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Rashomon 감상문





- 이하의 글은 2002년 5월 19일 저의 "개인낙서장"에 올렸던 제 영화감상문을 별다른 수정 없이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


고래 wrote:

요즘은 한국과 일본에서의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붐이 불어서 독일의 TV에서 일본영화를 많이 상영해주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영화는 전혀 상영을 안해주고 있다. 이래서야 우리나라가 힘들여서 월드컵을 유치한 보람이 있나, 원...). 어제는 Kurosawa Akira감독의 출세작 "Rashomon"을 3SAT에서 방영해주었는데, 이 영화가 인간의 심성과 진실의 문제, 사실과 경험의 왜곡문제 등을 철학적으로 깊게 파고들어간 작품이란 소문을 익히 듣고 있던 나는 상당한 기대를 갖고서 이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다.

羅生門이라는 이름의 다 헐어빠진 커다란 관문 밑에서 비를 피하는 세 명의 사내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된다. 어느 나뭇꾼과 승려가 한 사무라이의 살인사건에 증인으로 불려가 그 사무라이를 죽인 혐의자들과 피해자의 엇갈린 증언을 듣고 그에 관해 과연 무엇이 진실인가를 얘기하는데, 이때 나뭇꾼과 승려가 주고받는 대사는 너무나 심오하고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관객들로 하여금 이미 초장부터 이 영화의 깊이와 문제의식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자리에 비를 피하러 들어온 한 장사꾼이 두 사람에게 그 진지한 대화의 계기와 자초지종을 물어보면서, 이 영화는 문제의 과거(법정에서의 형사심리장면)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먼저 법정에 첫번째 증인으로 끌려나온 것은 나뭇꾼이었다. 나뭇꾼은 법정에서 자기는 숲 속에 나무를 하러 가다가 우연히 여인의 모자와 옷자락, 밧줄 그리고 사무라이의 시체를 발견한 것 뿐이라고 그 외에는 전혀 이 사건에 대해 모른다고 판관 앞에 증언을 한다. 그 다음에 두번째 증인으로 끌려나온 승려는 숲 속을 걷다가 어느 사무라이가 아름다운 여인을 말에 태우고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법정에서 증언을 한다.

증인신문이 끝나자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피의자신문이다. 물론 이 살인사건의 첫번째 피의자로서 법정에 끌려나온 것은 그 유명한 강도 Tajomaru (Mifune Toshiro 분)다. 그는 숲 속에서 웬 아름다운 여인이 사무라이 남편과 함께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길래, 사무라이 남편을 유인해 때려잡은 다음 밧줄로 묶고, 그 후 여인이 자기에게 단도로 덤벼들길래 여인을 제압하고 입을 맞췄는데, 순간적으로 여인이 자기를 끌어안길래, 에라 모르겠다 그 사무라이가 보는 그 자리에서 그 여인과 섹스를 했음을 말한다. 그리고 욕정도 채웠겠다 유유히 사라지려는 순간, 여인이 자기를 붙잡고, "이렇게 남편이 보는 앞에서 섹스를 한 것은 여인에게 죽는 것보다도 더한 부끄러움이에여... 제 남편과 결투를 해주셔요... 전 이긴 사람의 소유물일 뿐이어여..."하고 말해 어쩔 수 없이 사무라이와 결투를 해야 했고, 그래서 멋있게 사무라이를 죽여버렸는데 그 사이에 그 여인은 비겁하게 도망쳐버렸다고 진술한다.

왜 그는 이렇게 선선하게 자기 범죄를 다 시인하고 죽을 각오를 한 것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너무나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재물을 빼앗아왔기 때문에 어차피 이번에 자기 살인사실이 인정되건 인정되지 않건 자기가 죽기는 마찬가지인 이상, 이왕이면 멋드러진 모습으로나 죽자는 심정에서 그렇게 진술했던 게 아닌가 여겨진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포기하다시피한) 자기의 생명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존심과 자기 나름대로의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러한 의식이 그의 기억을 조작하여, 그는 실제로도 -자기에게 불리하건 말건 간에- 자기 자신이 강간범에 살인자인 것으로 믿게 돼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다음에 두번째 피의자로 끌려나온 것은 죽은 사무라이의 아내인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진술 시작부터 애처롭게 울면서 가냘픈 목소리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더니만 이렇게 진술하기 시작한다. "남편이 묶인 것을 보고... 저절로 제 단도에 손이 갔어여... (Als ich meinen Mann in Fesseln vor mir sah, da griff ich unbewusst meinen Dolch) 하지만 여자인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여? (Aber was konnte eine Frau wie ich tun?) 저는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어여... (Ich war hilflos) 제가 남편을 구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뿐이었어여... (Es gab nur ein Mittel, durch das ich meinen Mann retten konnte) 흑흑흑..."

그 여인이 말한 그 방법은 오직 강도에게 자기 몸을 바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강도와 섹스를 해야 했던 그녀는 강도 Tajomaru가 욕정을 채우고 가버린 후 남편이 너무나 경멸섞인 눈초리로 자기를 쳐다봤다고 울부짖는다. 그래서 제발 그렇게 보지 말라고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계속 자기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남편과 함께 죽기로 결심하고 그만 남편을 단도로 죽였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자기도 죽으려 했으나 그녀에게 자살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저같은 여자는 그러기엔 너무나 약하답니다... 그 무엇보다도... 남편의 저에 대한 경멸은 정당했었는가를 묻고 싶군여... 저는 남편을 사랑해서 구하려 한 죄밖에는 없지 않나여? 으흑흑..."

이 말은 곧 무슨 말인가? 살인자는 강도 Tajomaru가 아니라 바로 그 여인 자신이라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하지만 이 여인은 비록 살인은 저질렀어도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육체를 먼저 강도에게 바쳤던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서 경멸을 당한 것으로 인한 정신적 패닉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고, 그 다음에 남편과 함께 자신도 죽으려 했으나 다만 용기가 없어 자살을 감행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얘기이니 이는 그녀가 간통과 살인을 저지르긴 했어도 그 정상을 참작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녀는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삼을 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이처럼 그녀는 이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요구하는 고분고분한 여성상에 매우 부합하는 여자로서, 비록 살인죄로 죽을 운명이라 하더라도, 남들의 동정을 얻기에 충분한 여자가 된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진술이 엇갈리자 혼란에 빠진 판관은 어쩔 수 없이 살해당한 피해자인, 죽은 사무라이의 영혼까지 무당에 의해 불러들여서 진술하게 한다. 그런데 죽은 사무라이는 놀랍게도 무당의 입을 빌어 전혀 다른 진실을 이야기한다. "제가 보는 앞에서 제 아내는 그 강도와 진한 섹스를 나누었습니다. 그런 다음 강도가 아내에게 자기와 결혼해달라고 애원하자 제 아내는 강도에게 갑자기 부탁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가겠어여... 당신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 대신 제 남편을 죽여주셔여... 제 남편이 살아있는 한 당신과 함께 갈 수는 없어여...' 누가 보더라도 도저히 믿을 수 없을만큼 가증스러운 제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보자 강도도 환멸을 느꼈나 보더군요. 그래서 그 강도는 통쾌하게도 제 아내를 때려눕히고 사라졌습니다. 제 아내도 울면서 도망치더군요. 한참후에 다시 나타난 그 강도는 제 묶인 것을 풀어주었는데, 그런 못볼 꼴을 다 보고 난 저는 더이상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했던 것이고, 맹세컨대 저는 그 누구에게서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결국 무슨 의미인가? 다시 말해 사무라이는 강도와의 결투에서 패해 불명예스럽게 죽은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자결을 했다는 것이고, 그의 아내는 정조관념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창녀같은 여자로서 남편의 죽음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요청했다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그러면 결국 무엇인가? 피의자 및 피해자인 세 사람의 얘기가 다 다르다는 결론인데, 세 사람 중 두 사람의 진술이라도 서로 일치가 되어야 사건을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을, 이렇게 세 사람의 얘기가 다 달라버리니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것인가?

죽은 자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고, 죽은 사무라이의 진술이 맞을 거라고 장사꾼과 승려는 입을 모으지만, 왠지 그것을 바라보는 나뭇꾼의 표정은 영 떨떠름하기만 하다. 그러다가 나뭇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죽은 사무라이도 거짓말을 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무겁게 말한다. 그리고 장사꾼과 승려가 그것을 어떻게 아냐며 의아한 눈길로 나뭇꾼을 쳐다보자, 나뭇꾼은 잠깐의 망설임 후에 자신이 실은 살인현장 모두를 지켜보았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을 다 목격했지만, 곤란한 사건에 말려들기 싫어 자기는 나중에 사무라이의 시체만 발견한 것처럼 법정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그 나뭇꾼이 조금씩 승려와 장사꾼에게 말한 사건의 최종적인 진실은 다음과 같았다.

남편인 사무라이가 보는 앞에서 강도와 여인이 섹스를 한 다음에, 여인은 강도로부터 정말 비굴하고 천박한 애원을 받게 된다. 이왕 남편 보는 앞에서 섹스까지 한 이상 내 마누라가 되어달라고. 당신은 집에 재산도 갖고 있을테니, 그 재산으로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고. 종처럼 당신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하겠다고 강도 Tajomaru는 정말 자존심도 뭣도 없이 여인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며 무릎 꿇고 애걸복걸을 해댄다. 다시 말해 여인이 강도에게 같이 살자고 애원한 게 아니라 처음에는 강도가 여인에게 함께 살자고 애걸복걸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며 울고만 있던 여인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는 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겠다고, 남자 둘이서 결투를 해서 결정하라고 하면서 남편에게 달려가 남편의 묶인 줄을 단도로 끊어버린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다시 말해 여인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바친 것이 아니라 강간은 어쩔 수 없이 당했는데 그 후에 남편과 강도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는 얘기가 되며, 이로써 여인이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얘기는 거짓말 내지 기억의 왜곡이라는 얘기가 된다. 물론 강도 역시도 법정에서 거짓말을 한 것은 마찬가지로서, 여인의 남편과 정정당당한 결투를 하기 위해 사무라이의 밧줄을 자기가 직접 풀어주었다고 강도는 물론 말했지만, 실제로 사무라이의 밧줄은 강도가 풀어준 것이 아니라 여인이 단도로 끊어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 얼떨결에 결투를 하게 된 두 남자. 그런데 남편인 사무라이는 아내의 기회주의적 태도와 아내의 부정장면까지 다 봐버렸기 때문에 이미 아내에게 정이 떨어져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사무라이는 갑자기 결투를 거부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강도에게 말한다. "이깟 여자를 위해 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지는 않다. 강도 너는 이 여자를 갖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 이 여자는 정조를 잃었으니 죽을 권리밖에는 없다. 네깟 강도에게 딱 어울리는 여자다. 차라리 말 한 마리가 이 여자보다 더 가치가 있을 거다"

이 얘기는 뭔가? 결국 사무라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아내를 한낱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던 인간이라는 얘기였다. 따라서 아내때문에 세상에 환멸을 느껴서 자살했던 것이 아니라 아내가 강간을 당하건 말건 아내에게는 어차피 별 미련이 없었으므로 그냥 자기 혼자 살기 위해 재빨리 현실적인 주판알을 튕겼다는 얘기였다. 여자는 놀라서 이제는 강도의 눈치를 살피지만, 강도인 Tajomaru도 빼앗아 먹는 것이라면 모를까, 남이 버린 걸 주워먹는 것이라면 입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젠 여자를 놓아두고 그냥 가버리려 하게 된다. 그러자 여자는 아닌 게 아니라 자존심도 체면도 없이 강도를 붙잡고 제발 나를 놔두고 가지 말라고 애원해댄다. 만약 강도가 그대로 가버리게 되면 자기는 남자들의 이기심에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농락당한 몸이 되어 평생 남들의 동정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자존심은 완전히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런 무기력한 상황만큼은 이 여자도 절대 피하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그래도 강도가 말을 듣지 않고 가려고 하자, 이 여인은 갑자기 깔깔깔깔 웃어대기 시작한다. 여태까지의 다소곳하고 수동적인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디어 그녀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먼저 남편에게 쏘아붙인다. "이 비겁한 남자 같으니. 솔직히 말해서 강도와 싸우면 질 거 같으니까 안 싸우겠다고 하는 거면서, 왜 나를 그렇게 깔아뭉개? 뭐? 나에게 죽을 권리밖에 없다고?" 그렇게 남편의 자존심을 자극한 다음에 여인은 강도에게도 똑같이 쏘아붙인다. "강도 너도 마찬가지야! 난 네가 정말 멋있는 강도라고 생각해서 너를 따라가 네 하녀라도 될 생각이었어. 그런데 이 남자의 거짓말에 속아서 날 버리고 가? 둘다 똑같애. 둘 다 비겁자야!"

이게 결국 무슨 말인가? 그녀에게 오로지 중요한 것은 자기가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지는 말아야 하며, 그를 위해 필요하다면 지금 같은 극한적인 상황에서 남자들이 자기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피터지게 싸우도록 만들기라도 해야 할 만큼 자기는 독한 여자라는 얘기 아니겠는가? 그를 위해 명예욕과 승부정신에 목숨을 거는 남자들의 허세콤플렉스를 자극하고 이를 영악하게 조종할 만큼 그녀는 아주 머리가 좋으며 능동적인 여자였고, 이 사회가 요구하는 바보스럽고 연약하고 순종적인 여성으로서의 덕목 같은 것은 애초부터 그녀에게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그녀는 그걸 연기로써 속여가며 이 사회에서 자기를 훌륭히 지켜왔다는 것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이 여인의 독설에 자존심을 상하여 격분하게 된 두 남자는 얼떨결에 결투를 벌이게 된다. 왜 그들이 별로 원치도 않은 한 여자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 만큼 그렇게 갑자기 바보가 되었는가? 물론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그 상황에서 두 남자중에 누군가가 결투를 거부하고서 자리를 피했다고 해보자. 그랬다가는 평생동안 '비록 난 그때 내 목숨을 건졌지만 그 여자에게는 비겁자로서 조롱당했다. 그 여자의 기억 속에 나는 영원토록 비겁자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는 껄끄러운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목숨이야 자기가 승리하면 지킬 수 있는 것이지만, 일단 여기서 발뺌하면 그 여인에게 자기는 심리적으로 완전히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급변한 상황에서 상대방이 선제공격을 해올 경우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남자들은 대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화와 타협보다는 즉각적인 대결과 투쟁을 선택하게 된다. 따라서 나름대로는 똑똑하다고 하는 이 남자들도 결국은 이 상황에서 서로간의 결투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둘 다 생각보다 영 칼솜씨가 신통치가 않아 두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꾸 넘어지고 헛발질만 해댄다. 그러다가 결국 강도가 운좋게 칼로 사무라이를 죽여버리자, 이 광경을 벌벌 떨면서 숨어 지켜보던 그 여자는 강도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다가와 같이 떠나자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도망쳐버린다. 아니 강도가 남편을 이겼는데 왜 여인은 약속대로 강도와 함께 도망가지 않는가? 그 이유도 내가 보기엔 역시 간단하다. 그녀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로지 자기가 사무라이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것에 있었을 뿐이었다. 강도와는 애초부터 평생토록 같이 살아줄 생각이 그녀에겐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녀가 강도에게 매달리고 애걸복걸했던 것은 단순히 자기 정절을 잃고 남편에게 버림받게 된 위기상황에서 그녀의 자존심과 오기를 남편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쇼'에 불과했던 것이었지, 결코 진심으로 강도에게 기회를 줬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녀가 승리하기를 바랐던 것은 강도 Tajomaru 쪽이 아니라 비록 자기를 버리긴 했지만 사회적 지위는 강도 Tajomaru보다 훨씬 더 높은 사무라이 남편 쪽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그녀는 사무라이 남편이 강도 Tajomaru를 죽이고 자기도 다시 거두어주는 최상의 시나리오만을 원했으며, 거기에 모두 올인을 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이 나뭇꾼이 밝힌 실체적 진실의 결론은 무엇인가? 종합하자면 강도 Tajomaru는 명성과는 달리 용감하고 칼 잘 쓰는 강도가 아니었고, 여인은 겉보기와는 달리 정숙하고 순수한 여인이 아니었으며, 죽은 사무라이는 자기 주장대로 명예로운 자살을 택했긴커녕 하찮은 피래미강도와의 결투에서도 패할 정도로 형편없는 무사였던 데다가 강간당한 아내를 자기 목숨의 대가로 강도에게 떠넘길 정도로 옹졸하고 계산적인 남자였다는 얘기가 되고만다. 그런데도 세 사람 다 자기들 유리하게 사건을 기억하고서 순전히 자기들 멋대로 자기 체면만을 살리기 위해 법정에서 거짓증언을 꾸며 해댔으니 이래가지고서야 이 세상에서 누구 말인들 제대로 믿을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나뭇꾼의 이러한 이야기가 다 끝나갈 즈음, 바깥에서 애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장사꾼이 잽싸게 뛰어나가보니 어떤 부모가 방금 그 애기를 버리고 떠났고, 그 울고 있는 애기가 든 광주리 속에는 값진 옷가지와 귀중품들이 들어있었다. 장사꾼은 당연한 듯이 그 값진 옷가지와 귀중품들을 자기가 다 가져버린다. 나뭇꾼이 장사꾼에게 그건 아기의 부모가 아기를 생각해서 넣어둔 것인데 그걸 훔치면 어떻게 하냐고 말하자 장사꾼은 말한다. "모든 사람은 어차피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가게 돼있는 거야. 이 아이의 부모도 금방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아이를 버린 거야. 그런 자들의 재물이면 내가 훔쳐가는 것도 괜찮아."

그에 대해 격분한 나뭇꾼은 말한다. "장사꾼, 넌 정말 나쁜 놈이다. 이 아이의 부모도 말못할 사정이 있어서 이 아이를 버리고 떠난 거 아냐? 그건 이 아기의 재산이야. 도로 넣어둬 !" 그러자 장사꾼은 나뭇꾼의 따귀를 짝 때리고서 말한다. "그러는 넌 뭐 얼마나 착한 놈이야? 왜 법정에서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전혀 살인장면을 못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지? 그건 네가 그 범행현장에 버려져 있던 여인의 단도를 훔쳤기 때문이잖아? 너도 어차피 네 잇속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타인의 재물을 훔쳤으면서 왜 나한테는 그렇게 못하게 하지? 인간은 모두가 자기 잇속을 챙기면서 사는 것 아닌가? 기억도 모두 자기 편한대로 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하고 다른 사람의 물건도 막 훔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게 인간 아닌가?"

그러고서 장사꾼이 떠나가버리자, 나뭇꾼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망연히 서있게 된다. 승려 역시도 자기가 방금까지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다 거짓말장이요, 범죄자들인데다가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사람이었다는 이 잔인한 진실에 전율하며 역시 이기적인 부모에 의해 매정하게 버려진 아기를 자기 품에 안고 빗줄기를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만 있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잠시후에 나뭇꾼은 천천히 승려에게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겨있던 아기를 자기가 안으려고 한다. 놀란 승려가 '이젠 이 아기에게 무슨 나쁜 짓을 하려고 그러시오?'하며 화를 내자, 나뭇꾼은 조용히 말한다. "이보시우. 난 집에 어차피 여섯명의 자식을 키우고 있수. 여섯을 키우나 일곱을 키우나 나한테는 그게 그거유. 난 사실 나쁜 놈이우. 거짓말도 잘 하우. 아까 그 장사꾼이 말한대로 난 여인의 단도도 훔쳤수. 하지만... 이 아이는 내가 키울 수 있수..."

어느덧 비는 그치고 羅生門 위로는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기를 품에 안은 채 꾸부정한 허리로 스님과 인사를 나눈 나뭇꾼은 가난과 피로에 지친 듯한 걸음걸이로 羅生門 밖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게 아기를 품에 안고 사라지는 나뭇꾼의 더럽고도 허름한 옷차림 위로, 비온 뒤 여름햇살은 따사롭게 내려앉는다...


이 영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다룬 작품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인간에게 진실이나 도덕이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인간은 도덕과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한가, 아니면 약한가? 진리와 가치관이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하나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각자 다른 진리와 이해관계만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철학적 근본문제들을 깊이있게 파고들어간 작품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세계영화사에 있어서 철학적 이정표라고까지 일컬어지곤 한다.

이 영화의 결론은 흔히 "Pontius Pilatus (진실은 여러개이다)"라는 성서의 경구로 요약되곤 한다. 영화 전편을 통해서 세상과 인간의 추한 꼴, 진실의 존재불가능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관객의 부끄러운 눈을 열어주는 데에 이 영화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모든 인간의 도덕성과 정직성의 존재가능성을 냉소적으로 부정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 모든 진실을 고백하고 아기를 떠안는 나뭇꾼의 모습에서 Kurosawa Akira감독은 인간의 도덕성과 정직성의 존재가능성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남겨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진실과 진리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능성이 아니라, 각각의 인간성에 대한 상대적인 신뢰가능성일 뿐이지만, 이 작품은 한동안 관객을 독한 회의와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가도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과 생명, 그리고 진실에 대한 일말의 구원가능성을 던져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부끄러움과 혐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만들어준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은 어쩌면 모두가 약한 존재로서, 거짓말을 하고 상대방은 물론 자신까지 속이면서 그저 자기 잇속만을 챙기기 위해 살아가는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아첨하는 말이나 자기환상에 해독을 입으며, 필연적으로는 그 거짓말로 자기는 물론 자기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거나 파괴하도록 형성된 그런 존재로서, 그런 인간이 만든 이 세상 모든 관념이나 진실은 어쩌면 그런 거짓말의 질서 위에 올려져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나름대로 자기일관성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계속 거짓말을 하고, 그로써 자아와 사물을 왜곡하고, 그런 왜곡된 관념 위에 구축되어있는 이 세상의 질서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믿으면서 지금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러다가 아주 엉뚱하게도 가끔 선한 행동을 하기도 하며, 아름다운 것, 선한 것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원래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든 모든 선량함, 숭고함에 대한 동경은 이처럼 자기 스스로도 도저히 용서해줄 수 없는 그 선천적인 악랄함 속에 공존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 자양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성이란 너무나 풍부한 요소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조야한 선악의 잣대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가당치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52년전, 1950년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이처럼 모든 것을 용서치 않고, 모든 것을 조소하는 듯하지만, 가벼이 비분강개하지 않고 인간성과 인간인식의 깊은 심연 속을 담담히 파고들어간 명작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을 단순히 교활한 자, 더 강하고 영리한 자가 이기는 노름판으로 바라보거나 조악한 권선징악의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하기 마련인 헐리웃영화의 얄팍한 스토리전개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이런 무게있고 관조적인 영화가 낯설거나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 짧은 영화를 통해서 복잡한 인간세사의 영원한 모순과 허구에 대해 고민하고, 우리 인간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은 사색과 반성을 할 수 있는 단초를 얻어낼 수가 있게 될 것이다.

2002.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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