Ulrich Seidl의 영화 'Hundstage(복날)'





- 이하의 글은 2002년 8월 10일 저의 "개인낙서장"에 올렸던 제 영화감상문을 별다른 수정 없이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


고래 wrote:

지난 수요일밤에 보고서 내가 거의 자지러질 뻔했던 영화 'Hundstage(복날)' 이야기를 아무래도 늦기 전에 빨리 해야되겠다. 지금 독일은 더운 날씨가 한창 피크를 이루고 있는데, 이 더운 날씨가 가시기 전에 빨리 이 영화의 이야기를 해야 제 맛이 날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영화 'Hundstage'는 다른 나라 아닌 오스트리아의 한여름철을 배경으로 한다. 'Hundstage'란 말은 우리나라말로 하면 '복(伏)날'이라는 뜻 정도로서, 독일은 이 'Hundstage'가 보통 7월 24일부터 8월 23일까지를 말하지만, 오스트리아는 대개 7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를 'Hundstage'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나라만큼이야 아니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도 한여름철에는 무지하게 덥기 때문에, 이 기간동안 사람들은 가급적 모든 일을 중단하고, 오로지 보디오일이나 바르고서 땡볕 아래 누워서 일광욕이나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렇게 여유롭게 더운 날을 보내는 것은 당연히 집이 있고 돈이 있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나같이 지금 현재 집도 방도 없이 거리에 나앉은 인간은 그런 날일수록 더 짜증이 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영화 'Hundstage'는 어느 집없는 미친 여자 Anna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녀는 어느 교외의 슈퍼마켓 앞에서 아무 자동차나 붙잡고서, 자기를 가까운 곳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한 다음, 차에 올라타면 쉴새없이 수다를 떨어 수많은 자동차 운전자들을 신물나게 하는 식으로 이 더운 여름날을 나는 여자이다.

더운 날씨에 안 그래도 땀은 뻘뻘 나고 짜증 나서 죽겠는데 어느 여자가 차에 올라타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수다를 계속 떨어대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더군다나 Anna는 뒷좌석에 놓여진 운전자 핸드백을 함부로 뒤지면서 이것저것 참견과 훈계를 늘어놓기도 하고, 운전자의 체중과 나이, 현재 성생활을 지속하고 있는지 여부 등을 물어보기도 하며, 얼굴이 못생겼다느니 살이 지나치게 쪘다느니 고기를 너무 많이 샀다느니, 이빨이 뻐드렁니라느니 하는 모욕을 가하기도 한다.

어떤 노부부는 그냥 웃어넘기기도 하고, 어떤 뻐드렁니 난 수녀는 대화상대 생긴 게 그저 좋아서 같이 찬송가를 부르며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자동차운전자들은 화가 잔뜩 나서 그녀를 차에서 억지로 내쫓아버린다. 사실 여자가 나이가 어리거나 예쁘기라도 하면 그냥 봐주겠지만, 그녀는 이미 나이가 30은 넘어보이는 데다 얼굴도 엄청나게 못생겼으니 사람들이 그녀를 너그럽게 봐줄 리는 만무하다. 그래도 그 미친 여자는 계속해서 아무 자동차나 붙잡고 동승을 부탁하고, 자동차에 올라타면 쉴새없는 수다로 자동차운전자들을 신물나게 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 미친 여자 뿐만이 아니다. 화면은 바뀌어 어느 여든살 정도 먹은 배불뚝이 할아버지가 스크린 전면에 등장한다. 늙어도 아주 폭삭 늙은 데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살이 뒤룩뒤룩 쪄서 몸이 거의 구형이나 다름없는 이 할아버지는 교외에서 개 한마리 데리고 혼자 살고 있었는데, 마누라는 이미 죽었고 아들며느리들은 찾아오지도 않고,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전형적인 서구의 연금생활자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그러니 무슨 재미로 이 심심한 세상을 살겠는가? 이 노인네는 그저 매일마다 자기집 정원의 잔디밭을 손질, 또 손질하고, 옆집 젊은 부부의 말싸움에 참견하고, 슈퍼마켓에서 아무 쓸모도 없이 이런저런 통조림식품들을 대량구입한 다음 집으로 갖고 와 무게를 일일이 달아보고, 단 한개라도 무게가 규정에 미달되는 것이 있으면 슈퍼마켓까지 다시 달려가서 지리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식으로 심심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매일마다 집에 와서 청소 및 빨래를 해주고 가는 가정부할머니에게도 지긋지긋할만큼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이런 잔소리를 가정부할머니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린다.

그 다음 화면은 바뀌어 어느 밀실에서의 그룹섹스장면이 나타난다. 도시 쇼핑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그 그룹섹스클럽에서 십여명의 남자들과 뒤엉켜서 섹스를 하고 있던 어느 30대 여자는 대충 욕구를 해결하고 나자 옷을 걸쳐입고서 클럽을 빠져나온 다음, 죽은 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자동차를 몰고서 어느 굴다리를 찾아간다. 그녀의 딸은 얼마전 그곳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굴다리 옆 십자가 앞에 어느 30대 남자가 꽃을 놓고 있는 것을 보자, 멈칫하고 서서 멀찍이서 구경만 한다. 그리고 그 30대 남자가 가버리자 이번엔 자기가 그 십자가 앞에 다가가 아까 남자가 놓아둔 꽃을 치워버리고 자기 꽃을 놓고 간다. 왜냐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두 남녀는 부부였지만 지금 두 사람은 더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오스트리아의 어느 소도시 교외에서 벌어지는 소시민들의 일상을 건조한 다큐멘터리기법으로 보여준다. 이번에는 어느 40대 여교사가 화면에 나타나는데, 그녀는 이미 나이가 꽤 들었지만, 한눈에 보아도 옛날에 한가닥하는 미모였음을 짐작케 할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여자이다. 웨이브진 단발머리에 지성미가 넘치는 얼굴표정, 단정한 옷차림과 빈틈없어보이는 몸가짐으로 꼿꼿하게 돌아다니는 그녀이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이 더운 여름날은 견딜 수 없이 짜증나는 날일 수밖에 없다.

혼자 사는 집에 돌아온 그녀는 우선 전화 자동응답기를 눌러 메세지를 확인한다. 먼저 그녀의 어머니가 메세지 속에서 난 이곳저곳 안 아픈 곳이 없다, 넌 언제쯤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날 거냐 등등 온갖 푸념을 늘어놓고, 그 다음에는 어떤 무식한 남자의 역겨울만큼 낮게 깔린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진다. 이것저것 말도 안되는 로맨틱한 소리들을 지껄이면서 그 남자는 유치한 유혹의 수작을 부리는데, 그런 소리들을 그녀는 그저 가벼운 코웃음으로 넘겨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화장실에서 엉덩이를 까고 소변을 보고, 옷을 훌렁훌렁 벗은 다음에 선풍기바람을 쐬며 침대 위에 드러눕는다.

놀랍게도 아까 옷을 입고 있었을 때는 그렇게 후리후리하고 날씬하게 보이던 그녀였지만, 옷을 벗고 난 그녀의 모습은 정말 눈뜨고 봐주기가 곤란할 정도로 추하기 그지없다. 팔다리는 날씬하지만 아랫배가 불룩 나왔고 옆구리살은 투실투실 쪘고 올록볼록 들고 나온 곳 하나 없이 몸이 그냥 원통처럼 둥글둥글하기만 하다. 저렇게 얼굴이 예쁘고 다리가 날씬한 여자가 세상에 몸매가 저럴 수 있다니...하고 남자들은 놀라겠지만, 원래가 지성미 있는 여자들이라는 게 다 그런 것이다. 여자가 운동을 안하고 책만 열심히 읽다 보면 아무리 식사량이 적어도 몸매가 저렇게 원통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발가벗고 침대에 누워 좀 쉬었던 그녀는 다시 일어나 아까 슈퍼마켓에서 사온 닭날개 몇개를 꺼내서 좀 집어먹는데, 다 먹고 트림을 끄억하고 하는 그녀의 똥배는 아주 리드미컬하게 움직여서 나를 포함한 남자관객들은 그 장면 앞에 모두 뒤집어지고 만다.

그밖에도 이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다 늙고 못 생긴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몸에 보디오일을 바르고 햇볕 아래 누워있는 모습은 마치 죽은 물고기들이 햇볕 아래 늘어져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니 오스트리아에는 이렇게 늙고 뚱뚱하고 추한 사람들만 살고 있는 건가? 하고 어떤 이는 생각하겠지만, 이 영화에는 물론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도 드물게나마 나온다. 적어도 10대 후반의 소녀 Klaudia는 눈부시게 예쁘고 눈부시게 날씬한 처녀인 것이다. 비단 그녀뿐 아니라 그녀의 남자친구 역시도 군살없이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에 제임스딘처럼 잘생긴 얼굴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이 잘생기고 근육질몸매를 갖춘 젊은 남자는 불행히도 성질이 무척 급하고 터프한 남자이다. 남자가 성질 급하고 터프하다는 게 무슨 얘기인지 아는가? 그것은 여자를 팬다는 얘기이다. 이 젊은 남자는 쉴새없이 Klaudia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온갖 욕설을 퍼붓고 Klaudia를 두들겨팬다. 그러나 Klaudia는 눈물만 흘리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다. 왜?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내가 그 이유를 어떻게 아나?

화면은 다시 바뀌어 아까 그 40대 여교사가 나타난다. 그녀는 아주 지적인 시선으로 무표정하게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상념에 잠기는 듯하던 그녀는 별안간 옷을 벗고 가위를 들어 자기 음모를 깎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 그녀는 아까까지의 얌전하고 정숙한 모습과는 달리 거울 앞에서 온갖 해괴망칙한 포즈를 취하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거울 앞에 비추며 그 정숙하고 뻣뻣한 몸을 이리저리 꼬아보기도 하고 엉덩이를 흔들어보기도 한다. 이윽고 그녀의 집 앞에 갑자기 어떤 30대 남자가 나타나 초인종을 누르는데, 놀랍게도 그 남자가 그녀 방으로 들어와보니 그녀는 소파 위에 배를 걸치고 엎드린 채 자기 알궁둥이와 비너스를 내밀고 있는 상태이다.

그 30대 남자는 아주 무식한 날라리 같은 남자이다. 얼굴은 꽤 호남형으로 생겼지만, 목걸이를 수십개나 두르고 밤무대복장 같이 번쩍번쩍한 가죽잠바를 입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평생 배움이라고는 가까이해본 적이 없는 듯한, 그야말로 양아치같은 남자이다. 그는 더군다나 자기 똘마니인 어느 20대 청년까지 데리고 나타났다. 그는 그 청년과 함께 아름다운 40대 여교사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철썩 치면서 쌍스러운 욕설을 늘어놓고 그녀를 강제로 범한다.

그 다음 그 남자는 여교사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다. 여교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주 고급스러운 음성으로 클래식 아리아를 부른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 대항해서 똘마니와 함께 음정박자 완전히 무시하면서 '라쿠카라챠'를 부른다. 여교사가 노래를 멈추자 그는 여교사를 다시 구타하면서 아까 부르던 노래를 다시 부르라고 강요한다. 여교사는 다시 고운 목소리로 아리아를 부르고, 그는 다시 똘마니와 함께 엉망진창으로 '라쿠카라챠'를 부른다. 그리고 여교사가 화가 나서 그의 얼굴에 침을 뱉자 그는 여교사의 귀싸대기를 사정없이 갈긴 다음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화장실로 끌고간다. 그리고 그 여교사의 얼굴을 더러운 변기 물 속에다 쳐박고 변기바닥에다 수없이 짓찧어댄다.

그러나 이렇게 당하는 여자가 있는 반면에 또 한편에서는 즐기는 여자도 있게 마련이다. 아까 죽은 딸의 무덤 위에 각각 따로 꽃을 갖다 바쳤던 30대 부부는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갈라진 상태지만 아직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욕실, 같은 부엌을 사용하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저녁때 어느 젊은 20대 마사지사를 집으로 불러들여 마사지를 받은 후, 남편이 보는 앞에서 다정하게 그 청년과 둘이서 저녁을 만들어먹고 온갖 교태를 부리며 그 젊은 남자를 유혹한다.

급기야 남편이 두눈 부릅뜨고 버젓이 보고 있는 가운데 거실 소파에서 젊은 남자와 온갖 애무를 다 나누고 있던 그녀는 그 남자와 보란 듯이 섹스를 한다. 하지만 남편은 화가 나고 질투가 나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한다. 그걸 보고 그 젊은 마사지사가 이 남편을 아주 만만하게 대하는 듯하자 결국 참다 못한 남편은 다음날 아침에 아내의 침실에서 나와 세수를 하려 하는 이 젊은 마사지사에게 권총을 겨누어버린다. 하지만 그 이상 이 남편이 무슨 짓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남편은 그 젊은 마사지사에게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게 한 다음 맥주를 따게 하고, 그 다음에 건배를 제의하면서 그 남자와 같이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자기의 짧은 총기극을 끝마쳐버린다.

이 남편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그는 아내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바람둥이 같은 아내를 아직도 사랑할까? 그것까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뭐 사랑에 이유가 필요한 것인가? 어쨌거나 남편의 위협에 질려버린 마사지사는 짐을 싸고 집 밖으로 나가버리고, 남편은 쏟아지는 빗 속에서 과거에 죽은 딸이 자주 타던 그네 앞으로 나가 혼자 비를 맞으며 그네를 탄다. 조금 있다가 아내도 그네 앞으로 따라나온다. 그리고 두 부부는 말없이 함께 정원에서 같이 그네를 타기 시작한다.

한편 미친 여자 Anna는 여전히 도로상에서 수많은 자동차운전자들에게 폐를 끼치다가 드디어 봉변을 당하고만다. 그녀의 수다에 아주 진저리가 나버렸던 자동경보기 판매원 Hruby가 그녀에게 복수를 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었다. 역시 집 없이 자동차만 타고 떠돌아다니며 자동경보기 및 감시카메라를 행상하고 다니던 Hruby는 어느날 미친 여자 Anna를 차에 태웠다가 그녀의 무례한 언동에 아주 학을 뗀 적이 있었는데, 그녀를 차에서 내쫓은 후 그는 실수로 어떤 성질 더러운 부부의 차를 들이받아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Anna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러자 그는 그녀를 얼른 자동차에 태운 다음 강제로 납치하여 어느 지하실에다 가두고서 자기 모든 잘못을 그녀 Anna에게 다 뒤집어 씌워버리고 만다.

"당신들의 자동차를 망가뜨린 여자는 바로 저 여자입니다"하고 그 성질 더러운 부부에게 그가 거짓으로 일러바치자, 그 성질 더러운 부부는 번갈아 나타나서 미친 여자 Anna를 아주 잔인하게 두들겨팬다. 불쌍하게도 이 미친 여자 Anna는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기만 하지만, 자동경보기 판매원 Hruby는 이를 보고 죄책감을 느끼긴 커녕 유유히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기만 한다. 하긴 이 세상 모든 미친 사람들에게 우리 멀쩡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책임 떠넘기기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언제나 이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인 이 미친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사실상 거대한 수채구멍 역할을 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오물들을 그 미친 사람들에게 갖다던지면서 마치 자기 더러움이 그로써 씻겨지기라도 한 양 안도하고 살게 돼있는 것이다.

한편 젊고 예쁜 하이틴걸 Klaudia는 집에서 어머니한테 잔뜩 꾸지람을 듣고 있다. 밖에서는 남자친구에게 두들겨맞고 안에서는 또 엄마한테 야단맞고 그렇게 이 예쁜 여자아이의 삶은 그저 짜증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가 집에서 꾸중 듣는 것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Klaudia는 또다시 날씬하게 빼입고서 집바깥으로 나오는데, 그녀의 터프한 남자친구가 아니나 다를까 차를 몰고서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피하려고 하지만 남자친구는 차를 몰고 그녀 주위를 뱅뱅 돌면서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남자친구와 벌건 대낮에 또다시 차 안에서 카섹스를 벌이고, 섹스가 끝난 후 피곤해지자 다시 성질이 날카로워진 그녀의 남자친구는(원래 터프한 남자들은 졸립거나 배고파지거나 하면 무조건 성질이 나기 마련이다) 또다시 대수롭지 않은 것 가지고 트집을 잡아 Klaudia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그러나 젊고 예쁜 Klaudia는 거기에 대해 눈물만 흘릴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왜 그녀는 남자친구가 자기를 그렇게 두들겨패고 모욕해도 그냥 참기만 하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옛날에 그 남자를 크게 배신한 적이 있거나, 아니면 그 남자를 크게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터프한 남자는 젊은 나이에 벌써 그렇게 근사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아주 부잣집 아들인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은 단지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한편 40대 여교사는 그날밤 그 30대 남자에게 너무 심하게 두들겨 맞아 그 고운 얼굴이 완전히 멍투성이로 변해버린 채 집에서 담배를 피우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그날밤 그녀를 학대하는 데 동참했던 그 똘마니 20대 청년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 청년은 자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40대 여교사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다며, 이 모든 일이 그 30대 남자때문이라고, 자기가 그 남자에게 대신 복수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여교사에게 빌기 시작한다.

드디어 40대 여교사에게서 승락을 받은 그 젊은 20대 남자는 저녁때 그 여교사를 위해 복수를 해주기로 계획을 짠다. 이윽고 약속된 시간이 오자 20대 청년은 그 40대 여교사의 방에 쳐들어와 그 30대 남자의 얼굴에 권총을 겨눈다. 그리고 그의 팬티를 까게 한 다음 그 30대 남자의 살찐 엉덩이 사이 항문에다가 불붙인 양초를 꽂고서 그에게 항문이 달궈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라쿠카라챠'를 부르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40대 여교사에게는 담뱃불로 그 30대 남자의 팔뚝을 지지도록 명령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40대 여교사는 자기를 그토록 두들겨 팼던 그 30대 남자의 품에 안겨 자기는 이런 복수를 도저히 못하겠다고, 자기는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뜻밖의 모습에 20대 똘마니도 더이상의 복수를 단념하고 만다. 왜 그녀는, 그토록 지적이고 아름답고 꼿꼿한 자존심을 갖고 있던 그녀는 하필이면 이런 형편없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왜 다른 좋은 남자 다 내팽개치고 하필이면 이렇게 무식하고 폭력적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건 내가 보기에 그녀가 너무 오랜 세월동안 자기 자존심을 세우면서 꼿꼿하게 살아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진다. 그러다가 어느덧 폭삭 늙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데도 이 여자는 지쳐버린 것이다. 하긴 이건 어쩌면 우리 사회 모든 노처녀들에게 공통으로 해당되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노총각들이라면 어쨌거나 남자인 이상 행동반경도 넓고, 나이가 들어도 이 남성위주사회에서는 기회가 그리 제한돼있지 않아서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지만, 노처녀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운신의 폭도 좁아지고 자기 가치 역시도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어느날 갑자기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저키스트성향을 띠게 되곤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노처녀들은 한때 자기가 예쁘고 똑똑하다고 해서 사방팔방에 날리기도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때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토록 비참하게 사랑을 구걸해대던 동년배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사회 각 방면에서 그녀들을 추월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남자들은 그렇게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그녀와 같은 지적이고 성숙한 여자가 아닌, 멍청하고 만만한, 어린 햇병아리 여자들하고만 결혼을 하려 한다.

그리고 옛날에는 자기와 상대도 안되던, 그저 잘하는 교과목이라고는 체육밖에 없던 멍청한 동창친구들은 다들 좋은 남자 만나 일찍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가정주부로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니 그녀처럼 머리 속에 든 게 많은 여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사회적으로 찬밥신세 밖에 되는 게 없고, 그러니 별 수 없이 깡패한테 학대받으면서라도 자기 나름의 사랑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니까 너무 흥분하시지는 말기 바란다. 어쩌면 그 깡패남자는 정력이 절륜인 남자인지도 모르며, 그 여교사는 워낙에 지식세계의 고질적인 위선에 깊이 실망하게 된 나머지 특이하게도 그런 무식한 남자의 거친 폭력 속에서 야만의 쾌락을 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은퇴해서 혼자 살고 있는 그 80대 할아버지는 그 70대 가정부 할머니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과묵함과 무심함에 조금씩 마음이 끌리게 된다. 그는 자기 죽은 아내와의 결혼기념일날을 기념한다면서 정원에다 그 70대 가정부를 위한 선물을 숨겨놓기도 하고(하필이면 죽은 아내와의 결혼기념일?), 돼지처럼 살이 피둥피둥 찐 데다가 배가 남산만큼 나온, 그 늙고 못생긴 가정부에게 죽은 아내의 나이트가운을 입힌 다음 스트립쇼를 시키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그 70대 가정부 할머니가 그 80대 노인이 시킨대로 정말 다 한다는 것이다. 왜? 그 이유 역시도 간단하다. 그 할머니 또한 그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영화의 최고 하일라이트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70대 가정부 할머니가 밤중에 그 80대 할아버지 혼자 지켜보는 앞에서 조금씩 몸을 비틀면서 옷을 벗어던지는 스트립쇼장면은 정말 나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배꼽을 빼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었는데, 개인적으로 내가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웃어보기는 옛날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이란 영화에서 '뚱보' 배창호감독이 이주일 춤을 추었을 때 이후로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어질 정도였다. 어쨌든 가정부 할머니의 스트립쇼가 끝난 다음 그 모든 장면을 느긋하게 앉아서 지켜보고 있던 그 80대 할아버지가 내뱉은 멘트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아주 좋았어 ! 오리엔트식이었어 ! (Sehr gut gemacht ! Nach orientalischer Art !)"

그리고 이 영화는 마지막에 아까 그 형편없이 두들겨맞은 미친 여자가 온통 멍든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멀쩡하게 밤거리를 쏘다니면서 각 가정 대문의 자동점멸장치를 시험하고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왜 그녀는 그렇게 두들겨 맞고서도 화를 내지도 않고 기가 죽지도 않는 것일까? 왜 그녀에겐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아직도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할 뿐인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아직 어린 시절의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녀는 물론 다른 사람들을 조금 귀찮게 만들긴 하지만 아무에게도 결정적인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 여자이다. 그리고 그녀가 늘어놓는 그 수많은 수다들은 우리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수많은 모순들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렇게 개인주의적 예의범절이 강요하는 두터운 인간소외의 벽을 뚫고서 자기 나름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하고 그 안에서 터지는 모든 상처들을 자기 온몸으로 떠안아버리는 성모마리아같은 여자라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Ulrich Seidl감독이 그녀에게 이 영화의 마무리장면을 맡긴 것도 그녀를 이 영화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중요한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많은 평론가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Ulrich Seidl감독의 이 영화 'Hundstage'는 무척 노골적이고 추한 영화이다. 그는 이 영화 속에서 자기 조국 오스트리아의 감추고 싶은 여러 우스꽝스러운 면을 아주 거침없는 시선으로 까발려서 폭로했고, 거의 무자비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관객들을 씁쓸하고 찝질한 기분 속으로, 그리고 자기들의 창피한 기억 속으로 몰아넣었다.

다큐멘터리 기법을 흉내낸 그의 영화 속에서는 그 어떤 이야기구조도 발견되지 않는다. 감독의 의도나 주제 역시도 모호하기만 할 뿐이다. 반면에 이 영화 속에서 오스트리아교외에 살고 있는 여러 소시민들의 일상들은 너무나 리얼하면서도 엽기적이기만 하다. 얼핏 보면 여성비하적 악취미나 장난기가 엿보이기도 하나, 그의 영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비인간적 현대문명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영화 'Hundstage'의 경우 그가 폭로하고자 했던 것은 의사소통의 부재와 인간소외, 차갑고 엄격하게 구획된 이 사회의 숨막히는 단절감과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 같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런 소외감과 단절감을 극복하는 소통의 수단이 이 영화에서 대부분 폭력으로 나타났다는 점이겠는데, 한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폭력이란 것이 대부분 남성들에 의해 여성들에게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성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대부분 그러한 폭력을 즐기는 것처럼 나오고 있으며, 남자들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원래 오스트리아라는 나라는 현재 극우민족주의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독일남부지방보다도 더 보수적이고 마초적인 나라라고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너무나 잔인하고 일방적이고 섬뜩하기만 하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거의 마찬가지로 발견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내 개인적 혐오감과 경계심은 더욱 커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원래 오스트리아건 한국이건 지나치게 의사소통이 억압되어있고 그 반작용으로 개인간의 내밀한 의사소통이 지나치게 갈구되는 사회는 이처럼 변태적 폭력이 횡행하게 마련이며, 이러한 사회 속에서 폭력과 의사소통은 대개 백지 한장 차이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산업화가 성숙되어가면서 정상적인 가족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이 대부분의 개인들이 1인가족으로 혼자 살아가는 이 영화 속 현대사회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무척 합리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모든 개인들이 서로를 불신하면서 그저 자기 의사만을 관철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그런 암담한 모습으로 드러날 뿐이다. 모두가 자기만족과 이기심 속에 익명의 그늘 안으로 기어들어가면서 점차 햇볕 속에 북어처럼 메말라가는 쁘띠비쥐들의 백색 공동묘지가 바로 이 영화 속 현대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로지 섹스와 육욕에만 탐닉하는 여러 인간들의 짐승스런 몰골은 그들의 비대한 육체만큼이나 병적으로 보이지만, 더욱 역겨운 것은 그런 벌거벗은 욕망을 감싸고 있는 위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모든 추악한 면들을 Ulrich Seidl감독은 그 건조하고 차가운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짐짓 냉담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Ulrich Seidl감독이 그렇게 예리하고 신랄하고 냉소적인 시선을 견지하면서도 그의 영화가 한편으로 매우 따뜻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가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약간이나마 이 세상을 향한 긍정과 신뢰의 길을 열어둔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특히 영화 처음에는 매우 우스꽝스럽고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던 80대 노인은 영화 막판에 70대 가정부와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서 점차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한동안 서로 대화 없이 반목하던 30대 부부는 빗 속에서 같이 그네를 타면서 서로 화해를 모색한다. 특히 영화 처음부터 끊임없이 수다를 떨던 미친 여자는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두들겨패고 싫어할지라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물론 40대 여교사 역시도 비록 폭력적인 남자이긴 하나 자기 나름대로의 사랑을 찾게 된 것은 긍정적인 성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들 사랑의 자세한 내막이야 관객들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어쨌거나 그녀가 그런 사랑에라도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써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사건들이 Hundstage(복더위) 동안에 이루어졌다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바라볼 수 있다. 원래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는 마치 인간의 옷을 뙤약볕 아래서 하나하나 벗기는 것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 감정의 벽마저도 그와 동시에 허물어뜨리는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유럽에서도 오스트리아영화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영화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Axel Corti, Peter Patzak, Xaver Schwarzenberger 등의 감독들이 한때 높은 명성을 누리기도 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영화는 상업코미디영화 빼고는 그리 볼만한 게 없다는 말을 유럽영화계에서 듣기도 했었다.

그러나 얼마전부터 Wiener Filmakademie가 수많은 영화인재들을 양성해내고, 유럽영화계에 건조한 다큐멘터리기법의 영화들을 유행시킨 데 이어(어쩌면 우리나라 홍상수감독의 영화들도 이런 다큐멘터리영화 유행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작년에 Ulrich Seidl감독의 영화 'Hundstage'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획득하면서 이젠 오스트리아영화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섰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이상스러운 오스트리아사투리 발음때문에 이해에는 약간 애를 먹었지만 내가 오스트리아영화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이 신예감독 Ulrich Seidl의 다음 영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해보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200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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