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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유머에 관한 단상들 -풀몬티를 중심으로
이민서 ('99)
어젯밤 스탠리 큐브릭의 '풀메탈자켓'을 본 후 피터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정부'을 보았다. 우연찮게 오늘 오후 카프카의 '독신자 블룸펠트'를 읽고나서 바로 본 '풀몬티'는 나로 하여금 이 네 가지 택스트를 한 맥락에서 읽어낼 수 밖에 없게 한다. 블랙코미디를 보고 난 후 짓게 되는 그 씁쓸하고 의미심장한 웃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 웃음의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쩌면 처음부터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웃음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분석해보려는 이성의 시도 자체가 부질없고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는 이 경이롭고 부조리한 세계에 이미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완전하게 작동되는 결코 완전하지 않은 이 세계의 질서에 대해, 혹은 그 질서에 난 구멍과 구멍으로 무너지는 검은 웃음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감없이 경의를 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세계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그리고 우리는 완벽하게 짜여진 의미의 그물망에 의해 세계를 더듬으면서 살아가기에 그 밖을 감히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길들여 진 것이다. 사실 그 밖의 세계는 생생한 부조리의 현장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언제나 그리고 충분히' 공포와 경악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암울하도록 완전한 질서는 카프카에 의해서 감지된 절망적인 그 무엇이며 까뮈에 의해 부조리로 명명되는 것이며, 모더니즘에 의해 파괴될 뻔했던 그 무엇, 결국 대상을 찾을 수 없어 스스로를 파괴해야 했던 현대적 중압감의 표상, 세기 말의 한 징표이다. 또 그건 어쩌면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하는 지도 모르는 운명적이고 우주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보르헤스에 의해 새로이 발견된 그것은 여지껏 우리가 바라왔던 낡은 시선으로는 감지할 수 없을 전혀 색다른, 허무하고 풍부한, 끝을 알 수 없이 깜빡거리는 종교적이며 신화적인 것일 지도 모른다. 인간은 '너무나 운명적으로 또 너무나 순간적으로' 세계의 풍요로운 낯섬, 단단한 이 세계의 질서와 대면한다. 그것은 내 앞에 오만하게 버티고 있는, 필연적으로 부수어야 할 뿐인 대상, 내포하고 있는 수많은 의미에도 불구하고 불가해하고 무척이나 견고한 껍질과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그건 가끔씩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소한 계기에 의해서 일때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에서 부정적인 시선으로 그 대상들의 엄청난 구속력을 감지할 때 이미 그건 단순해져버린다. 그건 한마디로 싸워야 할 대상이다. 블랙유머는 바로 그 부분을 건드린다. 너무 거창한 서두였다면 다시 시작해보자. 풀몬티에서의 블랙유머는 이런 거창한 맥락에서 읽으려 한다는 것이 우습게 보일 만큼 명징하고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 자체로는 그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작품의 리얼리티가 확보되는 지점으로 돌아가 하나씩 짚어 보면 분석해야 할 것이 의미를 점점 확대시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솔직하고 노골적인 작가의 시선은 주인공들이 타개해야 하는 현실 설정에 의해 일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드러난 현실은 처음부터 단순한 대립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야 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지키고 싶은 실직자들의 문제가 출발인 것이다. 양육비를 구해야 하고 실추한 가장의 권위에서 모멸감을 느끼는 한 실직자가 열심히 출구를 찾고 있다. 그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돈을 버는 것만이 이 체제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다. 처음부터 소외당한 자들에게 갈 길은 적극적인 순응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적극적인 순응은 비굴한 것이면서도 오히려 적의 허를 찌르는 냉소와 야유의 의미를 지닐 때가 있다. 그것은 안쪽으로부터의 전복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메시지는 점층적으로 확대된다. 이 작품의 직접적인 테마는 사회적 매춘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우회적인 테러라고 할 수 있지만 넓게는 공고한 사회 질서에 대한 한방먹이기가 되며 모든 고정 관념들은 무력하게 난자된다. -예를 들어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정 관념도 돈 앞에서는 무의미해지며 적극적인 돈벌이 앞에서는 더욱 의미없는 것이 된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돈에 의해서고 체제에 의해서지만 그 대상이 내포하는 것을 확장시켜보면 그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의미망을 벗어나려는, 즉 모든 대상을 거부하려는 웃음에 의해서이다. 자신들을 실직자라고 가차없이 무시하고 모멸한 이 자본주의에 대해 그들은 옷을 벗음으로서 한발 앞서서 비웃음을 던진다. 스트리퍼로 나선 못난 주인공들의 모습에 웃음은 자연스레 터져나오지만, 그들이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못 상징적이다. 관객을 향해 다 벗어버린다는 것이나 자신들이 비난하는 것을 보려고 굳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나 둘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역설이다. 스트리퍼 노릇은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만큼 매력적인 것이며 그들에게 돈과 유명세를 가져다줄 수단이고 그건 곧 적극적인 매춘이다. 그리고 적극적인 매춘은 환호받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파괴의 계략은 혁명이 아니라 적극적인 돈벌이를 통해서 가능한가? 그들과 같은 비웃음, 전복적 상상력은 과연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지속적인 방법이 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쉽게 찾을 수는 없지만(사실 부정적이라고 보지만), 그들의 수가 제대로 먹혀들어갔다는 것이 가장 아이러니컬한 부분이다. 그들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실직자들로서 리얼리즘 소설들에서의 주인공다운 비극성 같은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하도 우스꽝스러워서 슬플 정도로 못난 인생들이며, 그들은 계층적 대변인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사회적 모순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으며 바로 그들에 의해 세계에 대한 대면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인가. 그 질서는 과연 어떤 질서인가. 누구를 위한 질서인 것인가? 누구에 의해 그 질서는 재발견될 수 있는 것인가. 모순투성이의 세계의 발견이란 이 영화에서처럼 주인공들에게 '그래도 살아나갈 방법은 있어야 한다'는 해결방법, 출구를 찾는다는 점에 있어서 몹시 인간적인 것이다. 또 동시에 그것은 철학적인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의 대립구도는 단순하고 해결한 방법도 그렇지만, 우리가 대면하는 세계의 의미까지 단순한 것은 아니다. 싸워야 할 것, 파괴해야 할 것이 이 영화에서처럼 항상 단순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머리를 날려버릴 정도로 충격적이고 불가해한 것일 수도 있고, 복잡미묘한 웃음을 짓게 하는, 미리 예정된 계시와 같은 것, 알레고리로 가득 찬 이 사물들의 세계 안 쪽에 도사리고 있는 영원한 미지의 질서일 수도 있다. 그것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무언가를 뚫어져라 보다보면 느낄 수 있는 광기어린 기이함일 수도 있다. 보르헤스나 카프카는 어쩌면 그런 껍질 안쪽의 세계에 대한 구멍을 뚫어보았던 것일 수도 있다. 악이라든가 인간의 초자연적인 본능에 대한 탐색 또한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거의 종교적일 정도이다. 그런 세계의 재발견은 기이한 미소를 띄게 하는 데 그 예시가 '로즈마리의 아기'에서 로즈마리가 마지막으로 짓는 미소이다. 그건 세계에 대한 하나의 암시로서의 웃음이다. 블랙 유머는 세계의 한 구멍을 통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려는 철학적인 진지함인 것이다. 카프카는 낯선, 암울하고 기묘한 렌즈로 세계를 묘사하는 데, 그건 삭막하지만 순수하게 알몸인 것이고 그리고 그는 비로소 웃을 수 있다. 냉소가 묻어있지만 그게 다는 아닌, 허허로운 웃음을. 피터그리너웨이의 영화 역시 잔혹하고 기묘한 광선 속에서 고백하는 여주인공의 나레이션에서 묘하게 강렬한 서정적인 느낌을 받았는 데, 그건 어두운 웃음이었다. 자본주의적 욕망이 증식하는 끔찍한 공간으로서 설정된 탐욕스런 레스토랑에서 죽음과 피가 경건하게 등장하고 그걸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아이러니컬한 이 세계에 대해 블랙유머적인 관조 그것이었다. 그들은 다 질문하고 있다. 무언가에 놀라워하면서 또 기이하게 바라보면서, 환상과 적절히 배합된 리얼리티 그 자체에 대해서. 아니 환상적이기까지 한 리얼리즘에 대해서. 풀메탈자켓에서의 스탠리 큐브릭 역시 독자를 놀라게 하는 일종의 사실 충격으로서, 블랙 유머를 도입했던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이것이 있었다. 현실에 대한 절망적일 정도로 치열한 해부, 세상에 난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 그리고 어떤 웃음. 전복적 상상력이라는 유행하는 개념으로 이런 종류의 블랙 유머를 이해하지 않더라도 직관에 의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웃음은 때로는 절망과 통하고 절망은 길을 찾으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한다. 세계와 알몸으로 대면한다는 것은 세계의 견고한 껍질을 벗긴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작가들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 슬플 것이다. 주인공들이 옷을 다 벗는 마지막 씬에서 우리는 가련한 느낌과 함께 폭소를 터뜨리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알몸이다. 1999.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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