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anic - 모든 비극은 매혹적이다





- 이하의 글은 2001년 1월 1일부터 1월 2일까지 그냥 심심풀이로 끄적거려보았던 코믹한 영화감상문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매년 명절 저녁때마다 애인 없이 집 안에서나 뒹구는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독일 TV 방송사는 평소때보다 특별히 더 괜찮은 영화들을 골라서 방영해주곤 한다.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도 예외가 아니어서, 독일 최대의 상업방송 RTL에서 대대적인 광고와 더불어 영화 "Titanic"을 방영한 것을 비롯, 많은 좋은 영화들이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 TV프로그램들을 장식해주었다.

나도 그렇고 내 독일친구들도 다들 어떤 자들인가? 대부분 여자친구 하나 없이 빌빌대는 자들로서 크리스마스때는 다들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거위 다리나 뜯으면서 TV나 봐야 되는 자들 아닌가? 당연히 그들도 나도 모두 이번 크리스마스 저녁엔 이 영화 "Titanic"을 보았고, 또 이 "Titanic"이 방영되기 전날에는 PRO7에서 Leonardo DiCaprio의 "Romeo & Julia"를, "Titanic"이 방영된 다음날에는 VOX에서 Kate Winslet의 "Heavenly Creature"를 방영했으므로, 지난 크리스마스 시즌은 우리 대다수 옆구리 썰렁한 독일의 청춘남녀들에게 완전히 "Titanic"주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사실 "Titanic" 같은 영화는 TV 보다 영화관에서 보아야 제맛이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남들 다 보는 영화, 블록버스터 영화 같은 것은 영화관에서 죽어라고 보지 않는 사람이고, 그 전에 James Cameron의 전작 "True Lies"를 보고 너무나 실망했던 경험이 있던 터. (더군다나 "Titanic"이 상영되던 1997년 당시 난 군바리 신분이었다.) 그러므로 이 "Titanic"을 영화관에서 보지 않은 것은 나로서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는 TV방송분도 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전날 예약녹화해두었던 "Romeo & Julia"에서 Leonardo DiCaprio가 꽤나 멋지게 나오는 것을 보고 "Titanic"도 잠깐 보아 나쁘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내겐 조금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가볍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던 나는 그러나 결국 그날 저녁까지도 굶고 이 "Titanic"을 한 장면도 놓치지 않은 채 끝까지 보게 되었으며, 마지막 장면에선 끝내 눈물까지 글썽이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나이가 백살 가까이 된 Rose라는 어느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이야기로부터 비롯된다. 그녀가 우연히 티브이를 슬쩍 보다가 타이타닉호의 인양작업에서 건졌다는 어느 젊은 여자의 누드화에 깜짝 놀라 다급히 전화를 하고 그 인양작업 현장까지 헬기 타고 날아갔는데, 그녀의 주장인 즉슨, "그 그림 속에 발가벗은 젊은 여자는 바로... 저에요... (Die nackte junge Frau auf dem Bild bin ich.)" 하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이 귀신 같은 할머니 말을 믿을 리가 있나? 그래서 안타까워진 이 할머니가 84년동안 자기 맘 속에만 담아두었다는 자기 옛사랑 얘기(die Geschichte ihrer Jugendliebe)를 들려주기 시작하자, 화면은 갑자기 툭 터져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배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역사상 최고로 거대한 호화유람선 티타닉호가 사우댐프턴 항을 떠나 누요어크(New York)로 처녀항해를 가려는 장면. 그 부두까지 무지하게 비싸 보이는 자동차 한 대가 달달거리면서 오더니만 거기서 한 눈에도 부티가 잘잘 흐르는 듯한 어느 통통한 처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내린다. 물론 여기서 이 통통한 처녀는 바로 이 영화의 여주인공 Rose이다. 화장을 짙게 한 데다 뭔가 심술궂고 피곤한 듯한 표정이 서려 있어서 나는 그 순간 "여주인공이 별로 안 예쁘구만(Na, nicht so huebsch ist die Protagonistin !)"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우리의 남자주인공, 귀염둥이 Leonardo(여기서는 이름이 Jack이다)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그는 어느 지저분한 룸에서 야만적으로 생긴 어느 공돌이자식과 포카를 치고 있었다. 타이타닉호 3등선실 티켓을 걸고 한판 치는 포카였는데, 일이 풀리려고 그랬는지 꼬일려고 그랬는지, Jack이 포카에서 이겨버렸다. 공돌이 자식은 열받아서 Jack을 향해 주먹을 팍 치켜들고, 첫눈에 보아도 쌈 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생긴 Jack은 바짝 쫄아서 눈을 질끈 감지만, 이 공돌이 자식이 한주먹 갈긴 것은 Jack이 아니라 자기를 포카판에 꼬드긴 옆에 친구놈이었다.

덕분에 우리의 Jack은 부리나케 티켓을 챙겨들고 막 떠날려고 하는 타이타닉호에 간발의 차로 올라타기에 이른다. 그리고 뱃머리로 달려가 난간에 발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하늘에 붕 뜬 자세로 바닷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허공을 향해 외친다. "나는야 이 세상의 왕이다, 아후, 아후, 아아후 ! (Ich bin Koenig der Welt, Hou, Hou, Hou !)" 하지만 이 장면을 보며 내가 씁쓸하게 중얼거린 말은 "불쌍한 자식, 곧 죽을 줄도 모르고..."

우리의 Jack이라는 이 친구는 허름한 옷차림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듯이 돈도 없고 집도 없고 한마디로 대책 없이 살아가는 건달같은 친구다. 이 친구가 하는 짓이라곤 되먹지 못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 하나 뿐인데, 이 타이타닉호에 올라타서도 이 친구는 자기 버릇을 못 버려서 지저분한 모자를 눌러쓴 가난한 이민자 가족들이나 시름 어린 표정으로 어린애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추레한 옷차림의 아줌마 따위를 부지런히 캔버스에다 옮겨댄다. 화면에 비춰진 그림을 보니... 뭐 못 그린 그림은 아니되 그렇게 썩 잘 그린 그림도 아니다. 나도 왕년에 그림깨나 그렸던 사람인데, 내가 그려도 저보단 더 잘 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다가 이 Jack이라는 친구, 1등 갑판 베란다에 햇살을 받고 서있는 한 여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여자가 누구긴 누구겠는가? 이 영화의 여주인공 Rose (Kate Winslet)지. 우리의 Jack은 한 눈에 Feel이 팍 꽂혀서 정신을 못차리게 된다. 옆에서 친구들이 눈 앞에다 손을 갖다대고 흔들어도 모를 정도로 완전히 맛이 가버린다. 뭐, 이런 일이 하긴 그 나이또래 젊은 남자들에게 있어 어디 드문 일이겠는가? 더군다나 그림깨나 그리고 약간 몽상적이며 심미적인 기질을 가진 남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경험은 정말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법이다.

원래 괴상한 심미안을 가진 남자에게 있어서 개성있는 얼굴과 육체란, 그 자체만으로도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그들은 종종 정열에 달리는 자의 무의식적인 맹신으로(Aus der unbewussten Unehrlichkeit leidenschaftlicher Menschen) 이러한 처녀의 자태에서 하나의 깊은 진실까지도 찾아내곤 한다. 물론 이 Kate Winslet이라는 여배우의 자태는 내가 봤을 때 별로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니다. 얼굴윤곽은 뭉툭하고 거만해보일 뿐 아니라 애교도 별로 없어보이며, 가슴과 엉덩이와 허벅지에 살은 미어지도록 쪘고, 팔다리도 짧고, 전체적으로 뚱뚱하다는 인상까지 주는 여자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자면 대다수의 남자들은 비쩍 말라 비실비실한 여자들보다는 이렇게 약간 통통한 스타일을 더 좋아하게 돼있는 법이다(요즘 여자들... 도대체 왜들 그렇게 다이어트들을 하려 하는지 몰라?). 거기다 적개심(?)이 풍성해서 거의 '갑빠'를 연상시킬 정도가 되면 남자들은 그 가슴을 보며 편안한 모성까지 느껴대곤 한다. Kate Winslet은 그리스의 젊은 조각상 같은, 예를 들면 엘렉트라라든지 카산드라와 같은(wie eine junge griechische Statue: Elektra oder Kassandra), 튼튼해보이고 생명감에 넘쳐있으며 그 고집스런 활력이 보면 볼수록 은은히 배어나오는, 고전적이고도 단아한 매력을 지닌 여자다. 이런 아름다움은 약간 시름에 젖은 표정으로 석양햇빛 아래 서있을 경우 더욱 불가사의한 광휘를 발산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렇게 Jack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Rose라는 여자가 그날 오후 그렇게 심난한 표정으로 갑판 베란다에 서있던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는데, 이 남자는 백만장자의 상속자(Millionenerbe)로서 얼굴 잘 생기고, 키 크고, 자신만만하고 터프하고,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남자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냐고?

문제는 이 남자가 불행히도 Rose를 자기 멋대로 다루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부잣집 아들들은 지 아빠한테 아부를 해야 그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스트레쓰들을 많이 받고 산다. 대개 돈많은 집안의 아빠들은 그 많은 돈을 간수하려면 주위를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모질고 독한 성격을 갖고 있기 마련이며, 자식들을 갈구고 시험에 들게 하면서 자기 노년의 고독을 잊으려 하는 못된 습성을 갖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그 아들들이 그 아버지로부터 받아야 하는 스트레쓰라는 것도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큰 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벼락부자나 졸부들의 경우, 상류사회에 이렇다 할 끈이 없어 항상 고급정보로부터의 소외나 권력층의 집중공격을 두려워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식들을 어떻게든 귀족집안 자식들과 혼인시키려고 하고, 이를 위해 자식들을 심하게 압박해대는 경향이 있다. 이러니 근본 없는 부잣집 아들들은 가급적 얼굴도 예쁘고 가문도 훌륭하되 뭔가 하자가 있는 (대개는 집에 돈이 별로 없는) 집구석의 여자를 마누라로 얻어, 이 만만한 마누라나 구박하면서 자기 스트레쓰를 풀려는 경향이 매우 강한 것이다.

졸부 자식들은 원래 배운 게 별로 없어 자기 분노나 적개심을 날것 그대로 표출하고,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면서 기뻐하는 야비한 속성을 갖고 있는 게 보통이다. 상대방이 자존심이 강하고 꼿꼿하면 할수록 짓밟을 때의 쾌감도 더 커지므로, 이들에게 있어 가급적 배우자는 쥐뿔도 없이 가난하면서도 거기에 안 어울리게 오만한 성격의 여자가 좋다. 그리고 얼굴도 예쁘고 육체파의 몸매라면 관능적으로도 여자를 농락할 수 있으므로 더욱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이런 조건에 Rose는 딱 맞아떨어지는 여자였으므로, 백만장자의 상속자 Billy는 Rose에게 푹 빠져 큼직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하기도 하면서 자기 부를 과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는 비열한 방법으로 Rose를 자기 마음껏 희롱하고 있었다.

물론 대개의 경우 여자들은 사랑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놀랄만큼 materiell하다. 남자가 가문 좋고 돈만 많다고 하면 아무리 더러운 수모를 당한다 하더라도 냉철하게 참아내는 끈질김을 대부분의 여자들은 갖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안락을 보장해줄 수 있을만큼 능력이 있는 남자라면 성격이 약간 유치하고 이기적이어도 상관없다. 자기를 어떻게든 사랑만 해주면 감지덕지다. 그리고 거기서 손상된 자존심은 지혜롭게 다른 공간에서 대리만족을 얻어도 된다. 가난하지만 잘 생긴 남자 하나 꼬셔서 거기다 대고 적절히 스트레쓰를 풀면서 자기 상처받은 일생의 위안거리로 삼아도 된다.

그런데 이런 지혜로운 애정관을 터득한 대다수의 현명한 여자들과는 반대로, 아주 드물게는 선천적으로 드라마틱한 성격을 타고난 여자들이 존재하기에 마련이다. 이런 여자들은 대체로 사랑은 이상이요 결혼은 현실이라거나, 한꺼번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여자에겐 나쁘지 않다거나 하는 식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들은 인생에 있어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만큼, 사랑에 있어서도 완벽주의적이기 때문에, 자기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지 않는 남자를 결코 참아내지 못하는 편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Rose는 그런 자존심 강하고 자의식이 분명한 타입의 여성 중 하나였다.

물론 아무리 독립정신이 강하다 할지라도 그녀에겐 그 잘난척하는 약혼자 빼고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해줄, 이렇다할 다른 좋은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아름다운 꿈과 구역질 나는 현실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서 아마 폐허와도 같은 고독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여자들이 세상에 대해 염증을 가지게 되면 극단적으로 자기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그래서 Rose는 어느날 밤 급기야 타이타닉호의 뱃머리로 울면서 달려가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 하기에 이른다.

이 당시 우리의 남자주인공 Jack은 뭘하고 있었던가? 그는 태평스럽게도 갑판 벤치 위에 조용히 혼자 누워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부초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녀본 적이 있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 어떤 가난한 남자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아름다움은, 하늘을 이불삼아 잠을 청해야 하는 여름밤에 눈부시게 흘러내리는 저 은하수의 별들 모습이라는 것. Jack은 그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젠 오랜 방랑을 끝마칠 때도 되었건만... 그는 아직도 어디다 닻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는 떠돌이... 누군가를 사랑해야 될 때도 되었는데... 이젠 정착할 때도 되었는데... 아아, 그건 그렇고 저 하늘의 별들은 무척이나 아름답구나...

이 순간 그의 곁으로 웬 여자가 마구 눈물을 뿌려대며 뱃머리를 향해 휙 지나가는 게 보인다. 아니, 이게 누구야. 바로 몇시간 전에 자기 마음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여자가 아닌가. Jack이 부리나케 달려가보니 이 여자 벌써 물에 빠져 죽을려고 뱃머리 난간을 넘어서버린 상태이다.

아무리 칠칠치 못한 남자라도 이런 절호의 찬스에서는, 사랑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고 또 해야만 하는 절호의 찬스에서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게 돼있는 법이다. Jack은 뛰어내려보라는 둥, 자기도 같이 뛰어내려 구해줄 것인 이상 어차피 죽지도 못할 텐데 바닷물이 엄청 찰 것 같다는 둥 너스레를 떨면서 결국엔 Rose를 구해내고 만다. 이런 너스레는 어떤 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건 어차피 죽거나 살거나 이판사판이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우리 밑바닥 인생들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신비한 힘이다. 그리고 이 힘은 이번 한번만 Rose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멀지 않은 대파국의 순간에도 Rose를 다시 한번 구해내게 되는 것이다.

하여튼 이러한 사건의 와중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받은 오해를 씻기 위해 Rose는 Jack을 다음날 저녁의 1등 승객(귀족) 파티에 초대하고, 그 다음날 낮에 Jack을 따로 만나 거만한 어조로 어젯밤 있었던 일은 그냥 잊어버리라는 둥 뭐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모처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는데 Jack이 정말 모든 걸 잊고 순순히 물러날 리가 있겠는가? Jack은 자기가 여태껏 그린 그림들을 Rose에게 보여준다. 그건 어쩌면 Jack의 모든 것이 담긴, 그의 혼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그림들이라고 해봤자, 이 환쟁이의 원래 출신성분을 보여주듯 창녀들 누드화나 그린 것 나부랭이들이었지만, Rose는 이에 대단한 흥미를 표시한다. 그렇다. 둘은 뭔가 통한 것이다. 이제 뭔가 위험하고도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전개되려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남녀관계가 그렇듯 Jack과 Rose의 연애관계도 결단을 먼저 내린 쪽은 남자인 Jack이었다 (남자들은 선천적으로 뭐든 이렇게 빠른 것 같다). 이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남자들은 마치 가슴속 밑바닥까지 휘저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조바심이 난다. 착잡한 여러가지 생각이 마음 속에서 이글거린다. 그건 간단히 말해 자연의 맹목적인 힘이 돌연 끓어오른 것과 같다(Es ist auszugsweise wie das ploetzliche Aufwallen der blinden Naturgewalten).

여자는 단순히 기다릴 뿐이다. 무엇을? 여자들은 과연 그것을 또렷이 알 수 있는가? 여자들은 실제보다도 겉이 더욱 복잡한 마음의 구조를 갖고 있다(das komplizierte Mechanismus eines weiblichen Herzens - komplizierter dem Anschein nach als in Wirklichkeit). 남자들은 속으로 아무리 뒤숭숭할지라도 겉으로는 보다 명쾌하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에라 모르겠다, 날 잡아먹어~'하고 덤비게 된다. 이런 미친 짓도 하지 못한다면 그는 남자라고 할 수도 없다. 두렵긴 하지만 이 매혹적인 미지의 흐름은 남자가 먼저 용감해져야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Jack이 얼떨결에 초대받은, 1등 선실에서 열리는 파티는 Jack의 입장에서 처음 겪어보는 매우 어색한 자리였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마음씨 좋은 귀부인에게 연미복을 얻어입고, 무작정 부닥치고 본다. 파티장을 걸어다니는 신사들이 어떻게 숙녀들을 에스코트하나 눈여겨보고, 자기도 그렇게 고대로 따라서 Rose를 에스코트한다. 이 상황이 되면 연애란 남자에게 있어서 거의 명령적인 것이 된다. 반드시 수행해야 할 군사적 작전임무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흉내내고 선방했지만 갈수록 사태는 어려워진다. 이 촌스러운 자식이 언제 격식에 맞게 나이프나 포크를 사용해봤겠는가 말이다. 거기다 Rose란 여자는 보아하니 약혼한 남자도 이미 있는 상태란다. 그런데 왜 지난번 그림을 보여줬을 때는 그렇게 나에게 마음이 끌려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거지? (Rose는 Jack과 함께, 심지어는 그 더러운 침 멀리 뱉기 놀이도 같이 했었다.)

Jack은 날카로운 눈으로 약혼남이란 자와 Rose를 치밀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녀가 이 핥아논 개죽사발 같은 작자를 절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하긴 그 약혼자를 만약 사랑했다면 뭣하러 뱃머리 난간에서 자살하려고 했겠는가?). '양다리를 걸치는 여자라면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렇지 않다. 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다'하고 Jack은 생각하기에 이른다.

Jack은 돈많은 족속들의 화제에 끼어들만큼 그들의 문화에 익숙지도 않고, 그들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식사예절에도 무지한 자신을 느낀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식탁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한 일일 뿐, 예의나 격식은 거의 문제가 안된다(Bei Tisch ist die Hauptsache nur Essen und Trinken und es kommt wenig auf die Manieren an)는 식으로 마구 행동해버린다. 그는 빵을 손으로 뜯어먹으면서 모두가 당혹해 하는 가운데 자기 나름대로 거칠고 파격적인 대화를 이끌어가고, 담뱃불을 붙이려는 Rose의 약혼자에게는 성냥을 휙 집어던진다. 그리고 이 정도면 자기 인상을 어떻게든 강하게 남긴 셈이라고 자족하면서 적당히 때를 보아 자리를 빠져나온다.

남자에게 있어서 이렇게 자기 열등감과 컴플렉스를 드러낸다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이것을 사랑의 징표로 기껍게 받아들이는 면이 있다. Rose는 Jack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린다.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 아이, 기뻐 ! 날 사랑해주다니, 참 착한 사람이기도 하지... 나도, 나도 좋아하고 말고. (Er liebt mich... Wie entzueckend ! Wie nett von ihm, dass er mich liebt... Und ich, ich liebe ihn auch.)" 그리고 그녀는 떠나는 Jack의 뒤를 쫓아간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그녀의 야성적인 활기가 이제야 드디어 분출구를 찾은 것이다.

둘은 1등선실의 귀족적인 파티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고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배 밑바닥 3등선실의 파티에 참가한다. 보통 여자들이라면 이 시끄럽고 외설적인 분위기에 놀라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버리겠지만, 이 세상엔 너무나 드라마틱한 성격을 갖고 있어서 어디에서든 마치 영화주인공처럼 화려하게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여성이 간혹 존재하는 법이다. Rose는 그 파티에서 가장 눈부신 정열의 혼을 발휘한다. 기쁨에 취해 몸을 뱅글뱅글 돌리며 자기 모든 매력을 발산하며 Jack과 함께 경이로운 동작으로 춤을 춘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곧 그 배 안에서 하나의 스캔들이 되어버린다.

며칠 후 약혼자는 Rose의 방으로 쳐들어가 그녀의 뺨을 갈긴다. 식탁을 뒤엎어버리면서 행패를 부린다. 가난하고 천한 것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교육받은 그에게 있어서 Rose가 3등 선실 축제에서 춤을 추었다는 스캔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약혼자의 폭력에 Rose는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지만, Rose의 어머니는 그녀를 설득한다. 우리 집안은 뼈대 있는 집안이긴 하지만 아버지가 죽고나서 이미 빈털터리가 됐단다. 네가 그런 부잣집 도령과 결혼하게 된 건 너와 나에게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돼. 반면 그 환쟁이 놈팽일 봐. 그런 천한 쌍것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니? 왜 넌 이 어미 생각을 눈꼽만큼도 해주지 않는 거니? 왜 넌 그렇게 selbstsuechtig한 거니?

아무리 순진한 호기심과 크나큰 흥미로 연애만을 생각하는 어린 소녀라 해도 현실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 법. 언제나 하나의 계획이 다른 계획을 부수며, 아무리 아름다운 꿈도 그 꿈만큼 이상적이진 않으나 더 확실하고 유리한 현실이 나타나면 간단히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 여자들의 공통된 심리다. Rose는 Jack을 만나 당신과 나는 신분 자체가 다르므로 당신 같은 천민과는 다시 더 안 만나겠다고, 당신이 그동안 주제파악도 못하고 나한테 저지른 무례가 얼마나 많았는지 아냐고, 난 당신 같은 무능한 쌍것을 가지고 놀 수는 있지만 사귈 수는 없다고, 어쩌고 하면서 아주 모욕적으로 Jack을 걷어차버린다.

이때 Jack이 보인 반응은 다분히 처절한 것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공격성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그는 납득할 수 없다고, 오해한 것 아니냐고, 제발 좀더 생각해보라고 Rose에게 정말 더럽게 애걸복걸한다. 원래 여자는 남자가 이렇게 추하게 목매고 달려들면 더욱 정나미가 떨어지게 마련인 걸 Jack은 몰랐던 것일까? 하지만 남자들은 거의 생리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기 자신이 총체적으로 부정을 당하는 그 순간엔 아주 몸부림 치며 발악을 하게 돼있는 법이다.

물론 나중에 가서는 "내 초라한 현실을 생각해 그때 눈물 흘리며 조용히 보내주었지" 어쩌구 회상하지만, 실제로 남자들은 그 상황이면 결코 맥없이 주저앉지는 않는다. 그래봤자 더 큰 모욕만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밀어붙일 수 있는 데까지 밀어붙여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자는 그 뒤로 가슴에 회한이 쌓여 더 이상 자기가 살 수조차도 없게 돼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여튼 더 이상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최종통고까지 못박고 나서 Rose는 싸늘하게 Jack을 떠나버린다. 이런 식으로 남자들을 잔인하게 걷어차는 여자의 심리가 남자를 속으로는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 남자더러 자기를 깨끗이 잊으라고 그렇게 한 것이라거나, 자기 미련을 그렇게 다른 식으로 뒤집어서 표현한 것이라고 속좋은 남자들은 흔히 믿지만(왜냐하면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자기가 더 맘편히 살 수 있으니까), 이건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여자들이 남자를 이렇게 짓밟는 것은 단순히 그 남자를 아주 경멸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봐야지 그 밖에 다른 이유는 생각할 여지도 없다.

그런데 우리 주위의 일반적인 사랑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다 끝나게 돼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영화답게 흘러가려면 이런 식의 결말은 좀 곤란하다. 거기다 Rose라는 여자 자체가 원래 정열적이고 극단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여자이므로,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원리에 따라 자기가 일방적으로 끝까지 나간 만큼 결국 반대방향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 되어야 한다.

Rose라는 여자에게는 Jack 같은 건달과의 사랑이 이를테면 한편의 소설을 시작한 것과도 같았다. 자기 자존심과 상상을 만족시켜주는 최대의 기쁨을 이 소설 속에서 막 끄집어내려던 찰나였는데, 자기가 차라리 차였다면 모를까 그냥 싱겁게 자기 스스로 이 소설을 끝내버리고 말았으니, 이건 정말이지 Rose같은 여자로서는 견딜 수가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미 막연한 사랑의 꿈이 사라진 것에 대한 소녀적인 아쉬움은 그 발작을 시작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그 사이에 있었던 조그만 거짓말과 조그만 이기심은 이러한 동경의 커다란 빛 앞에 곧 스러지지 않을 수 없게 돼있었다.

둘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둘의 인연이 처음으로 맺어진 곳. 그곳은 이 거대유람선의 맨 앞 뱃머리, Rose가 물에 빠져죽으려 했고 Jack이 그녀를 극적으로 구해줬던 그곳이 아니면 그 둘은 다시 만날 수가 없게 돼있었다. 마침 그곳을 서성거리며 실연의 아픔을 인내하고 있던 Jack에게 Rose는 다시 살며시 다가간다. 그리고 "저기, 나 생각을 바꿨어... (Na, ich habe meine Meinung geaendert...)"라고 말한다. 그러자 Jack은 거기에 뭐라고 대꾸함이 없이 Rose에게 눈을 감으라(Schliesse Deine Augen)고 명령한다.

그런 후 Jack은 Rose를 뱃머리 난간 위에 올려세운 다음 양팔을 벌리게 하고 자기가 Rose의 몸을 지탱시키고서 파도와 바닷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나가는 유람선 위에 붕 뜬 자세로 날아다니는 기분을 Rose로 하여금 맛보게 한다. Jack같은 놈팽이가 나름대로 사랑하는 여자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둘은 이 대목에서 첫키스를 한다. 요즘 어린 것들은 이런 짓을 어디 공중화장실 같은 데서 싸구려로 술김을 빌어서 마구 해치우곤 하지만, 원래 이런 행위는 이런 정도의 분위기를 연출하고서 해야 일생에 추억이 남는 것이다. 그때까진 아무리 간절한 기분이 들더라도 꾹 참고 아껴둘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듯이 이런 순간은 일생에 단 한번도 올까말까하다. 그냥 현실적으로 하루세끼 밥먹고 살아가는 데 낙을 두는 사람은 이런 순간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다. 이런 순간은 전광 같은 번쩍임이다. 원래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고, 그것도 동시에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인데, 그것을 이렇게 동시에 고백까지 하고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 순간엔 이기심도 허영심도 현실적 속셈도 있을 수 없다. 다른 것은 모두 스러져 버린다. 그저 서로에게 몸을 바치고 싶어하고, 상대방을 위해 괴로워하고자 하며, 죽고 싶어하는 감정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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