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지혜로운 마법사라 해도 자기 일생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그 순간에는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법일까? Merlin은 자기 유일한 꿈이자 희망이었던 Arthur가 자기 말을 더이상 듣지 않을 뿐 아니라 Excalibur까지도 버렸다는 사실에 극한의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Merlin이 그 오랜 시간동안 공들여서 성군으로 키워낸 Arthur는 이제 국왕으로서의 모든 자신감을 잃고 오로지 파멸의 길을 향해 치닫을텐데... Arthur가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그 어떤 간사한 무리가 패권을 잡게 될까? 당장은 Arthur를 대신할 인물도 찾아볼 수가 없건만... 고뇌하면서 Merlin은 화풀이라도 하듯 자기 닮은꼴 Morgana와 벌거벗은 채 뒤엉켜 몸을 섞고, 그 사이에 Morgana는 Merlin을 자기 다리 속에 받아들이면서 음탕한 마법으로 Merlin의 머리 속 깊은 곳에서 그 거대한 용을 부르는 비밀의 주문을 읽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절망하는 자기 정신에 새로운 힘을 공급받으려는 듯 Morgana의 육체 앞에 난파선처럼 돌진하는 Merlin의 욕정을 농락하며 Morgana는 온갖 기교로 Merlin을 완전히 곯아떨어지게 만든다.

"이제 이 세상 최고의 마법사는 나다." Morgana는 크리스탈 문을 열고 신방을 빠져나온 다음 잠들어있는 Merlin을 향해 용의 주문을 외운다. 뒤늦게 깨어나 신방을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마법사 Merlin은 주문에 의해 흐물흐물 진홍빛 연기로 녹아버리고, 그 연기는 곧 차디찬 얼음기둥으로 단단하게 굳어져버린다.

그 다음 Morgana는 Arthur가 있는 Camelot으로 날아간다. 거기서 Arthur는 죽음과도 같은 허무감에 이성을 상실하여, 극단적인 자학과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채 궁궐 안을 떠돌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Arthur의 손에 엑스칼리버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수군대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Morgana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홀로 누워있던 Arthur에게 조용히 다가간다. "내 동생 Arthur야. 내가 널 위해 울어줄게. 넌 왕이야. 울면 안된단 말야." 그리고 Morgana는 잠시 Guenevere로 변신한 다음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Arthur의 몸 위에 올라탄다. 이를 보고 Arthur는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어하며 힘없이 중얼거린다. "Guenevere, 돌아왔구료. 내 속좁음을 용서하오." 이에 옳다꾸나 생각한 Morgana는 Guenevere의 목소리로 Arthur에게 속삭인다. "말씀하지 마세요, 전하. 천마디의 말도, 만마디의 말도 정말로 있어야 할 진실에는 오로지 서막일 뿐이에요. 왕인 전하와 왕비인 저는 우리의 사랑을 이어줄 아이를 낳고, 우리의 왕국을 더 강하게 하고, 우리보다 더 위대한 정복자를 만드는 거에요. 들어오세요. 다시 돌아온 제 몸 속으로 들어오세요, 나의 전하."

어려서부터 모성의 결핍 속에 자라온 Arthur는 Guenevere에게 절대적인 친밀감과 무조건적 사랑만을 갈구하고 있었고, 그런 자기 기대가 처참하게 배신당한 것에 전율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Guenevere가 다시 '엄마'와 같은 분위기로 나타나 자기 모든 것을 다 이해해줄 것처럼 자상하게 굴어주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Arthur도 아무런 골치아픈 생각 할 것 없이 그냥 어리광만 부리면서 '엄마'의 품에 안겨 울고 싶을 뿐이었다. Arthur가 그 까마득한 옛날 언젠가에 한번 맡았을 그 '엄마'의 향기를, 자기가 태어난 그 순간 이래 처음으로 다시 느끼며 '엄마'의 느낌을 주는 젖을 빨고, 자기 존재의 시원과도 같은 한 여인의 그 신비한 태고의 늪 속으로 파헤쳐 들어가 그 속에 자기 생명촉수를 집어넣고 운명의 몸부림에 흐느끼며 떨자,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던 Morgana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그만 자기 본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고 만다. 명백한 근친상간.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자기가 직접 왕이 될 수는 없음을 알고 있던 Morgana에게 그녀를 옭아매는 모든 도덕과 관습은 그녀의 적이었고,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충분히 위악적인 여성이 될 수도 있어야만 했다. 동생 Arthur의 씨를 받아서 그의 아들을 낳아, 자기가 직접이 아니면 간접으로라도 나라를 차지하겠다는 그녀의 미치광이적 행동은 이제 단순한 반이성의 일탈이 아니라 그녀의 전생애적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일종의 제의행위와 비슷한 것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동생이자 국왕이자 자기 어머니를 강간한 자의 아들인 Arthur와 깊이 몸을 섞으면서 그녀는 일생일대의 카타르시스와 함께 영원 또는 숙명으로의 회귀와 같은 신비한 느낌까지 경험하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비윤리적 만행이었지만, 그녀는 이러한 모든 비윤리적 만행 역시도 자기의 모든 생적 에너지와 자기를 낳고 만들어내고 부수어버리는 어떤 근원적인 인과관계의 요청으로서, 어떤 거대한 보상을 위해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Arthur의 씨앗과 영혼의 뜨거운 농축액이 자기 육체 한가운데 깊숙한 곳에 뿜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Morgana는 기뻐서 울면서 소리친다. "마치 달빛이 땅 속에 흘러들어오듯, Uther집안의 씨앗이 다시금 우리 Cornwall가의 핏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이번 교합은 Uther가에 대한 우리 Cornwall가의 복수다. 마치 옛날 네 아버지가 내 어머니의 정조와 자존심을 능욕했듯, 오늘 난 너의 권위와 도덕성을 능욕해버린 것이다. 내가 너를 지금 죽일 수 있음에도 살려두는 이유는 너와 나의 아들이 언젠가 Uther가의 원죄와 Cornwall가의 영광을 대변하면서 너 Arthur를 직접 찔러죽이고 왕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Morgana가 득의만면하여 사라지고 난 후, 이제 Lancelot도 떠나고, Guenevere도 떠나고, Merlin마저 이미 그의 곁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알게 된 Arthur는 자기부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폐인이 되어버린다. 자기가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해 탄생한, 특별히 예비된 자라는 기쁨과 자부심으로 살아왔고, 어린 시절의 그 수많은 고생과 모욕이 왕위등극으로, 어린 시절의 그 쓰라린 고독과 모성결핍이 Guenevere와의 결혼으로 다 해소가 되고 보상을 받은 것으로 여태까지 간단히 생각해왔는데, 그러한 믿음이 일순간에 다 부정되어버리고, 자기는 단지 폭력적인 아버지의 부정하고 부도덕한 결합, 강간행위에서 만들어진 쓰레기 사생아였을 뿐이며, 그저 Merlin의 꼭둑각시로서 왕이 되었을 뿐, 실제로는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할, 혐오스러운 인간말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아예 삶의 의욕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극단적인 자기모멸과 자책, 그리고 염세에 고통받던 Arthur는 뭔가 새롭게 의지할 만한 계획, 이 무한부정의 쳇바퀴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어떤 숭고한 해답의 열쇠를 찾아 헤매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오로지 옛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의 피를 담은 술잔, 성배를 찾아 그 잔에 담긴 물을 마시는 수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Arthur는, 원탁의 기사들을 소집해놓고 완전히 병들고 초췌해진 음성으로 묻는다. "누가 숲 속의 미로를 뚫고, 영혼의 근원과 지상의 끝까지 찾아가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비책을 가져오겠소? 누가 '성배'를 찾아오겠소?"

과거 Guenevere 왕비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결투에 나섬으로써 그 덕으로 기사가 되었던 의로운 소년 Perceval을 비롯한 모든 기사들이 성배를 찾으러 가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그렇게 기사들을 동원하여 성배를 찾겠다는 결단은 사실 Arthur에게 있어 또다른 실책이었다. 마치 이후 몇백년 뒤에 다시 일어나는 성지회복의 십자군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성배를 찾기 위한 원정으로 인해 민생은 더욱 궁핍해지고 외적은 더욱 발호하기 시작하며, 성배를 찾으러 떠났던 기사들은 거의 모두 객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많은 기사들의 죽음 뒷편에는 Morgana가 몰래 꾸민 술책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Morgana는 Arthur와의 사이에서 낳은 Mordred를 금이야 옥이야 기르며 자기 세력을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독하고 욕심많은 모든 여자들이 다 그러하듯 Morgana는 외아들 Mordred를 마치 자기 괴뢰처럼 잔혹하게 채찍질하면서도 동시에 비뚤어진 자만심을 붇돋아주며 작은 악마로 만들어가던 중이었는데, 마침 어린 Mordred는 Arthur의 골격과 Morgana의 두뇌 모두를 물려받아 일찍부터 무예와 지략에 출중한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Morgana는 이미 자신의 마법을 이용해 신비의 광산을 발견해놓았으므로, 거기서 채굴된 금속들은 Morgana가 아들 Mordred를 위해 군대를 양성하는 데 소중한 밑천이 되어주고 있었다.

성배를 찾아떠난 원탁의 기사들은 모두 Arthur의 수족들이었으므로 Morgana 입장에서는 제거되어야 마땅할 세력들이었다. 따라서 Morgana는 뿔뿔이 흩어져 돌아다니는 이 기사들을 마법의 함정에 끌어들인 다음 모두 자기 아들 Mordred의 손에 의해 죽게 만들어버리려 하였다. 심지어는 Perceval마저도 Mordred의 탁월한 무예에 꺾여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나무에 목이 매달려 있던 와중에 천우신조로 되살아난다. 그러다가 냇물에 휩쓸려 떠내려 가던 Perceval의 눈에는 우연히도 늙고 추악하게 변해버려 숲 속에서 혼자 살아가던 Lancelot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Lancelot은 그때 기괴하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디로 가고 있느냐, Lancelot? 너의 쇠무덤으로? 아직도 세상을 구하려 하느냐? 최고의 기사, 용감한 기사, 위대한 기사... 그런 바보같은 기사가 옛날에는 살았나보지. 하지만 지금 세계는 썩고 있다. 죽음이야말로 이 지상의 왕. 그렇게 만든 건 누구인가? 바로 너다, Lancelot. 창칼로 도륙을 해버릴 놈, 비겁한 네놈 Lancelot." Perceval은 Lancelot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보지만, Lancelot은 물에 떠내려가는 Perceval을 애써 외면해버린다.

한편 자기 세력이 드디어 완전히 갖춰졌고 Arthur의 기사들도 거의 다 제거되었다고 생각한 Morgana는 아들 Mordred (Robert Addie 분)에게 금빛 갑옷을 입혀 그의 아버지가 있는 Camelot으로 보낸다. 그리고 아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Arthur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 Mordred와 대면한다. 서로 단 하나뿐인 아버지이자 단 하나뿐인 아들이면서도 이제서야 서로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된 두 사람. 비록 정상적인 부자관계는 아니지만, 혈육의 정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마침내 Arthur의 얼굴을 본 순간 Mordred는 자기도 모르게 감정에 북받쳐 외친다. "아버지..." 그러나 Arthur는 정말로 자기 피와 살을 물려받았음이 분명한 젊은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도 이 아들이 자기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기에 자기 후계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Mordred. 난 너를 그냥 내 아들로서만 인정하고 싶다. 그 이상은... 안된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Mordred는 자기 본성을 드러내어 아버지에게 대들기 시작한다. "흥. 아버지가 정말 이 나라의 왕이란 말입니까? 영주들은 아버지에 대해 모두 반란을 모의하는 중입니다. 외적은 해안을 위협하고 있고, 농작물은 자라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 나라에는 기근과 역병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거기다 아버진 이미 Excalibur조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정말 이 나라의 왕이란 말입니까?" 그리고나서 Mordred는 오른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높이 쳐들면서 외친다. "물론 제게도 엑스칼리버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 거대한 창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을 때 그의 허리를 찔렀던 거대한 창입니다."

Arthur는 담담한 표정으로 Mordred를 응시한다. "네 엄마가 그렇게 얘기해주더냐?" 그러자 Mordred는 이제 정식으로 Arthur에 대해 선전을 포고한다. "당신은 제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무능한 군주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악과 결합하고 이 세상의 악을 지배할 수 없으면 그에겐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린 부자지간이지만 서로 전쟁에서 만날 수밖에는 없는 운명입니다. 전 아버질 오로지 이 거대한 창의 날끝으로만 대접해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말머리를 돌린다. "이제 전 돌아갑니다. 하지만 제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군대를 이끌고 무력으로 제 왕국을 되찾을 것입니다."

사실 Mordred가 이렇게 자신만만한 소리를 내뱉은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Arthur는 비록 카멜롯성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이제 완전히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자 Arthur의 실정을 비난하고 있었으며, 이제는 젊고 새로운 왕이 나타나 나라를 다스려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물론 Mordred는 Arthur의 정식 왕자가 아니었고,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Arthur 역시도 왕으로 인정해주기엔 부끄러운 사연으로 출생한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Arthur나 Mordred나 어차피 더럽고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 그나마 Mordred는 Arthur만큼 무능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백성들은 Mordred에게 적잖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민심이 이반했다 하더라도 기존의 질서를 뒤엎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Arthur가 한때 성군으로서 이룩했던 눈부신 치적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대세가 일단 기울면 재빨리 그 힘 있는 곳으로 한꺼번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Mordred가 공공연히 드러내는 악마적 성향의 불길함도, Arthur의 선량함과 어짊에 대한 믿음도, 백성들에게는 이미 기울어버린 대세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Mordred는 Arthur보다 거의 10배나 더 많은 병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의 휘하에 몰려든 민중들은 이제 전쟁이 일어나면 Arthur 휘하의 군졸들을 일방적으로 살육할 재미에 벌써부터 피냄새를 맡고서 흥분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때 하늘도 무심치 않으셨던 것일까? 최후로 남아 떠돌아다니던 기사 Perceval이 드디어 천사의 인도를 받아 십여년간 찾아다니던 성배를 찾아오기에 이른다. 그 성배는 머나먼 동방이나 바다 건너 먼 땅이 아니라 바로 Arthur의 카멜롯성 앞에 서려있던 신비한 기운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모든 일이 그렇지만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그 어떤 초월적 힘도 사람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않으며, 특히 Arthur처럼 세속적으로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던 사람에게 신은 절대 자비만을 베풀어주지 않는다. 어차피 세습적 절대왕정은 자연적 혈연에 정치적 권력을 결부시키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피의 흐름이 지저분해지고 그로 인해 가족관계가 꼬이는 당사자들의 인성이 왜곡되며, 나중에는 극단적 투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위대한 성군을 옹립하고 정치를 개혁함으로써 세계평화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한갓 이상에 불과할 뿐. 결국 모든 평화와 정의는 인간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국가도 민족도, 결국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서 Perceval이 가져온 성배. 그 성배 속에 가득 담겨있던 신성한 물을 마신 후 Arthur는 드디어 그동안 자기가 저질렀던 모든 과오와 어리석음을 깨닫고 외친다. "난 얼마나 오랜 동안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내 영혼이 지금껏 이렇게 비어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인자한 군주도, 전능한 개인도 아니었으며, 그저 운명의 장난에 의해 이 자리에 오게 된 사람이었음을. 그리고 나는 그 운명이 시키는대로 이 나라와 하나가 되었기에, 그 이상의 나는 결코 허용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그것이 나의 불행을 불러왔다면, 나는 그 근원을 끝장내야 했다는 것을. 아아, 군사들을 소집해 전쟁을 준비하라. Mordred는 나의 원죄이다. 이제 내가 모든 것을 매듭지을 것이다."

그리고 Arthur는 최후출정의 날 새벽에 성 가까이에 있던 수녀원을 방문한다. 그곳에는 자기 경솔함을 죄갚음하기 위해 이미 수녀가 되어버린 Guenevere가 십여년만에 나타난 자기 옛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Arthur는 이번 싸움에서 자기가 죽을 운명임을 직감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Arthur는 그동안 어그러졌던 Guenevere와의 인연과 그 사무친 한을 이제 조금이나마 풀고서 떠나고 싶었다. "Guenevere, 내 용서를 받아주오. 당신의 아픈 마음을 이젠 편히 쉬게 하시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고통받아왔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당신만을 항상 사랑했고, 아직도 변함없이 당신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오."

그때 Guenevere는 Arthur에게 자기가 그동안 몰래 보관해왔던 신검 Excalibur를 말없이 건네준다. 그것이 Guenevere의 손에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보관되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해왔으므로, 감격한 Arthur는 Guenevere에게 묻는다. "나는 가끔 생각해왔소. 우리 다음 생에는 우리 두 사람이 왕과 왕비가 아니라 평범한 남녀로서 만나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그게 내 유일한 꿈이라고. 그때 당신은 나를 당신의 남자로 받아줄 수 있겠소?"

하지만 이미 하느님의 여자가 되어버린 Guenevere가 이 물음에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단지 그간 왕으로서 Guenevere에 대한 사랑에 충실할 수 없었던 Arthur의 개인적 고뇌와 그 미안한 마음의 깊이를 헤아리며 자기 인생의 해묵은 한이 이제 비극적으로나마 매듭지어지는 것을 담담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Arthur는 Guenevere에게 작별을 고하고 이제 죽으러 가는 싸움을 향해 떠난다. 말 위에 올라탄 그가 하늘 높이 뽑아든 Excalibur의 칼날은 새벽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난다. 하지만 그 옆에는 기사 Perceval과 아주 소수의 병졸만이 함께 할 뿐이었다. 이에 Arthur는 그동안 잊고 있던 Merlin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Merlin. 나는 지금 보다시피 너무나 약하다. Mordred는 이제 더 이상 젖먹이가 아니고, 난 그를 물리칠 계책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난 지금 그 어느때보다도 Merlin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Merlin.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그때 Merlin은 이미 흐물흐물 녹아버린 기체로서 Morgana가 만들어놓은 얼음기둥의 감옥 속에 갇혀있는 몸이었다. 육신은 그렇게 처참히 망가졌지만 억울한 혼백은 아직도 저세상에 가지 못하고 후회와 자책 속에 구천을 떠돌던 참이었는데, Arthur가 뒤늦게나마 자기를 기억해주니 Merlin도 이제는 자기 삶의 의미와 나아갈 바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Merlin은 Arthur의 꿈 속에 나타나 Arthur에게 자기가 아직도 완전히 죽지는 않았음을 고한 뒤 오랫동안 별러온 복수를 위해 마지막 남은 모든 기를 끌어모아 Morgana의 텐트를 찾는다.

이때 Morgana는 자기 아들이 차려놓은 전쟁캠프 한가운데의 호화로운 개인텐트에서 눈부시게 치장한 몸으로 내일의 기분좋은 승리를 꿈꾸며 잠들어 있었다. 이미 나이가 꽤 들었건만 Morgana의 얼굴과 육신은 젊은 여자 못지 않게 아직 탄력이 있고 탱탱하기만 하다. Merlin은 그 옛날의 황홀하면서도 끔찍했던 마지막 정사를 떠올리며 Morgana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난 이제 돌아왔다, 마녀야. 넌 여전히 아름답고 화려하구나. 영원한 젊음을 위해 내게서 훔친 그 모든 마법을 다 사용한 모양이지? 그런데 나와의 마지막 싸움을 위한 마법은 조금 남겨놓았나?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차가운, 이 뱀 같은 여자야. 난 너 뱀을 내려치는 지팡이(Stab)가 되겠다."

놀란 Morgana는 자기도 모르게 대꾸한다. "난 그 지팡이를 재로 만들어버릴 불꽃(Flamme)이 되겠다." Merlin도 재빨리 응수한다. "난 그 불꽃을 꺼버리는 소나기(Wolkebruch)가 되겠다." Morgana는 사력을 다해 대꾸한다. "난 그 소나기를 빨아들이는 사막(Wueste)이 되겠다." Merlin은 웃으며 응수한다. "난 그 사막을 영원히 그 무게로 덮어버리는 바다(Meer)가 되겠다." 여기서 밀리면 자기 마법을 완전히 잃는다고 생각한 Morgana도 지지 않으려 급하게 답한다. "난 도망치듯 그 바다로부터 솟아오르는 안개(Nebel)가 되겠다." 그러자 Merlin이 웃는다. "안개 ! 바로 그거야. 넌 안개가 될 수 없어. 넌 안개가 될 수 있는 마법을 내게서 미처 배우지 못했어."

Morgana는 몸부림치며 필사적으로 안개가 되어보려 애쓴다. 하지만 Morgana가 죽어라고 마법의 주문을 외워 입에서 안개를 뿜을 동안 그녀의 눈은 튀어나오고 그녀의 피부는 급속도로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져 버린다. 이는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용의 주문으로 안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일정수준 이상의 내공을 가진 마법사만이 할 수 있으며, 그만큼의 내공이 부족한 마법사가 용의 주문으로 안개를 만들 경우 몇백년의 나이를 한꺼번에 먹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Morgana는 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곧 그토록 젊던 그녀는 실제보다도 훨씬 더 늙고 추한 노파로 변해버리며, 그녀가 뿜어낸 안개는 Mordred의 진영 전체를 한치 앞도 분간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 틈을 타 Arthur는 Mordred의 진영으로 쳐들어온다.

"누구야. 누가 이런 안개를 만들었어?" Mordred가 화가 나서 안개의 진원지인 자기 엄마의 텐트로 들어가보니 웬 추하고 지저분한 노파가 "아들아..."하며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Mordred는 이 순간 자기 엄마 Morgana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강요받으며 어머니로부터 너무나 과잉보호를 받고 자라온 모든 아들들이 그렇듯 Mordred 역시 그동안 엄마 Morgana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한편으로, 그동안 이 엄마에게서 심한 구속감과 반발감을 느끼고 살아온 참이었다. "더러운 근친상간으로 나를 낳아놓고, 어려서부터 오로지 자기의 야망을 위한 꼭둑각시로만 나를 길러온 사람... 내 아버지를 죽이고 그 왕인지 뭔지가 되어라 하면서,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맘놓고 뛰놀게 한번 내버려둔 적 없더니만... 이제 내가 고생고생해서 겨우 당신의 그 목적을 이루어주려 하니까... 당신이 내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Mordred는 아빠를 죽이는 것도 죽이는 것이지만 먼저 이 엄마부터 죽여야 자기가 자유롭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Mordred는 이제 완전히 힘이 없어지고 늙어 추해지기까지 한 엄마 Morgana의 목을 졸라 그 절망적인 눈을 쳐다보며 천천히 숨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Morgana의 시체를 뒤로 한 채 이제는 아버지 Arthur를 죽이러 전장터로 나간다.

한편 안개는 Mordred의 군사들을 완전히 혼동시켜 어리석게도 서로를 베어 죽이게 만들고 있었다. 전쟁터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Arthur 역시 워낙 Mordred의 병력이 많다보니 그 와중에서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때 홀연히 백발의 늙은이가 하나 나타나 능숙한 검법으로 수많은 Mordred의 군사들을 베어눕히기 시작한다. 이를 보고 Perceval이 Arthur에게 외친다. "오, Lancelot ! Lancelot입니다 !"

돌아온 Lancelot은 눈부신 활약을 펼치지만, Mordred의 병력이 워낙 많다보니 중간중간 온몸에 창칼을 맞고 만다. 결국 Mordred의 병력이 사실상 거의 전멸에 이르게 될 즈음에는 Lancelot도 기력이 소진하여 그 창과 칼 사이에 피투성이로 쓰러져버린다. 이때 달려간 Arthur는 이미 초점을 잃은 Lancelot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외친다. "Lancelot. 내가 널 구하겠다. 죽지 마라, Lancelot !"

하지만 Lancelot은 이제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고대하던 쇠무덤 속에 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안도하던 참이었다. "전하. 제가 죽는 것은 Mordred의 졸개들에게 찔리고 베인 때문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악화되어왔던 제 깊은 상처 때문인 것입니다. 전 이미 아주 옛날부터 그 상처가 치료되지 않는 것임을... 제가 그로 인해 이 순간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Lancelot은 갑자기 슬픈 눈빛으로 그동안 자기가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을 Arthur에게 묻는다. "Guenevere. Guenevere는 이미 전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다시 전하의 왕비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Lancelot이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멀리서는 Arthur의 남은 병사들을 모두 살육한 젊은 Mordred가 시체더미를 헤치고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Mordred는 무시무시한 음성으로 아버지 Arthur를 부른다. "Arthur야. 어디 있느냐? 내 거대한 창맛을 보아라."

Arthur는 이제 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과 세상을 괴롭혔던 질긴 악연과 죄업을 자기 손으로 종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Arthur는 "Mordred, 네 죽음을 맞기 위해 준비하라."하고 외치며 일어서지만, 억세게 밀고 들어오는 Mordred의 창을 일부러 피하지 않고 자기 가슴으로 그냥 받아버리고 만다. 물론 Arthur의 갑옷은 매우 단단한 철제 갑옷이지만, Mordred의 창은 생각하는 이상으로 날카로웠고, Mordred의 팔힘 역시 생각하는 이상으로 억세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Mordred의 창은 Arthur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고 Arthur의 등을 관통해 비어져나와버리며, Arthur의 입에서는 피가 울컥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에 Mordred는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웃지만 Arthur는 거대한 창에 가슴이 꿰뚫린 채 눈을 부릅뜨고서 앞으로 계속 전진한다. Mordred는 이렇게 전진하는 Arthur를 피할 수도 있을 테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 기세에 밀려 쓰러진 채로 아버지 Arthur가 자기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Arthur는 창자루가 자기 심장과 허파를 긁으며 지나가는 것도 아랑곳않고 천천히 Mordred에게 다가간 다음, 조용히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 Mordred를 신검 Excalibur로 찍어버린다. 날카로운 엑스칼리버의 칼끝은 Mordred의 두껍고 단단한 갑옷은 물론이고 Mordred의 피, 살, 뼈 그리고 골수까지 철저히 으스러뜨려버린다.

Arthur는 이제 자기 죽음 역시 머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Arthur는 Perceval에게 자기 가슴에서 Mordred의 창을 뽑아낼 것을 명한 다음, 신검 Excalibur 역시 바다에 던져버리고 오라고 당부한다. Perceval이 도저히 버릴 수 없다고 말하자, Arthur는 외친다. "내 말을 들으라, Perceval. 이건 왕으로서 나의 마지막 명령이다."

그리고 Perceval이 제왕의 상징임과 동시에 인간의 모든 정복욕과 권력욕, 그리고 정의와 진리를 향한 허망의 상징이기도 한 엑스칼리버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돌아왔을 때 Arthur는 이미 자취조차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먼 바다에는 신성한 분위기의 돛단 배가 태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며, 배의 갑판에는 얇은 예복 차림의 선녀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누워있는 Arthur의 형상이 보이고 있다. 말을 탄 채 바닷가에 선 Perceval은 보자기에서 성배를 꺼내 동터오르는 하늘을 향해 쳐들고, 바람은 성배 안을 맴돌고 지나가며 묘한 휘파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웅장한 선율의 주제음악 "O Fortuna (오, 운명이여)"가 울려퍼지면서 이 지독한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오, 달처럼 변하는 운명이여. 너는 이 가증스러운 인생을 언제나 상승시키거나 악화시킨다. 때로는 훼방하며, 때로는 비웃으며, 가난과 부를 얼음처럼 녹이면서, 우리를 욕망에 탐닉케 한다. (O Fortuna, velut luna statu variabilis, semper crescis aut decrescis; vita detestabilis nunc obdurat et tunc curat ludo mentis aciem, egestatem, potestatem dissolvit ut glaciem.)

공허, 무시무시한 운명, 언제든지 돌아가는 바퀴. 너는 열악한 환경과 기만적 성공 모두를 동등하게 파괴한다. 흐릿하게 그늘져서, 너는 나 역시도 공격한다. 이제 너의 변덕 앞에 나는 내 등을 드러낸다. (Sors immanis et inanis, rota tu volubilis, status malus, vana salus semper dissolubilis, obumbratum et velatam mihi quoque niteris, nunc per ludum dorsum nudum fero tui sceleris.)

너, 운명, 너는 내 건강함과 권력을 앗아가며 내게 맞선다. 나의 꿈과 나의 연약함은 언제나 나를 노예이게 하는 것. 이 시간 만물은 끊임 없이 실을 뽑아, 나에게 어느 용감한 자의 운명적 파멸을 한탄하게 한다. (Sors salutis et virtutis mihi nunc contraria, est affectus et defectus semper in angaria; hac in hora sine mora cordis pulsum tangite, quod per sortem sternit fortem mecum omnes plangite.)

원래 John Boorman 감독은 이 영화 "Excalibur"를 등장인물 전체가 칼을 든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냥 단순한 중세 활극 형식으로 만들려 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Shakespeare식 전통비극 내지 종교적 서사시처럼 완성되어버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서로를 계속 의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끝내는 상대방은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까지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John Boorman 감독 특유의 리얼리즘적 완벽주의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7세기 경의 켈트지방 시대상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Arthur왕으로 분한 Nigel Terry는 용맹과 덕성으로 위대한 왕국과 아름다운 Camelot을 건설하지만,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 모두가 그만큼 고귀하고 선량한 성품을 가진 것은 아님을 알지 못하는, 한 위대하고도 소박한 인물을 훌륭하게 연기한다. 특히 그는 운명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 한 남자로서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이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무거운 임무를 위해 개인적 행복 같은 것은 포기해야만 하는 영웅들의 고뇌는 그 이후로도 이 세상 모든 야심가들이 그 야심으로 인해 공통으로 겪어야 했던 비극적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복수심에 가득한 Morgana 역을 맡은 Helen Mirren은 Arthur의 주의를 Guenevere왕비와 Lancelot간의 사랑에만 맞추게 함으로써 Camelot의 파멸을 불러오는 악녀의 역을 소름끼치도록 실감나게 연기한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집요한 모략과 술수는 "큰 선을 위한 조그만 악"에 잔인하게 희생된 유년의 기억으로 인해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는데, 이로써 이 영화는 모든 비열한 인간상이란 대개 인간세의 불행과 모순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창조되고, 아무리 선한 질서라 해도 인위적으로 수립된 것인 한 그런 아주 사소한 모순만으로 쉽게 붕괴될 수 있다는 진리를 은유적으로 가르쳐준다. 또한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다분히 feministisch한 성격을 갖는 마녀 Morgana는 그러한 불공평에 대한 고민이 비뚤어진 반이성과 자기중심적 광기로 발전할 경우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오는가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의 아내를 사랑한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똑같이 사랑하게 돼버린 유부녀. 아내와 부하를 똑같이 사랑하고 대의를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질투의 불꽃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남편왕. Arthur와 Guenevere의 화려한 결혼식 장면에서 이를 지켜보는 Lancelot의 담담한 표정과 자기 명예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 여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숲 속에서 혼자 기도하는 Lancelot의 늠름한 모습. 그밖에도 자기 감정에 충실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Guenevere가 Lancelot을 만나러 가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려갈 때의 위태로운 매력과, 그 둘의 불륜장면을 보고 자기 권력의 원천 Excalibur를 벌거벗은 둘의 몸뚱아리 사이에 꽂은 채 돌아와 버리는 Arthur의 처연함은 이 스케일 큰 영화 속에서 아주 간단간단하게 다루어지기에 더욱 안타까와보인다. 여기에 Merlin의 독백이 겹쳐진다. 사랑도 권력도 모든 것은 순간(Augenblick)이다... 모든 악한 것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그곳(ueberall, wo wir nicht voraussahen)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뮤지컬 "Camelot"의 호화로운 아름다움과는 거리를 둔 채, 이 영화 "Excalibur"는 진흙과 구더기가 뒤범벅이 된 7세기 영국의 섬뜩한 정경을 배경으로 한다. Arthur왕 이야기 가운데서도 좀 우중충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Thomas Malory의 "Morte D'Arthur"를 원작으로 삼은 탓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잔인하고도 냉혹한 분위기는 Boorman 감독의 모든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요소이며, 원작 역시 영화 속에서 많은 수정과 재해석이 가해졌기 때문에 영화 "Excalibur"는 사실상 Thomas Malory가 아니라 John Boorman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Arthur왕과 그 기사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성배에 관한 전설은 그리스-로마 신화 못잖은 서양의 중심설화로서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큰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 "Camelot"이나 "Merlin" 등을 비롯해 "Excalibur" 이후로도 Arthur왕 전설을 소재로 해서는 숱하게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Boorman의 "Excalibur"만큼 그 전설의 정신을 깊이있게 파고들어간 영화는 다시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영화들이 삼각관계의 비극이나 Merlin의 인간적 고뇌만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는 반면, Boorman의 "Excalibur"는 이상왕국을 건설하려는 Merlin의 거대한 계획과 그 필연적 좌절, 그리고 그 와중에서 소용돌이치는 Arthur, Morgana, Guenevere, Lancelot 등의 의지와 운명 간에 벌어지는 갈등 등을 아주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렇듯 사랑과 권력, 그리고 우리 인간의 욕망과 야심, 자부심, 가족애 등이 갖는 덧없음을 파노라마식으로 장쾌하게 보여주는 일대 서사시이다. Shakespeare의 "Hamlet"이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갔다면 Boorman의 "Excalibur"는 그것을 선 굵은 묘사력으로 훑어서 보여준다. 이처럼 잔인하고 어리석은 생명의 만행과 무상감이란 우리를 얼마나 지치게 하는 것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왜 그들과 똑같은 만행을 따라서 저지르고, 따라서 똑같이 허무해 한단 말인가?

아아, 난 오늘 13년만에 "Excalibur"를 다시 보았다. 그 옛날 내 동생과 함께 전율하며 보았던 그 영화, 나에게 서사시적 장중함과 인간고통의 미(美)를 가르쳐준, 그 끔찍한 영화, "Excalibur"를...

2000.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