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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전 승리를 보고도 지금 내 기분이 씁쓸한 이유
그러나 지난번 폴란드를 이겼을 때만 해도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내게 전화를 걸어 축하인사를 해주던 내 독일친구들은 내가 혼자 감격하고 있다가 기다리다 못해 먼저 그들에게 전화를 걸자 '한국의 승리는 축하하지만 사실 오늘 한국의 전력은 포르투갈보다 한 수 아래였다'고 말하거나 '별로 기쁘지 않다. 포르투갈의 멋진 경기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내 김을 빼놓는 반응을 보였다. 독일신문과 방송은 한국의 승리보다도 포르투갈의 패배를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으며, 독일방송의 해설자는 매우 불쾌한 얼굴로 '한국팀에게 더이상의 승리는 없을 것이다. 한국팀은 분명 빠르고 부지런하고 체력도 뛰어나지만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창조성이 결여돼있기 때문이다'라고 내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하기까지 하였다.
왜 한국팀은 그렇게 좋은 경기를 펼치고서도 이렇게 독일인들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는가? 무엇이 한국팀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냉소적이 되게끔 만들었으며, 왜 많은 축구팬들이 한국팀의 승리를 보면서 이렇게 씁쓸해하는가? 단지 어느 아시아팀의 선전에 대한 독일인들의 시기와 경계인가? 그 이유는, 일단 한국과 포르투갈의 오늘 경기를 하나 하나 분석해보면서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겠다.
오늘 한국팀의 Guus Hiddink감독은 "비기는 경기를 하지 않겠다"는 종래의 발언과는 달리 3-6-1이라는 거의 극단적인 수비위주의 진용으로 경기를 시작했다. 기존의 쓰리백(홍명보, 최진철, 김태영)은 그대로 고수하면서 미드필드에 무려 6명이나 되는 선수(송종국, 김남일, 유상철,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를 배치하고 공격수는 전방에 안정환 하나만 둔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사실상 공격은 거의 포기하고 미드필드에서 최대한 상대방의 공격을 차단하는 소극적인 경기를 하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4-2-3-1의 포메이션, 즉 공격형 미드필더를 세사람(Figo, Joao Pinto, Sergio Conceicao)씩이나 두고 최전방에 원톱(Pauleta)을 박아놓는 굉장히 위협적인 공격위주의 포메이션을 쓰는 팀이다. 쓰리백으로는 도저히 이런 공격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포백 정도는 둬야지 수비를 더 튼튼히 다질 수 있는데, 쓰리백을 그대로 고수하고 그 대신 미드필더에 무려 여섯명이나 때려넣었다는 것은 사실상 미드필더 6명까지 합쳐서 수비진을 9명으로 정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얼마나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경기진용인가? 이런 식으로는 한국팀이 전반, 후반 다 합쳐서 슛팅을 10번 해보기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 대신 개인기의 열세를 딛고 수비벽을 촘촘히 쌓는 데는 유리하므로 상대방인 포르투갈팀에게도 여간해서는 슛팅 챤스를 주지 않게 된다. 이게 결국 뭔가? "비기는 축구"를 하겠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후 미국이 폴란드에게 0-2로 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포르투갈 선수들은 한국팀과 비기기만 해도 자기네들이 16강에 진출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팀도 마찬가지로서 방금 전 Figo의 귀신 같은 패쓰에 간담이 서늘해진 상태라 감히 적극적인 공격을 펴지 못하고 공을 뒤로 빙빙 돌리려 하였다. 마치 1982년 월드컵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막판에 사이좋게 비겨서 16강에 올라갔던 것처럼 한국과 포르투갈 두 팀도 사이좋게 비겨서 16강에 동반진출하려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으니,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독일친구들이 이런 장면을 좋게 봤을 리는 만무하다. "비겁하다"는 비난을 내 동거인 Dirk는 쏟아부어댔으며, 내가 보기에도 이때 한국팀과 포르투갈팀의 소극적인 경기모습은 보기가 영 안 좋았던 게 사실이었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한국팀이 포르투갈팀에 대한 숫적 우세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모습은 너무나 안타까워 보였다. 10대11로 싸우는 상황이면, 적어도 대인마크를 전혀 받지 않는 공격수가 최소한 한 명은 나오게 돼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공수를 조율해 단 한번의 패쓰로 완벽한 챤스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게, 그런 패쓰를 할 수 있는 플레이메이커를 한국팀이 단 한 명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게 좀 안타까워보였다. 해설자 역시 그런 점을 지적하며 한국축구의 수준 낮음을 비꼬는 모습이었고,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0-0으로 경기가 끝날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니 포르투갈 감독은 잘 싸우고 있던 원톱 Pauleta를 빼고 그 대신 수비수 하나를 더 집어넣어 이젠 공격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수비 굳히기로 '비기기 작전'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9대11로 싸워야 하니 괜히 골을 넣으려 하기 보다는 0-0으로 굳히기를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수비위주 작전을 펴면 뭐하나? 10대11도 아니고, 9대11인 상황이었다. 밀착마크를 받지 않는 공격수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남는 상태인데, 이런 상태에서 한국팀이 단 한 골도 못 넣는다면 그것은 한국팀으로서 수치도 이만저만한 수치가 아닐 상황이었다.
이렇게 한 골을 먹고 나니, 그 뒤로 펼쳐진 포르투갈의 공세는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후반 30분 Figo가 아크정면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내었지만, 평소 그토록 정확하던 Figo의 프리킥은 골대 왼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포르투갈은 다시 공격수 Gomes를 투입하여 공격의 고삐를 더욱 잡아당겼는데, 후반 40분 Paulo Bento가 최전방에 노마크상태로 서있던 Gomes를 보고 거의 5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정확하게 Gomes에게 롱패스를 해 슛챤스를 만들어주었지만, Gomes가 노마크챤스에서 어이없게 헛발질해 그 결정적인 챤스도 멍청하게 날려버리고 말았다. 만약 Gomes가 아니라 부동의 원톱 Pauleta가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골로 연결시키고도 남았을 챤스였으니, 포르투갈팀으로서는 땅을 칠 만큼 원통한 순간이었고, 한국팀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다행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미드필드에서의 몸싸움에서 포르투갈에게 밀리지 않았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11대9의 숫자로 싸워서 겨우 1-0으로 이긴 게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포르투갈이 결정적인 챤스만 놓치지 않았어도, 쓸데없는 파울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한국이 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던 경기였는데, 우리들에게는 경기결과만이 그렇게 중요한가 말이다.
정말이지 이젠 16강 진출도 달성하고 했으니 우리 한국인들도 슬슬 집에 앉아서 편안히 맥주나 마시면서 경기를 관람하거나, 아니면 경기장에서 응원할 때도 위압적으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댈 게 아니라 '소양강처녀'나 불러대면서 니나노 놀기도 해야 할 때가 온 게 아닐까? 심지어 나는 이제 그만하면 우리 대표팀도 많이 이겼으니 이번엔 한국팀이 16강 정도만 하고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곤 한다. 물론 한국팀의 눈물겨운 16강진출때문에 내 이번 달 공부계획이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되어 내가 이런 삐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2002.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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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 한국팀이 그토록 염원하던 16강 진출의 목표를 달성했다. 프랑스와 아르헨티나가 모두 탈락한 후 최고의 우승후보 가운데 하나로 불리우던 포르투갈을 바로 우리 한국팀이 꺾어버리는 기염을 토했으며, 그토록 오만하게 굴던 미국의 콧대를 누르고 당당하게 D조에서도 1위의 자리에 올랐다. 마침 포르투갈팀은 옛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때 동족인 북한팀을 8강전에서 탈락시켰던 팀이기도 했으니 덩달아 북한 동포들의 복수까지 해준 셈이 되었으며, 비록 일본과 2승 1무로 똑같은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우리는 강팀인 포르투갈을 꺾고 1위에 올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본보다도 우리나라가 더욱 주목받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물론 밉살스런 미국이 '한국의 은혜'로 16강에 오르게끔 만들었으니, 결과적으로 미국을 거지신세로 만든 게 되어 오히려 미국을 탈락시킨 것보다도 더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당연히 우리나라 온 국민이 환호하고 기뻐할 만하다.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신다면 내 설명을 가만히 잘 들어보시라. 포르투갈은 Beto, Fernando Couto, Jorge Costa, Rui Jorge라는 네 사람의 수비수가 나란히 일자로 서서 수비하는 포백시스템을 갖춘 팀이다. 따라서 이 수비진을 깨부수려면, 최전방 공격수가 최소한 두 명은 되어야 이 네 사람을 마구 뒤흔들어서 골챤스를 잡을 수가 있다. 그런데 안정환이가 개인기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혼자서 무슨 용가리통뼈라고 이들 네 사람을 다 이기느냐 말이다.
실제로 이런 포메이션을 쓴 덕분에 한국은 미드필드에서야 거의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지만, 최전방의 안정환 앞으로는 볼이 거의 공급되지 않고 모든 패쓰가 자꾸 Beto, Fernando Couto, Jorge Costa, Rui Jorge의 포르투갈 포백에게 차단되는 결과에 부딪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안정환 혼자서 어떻게 위 네 사람의 수비진을 당해낸단 말인가? 그래서 Fernando Couto가 안정환에게 연결되는 패쓰를 가로채 미드필드에 있는 Figo에게 패쓰하면 한국팀은 미드필드에 여섯명이나 되는 선수들이 늘어서 있으니, 송종국, 이영표 등이 찰거머리처럼 달려들어 Figo를 차단하고, 그래서 한국팀이 전방으로 패쓰하면 또다시 포르투갈의 포백이 공을 빼앗는 재미없는 상황이 전반 내내 지겹도록 반복되었다. 물론 이영표와 유상철이 한번씩 중거리슛을 날려보긴 했지만, 그저 공포탄에 불과했던 것. 한마디로 전반 15분까지는 공이 그 어느쪽 페널티지역에도 못 들어오고 그저 미드필드에서만 왔다갔다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였다.
물론 이런 상황을 포르투갈이 타개하지 못했던 결정적 원인은 Figo의 부진에 있었다. 도무지 송종국과의 1대1대결에서 특유의 개인돌파력을 선보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Figo의 패쓰를 받아줄 Joao Pinto, Sergio Conceicao 역시 김남일, 유상철,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에게 꽁꽁 묶여 있었고, 최전방의 Pauleta는 홍명보, 최진철, 김태영 등이 마크하고 있었으므로, Figo로서는 공을 설령 잡았다 하더라도 어디 패쓰를 할 곳이 마땅치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다 보니까 자꾸 한국선수들에게 공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한국팀 역시 그렇게 Figo에게서 공을 빼앗아봤자 역시 패쓰할 곳이 없으니까 다시 빼앗기게 되고... 이런 모든 지루한 공방이 결국 한국팀의 극단적인 미드필드 압박때문에 벌어진 교착상태라고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르투갈은 서두르지 않고 Beto, Fernando Couto, Jorge Costa, Rui Jorge 같은 최종수비진들의 오버래핑으로 한국 미드필드진의 압박을 뚫었어야 했지만, 불행히도 포르투갈의 감독과 선수들은 우리나라 감독이나 선수들에 비해 그리 똑똑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꼭 이겨야한다는 생각으로 조급하게 굴다 보니 그만 수비수 Beto가 전반 22분경 설기현에게 불필요한 반칙을 해서 경고를 받은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Joao Pinto가 박지성에게 역시 거친 반칙을 범해서 급기야 퇴장까지 당하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다혈질인 포르투갈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의 '소극적 무승부 작전'과 '미드필드만 죽어라고 압박하기 작전'에 뿔따구가 나서 자멸을 해버리는 꼴이었다. 그 상황에서 도대체 Joao Pinto는 왜 그런 위험한 반칙을 범했던 것이었을까? 박지성의 오늘 움직임이 워낙 좋았다고는 했지만, 그 반칙은 아무런 쓸데도 없는, 불필요한 반칙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Joao Pinto는 Louis Figo, Sergio Conceicao과 함께 옛날 포르투갈의 세계청소년컵 2연패를 이끌었던 장본인으로 송곳같은 패쓰가 일품인 탁월한 미드필더였는데, 그런 Joao Pinto가 퇴장당하고 말았으니, 천하의 포르투갈도 그 기세가 많이 꺾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포르투갈은 강력한 우승후보로서 우리와는 엄연히 수준차가 존재하는 팀. 더군다나 포르투갈의 플레이메이커 Figo가 누구인가? Zinedine Zidane과 우열을 다투는 세계최고의 테크니션이요, 
"축구의 예술가"라 불리우는 천재선수가 아닌가? 전반 초반 부진하던 Figo였지만, 전반 35분경 Figo의 동물적인 패쓰감각은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되니, Petit로부터 해딩패쓰를 받은 Figo가 단 한번에 유상철과 송종국의 틈새를 뚫고서 자로 잰 듯한 정확한 오른발 패쓰로 최전방으로 달려가던 Pauleta에게 단독 슛챤스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Pauleta와 골키퍼 이운재의 1대1 상황. 꼼짝 없이 골을 먹는가 했지만, Pauleta의 슛이 골대 위로 빗나가는 바람에 한국팀은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귀신같이 단 한번 툭 올려차서 그런 결정적인 챤스를 만들어내는지... 역시 Figo는 Figo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까짓거 한 명 퇴장당했다 하더라도 우리 팀에게 전혀 위축되지 않을 만큼 포르투갈은 그렇게 강팀이었던 것이다.
슈팅수 2-1이 말해주듯, 그렇게 소강상태로 재미없게 전반을 마친 뒤, 후반 들어서 한국팀은 송종국이 Figo의 반칙으로 보기 좋게 프리킥을 얻어낸 다음
그것을 중앙의 유상철에게 패쓰해주고 이를 유상철이 최전방에 있던 설기현에게 단번에 절묘하게 올려줘 설기현이 헤딩슛을 하는 꽤나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골대를 약간 옆으로 벗어나는 슛. 물론 세트플레이로서는 꽤나 괜찮은 것이었지만, 이미 설기현이 문전으로 쇄도할 때부터 포르투갈의 수비수 Beto는 한국팀의 작전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Beto의 밀착수비로 설기현은 제대로 슛을 쏠 수가 없었다. 비록 한국이 포르투갈에 비해 숫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공격에 있어서는 오히려 포르투갈보다도 덜 위협적이고 덜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순간이었다. 해설자는 이 장면을 보고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한국팀이 골을 넣을 수 없다'며 이제 노골적으로 포르투갈편을 들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 후반 6분에 이어진 설기현의 빠른 왼쪽 돌파. 발빠른 설기현이 포르투갈의 수비수 Beto를 월등히 능가하는 주력으로 왼쪽 진영을 뚫었지만, 한국선수들의 공격패턴을 훤히 꿰뚫고 있던 포르투갈의 수비수들은 설기현이 센터링을 할 것으로 이미 짐작하고 벌써 문전으로 쇄도한 유상철을 샌드위치 마크해버린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설기현은 중앙으로 센터링을 하였고, 놀랄만한 투지로 유상철은 이를 받아 헤딩슛을 날렸지만, 역시 덩치 좋은 Jorge Costa의 밀착수비를 뿌리치고 골을 넣기는 역부족. 해설자는 이 장면을 가리키며 한국축구는 창조성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이런 단조로운 방식으로는 절대로 선진축구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해대기도 하였다.
하지만 포르투갈팀의 공격은 역시 날카로웠다.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국팀을 오히려 세차게 몰아붙이던 포르투갈팀은 후반 16분 얻어낸 코너킥을 Figo가 걷어찼는데, 그 공은 마치 자로 잰 듯이 문전 왼쪽 45도 지점에 서있던 Pauleta에게로 낮게 깔려서 날아갔고, Pauleta는 한국 수비수들이 자기가 그 공을 왼발 터닝슛할 것으로 알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자, 임기응변으로 몸을 숙여 낮은 헤딩슛으로 공을 틀어 한국골대 오른쪽을 향해 쏘아올렸다. 다행히 이운재가 가까스로 선방하고 유상철이 걷어내었기에 망정이지, 완전히 한 골 먹는 상황이나 다름 없었으며, 정말 그림같이 멋진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방송 해설자는 이 장면을 보고 포르투갈이 정말 창조적인 축구를 한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운이 없음을 계속 한탄해대었다.
이대로 가다간 포르투갈이 거의 승리를 하게 될 판이었지만, 여기서 포르투갈은 또다시 자멸하는 모습을 보이고 만다. 후반 21분 왼쪽 미드필드를 치고 들어가는 이영표에게 포르투갈의 수비수 Beto가 태클을 걸었는데, 이게 또 한번의 경고를 받게 되어 Beto가 당연히도 경고누적으로 퇴장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열명의 선수가 싸우는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아홉명으로 싸우라니... 포르투갈팀으로서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 판정은 그만하면 공정한 것이었다 (물론 독일방송 진행자도 그 판정은 옳았다고 보는 것 같았다). 다만 Beto의 그 파울은 전혀 불필요한 파울이었는데, 도대체 Beto가 뭣하러 그런 멍청한 파울을 저질렀는지, 그저 포르투갈선수들 전부에게 귀신이 씌워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후반 25분 포르투갈 문전 오른쪽에 박지성이 마크 없이 서있는 것을 본 이영표가 크로스패쓰로 박지성에게 볼을 귀신같이 연결하자, 박지성은 가슴으로 받아 오른발로 공을 한번 튀겨 그 앞에 서있던 Sergio Conceicao을 가볍게 제친 다음 강한 왼발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리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멋지고 기술적으로도 거의 완벽한 슛이었지만, 포르투갈의 수비숫자가 월등히 적은 상황이었으므로 그만큼 빛이 바래는 슛이기도 했다.
그 뒤로도 포르투갈팀은 아홉명의 선수로 열한명의 한국팀을 계속 몰아세우면서 공격의 끈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후반 44분에는 페널티지역에 서있던 Sergio Conceicao 앞으로 공이 흘러나왔는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Sergio Conceicao은 정확하게 그 공을 감아찼지만, 공은 골포스트를 맞고 나와버렸다. 어떻게 보면 오늘 포르투갈에게는 불운이 겹치고 또 겹쳤던 셈이었다.
결국 포르투갈은 한국에게 1-0으로 무릎을 꿇었고, 한국팀은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방송진행자는 한국팀에 대해 별다른 칭찬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국선수들의 환호하는 모습보다는 포르투갈 선수들의 흐느끼는 모습이 더 집중적으로 클로즈업되었고, 방송진행자는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선수들이 그렇게 뒤늦게나마 멋지고 아름답게 싸워준 것을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오늘 한국선수들은 스코어상으로는 이겼지만, 전력의 우위까지 확인받지는 못했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내 독일친구들도 한국팀을 칭찬하기 보다 모두 '오늘 한국의 운이 억세게 좋았다' '포르투갈이 멍청하게 경기해서 졌다'고 평하는 데 예외가 없었다. 비록 한국이 포르투갈을 이겼다지만, 이태리와의 16강전에서는 한국팀이 탈락할 것을 거의 예상하는 분위기였고, 방송해설자는 '한국팀에 더이상의 승리는 없을 것'이라고 잘라말하기까지 했다. 창조성이라곤 거의 없이 체력과 스피드, 정신력, 관중의 응원, 그리고 행운만 갖고 승부하는 팀이 이렇게 16강까지 올라간 것만도 기적이라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한국팀의 히스테리컬한 응원도 입방아에 올랐다. 모든 국민이 이렇게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마치 한 사람처럼 총화단결하여 응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해설자는 뭐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얼버무렸지만, 나의 동거인 Dirk는 '전형적인 후진국문화, 파쇼문화의 유산'이라면서 '그 자체로 병적인 증후군이요 한국사회에 전체주의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라고 비꼬아대는 모습이었다.
어떤 한국인이 경기 몇시간 전에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하며 분신자살을 기도했다가 중화상을 입은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는데, 마치 한국인들은 이번 월드컵을 즐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치르듯 생각하고 있으며, 온 국민이 이미 축구경기를 치르기 전부터 뭔가 집단 히스테리에 빠져 있는 것처럼 독일인들에게는 보이는 듯했다. 물론 Guus Hiddink감독이 이번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한국인들에 의해 대통령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고, 귀화를 시키든 어떻게 하든 Guus Hiddink감독을 절대로 한국인들이 놓아주지 않을 태세라는 얘기도 여기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웃음거리가 되는 듯했다.
나는 그걸 보며 새삼 챙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독일의 축구팬들은 경기결과보다는 평소 어떻게 아름답게, 창조적으로 축구하느냐에 더 신경쓰는 편이고, 경기결과나 다른 데에 더 신경쓰는 축구문외한들은 아예 월드컵이고 축구고 뭐고 하는 데에 관심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왜들 그렇게 남의 나라 문제에 대해 호들갑을 떨며 난리들을 치는지도 유감스러웠지만, 한국인들의 열광하는 모습도 너무 단순해보였다. 사실 이번 한국과 포르투갈의 경기에서 한국은 실력상 포르투갈보다 한 수 아래의 팀이었으며, 정정당당하게 맞대결했으면 크게 질 수도 있었던 경기였지만, 한국이 수비위주의 대형을 짜고서 비겁하게 맞섰기 때문에 승리를 줍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한국팀은 유럽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할만한 어떤 아름다운 기술을 그리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 박지성의 멋진 슛을 제외하면 다른 선수들의 기술은 투지나 체력에 비해 많이 초라한 수준이었으며, 눈쌀 찌푸리게 하는 지연작전이나 '공 뒤로 돌리기'작전 같은 것까지 한국팀은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최소한 포르투갈의 선전 앞에 우리 국민들이 약간은 겸연쩍은 모습이라도 좀 보여야 할 상황에서, 그저 아무 생각없이 승리에 대해 열광만 하고 있다는 사실은 독일인들을 비롯한 다른 나라사람들의 눈으로 봤을 때는 굉장히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한(恨)이 그렇게 많이 쌓였던 것일까?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 무슨 열등감이 그렇게 많이 쌓여서 여기 독일인들은 별로 대수롭게 생각지도 않는 월드컵 16강진출 하나만 갖고도 온 국민이 하나되어 그렇게 기뻐하는 것일까? 이것도 일종의 집단적 광기이자 히스테리가 아닌가?
이 시점에서 나는 느닷없이 옛날 어렸을 때 보았던 이장호 감독의 '일송정 푸른 솔은'이란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김좌진 장군과 독립군들의 청산리대첩을 그린 그 영화는 청산리대첩이 실제로 일본군에게 우리 독립군이 일방적 승리를 거둔 전투가 아니라 일본군은 물론 우리 독립군도 사실상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전투였음을 가슴 아프게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란 존재가 어차피 행복하게 나 하나라도 오래오래 잘 살자는 욕망을 갖고 살아가는 그런 존재인데, 왜 남도 죽이고 나도 죽는 그런 무모한 싸움을 벌이다 모두 죽어야 하는가... 그러한 질문에 대해 이 영화는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숨져간 우리 독립군 병사들의 대부분이 사실은 애국심이나 애족심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라, 워낙에 인간적으로 극한적인 상황에 몰린 나머지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다들 자기 목숨을 버렸다는 점을 은근히 암시해주고 있다. 원래가 광적인 애국심이란 것은 대개 그렇게 슬프고도 비참하며 극한적인 정서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한국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며 부산 앞바다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한 그 45세의 남자가 어떤 심정으로 자기 몸에 불을 질렀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 왜 그토록 많은 국민들이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한국팀을 위해 응원을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으며, 왜 '붉은 악마'의 응원은 다른 외국팀의 응원단처럼 그저 술마시고 노래 부르고 깽판치면서 이 기회에 스트레쓰나 좀 풀고 놀아보겠다는 응원이 아니라 그렇게 무슨 종교행사, 무슨 국가주의 집회행사처럼 엄숙하고 진지하게 '거행'되는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하겠다. 다만 조금씩 내게 확실해지는 것은, 여기 유럽인들이 그런 한국인들의 진지한 모습에 대해 이젠 더이상 편안한 마음만을 갖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뭔가 꺼림찍한 병적 징후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위험한 파씨즘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한국의 보통 인간들을 극심하게 공통으로 억누르는 어떤 병적인 압박 같은 게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응어리가 이런 축구응원을 통해서 집단적으로 폭발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