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Shogun 감상문





- 이하의 글은 2002년 5월 12일 저의 "개인낙서장"에 올렸던 장난기 어린 영화감상문을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


고래 wrote:

요즘 독일은 월드컵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면서 TV에서 일본관련 프로그램이나 영화 같은 것을 많이 방영하고 있는 듯하다(한국관련 프로그램? 거의 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Kabel1에서 Richard Chamberlain과 Shimada Yoko 주연의 영화 "Shogun"을 방영했는데, 워낙에 중세시대극을 좋아하는 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여자배우 Shimada Yoko가 나오기까지 했으니 이런 좋은 영화를 내가 놓칠 리가 있나? 저녁 8시 15분부터 각잡고 세시간 동안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한편으로 화려한 일본전통의상들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Shimada Yoko의 매력에 또한번 넋을 잃어야 했으니... Shimada Yoko (島田陽子) ... Yamaguchi Sayoko와 함께 일본여배우들 가운데서도 가장 일본적인 여자배우로 불리우는 이 여자 Shimada Yoko의 여성미 앞에서 나는 오늘밤에도 깊은 황홀감에 빠져야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Shimada Yoko는 (독재자를 암살한) 반역자의 딸로 태어나, 무뚝뚝하고 이기적인 Samurai에게 원치 않은 시집을 가서 노예처럼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비운의 여인으로 나온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임기응변도 뛰어난 재원이지만, 남자들의 야망과 욕심에 그저 도구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자기 숙명을 조용히 따르다가 결국엔 죽음으로 삶을 마치고야 마는, 순종적이면서도 당찬 일본귀족여성의 역할을 연기한다.

이 영화에서 대개는 하얀 빛깔의 Kimono를 입고 종종걸음을 치거나, 가만히 고개를 숙이면서 조심조심 말하는 모습의 Shimada Yoko는 눈부시도록 청결하고 단정한 게 꼭 하얀 눈송이와도 같다. 얼굴은 비록 그리 예쁜 얼굴이 아니지만, 두터운 화장이 본래의 밋밋한 얼굴과 아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무척 깨끗하고도 이지적인 느낌을 준다. 게다가 절대로 크게 터뜨리지 않고 살짝 짓다가 마는 웃음이나 뭔가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남자들에게 무한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 어떤 순간에도 자기 할 말을 다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운을 남기는 짤막한 암시만을 하고, 자기 속마음을 다 드러내지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항상 자기 마음을 상대방에게 다 보여주는 그녀의 이중적인 태도는 어떻게 보면 답답한 것처럼 보이나, 어떻게 보면 깊고도 그윽하게 보인다. 웃고 있어도 웃는 것 같지 않고, 울고 있어도 우는 것 같지 않으며, 언제나 상대방의 속마음을 완전히 꿰뚫어버리는 날카로운 말로 상대방의 말문을 막아버리지만, 절대 상대방을 압도하거나 몰아붙이는 일이 없는 그녀의 순한 시선은 가까운 당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먼 앞날을 바라보기 때문에 항상 비어있고 공허해 보인다.

Richard Chamberlain이 목욕하고 있는 데 갑자기 들어와 옷을 사르르 벗고 알몸으로 탕 안에 들어오는 Shimada Yoko의 그 유명한 욕탕씬은 한편으로 그녀의 몸매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_-;; 많은 남자들의 눈에 그녀는 오히려 잘나가는 육체파, 슈퍼모델 여배우들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고 관능적으로 보인다. 자기 몸매를 당당하게 내놓는 것이 아니라 설령 옷을 다 벗는다 해도 은근히 감추는 수줍음과, 남자와 함께 목욕을 하면서도 송곳같은 차가운 말로 남자에게 절대 범접할 틈을 주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들이 남자들을 오히려 더 묘하게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어두운 밤에 몰래 Richard Chamberlain의 침실에 들어와 섹스를 하고 난 다음, 나중에 무표정한 얼굴로 그때 침실에 들어왔던 여자는 자기가 아니었다고 Richard Chamberlain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모습은 현대적이고 당당한 태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남자들의 애간장을 살살 녹이기도 하는 것이다.

쏟아지는 햇볕 아래에서 무늬없는 하얀 Kimono를 입고 자기 주군의 가족들을 인질에서 풀어내기 위해 그녀가 자살을 위협하는 장면 역시도 정말 감동적이다. 완력이라곤 하나도 갖추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영화 전편을 통해서 자기 주위의 사람들과 수많은 싸움을 벌이는데, 무력이라고는 하나도 쓰지 않고 언성도 한번 높이는 일 없이 적시에 아주 적절하게 자학적인 방법을 씀으로써 오히려 더 철저하게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그녀는 상대방을 절대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상대방보다 더 강한 위치에 서있다. 그녀의 그러한 강함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가장 약한 여자라는 점에서 나오는 것인데, 어쩌면 이 세상이란 게 결국 그런 역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철저히 알고 있었기에 그런 약하면서도 강한 힘을 그녀는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오늘날의 여성주의적 시선에서 보자면 Shimada Yoko의 그런 다소곳한 모습은 마쵸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비현실적 가공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Shimada Yoko는 영화 종반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Richard Chamberlain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기까지 하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와의 현실적인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사랑하는 남자와 이렇다할 대화나 협의 같은 것도 거치지 않은 채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혼자서 자학적으로 결정해버리는 그녀의 태도는 어떻게 보면 너무 일방적이면서 오만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분명 그녀는 매우 깊이 있는 여자이긴 하다. 하지만 모든 여자가 그녀와 같은 깊이를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며, 사랑은 오히려 얕은 단계에서 서로가 알콩달콩, 티격태격 싸워가며 서로가 조금씩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고,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키워나가는 것이 더 이상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남자들이 모든 여자들에게 이 Shimada Yoko와 같은 수준의 깊은 이해심과 어머니같은 희생정신, 진지함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여성들에게 분명 억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용모에 지극히 평범한 몸매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그 어느 잘난 여성들보다도 남자들 눈에 더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다가온다. Richard Chamberlain 앞에서 계속 상냥하면서도 모호하고 차가운 태도만을 고수하던 그녀가 어느샌가 그때까지의 긴장된 태도를 풀고, 마치 아기처럼 곱고 보들보들한 피부와,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가늘고 연하기만 한 자기 몸매를 드러내며 알몸으로 Richard Chamberlain의 품에 안긴 채 '당신이 나의 첫사랑, 유일한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이나, 죽음을 결심하고서 그 직전에 Richard Chamberlain을 찾아와 자기를 사랑한단 말을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단한번만 해달라고 부탁할 때의 그 촉촉한 눈연기 장면 등은 오래도록 뭇 남자들의 가슴에 애잔하게 남을 것들임에 틀림없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이미 내 중학교 2학년때 청계천4가의 '아세아극장'에서 보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영화의 수입이 완전히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유명한 여배우를 한국의 극장에서 본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체험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 영화는 비록 일본을 소재로 하고 있었지만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였던 까닭에 우리나라에도 상영이 허가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이미 청소년시절에 이 여자 Shimada Yoko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연소자관람불가영화였지만, 난 이미 청소년시절부터 연소자관람불가영화만 보러 다니던 인간이었다).

한동안 일본에서도 Kimono를 입은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져왔던 여자 Shimada Yoko... 이제는 벌써 오십이 가까운 아줌마의 나이가 되어버린 여자 Shimada Yoko... 어린 시절 그녀 Shimada Yoko 외에 '은하철도 999'의 메텔이나 '미래소년 코난'의 라나 등에게서 강한 이성적 매력을 느껴왔던 나는, 아직까지도 내 앞에 앉은 여자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직설적으로 얘기를 하거나 화를 버럭버럭 내거나 할 경우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아주 정나미가 팍 떨어져버리는 버릇을 전혀 고치지 못하고 있으며, 누군가로부터 '이 세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여자는 어느 나라 여자?' 같은 질문을 받을 때면 당장 '일본여자(Japanerin)'라고 말해버리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경향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따뜻한 태양이 비추고 넓은 바다에 둘러싸인 나라. 상냥한 여자들과 친절한 남자들과, 아름다운 산수와 기름진 논밭을 가진 나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배우 Shimada Yoko가 살기도 하는 나라. 하지만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가깝고도 먼 나라. 아, 언제쯤 내가 이 일본이란 나라에 한번 가볼 수가 있게 될런지...

2002.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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