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Reykjavik





- 이하의 글은 2002년 7월 18일 저의 "개인낙서장"에 올렸던 제 영화감상문을 별다른 수정 없이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


고래 wrote:

오늘은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감기기운도 있었지만, Kinotag인 수요일이었던 관계로 내 독일친구들인 Jonas, Emmanuel과 함께 "101 Reykjavik"라는 아이슬란드영화를 Abaton극장에서 관람하였다. 처음엔 그냥 여태껏 못본 아이슬란드 영화를 한번 기념삼아 본다는 기분으로 얼떨결에 들어가서 보았으나, 다 보고 난 지금은 영화를 보면서 너무나 웃어서 그런지 뱃가죽이 다 땡기고 정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올해초쯤에 ARTE TV에서 프랑스영화 'Sitcom'을 보고 황당했던 이래, 영화 보고 이렇게 황당하게 웃어보기도 정말 처음인 것 같다.

이 영화는 아이슬란드의 어느 28살 먹은 청년의 삶을 건조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장래에 대해 그 어떤 계획도 없고, 직업도 없고, 여행을 다닐 생각도 없고, 자기 집도 없고, 그냥 홀어머니에게 얹혀 살면서 아이슬란드의 발달된 사회보장제도 혜택 속에서 걱정없이 살아가는 청년 Hlynur는 아침에 일어나 욕조 속에 몸을 담그면서 콘프레이크를 먹고, 인터넷을 하고, 저녁에는 술집에 가서 또래 젊은이들과 함께 술을 퍼마시면서 놀고, 밤에는 여자친구 자취방에 가서 섹스를 하고... 그러면서 게으르게 사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서, 다른 것은 생각도 못하는 젊은이이다.

워낙 실업문제는 심각한 데다 독일이건 아이슬란드이건 유럽사회는 너무나 안정되고 정체된 사회이기 때문에 개인으로서 이렇다하게 욕심부릴 만한 일도 많지 않고, 야망을 키울 일도 많지 않고, 굳이 일을 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그는 자기 Postbezirk인 101 Reykjavik를 한발짝도 떠나지 않으면서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무료한 삶을 때워간다. 그 어떤 삶의 목적도 없고, 욕심도 없으며,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고, 누구를 집요하게 미워하지도 않는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그저 비웃음과 무관심의 대상일 뿐이다. 다행히 얼굴은 잘 생겨서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은 그에게 저절로 달라붙기 때문에, 밤마다 그런 여자들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느라 녹초가 되는 그에게는 사랑 같은 것도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집으로 초대한 Flamenco강사 Lola를 보게 되면서 그의 지루한 삶은 갑자기 변화를 겪게 된다. 거리낌 없이 그의 앞에서 목욕을 하고 나체를 보여주는 스페인여자 Lola에게 조금씩 매혹되기 시작한 Hlynur는 어머니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자기를 유혹하는 연상의 여인 Lola와 함께 술집에 가서 같이 술을 마신 다음 집에 돌아와 그녀와 뜨거운 섹스를 나눈다. 물론 그에겐 이미 다른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중이었기 때문에, Hlynur는 이제 Lola를 자기 여자친구로 삼으려 하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드디어 놀라운 일은 벌어지고만다. 사실 Lola와 그의 어머니는 레즈비언이었고, 둘은 동성애를 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Hlynur 앞에서 자기는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하는 Hlynur의 어머니... 그리고 스페인여자 Lola는 갑자기 안면을 싹 바꾸고서 Hlynur를 외면한 채 그의 어머니 팔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Hlynur는 밤마다 옆방에서 어머니와 Lola의 섹스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통에 신음하게 된다. 어머니와 아들이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다니... 그리고 어머니가 아들에게서 그 사랑을 가로채버리다니... 급기야 어머니가 인공수정으로 Lola를 임신시켰다는 소식을 Hlynur에게 전해주기에 이르자, Hlynur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게 된다.

그는 남자동성애자인 자기 친구들 집에서 밤에는 잠을 얻어자고 낮에는 거리를 배회하며 비참하게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생계는 막연한데, 옛날 여자친구는 임신을 했다면서 그에게 매달리고, 그녀의 오빠는 그에게 달려와서 이 자식 죽여버리겠다고 그를 두들겨패고... 한마디로 그는 총체적 난국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가 미쳐 손쓸 사이도 없이 옛 여자친구는 그의 애기를 낙태해버리고서 새 남자와 동거를 시작하며, 어머니와 Lola는 인공수정으로(?) 낳은 그들의 애기를 품에 안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Hlynur는 술을 잔뜩 퍼마시고 눈 속에 파묻혀서 죽으려고 한다. 어머니에게 "그 아이의 아버지는 나야~"라는 유서를 남긴 채... 하지만 날씨가 갑자기 풀리면서 따뜻한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자살기도도 실패하고 만다.

결국 Hlynur는 이 모든 현실을 다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만다. 어차피 자기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욕심따윈 포기하고서, 동성애커플인 어머니와 Lola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를 통해 Hlynur는 다시 삶의 기쁨을 되찾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동생인지 아들인지 모를 갓난아기와 함께 목욕을 하고 교통순경으로 취직하여 낮에는 돈도 벌기 시작한다.

까짓거 사랑따위 못 받으면 어떤가? 삶이란 원래가 그런 것이다. 죽음과 죽음 사이에 낀 잠시의 휴지기일 뿐인 것이다. 그냥 현실을 인정하고, 자기 밥줄에 충실하고, 자기 피붙이와 가까이 지내다 보면 그 짧은 삶도 조금이나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을, 그 이상 뭘 더 욕심낸단 말인가? 그냥 등 따숩고 배 부른 것이 최고이며, 그 이상을 얻을려면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결론 속에서 Hlynur는 미소 띤 얼굴로 Reykjavik시내를 걸어가고, 이 영화 '101 Reykjavik'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영화의 압권은 뭐니뭐니 해도 파격적인 동성애장면의 묘사와 함께, 어머니에게 사랑을 빼앗기고서 세상을 거의 다 포기해버린 Hlynur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저지르는 엽기적인 행동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특히 어느 친구의 침실에 다짜고짜 쳐들어가 거기서 불륜의 정사장면을 감상하며 여유있게 시를 읊어대는 장면), 내 눈에 그보다 더 인상깊게 보여졌던 것은 그 사이사이에 보여지는 아이슬란드의 풍광들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아이슬란드의 수도 Reykjavik 시내의 여러 건축물들도 아름다웠지만, 특히 영화 초반부와 절정부에 보이는 어느 눈내린 바닷가 고원의 절경은 쉽게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장관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슬란드는 비록 인구 27만의 작은 섬나라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독일, 프랑스와 맞먹을만큼 부유한 나라이며(1인당 국민소득 2만 6천불), 천혜의 관광자원을 갖고 있어서 많은 유럽인들에게는 필수 방문코스로 꼽히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는 좌파 사민주의자의 세력이 매우 강해서 마치 스칸디나비아제국처럼 사회보장제도가 아주 잘 갖춰져 있으며, 또 여권(女權)이 강하기로도 소문나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던 그 유명한 Vigdis Finnbogadottir는 세계최초의 여성 직선대통령이었고, 지금도 그녀가 아이슬란드 및 유럽에서 행사하고 있는 도덕적 권위는 아주 대단하다.

언제 한번 나도 아이슬란드에 가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과연 내 평생에 그런 기회가 찾아올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만약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평소 추운 나라에 가보기를 소원하던 내 동생이랑 같이 가봐야 할텐데...

200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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