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우 감독의 영화 '거짓말'





- 이하의 글은 2002년 10월 15일 저의 "개인낙서장"에 올렸던 제 영화감상문을 별다른 수정 없이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


고래 wrote:

어제는 함부르크의 Abaton이라는 극장에서 한국영화 '거짓말'을 상영해줘서 간만에 모처럼 6 EUR의 거금을 주고 한국영화 감상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 한국어가 아니라 독일어더빙으로 상영을 해줬기 때문에, 어제 나는 난생처음으로 우리나라영화를 모국어가 아닌 독일어더빙으로 감상하는, 색다른 경험까지 해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기분도 참 묘하대~ -_-;;).

그동안 하도 많은 사람들이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을 가지고 욕들을 해대곤 해서 별 기대를 안하고 봤지만, 보고 난 뒤의 내 솔직한 소감은 사실... '별로 나쁘지 않다...' '그만하면 잘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공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포르노'라고 상영허가를 안 내줬다는 것, 음대협이 이 영화를 음란물로 고발하고, 검찰이 전국 수십개 극장에서 이 영화의 필름을 압수했으며 장선우 감독을 구속하려 했다는 것은 뭐... 한마디로 그 계통 사람들이 '대기만성(대기만 하면 성감대)'의 이상한 정신/육체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밖에 안되는 것이고, 대부분의 영화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보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를 따온 것이라 독창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던 것도 나로서는 그저 쓴웃음이 나올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옛날 소싯적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봤었지만 '거짓말'과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거짓말'은 다큐멘터리 feel의 영화이지만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전형적인 극영화였다).

사실 수많은 우리나라 영화평론가들은 '성과 권력관계의 함수를 파고든다는 것은 이미 Bernardo Bertolucci 감독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울궈먹었고 지금에 와서 이 주제를 다시 천착한다는 것은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이 영화를 평했지만, 이 얘기는 나로서 정말 허파에서 바람이 빠질만한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영화 '거짓말'에 보면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과 호텔에서 질펀한 정사를 갖고 나서 호텔문을 나오다가 자기가 알고 지내는 어느 대학교수 한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남자주인공이 쩔쩔 매면서 무려 열번도 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그 교수란 사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만을 떨면서 남자주인공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해대는 장면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같은 서양영화에서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한국적인 장면이었고, 그리고 나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의 발가벗은 몸에 잔인하게 매질하는 장면(이렇게 때리고 맞는 남녀의 역할은 영화후반부에서 뒤바뀌기도 한다)이 이어지는 것은, 그 어느 모로 보더라도 이 영화가 예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보다도 훨씬 더 '성의 정치적 함의' '부조리와 위선에 대한 도발의 의욕' '복합적인 긴장' '신랄한 역설로 위장한 오래된 모순의 비판' 등의 주제의식을 더 노골적으로,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파고들어간 작품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워낙에 핸드헬드 카메라를 들고 덜렁덜렁 쫓아다니며 찍은 작품이라 영화가 한시간을 넘어가니까 어지러움때문에 구토가 나올 뻔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구토는 비단 안정되지 않은 화면 때문에 나온 것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너무나 노골적, 야만적으로 드러나는 우리 한국의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상하 위계질서, 보수적인 전통과 고정관념, 그리고 거기에서 상처받는 우리 보통인간들의 억압된 자의식들이 가학적 성관계로 분출되는 모습, 그 추하고도 생생한 현실들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구역질이 나왔던 것이지 결코 화면이 흔들려서만 나온 구토는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마치 고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온몸이 후줄근해졌지만, 이 영화가 아주 잘만들어진 영화라는 데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배우들이 아주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각자의 배역 속에 녹아들어간 연기를 했다는 것도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고(특히 남자배우 이상현... 정말 그는 대단한 인간이었다...-_-;;), 매우 단조롭고 건조한 화면이 계속 이어졌지만, 작위적인 생략이나 위선적인 당위론이 거의 묻어나지 않게끔 구성과 편집이 이루어졌다는 점도 내게는 깔끔하고 담백하게 느껴졌다. 극장 안에 관객이라고 해봤자 나를 합쳐 고작 너댓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거의 모든 관객들이 대체로 나처럼 만족해 하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요즘 우리나라 영화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얼마전에 한국에 들어가서 곽경택 감독의 '친구',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 여균동 감독의 '미인',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 등을 쭈욱 비디오로 빌려보았는데 모두 기대 이상의 수작이었고, 요즘 한국의 쓸만한 인재들은 모두 다 영화판으로 모였다는 얘기가 사실임을 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럽영화보다 나으면 더 나았지 별로 뒤쳐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여러 한국감독 중에서도 역시 나를 예전부터 가장 강하게 사로잡았던 감독은 역시 장선우 감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옛날 'MBC베스트셀러극장'시절부터 나를 조금씩 감격시키더니만, 데뷔작 '성공시대'와 '우묵배미의 사랑', '경마장 가는 길', '화엄경', '꽃잎',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나쁜 영화'를 거쳐 이번의 '거짓말'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장선우 감독의 영화치고 나를 실망시켰던 영화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될 정도다. 원래부터 우리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냉소와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들에 대한 잔혹한 모멸, 그리고 장자의 가상현실론에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결합시킨 허무하고도 무신경한 영화기법으로 나의 눈길을 끌더니만 최근 들어서는 우리 사회의 천박한 단면들을 가차없이 까발리고, 모든 은폐된 주변적, 사적인 문제들을 급진적으로 정치화해내는 용기까지 보여주고 있는 장선우 감독...

한국에서 시간이 만약 더 있었다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까지 보고 나왔을텐데 참 개인적으로 안타깝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 영화 흥행은 쫄딱 망했다고 얘기 들었지만, 난 원래 그딴 것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므로... 하여튼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을 무삭제 원판으로 독일극장 큰 화면을 통해서 보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내 아쉬움은 크게 상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생각할 때 장선우 감독의 최고걸작 영화라 할 수 있는 '거짓말'... 내 친구들에게도 빨리 보라고 추천해줘야지...

200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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