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읽기

80년대에 바침 - 공지영 읽기

이준호 ('97)

0. 공지영의 80년대를 이해하기 위하여 고대생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위대한 독재자가 총탄에 쓰러지고 심수봉의 노래가사처럼 '그때 그사람'으로 사라져가자 독재자의 시대는 79년으로 막을 내린 듯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서울의 봄이 왔고, 그러나 그 봄은, 그야말로 개나리가 지던 5월에 덧없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배운, 80년대의 시작이었다. 제조일자가 겨우 78년쯤이고보니 나는 80년대를 살아내긴 하였으되 8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코흘리개 시절에 아버지가 사들고 오신 흑백TV 속의 배삼룡과, 82년쯤에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던 일과,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6년씩이나 다녔던 같은 국민학교의 풍경 정도가 내가 80년대에 바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억이다. 민주화성지라는 광주에서 인생의 태반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꽤 대가리가 커질 때까지도 전두환 대통령처럼 멋진, 훌륭한, 똑똑한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고 믿어왔고 87년쯤에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나는 왜 전두환이 대통령을 그만둬야 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물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보통사람처럼 생긴, 그리고 정말 보통사람을 위하는 것같은 노태우 '대통령각하'를 존경하게 되었다.

이처럼 불행하게도, 나의 유년기와 겹쳐버린 80년대는 나에겐 어떤 빛이 되어주지도, 어떤 빚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80년대를 떠올려본 적이 거의 없다. 나의 신경세포들은 온통 동구권과 소련이 무너진 이후의 세계에만 쏠려있다. 김남주가 임종을 맞은 병원 담벼락에 '조국은 하나다'라는 시가 붙었다느니, 김정환과 박노해, 황지우의 시가 어떻게 변했다느니 하는 소리들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다는 건 비단 나만의 유별난 반응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도, 저 사람들은 그 시대를 떠메고 사는구나, 공허한 뒷북치기를 지독히도 오랫동안 계속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얼핏 들 뿐. 그리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들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도 대단한 한 세상을 살았나 싶어 화두없는 건조한 오늘을 되씹어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지영은 내가 콤플렉스를 느끼는 부류에 속한다. 저 찬란한 80년대에, 맹렬한 NLPDR 운동권 학생으로 절대공동체(김동춘 교수의 표현)의 일원이었으며 학교 다닐 땐 탁월한 감성으로 학교내 각종 문학상을 휩쓸곤 했던, 졸업하고 나선 현장에 투신해 구로공단 대파업 등을 주도했던, 386세대 소설가 공지영. 그녀의 새 소설집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는 아직도 80년대에 매달리고 있다. 95년쯤부터 하나씩 발표한 단편들을 모은 거라 더욱 그런 냄새를 풍기는지도 모르겠지만.

1. 비틀린 성장-교육을 바라보는 눈

사랑의 매를 때려주신 스승님의 깊으신 뜻과, 의문의 여지없이 주사기로 주입되던 지식들, 시키는 대로 네 개의 답 중에서 한 개를 골라내는 일만 잘하면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교육은 공지영의 세대에서만 통용되던 것이 아니라, 오늘까지도 계속돼온 방식, 우리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왜곡해온 방식이다. 나는 이 단편을 읽고나서 상당히 감동을 받았었다. 이러한 교육현실에 대한 공지영의 문제의식은 몹시 진지해보였으며, 그녀의 아이들에게까지 그 촉수를 뻗치는 교육권력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다고 보았다.

- 아마 사학년 때라고 기억되는데, 나는 우리가 왜 유신헌법 개정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져야만 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본 구봉서와 배삼룡의 선전 프로그램을 요약해서 조리있게 말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어린 화자 윤희는 구봉서와 배삼룡의 선전프로그램에서 얻어들은 '한국적 민주주의'론을 학생들앞에서 발표한다. 동화를 재미있게 이야기할 줄 아는 윤희는 그 한바탕의 연설(어렸을 때 열심히도 연습했던 반공연설이 생각난다)로 인해 '특별한' 사립학교에서 '특별한' 총애를 받으며 학교를 다니게 되고, 당연하게도 윤희는 선생님이 장래희망인, 착하고 똑똑한 모범생으로 자란다. 그의 집안에 가난이 닥쳐오고, 그렇게 존경하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강요'한 사건을 겪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무렵에는 학교와 스승에 대한 존경이 무조건적인 증오와 모멸로 바뀌어버린다.

- 만일 누가 내게 한 십년이나 이십년쯤 젊어지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처럼 솔깃한 말은 없겠지만 아마도 나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젊은 나이에 나는 또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라면 내 청춘 열 번을 다시 돌려준다해도 싫었다-

게다가 오늘날의 교육현실에 관한 직접적인 화살을 피하고 우회적인 풍자와 냉정한 관찰로 일관한 묘사는 일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신도시의 학교는 깨끗하고 아담했다. 게다가 이제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변해 있었다. 그러니 이 모든 염려들은 모두 기우일 뿐이기를 나는 바랐다. …(중략)… 나역시 나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두 발을 돋우고, 마치 나의 시선이 그 아이를 놓쳐버린다면 미친 바람이 그 애를 휩쓸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아프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심지어는 십수년이나 교직에 있었던 평론가조차 그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 공지영의 '광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도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친 적이 있고 지금도 학생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 있다. …교실에서 그처럼 끔찍한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언내용은 우리 교육의 문제를 깊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로서…(후략) - 정현기, '이야기 집의 넓힘과 자아탐구'

그리고 나는, 그녀의 사상적 경향이 부문운동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디어 그녀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부문운동으로서 교육에 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섣부른 해석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확실히 그러한 해석이 옳다면 공지영은 지금까지 너무나 부족했던 사상성을 조금이나마 채워넣게 된 것이고, 나아가 80년대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소박한 센티멘털리즘도 극복하게 된 것이 아닐까. 나는 그래서 어쩌면, 좀더 좋은 글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이 소설집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출발을 보였던 이 소설집은 나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반했다. 결국은 변한 것이라곤 밤톨만큼도 없는, 그저 공지영 스타일의 소품들을 보기좋게 짜집기해놓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2. 신화의 시대; 방황의 시대

여전히 공지영은 80년대에 억눌려 있다. 80년대가 그녀에 있어서 신화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그녀에게 방황의 시대일 뿐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80년대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것은 오히려 80년대에 대한 그녀의 압박감을 반증해 준다. 언제나 똑같이 8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이 주인공이며, 미술을 하는 사람이든 디자이너이든 가정주부든 모든 인물들이 언제나 혼란한 상태에 빠져있다. 80년대는 그녀가 시도한 바대로 가볍게 은폐되고 축소되어 나타난다.

앞서 언급했던 '광기의 역사'에서도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주인공 윤희는 1980년에 고3이 된 여학생이며,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그해 봄에 폭력교사 규탄시위에 참가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해 오월이 다 가기 전에 이루어진/ 잠시의 섣부른 반역'에 지나지 않았고, 돌아온 것이라곤 참담한 굴종과 그치지 않는 학대뿐이었다. 그리고 상세한 80년대 살이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 시기에 대학을 다녔을 것이고 그 시기에 이른바 운동권이었으리라는 추측은 공지영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다. '동트는 새벽'부터 시작하여,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에서 펼쳐보였던 '등이 푸른' 자유에의 이상은 '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에서 차츰 버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완전히 죽어서 적당히 간이 맞춰진 '고등어'로 슬픈 결말을 맺는다. '광기의 역사'의 주인공 윤희도 그러한 과정을 밟아, 이제 90년대의 평범한 주부로, 아이 걱정에 밤잠 못이루는 일상의 인간으로 귀순한 것이다. 이러한 우려할 만한 징후는 공지영의 초기 작품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가장 이념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동트는 새벽',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같은 소설에서도 주요한 내러티브를 이루고 있는 요소는 단연 사랑이다. 그것도 지나치게 몽상적이고 하이틴소설류의 기형적인 연애, 예컨대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에선 유부남 선생과 제자간의 사랑, 가톨릭대 학생인 예비 신부님과 여고생간의 사랑이 소설의 도입부임과 동시에 줄거리 전개의 주요한 기둥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등어'에 가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80년대는, 그녀의 소설에 있어서는 아름다운 사랑의 연주를 더욱 달콤하게 하는 향신료 정도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80년대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여전히 그녀가 쓰는 소설 전부가 어떻게든 80년대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그 증거로 충분하다. 게다가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조차 80년대에 관해 완전히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것들도 있다. 동구권의 몰락과 사회주의의 끝을 회의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는 한 소설의 서두는 다음과 같은 시로 시작하고 있는데,

- 보라, 옳은 것은, 사실 옳았던 것이다/ 남은 것은 역사 속에/ 남은 자의 몫일 뿐이니/ 남은 자의 기억은 옳지 않았다/ 피비린 기억보다 더 많은 것이 이룩되었다/ -김정환의 시,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에서 재인용-

나는 이 대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소설이 사회주의의 끝을 유일한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김정환의 시풍과 정치적 태도는 완연히 소녀적인 센티멘탈로 흘러버린 이 소설과 어울리지 않는다. 모스끄바는 한낱 지나간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치부되며 그녀가 80년대에 대해 떠올리는 것은 그 시대에 그녀와 동료들이 믿었던 사상의 옳고 그름과는 관계없이, 다만 그때에는 외롭지 않았고 힘이 넘쳤다는 것 뿐인데, 그렇다, 그녀는 90년대에 외롭고 나약하다. 80년대의 이상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90년대에는 적응하지도 못했다. 80년대에 대한 회고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90년대의 행복'이라는 주제는 현재 공지영이 시대에 대한 지체감과 SELF-IRONY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는 추측을 낳는다. 이러한 예상이 꽤 신빙성이 높음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항변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 그래, 외로워서 썼어. 다들 어디 있니? 우리 그땐 이렇게 힘찼잖아. 우린 그때 실망하지만도 슬퍼하지만도 않았잖아. 그런데 다들 어디 있니. 그런 말이 하고 싶어서 쓴 거라구. 그런데 쓰고 나서 난 더 외로워졌어. 사실은 내가 외로워서 그런 소설을 쓴 건데, 쓰고 나니까 정말 외로워진 것 같애-

그리고 지금의 고독과 결핍, 긴 방황의 시대에 느끼는 불안은, 비교적 젊었던 시절과 확고한 목표가 존재했던 신화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결국 공지영의 소설은 '참여문학'으로 분류되어야 할 소설이 아니라, 보통의 '여성소설'로 분류되어야 옳았던 것이다. 공지영의 '80년대'의 의미는 정치적인 부채의식과 사회적인 무기력등으로 일컬어지는 압박이 아니라, 그 시대에 그가 경험했던 단단한 결속과 유대, 이른바 '절대공동체'의 체험에서 비롯된 향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보편적인 것으로 유통되는 것들에 대한 거부로 인해 더더욱 과대하게 부풀려져 있다. <광기의 시대>에서조차 대립항으로 존재하는 것은 '정의'와 '불의' 같은 정치적인 혹은 이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경험틀에서 비롯된 '폭력교사'와 '나'의 대립이다. 쥐스킨트의 소설 '깊이에의 강요'를 다소 베낀 듯한 인상을 주는 '진지한 남자'에서 주인공의 불행은 그저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 시도때도 없이 진지하다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공지영의 사회적 의식수준이 예상외로 낮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이 각기 교육현실의 문제를 솜씨있게 에피소드화하고 있고('광기의 시대'), 우리 사회의 속물주의와 허상뿐인 제도를 풍자하고 있지만('진지한 남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교육현실을 잘못된 선생 탓으로만 돌리고 있거나 구조적인 관점에서 접근했어야 할 주제를 지나치게 협소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으로 인해 스스로 작품을 망치고 말았다.

3. 공지영 소설의 또다른 한계- 자의식의 과잉

90년대에 대해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공지영의 어떤 소설도 80년대와 관련을 맺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과, 그녀가 사용하는 모든 등장인물이 그녀의 '돌리'에 불과하다는 문제로 이어진다. 물론 소설이란, 또한 문학이란 '자아의 객관화'이기도 하며, 모든 인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작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타자의 주관화', 즉 주체와 구별되는 타자로서 작가와 독립된 (소설적) 생명체의 생성 역시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공지영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것은 '작가의 과잉된 주관'에 의해 창조된 인물들 뿐이며 따라서 작가의 의식과 극히 동일한 평면을 이룬다. 그렇다보니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황당한 대목도 만나게 된다. 이 소설집에 실린 '길'이라는 단편에서 주인공인 60대 할아버지의 독백을 들어보면,

- 그는 차창으로 달려드는 하늘을 보면서 그날의 바닷속을 생각했다. 그러자 문득, 만일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하나의 바닷속과 같다면 지금 저 하늘 위의 세상에는 폭풍우가 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우리가 하늘이라고 부르고 있는 저것이 만일 다른 세상의 수평선 같은 것이라면…… -

이건 흔히 예상되는 60대 남자의 감성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차라리 주인공의 독백이 아니라 작가의 감성, 정서의 표현이라고 이해해야 옳을 것 같다. 주인공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실제 작가의 그것과 똑같은 것이라면, 그 인물은 단지 작가의 자화상일 뿐,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작'에서 '고등어'에 이르기까지 소설 안에서 갈등하고 대립하는 인물들은 작가 속에서 병존하고 충돌하는 다중적인 내면과 완전한 등치관계이다. '그리고~ 시작'에서의 은수와 지수, '고등어'에서의 명우와 은림은 모두 작가의 복제품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공지영 소설이 지닌 이러한 한계는 다른 여성작가들의 소설들이 지적받는 문제- 모든 소설적 공간이 작가들의 실제 경험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를 공통분모로 가진다. 이 소설집에서도 작가를 닮지 않은 인물은 많지 않지만, 그러한 인물일수록 하나같이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고 형상화 자체도 밀착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99.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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