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현

수 염

김지현 ('95)

어느날부턴가 Q에게 수염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냥 하나씩 둘씩 나서 눈썹 다듬는 족집게와 칼로 해결이 됐는데, 이제 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오후 5시만 넘으면 턱 주위에 그림자가 생기는 여자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거 봐. 우리말을 잘 안 들었기 때문이야"라고 부모님이 말했다.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이런 일이 안 생기지"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그러게 색조화장은 안해도 기초화장은 해야 한다니까"라고 친구가 말했다.
"뭐, 그런대로 멋있잖아"라고 가장 친한 남자친구가 말했다.

Q는 큰 가방에 거울과 면도기와 면도크림을 넣어다니며 두 시간마다 한 번씩 면도를 했다. 처음에는 여자화장실 세면대에서 면도를 했으나,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위의 눈총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자화장실의 좌변기가 있는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면도를 했다. 물론 좌변기의 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정말 찜찜했는데, 익숙해지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부모님의 걱정은 대단했다.
사실 Q는 두시간에 한 번씩 면도를 해야 하고 MT를 못 간다는 것 외엔(아침엔 수염이 장난이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Q의 부모님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나 보다. 부모님은 Q를 데리고 내과, 피부과에 정신과까지 병원이란 병원은 다 돌아다녔다. Q가 가장 싫었던 건 아침에 부모님이 서로 상대방이 Q를 데리고 병원에 가라고 싸우는 것이었다.

'이게 그렇게 창피한 건가?'
여러 병원을 돌아다녀도 별 뾰족한 수가 없자 Q의 부모님은 슬슬 포기하기 시작했다. Q의 동생들을 데리고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 속셈 학원을 다니는 게 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뭐, Q에겐 오히려 더 잘된 일이었다. 혼자 병원에 간다고 말하고 받은 돈으로 군것질을 하고, 책을 사고, 그래도 남은 돈이 있으면 길거리의 거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Q에게 수염이 나기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어진 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Q는 원래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스타일인데, 수염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Q와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아예 Q와 있는 것을 싫어하던가, 아니면 오히려 Q를 아주 특별한 애로 여기고, 무언가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Q가 보기에는 자기나 남들이나 똑같은데, 남들은 아닌 것처럼 Q를 대했고, 그래서 Q는 '내가 정말 다른가'하고 의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 그 사람들이 실망할까봐 정말로 독특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Q는 점점 Q가 속한다고 생각했던 사회로부터 제외당하기 시작했다. 집에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Q의 부모님은 Q가 방에 쳐박혀 있는 것을 원했다. Q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부엌을 들락날락하거나 하면, 엄마는 "방에 들어가 있으라니까 왜 나오니?"하며 신경질을 냈다. 원래 동생들과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안의 첫째로서 언니 대접은 받았었는데, 이제 동생들은 혹 Q와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식구들은 할아버지 생신 같은 집안 행사에도 Q를 빼놓고 가기 시작했고, 외식도 자기들끼리만 했다. Q는 점점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기 시작했다.

나가는 데가 없으니 면도하기도 귀찮았다. Q의 생활공간은 이제 거의 Q의 방뿐이었다. Q의 수염이 한 1cm 정도 자랐을 때, 식구들은 징그럽다며 Q와 같이 밥 먹는 것을 거부했고, Q는 감옥에 있는 죄수처럼, 방문 앞에 날라져온 밥을 방에서 혼자 먹었다.

처음에는 방에만 있어도 그리 지겹지 않았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밥이 오면 먹고, 거울을 보고 여러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혹시 나갈 일이 생기면, 헐렁헐렁하고 큰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나갔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Q가 남자라고 생각하고 Q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Q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주위에선 난리가 났다. "이거 게이 아니야!"하며 질겁을 하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고, 옆에 있는 사람과 귀엣말을 하며 Q를 곁눈질하는 여자들도 있었고, "아이, 재수 없어!"하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Q는 점점 말하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식구들과 말하는 것조차도, 즉 말하는 것 자체가 무서워진 것이다. 그래서 '예', '아니오', '이거 얼마에요?' 등의 카드를 만들어 들고 다녔다. 시간이 지나자 말을 하는 것보다 카드를 쓰는 게 익숙해져서, 책을 발에 떨어뜨렸을 때도, '아야!'라는 카드를 들고 발을 잡고 아픈 표정을 지었다.

방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아주 익숙해졌을 때쯤, Q는 언제나처럼 얼마전에 마련한 중고 TV를 보고 있었다. 쇼프로가 끝나고 선전이 나오던 중 Q는 까만 슬립을 입은 늘씬한 여자가 계속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춤을 추는 선전을 보았다. 쏟아지는 물에 원피스가 젖어 여자의 몸매는 그대로 드러났다. Q는 그 여자가 정말 섹시해 보인다고 생각했고, 한참동안 잊고 있었던 '여자'라는 느낌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Q는 옷장을 열고 옷장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치마들과 꽉 끼는 옷들을 다시 꺼냈다. 옷을 고르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Q는 가장 짧은 치마와 가장 작은 티셔츠를 입고, 가장 높은 구두를 신고 현관을 나섰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식구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Q를 쳐다보았다.

Q는 하루종일 시장을 돌아다녔다. 액세서리를 구경하고, 옷을 구경하고, 자판기에서 그 날씬한 여자가 선전하던 음료수를 뽑아마셨다. 시장은 거리와 가게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아서 좋았다. 따로 매장이 있는 가게에 들어가는 것은 Q에겐 이미 너무 무서운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시장 구경을 끝낸 뒤 혼자 영화를 보고, Q는 자정이 다 되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Q의 집은 아파트 단지 가장 구석에 공원 옆에 있는 아파트의 사층이었다. 평일인데다 시간이 늦어서 거리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Q는 큰길에서 코너를 돌아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조용한 길을 종종 걸음으로 걸었다.

거의 집에 다 와서 공원으로 들어선 Q는 직감적으로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걸음을 빨리 하며 뒤를 돌아본 Q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남자 애들 세 명이 Q를 보고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Q는 걸음을 빨리 했다. 오랜만에 신은 높은 구두가 무겁게 느껴졌다. 뒤의 남자 애들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Q는 아예 구두를 벗어버리고 뛰기 시작했다. 뒤의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Q는 가방까지 집어던지고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나 남자 애들은 금방 Q를 따라잡았고, 그 중 한 명이 Q를 뒤에서 안았다. Q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이미 그 남자애의 손이 Q의 입을 막고 있었다. Q의 심장은 너무 빨리 뛰어서 터질 것 같았고,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며 팔다리가 떨렸다. 그때였다. Q를 안고, Q의 입을 막고 있던 남자애가 소리쳤다.

"어, 이거 뭐야?"
면도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나기 시작한 Q의 수염이 그 애의 손에 느껴진 것이다.
"아이 씨발… 나 토할 것 같애. 이 새끼 남자야!"
그 애가 소리 쳤다. 뒤에서 실실거리며 웃고 있던 애들이 '어, 뭐야'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 중 한 명이 라이터를 켜서 얼굴에 들이댔다.
"어? 이거 수염 아니야! 야, 너 변태지?"
그 애는 Q를 툭 밀며 말했다. 남자애들은 온갖 욕을 하며 Q를 쓰러뜨려 때리고 발로 찬 다음, '재수 없다, 가자'하며 침을 뱉고 공원 뒤로 사라졌다.

여기저기 멍이 든 Q는 한참을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이렇게 맞아본 건 처음이었다. 얼마후, 겨우 정신을 차린 Q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온몸이 여기저기가 쑤시고 따가왔다. 그런데 이상한 건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Q에게는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되도록 으슥한 곳에 가지 않고 택시를 혼자 타면 뒤에 앉는 등의 자기방어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Q는 그런 것에서의 해방감을 느꼈다. Q는 Q를 잡았던 남자애가 '어, 이거 뭐야'하며 뒷걸음치던 모습을 떠올렸다. 웃음이 나왔다. 그 때 그애의 놀란 표정이란! Q는 턱을 만지며 큰 소리로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Q는 구두와 가방을 집어들고 집으로 갔다.

그 일이 있은 후 Q는 두 시간마다 면도하는 것을 중지했고,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식구들과는 여전히 따로 밥을 먹었지만, Q의 방에 있던 중고 TV를 마루로 옮기고, 마루에 있던 대형 TV와 비디오를 Q의 방으로 가져왔다. 식구들은 멀뚱멀뚱 Q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는 Q의 뒷모습을 보면, Q의 가방에 달린 수염 긴 해적인형을 볼 수 있다.

199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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