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희

재 즈 클 럽

조정희 ('94)

스테이지 위에 오늘 연주하기로 되어있던 색소폰 주자가 뛰어올라왔다. 나는 바에 앉아 위스키 잔을 살짝 흔들어 얼음이 잔에 부딪쳐 나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스테이지 위의 수많은 손가락들을 바라보았다. 숙달된 낚시꾼들이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물고기의 내장을 순식간에 뽑아내듯이 그 손가락들은 쉴새없이 움직이며 기묘한 화음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군요."
사람 좋아보이는 후덕한 살집을 지닌 바텐더가 묻는다. 이곳에 온 것은 두 번째로, 이미 세 달이 지난 후였지만 나는 그의 이름 '김'을 기억한다.
"저 밴드, 꽤 잘하는데요."
"이곳과 계약한지는 두 달이 채 안되지만 저 친구들 흡인력이 굉장해요. 덕분에 손님도 많이 늘었고 단지 금요일 밤뿐이라는 게 아쉽긴 하지만."
한 곡 연주가 끝나고 밴드의 리더인 색소폰 주자가 고개를 살짝 굽혀 인사를 하니 박수와 휘파람 소리가 스테이지 위에 쏟아진다. 곧 이어지는 또 다른 곡.
"학생입니까?" 김이 묻는다.
"그런 셈이죠."
나의 대답에 후덕한 살집을 지닌 중년의 바텐더는 소리없이 웃는다. 별로 의미 없는 질문에, 별로 의미 없는 대답이다. 그도 알고 있겠지.
아찔한 위스키의 취기가 진한 꽃향기처럼 머리 속을 어지럽힌다. 갑자기 중학 시절 주간지를 보다가 친구가 내게 '근데 정말 정액이 밤꽃향기야?'라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위스키 잔을 보며 픽, 하고 웃었더니 김이 나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재즈 좋아해요?"
내겐 이런 곳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하나의 공통 관심사-음악-이라는 게 있으므로 혼자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들끼리 친해지는 것도 별다른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손님도 아닌 바텐더라니. 별로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서 대답 대신에 처음 보는 칵테일을 한잔 더 시켰다. 바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 혼자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테이지 쪽으로 다가가 공연을 보고 있었다. 이대로는 저 뚱뚱한 바텐더의 말벗이나 하는 수밖에. 어차피 달리 해야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연은 계속되고 있었고, 나는 베이스 주자의 공기 속을 떠도는 듯한 솔로를 들으며 위스키를 모두 들이켰다.

나이 열 일곱이 되던 무렵에 난 철부지였다. 여자를 안기엔 너무 용기가 없었고 세상을 알기엔 너무 어리던 그 무렵 난 알코올에 젖어 살았었다. 자율학습 시간까지 하루의 모든 수업이 끝나고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 되면 난 친구녀석 하나와 함께 집 근처의 산에 올라가 안주도 없이 소주를 마셨다. 바위 위에 앉아 도시의 색이 조금씩 붉게 변하고 다시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보며, 별빛처럼 하나둘씩 나타나는 도시의 불빛을 향해 빈 소주병을 던지고, 또 던지곤 했었다. 그렇게 깨져나간 소주병들이 발밑에 예쁘게 빛나는 파편들로 쌓여갈 때쯤엔 그 중 하나를 집어들어 손목을 그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하얗게 빛나는 도시의 불빛들과 소주병의 파편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났다.
"확 불질러 버릴까." 친구녀석이 바닥의 돌멩이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무얼?"
"전부 다 말이야. 날 포함해서."
" . . .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네 말이 맞아."
우리 둘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고, '네 말이 맞아'라고 대화를 끝내고 나면 친구 녀석은 언제나 소리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은, 둘 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교실에서 잠을 잤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군요."
사람 좋아보이는 후덕한 살집을 지닌 바텐더가 묻는다. 그의 이름은 '김'이다.
"아무것도."
생각해보면, 안 좋은 일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없었던 것 같다. 문제는,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알코올에 젖어 지내던 고교생활의 마지막에 난 우연히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은 정말 우연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거대한 사막에서 줏은 거대한 소라껍질처럼, 그것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어떤 우연을 충분히 웅변하는 것이었다. 대학 1학년의 겨울, 친구를 군대보내며 함께 갔던 어느 사창가의 여관방에서 처음으로 여자를 안았다. 벽이 얇은 여관방의 저편에선 이미 내 친구와 어느 여자의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고, 그녀가 켜놓은 붉은 불빛과 습기찬 이불의 냄새는 나로 하여금 더더욱 본능적인 방어의 몸짓을 취하게 했다. 그녀가 약간은 짜증 섞인 재촉의 표시로 나의 목에 팔을 둘렀을 때에야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서 그녀를 안을 수 있었고,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정신없는 일련의 행위들 속에서 난 어린 시절 내 어깨에 기대 잠이 들곤 했던 까만 눈의 아이를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사정이 끝나자, 그녀는 추욱 가라앉은 흥분의 끝에서 호수의 밑바닥 같은 침묵으로 날 기다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처음이었어요?"
내가 그렇다, 고 대답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약간은 비웃음이 섞인 듯한 미소를 지었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그녀의 눈은 더욱 까맣게 반짝이고 있었고, 그녀의 미소는 나에게 어린 시절 TV에서 본듯한 먼 나라의 공주를 떠올리게 했다. 그 공주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아니, 수영을 하던 중 익사했다고 하던가. 그녀의 손에 4만원을 쥐여주고 나오는 길에 까만 눈의 그녀는 또 오라며 나에게 예의 그 미소를 다시 지어 보였다. 그 깊고 새까만 눈 속에 그녀가 떠나온 왕국이 파란 물빛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그 후 몇 개월간, 나는 그 먼 나라의 공주를 잊기 위해 내 몸에 적셔진 그녀의 냄새를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내야만 했다.
그 후, 다시는 그 먼 나라의 공주를 만날 수 없었다.

"저 친구, 재미있는데요."
후덕한 살집을 지닌 사람 좋은 미소의 바텐더가 말했다. 스테이지를 보니 한 취객이 그 위로 뛰어올라가 밴드의 드러머에게 드럼스틱을 내놓으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연주는 물론 중단되었고, 밴드의 드러머는 '어쩔 수 없군'하는 표정으로 드럼스틱을 그 취객에게 건네주었다. 사람들은 그 용감한 사내에게 환호를 보냈고, 그 사내는 사람들을 향해 드럼스틱을 모두어 잡은 손을 흔들어 보이고서, 한번 씨익 웃더니 마이크에 대고서 말했다.
"자, 이제 파티타임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드럼세트로부터 소용돌이치는 듯한 비트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아트 블레키(Art Blakey)의 곡이었다. 사람들은 더더욱 열광했고, 기분이 상하다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밴드의 다른 멤버들도 금방 표정이 바뀌어 그 사내의 연주에 맞춰 연주하기 시작했다. 스테이지 위엔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빈 맥주캔이 점점 쌓여갔고, 연주가 계속될수록 사람들의 발장단이 클럽의 플로어를 더더욱 뜨겁게 달구어댔다.
"이런 맛에 이곳을 찾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이는 한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하얀 셔츠에 밝은 빨강의 수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나는 그의 질문에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은 아니었으므로. 그 사람은 바텐더에게 맥주 한 캔을 주문하더니 머리 위의 희미한 조명을 바라보며 뇌까렸다.
"저 불빛들이 담배연기 사이로 스물스물 비어져 나오는 것을 봐. 이 곳을 가득 채운 이 니코틴과 알코올의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음악이라는 아편으로 이상향을 찾는 거라구. 아무 것도 생각해선 안되는 거야. 생각은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죽음에 가깝게 하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지. 그러니까, 아무것도 생각하면 안되는 거라구. 그건 이곳에 대한 모독이요, 배신이야. 가슴이 있는 자라면 느껴보시오. 이 自由를. 무언가, 무언가 해야만 해. 생각을, 자유를, 아니 난 음악을 들어야하지. 그래 그래, 그것뿐이야, 그것뿐이야 "
나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그 남자의 입 속에서 맴도는 고대의 주문 같은 말들을 모두 다 알아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금은 당황해버린 나를 보고 바텐더가 슬며시 팔을 잡아당기더니 말한다.
"저 사람은 이곳 피아니스트였죠. 그때는 참 대단했는데."
바텐더의 눈빛은 마치 오래 전의 첫사랑을 이야기하는 남자의 그것처럼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듣는 나로선 순간 연결이 잘되지 않는다. 저 약간 정신 나가 보이는 사람과 재즈 피아노라.
"이년 전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쳤어요. 그 후로 부인의 간호를 받으며 집에서 요양을 하며 가끔씩 클럽에 나와 연주하곤 했는데, 어느 날 식칼을 들고 부인을 죽이려다가 감방에 들어갈 뻔했어요. 처음엔 무슨 일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부인이 간병중에 저 친구의 고등학교 동창인가하고 바람을 피웠다더군요. 머리가 이상해지더라도 본능만은 남는가 봅니다. 아무튼 저 친구는 정신이상이 참작되서 집행유예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 후로 병원에 있다는 소리만 들어왔는데, 일 개월 전부터 클럽의 손님으로 이곳을 자주 찾더군요."
김은 말을 마치며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지금은 거의 다 나은 상태고, 근본이 워낙 착한 사람이라 남을 해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김은 내가 그 빨강 수트의 남자를 무서워할 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알았다, 고 대답하고서 그렇게 조명을 바라보며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상하게도 바텐더에게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의 얼굴이 너무나 평온하게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너무나 부러울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몇 번의 만남이 있었다. 그 몇 번의 만남에 상당하는 몇 번의 헤어짐을 겪으면서 새로 만나게 되는 사람의 모습 속에 헤어진 사람들의 모습은 점점 희미하게 흡수되어져 갔고, 헤어진다는 것에 별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만큼 떠나보내는 것에 익숙해진 즈음 난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갔다.
대학교 2학년의 습기찬 여름의 한복판에서 난 한 여자를 만났다.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갔던 동해안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 합석했던 일단의 여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유난히 차가워 보이는 미소를 하고서 사람들을 대했다. 촉새같이 떠들어대는 웨이터의 권유로 그녀는 우연히 내 옆에 앉게 되었고, 몇 마디의 의미 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또 대답하는 사이에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는 지루한 시간이 계속됐다.
"밖에 나가지 않을래?"
나이트클럽 특유의 끈적끈적한 분위기에 질려버린 나는 그녀에게 바다에 나갈 것을 권유했고, 그녀는 약간 망설이는 빛을 보이며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는 길에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비난이 들려왔다.
밤의 바닷가는 흥겨운 파티 분위기에 젖어있었다. 해변에는 끼리끼리 모여든 사람들이 야광으로 빛나는 장난감들을 흔들며 즐겁게 들리는 웃음소리를 이곳저곳에 뿌리고 있었고, 조금 안쪽에는 색색가지의 불을 켜놓은 포장마차와 오락실들이 가게마다 꽉꽉 들어찬 손님들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해변을 걸었다. 수평선엔 등대처럼 불을 밝힌 오징어배들이 줄지어 있었고, 신발을 벗고 해변에 가까이 걸으니 파도에 젖은 축축한 모래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렇게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해변을 걷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술을 마시자고 제안해왔다. 나는 그 유난히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섭지 않아?"
"뭐가?" 그녀는 별 바보 같은 소리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빤히 날 쳐다본다. 그래, 사실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우리는 함께 그녀의 방에 올라가 그녀가 가져온 발렌타인 한 병을 나누어 마셨다. 새벽 한시가 넘어 방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을 무렵 난 그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의사를 그녀에게 비췄고, 그녀는 즐겁게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아찔한 위스키의 취기가 무슨 꽃향기처럼 내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그녀와의 대화는 그렇게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 땀과 체액만이 교류되는 대화의 중간중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 남자의 이름을 불러댔고, 피곤에 지쳐 잠든 그녀의 땀방울 빛나는 몸에 얇은 이불을 덮어줄 때쯤 그녀는 또다른 남자의 이름을 웅얼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에서 남자들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는 순간, 난 처음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난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즐겨 쓰는 권총모양의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였다. 그리곤 관자놀이에 그 권총을 들이대고서 자살하는 시늉을 해 보았다.
팡! 아주 재미있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여름의 해변에 그치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온 후에도 긴 머리를 한 시체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그녀와의 만남은 계속되었고, 어쩌다 잠자리를 함께 할 때면 어김없이 그녀의 입에선 다른 남자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입에서 맴도는 남자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확신이 점점 굳어져갔다.
그녀를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그녀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살인청부업자였다. 그녀의 임무는 남자들을 살해하는 것이었고, 의뢰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그녀가 즐겨 쓰던 그 권총모양의 라이터는 실은 진짜 권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살인청부업자였고, 스스로가 의뢰하고 또 의뢰받은 남자들을 철저하고 잔인하게, 그리고 가장 깨끗하게 처리했다. 그녀는 수첩에 적힌 수많은 남자들의 이름을 내게 보여주며 아이처럼 천진스런 웃음을 짓곤 했다. 그녀는 그 명단을 너무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또 그 명단에 이름이 하나하나 추가될 때마다 그것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게 이름이 올라간 남자들은, -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를테면, 그녀의 게임을 지켜봐주는 유일한 청중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나를 소중하게 대했고, 난 그렇게 뛰어난 솜씨를 가진 그녀를 자랑스러워했다.

"그 여자를 사랑했나요?"
후덕한 살집의 사람 좋은 미소가 묘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 아이에게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말했죠."
"그건 대답이 아닌 것 같은데."
바텐더는 자신도 목이 마른지 맥주캔을 따고서 한입 맛있게 목을 축이고는 내게 나머지를 권했다. 밴드는 마지막 곡이라는 멘트와 함께 빌 에반스(Bill Evans)의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거의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아침마다 그녀의 사서함에 새로운 곡들을 녹음했고, 그녀를 만날 때마다 만난 횟수에 맞추어 붉은 장미를 그녀에게 선물했다. 그녀의 명단이 50명째를 채우고 나의 장미가 32송이에 이를 무렵, 나는 약속장소였던 대학로의 한 커피숍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삼십 분이 지나고 한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고, 난 무슨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그녀에게 끊임없이 연락을 취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고,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새 커피를 시키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녀를 기다렸다. 재떨이에 더 이상 꽁초를 꽂을 곳이 없게 되었을 즈음 시간은 이미 두 시간이 지나있었고, 난 그녀를 만나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에서 내가 마신 3잔의 커피값을 치르려하고 있는데, 한 웨이터가 내게 다가왔다.
"한 여자손님이, 꼭 손님같이 생기신 분께서 혼자 와서 커피를 마시다가 밖으로 나갈 때쯤 되면 이걸 전해 드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 3시간쯤 된 것 같네요."
나는 그 웨이터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받아들었다. 상자에는 조그만 그녀의 글씨로 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상자를 여니 그 안에는 그녀가 즐겨 쓰던 권총 모양의 라이터가 들어있었고, 그 옆의 작은 종이 위엔 파란 잉크로 쓰여진 그녀의 글씨가 눈에 띄었다 :

'나는 너의 사랑한다는 말 속에 고사(枯死)해 버리고 말았어.
다시는 날 볼 수 없을 거야. 안녕. '

나는 그 길로 거리에 나와 32송이의 붉은 장미를 휴지통에 처박아버리고는 그녀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녀의 집, 그녀와 자주 함께 가던 술집과 커피숍을 아무리 헤매고 찾아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의 권총모양 라이터를 빼고는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마치 낯선 곳에서 깨어난 기면발작증 환자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녀를 이곳으로부터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어쩌면 내가 그녀를 죽였을 지조차 모른다는 죄책감에 난 아무 일도 손에 댈 수가 없었다. 그녀의 냄새를 그리워하며, 난 이것이 진짜 권총이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권총 모양의 라이터를 관자놀이에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이젠 가스조차 남아있지 않는 녹슨 라이터일 뿐이었다. 난 점점 다시 알코올에 젖어 들어갔다.
그렇게 두 주일이 지나자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도, 그녀의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난 그녀의 냄새를 기억하려 애썼지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뿐이었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군요."
사람 좋은 미소는 옆자리의 여자가 주문한 블러디메리를 만들기 위해 쉐이커를 흔들며 내게 말했다.
"그런 걸까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앵콜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밴드의 연주가 끝난 것이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 있었다. 나는 주섬주섬 자리를 일어날 채비를 했다. 사람 좋은 미소의 바텐더가 내게 말한다.
"손님이 너무 많으면 손님들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기가 힘들죠. 내일이면, 또 다른 얼굴을 한 손님들이 이곳을 찾겠죠?"
"그럴 겁니다." 후덕한 살집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닌 그 바텐더에게 미소를 보낸다. 그의 이름은 '김'이다.
재즈클럽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길에 등 뒤에서 밴드의 앵콜곡이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정신이상이라는 그 빨강 수트의 사내는 아직도 머리 위의 희미한 조명을 바라보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예의 그 행복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거리엔 갖은 색깔의 네온이 술 취한 사람들의 그림자를 부축하듯 밝히고 있었다. 더 이상 음악은 들려오지 않았고, 나는 그 수많은 네온들이 토해놓은 사람들의 사이를 걸어가야 했다. 검은 아스팔트와 회색빛 보도 위로 사람들은 위태로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발 아래 입을 벌린 거대한 그늘 속으로 내 모습을 감추려던 나는, 순간 내 눈에 고인 것을 닦아 내야만 했다.
그 곳엔, 정말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1995.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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