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화…… 그 파급
박세준 ('93)
1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해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의 총칭. 이것은 문화에 대한 사전적 해설이다. 과연 현재 우리가 느끼고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문화'라는 단어가 이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 현대인은 위의 사전적 의미에서 말하는 소득을 받기에만 열심이고 그에 합당한 지출의 개념을 잊은 것은 아닌지. 현대의 문화는 소위 세계화라는 물결 속에서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다양성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현상'과의 구별이 모호한 유령의 모습을 한 포스트모던한 모습으로. 그러나 누구를 위한 세계화인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문화의 파급을 받아들이고 느끼기에만 바쁜 것은 아닌지, 그에 따른 생각의 표출, 즉 그 지출에 합당한 행동에 너무도 소홀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시간이 감에 따라 토플러의 이야기가 맞아들어감을 보게 되고, 그 안에서 문화는 인간 사는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 그 속에서 잉태된 당파성과 이익집단의 싹은 공존하고 그 집단단계의 경제적 능력은 날이 갈수록 상승곡선을 그리려 하고 있다. 소위 엑스세대, 신세대라는 알다가도 모를 이분법적 사고도식은 현세태와 그 속의 잔존 문화탐구를 훨씬 용이하게 만들어놓았다. 과연 그것들이 어떠한 것이며, 그런 새로움을 주는 것만 같은 생각과 사고들로 여겨지는가. 구세대의 낯설음이 거의 정점에 다다른 90년대 중반인 현 시점의 문화의 파급에 대한 논의는 그래서 충분한 의의를 갖는다. 2. 현대문화의 특징은 그 '알 수 없음'에 있다.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현상'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각지에서 출몰하도록 만들어놓았다. 그 현상들은 곧 유행으로 전파되고 평가된다. 그것은 어느덧 인간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고 뒤이어 올 새로운 현상과 맞물려 변화할 채비를 갖춘다. 변증법적으로 어울려서 합일의 현상도 보이지만 과감히 사라지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순환과 반복이라는, 마치 역사와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또 하나의 원인은 포스트모던이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예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고임은 주지의 사실이나 문예사조와 현실사조는 차이를 보인다(이른바 '현실'과 그 '반영'에서 오는 차이랄까). 모더니즘이라는 세계관은 기존의 상식에 대항하는 기계이용적, 근대적 관념이었다. 그것과 연관고리를 가지면서 해체와 비방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주의자들의 궁극적인 근원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들은 철저히 이기적이어야 하므로 남을 인정하는 반어적 사고를 한다. 그 속에서 불확정성, 단편화의 현상으로, 또한 전통과 상당한 연관고리를 맺으며 실체를 알 수 없는 - 과연 체계와 변별력이 있는 창조적 주장인가, 아니면 청결치 못한 문화행패인가의 논쟁같은 - 유령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성격들은 한국의 광고문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기심과 개인차별의 조장처럼 보여지는 이러한 성격들도 경제사정과 매치될 때에야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한국의 현실은 포스트모던의 성격이 변질 내지 조장되게 했고, 모더니즘의 일점 속에서 포스트모던으로의 여과된 유입은 포스트 모던을 '세련'으로 착각하는 사고의 오류를 가져왔으며, 그것이 신세대라고 규정지어지는 오늘날의 문화형태를 부채질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매스미디어로 인한 즉각적 사고, 커뮤니케이션 체제의 발달, 모던+포스트모던, 축적된 자본, 이 3박자의 충족과 묘한 혼재가 오늘날 90년대 문화의 원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전통과 고유성을 승계하려는 노력이 더해질 수 있겠는데, 그만큼의 자본이 없이는 현상의 일부로 자리잡기조차 힘든 현대상황 속에서 조화를 찾지 못하고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전통의 모습은 매우 안타깝다. 3. 국가적 시스템으로 본다면 어떠한가. 한국은 이미 헌법에 인간존엄과 표현의 자유를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문화활동의 기본이 되는 시스템은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두 알 듯이 이 모든 것들이 정치적으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즉 문화도 정치적 헤게모니의 역학관계 속에서 행정의, 정치의 재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60, 70년대 한국은 군부독재의 시련 속에서 경제적으로 커왔다. 그리고 지금, 부의 불평등 속에 전체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 모아진 자본의 덕택으로 문화의 선도요소들인 예술과 그 외의 대중문화들이 눈에 띄는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고, 현재도 상당부분 남아있는 유교의 사상적 기반이 깨어지고 있음을, 특히 한국인들이 가장 외경하는 가부장적 사고가 부분적으로 해체됨을 보여주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 속에서 문화의 흐름을 선도하는 '시대정신'이 사라진 것 또한 사실이다. 이념의 부재, 사상의 부재.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인간됨'이라는 지각변동 속에는 아노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인간의 기본적 생활상이란, 특히나 감정적 측면에 있어서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고 다를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 다르지 않음이 문화의 공유성을 뽑아내는 약이 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데몰리션 맨'은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거의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 주된 내용이야 역시 액션에 의한 권선징악이었지만, 21세기의 더 큰 모더니즘의 물질문화 속에서 체제의 비판 없이 살아가는 호사로운 인간들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시대는 달라져도 본성(?)은 못 버린다'는 문구처럼 인간삶의 감성적, 논리적 공유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궁극적 인간문화의 대안은 조화에 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시스템, 혹은 시대적 흐름에 기초하여 인간사회에서는 어디서든지 문화가 존재하며, 그것들은 서로 직면하여, 공유되며, 교차될 여지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 속에서 인간 개인과 문화의 커뮤니케이션이 완성되고 적절한 수용과 그에 알맞은 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4. 그러면 이제 현대문화의 부분들을 들춰내보자. '신세대'의 문화와 그 사고영역의 이해는 포괄적 이해와 서술을 전제하게 한다. 이 시대의 문화는 과거에는 있었으나 경시되었던 많은 것들이 새로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유입과 파급의 정도는 전술했듯이 순간적이고 파격적이다(그러나 이것만 갖고서 세계화 운운하기는 힘들다). 요즈음 거리를 거닐 때 나오는 노래들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현실문화의 기저인 세태와 현상의 문제를 되새기는 내용들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도 가사의 대부분 주제들이 '사랑타령'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에 탈피된 내용, 때로는 황당한 내용도 눈에 많이 띈다. 탈피된 내용의 주류는 '외로움'이다. 사랑에서 상처받은 후, 징징 우는 외로움이 아닌 군중에서 소외된 자신의 모습, 자기 내면의 표출이 그 주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은 시대적 냉소와 허무의 환멸이다. 마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식의 가사에 불안과 분노는 있어도 대안은 항상 유보한다. 또한 이것들은 상품이 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노래들은 그야말로 세련된 포장 속에서 테이프로 CD로 팔려나간다. 그 속에서 대중은 느껴보고 공감한다.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시대의 비애를. 그러나 대안을 직접 생각해보는 대중은 극히 일부이다. 문화를 받고 그 보답에는 극히 소홀한 현시대의 일면이다. 또 때로는 맹목적 붐을 이루기도 한다. 경제적 풍요는 그만한 여유를 갖게 해주었고 대다수의 남들이 하는 것들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존재한다. 즉 잘 만들어서 우수하다 인정되면 어김없이 찾게 되고 곧 현상이 되고 문화표출의 방식으로 되는 것이 현시대인 것이다. 정말 고학력, 중산층의, 입시교육의, 그대로의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양상이 조금 다르다. 예전부터 인기있는 영역은 현재도 마찬가지로 읽혀진다. 전술한 것과 비슷한 하루끼라는 일본작가의 소설이 한국에서 크게 어필하고 있다는 점과 포스트모던이라 구분되어 있는 소설들의 등장이 새로운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대하소설류의 큰 작품 외에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같은 패러디작,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장정일의 '아담이 눈 뜰 때', 시집 '햄버거에 관한 명상' 등이 그 난해성과 단편성으로 약간은 동떨어진 듯한 문화의 시발을 추구했다(이 중 '영원한 제국'은 그 재미면에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파급의 충격파는 있었으나 아직까지는 컬트적 성공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즉 느끼고 흥미를 갖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는데, 과연 이러한 작품들이 자본주의의 시장의 개념과 어떻게 조화될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대학가, 학원가를 중심으로 부상하는 문화로 만화(애니메이션)를 꼽을 수 있다. 그 유통경로가 일본만화의 지배로 박살날 것이라는 뉴스도 이미 접하고 있다. 일본만화는 어느덧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인 것처럼 널리 퍼져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현 내러티브의 위기를 만화로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구독량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되어버린 그네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일본만화의 시작점은 60년대의 데스까 오사무로 올라간다. 그의 히트작 아톰은 그에게 큰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고, 그 이후 다분히 권선징악적인 스테레오타입의 로봇만화들이 히트하게 된다. 이들 스테레오타입의 거대한 로봇주연영화의 이면에는 70, 80년대의 경제적 대국으로 도약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군국주의라는 잊혀졌던 단어를 일깨움으로써 새로운 용감한 경제적 가미가제 육성이라는 의미가 있었다(이들의 다수는 여과없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방영되었다). 그 이후 월트 디즈니와 필적할 만한 대규모 시스템을 지니게 된 일본만화는 미야자끼 하야오 등의 세계적 엔터테이너를 배출하며 연간 수천억의 매출액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우리도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졌고, 또한 그것은 성에 관한 관념에 있어서 - 기성세대에게는 놀랍기 그지없는 - 표출방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즉 현시대의 문화 속에 만화는 아직까지 '현실 잊기'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여러 동향들 속에서 기대할만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만화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이 퍼져 있다. 이를 문화적 측면에서 인정하고 그 유통경로와 자본의 지원이 시급하다. 현대문화의 일면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패션이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만, 옷이 문화현상의 일부로서 다루어진다는 말의 의미는 그만한 경제적 상승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기성세대가 보는 신세대의 패션이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자기 표현의 방식. 자기만족의 또다른 수단. 갖가지 말과 행동 속에 옷을 입는데, 디자이너 지망생들의 말처럼 옷에도 철학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세대들은 그런 말을 적용하기엔 요원한 것 같다(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개성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있는 다른 '몰개성'이 바로 현대 옷입기의 모습이다. 그런 집단화된 상표화된 물개성 속에 옷은 '사회풍습'과 매우 흥미로운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는 도덕과 법의 관계처럼 때로는 조화를, 때로는 아집으로 자리를 내어주지 못하는 관계에 서있게 된다. 배꼽티와 미니스커트와 사회시각, 그리고 개인적 선호는 그야말로 실체를 알 수 없게 연결되어 있으며 '나는 좋지만 사람들 앞에선 왠지 그런, 흥미로운 몰개성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마이다스의 손, 자본 아래서 성장한 옷입기 문화는 제품과 그 묶음이라는 끝없는 몰개성 속에 개성적 만족을 찾는 역설적 문화다. 오늘날의 대학문화는 어떠한가. 흔히 나오는 말들이 '왜 지금은 대학이 문화를 선도하지 못하나?'하는 것들이다. 이것은 시대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 이것은 비대학인들의 지적 수준과 경제수준이 한국도 상당한 성장을 가져왔음을 보여준다. 즉 대학인들의 사회적 역할은 그대로 존속하나, 그 지위는 과거와 같은 구분된, 승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고의 기반 속에서 초·중·고의 입시생활에서 얻어지는 매스미디어의 영향은 결코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리고 대학의 문화는 '그 무엇'의 테두리 안에 갇히는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물질문화에 길들여진 채로, 세련에 길들여진 채로 대학인들은 살아가며 대학은 대중문화의 힘 앞에 주체적 수용을 할 시간조차 없는 가장된 성역이다. 그 안에서 인간됨의 지각변동이 몰고온 이기주의가 역시 대학에서도 팽배하여 고학번들을 낯설게 하고 있고 총체적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문제의 본질적 해결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하겠다. 현재의 위 현상들을 인정하고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이제 더 이상 젊은 혈기로 '개떼 같이' 몰려 다니는 행위들이 - 특히 합리성을 상실한 경우 -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니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5. 그러면 문화의 파급으로 나타나는 가장 민감한 부분, 성(性)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성과 자본주의는 뗄 수 없는 연관고리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성문화와 그 산업은 현대시장의 커다란 부분으로 남고 있는 것이다. 영화산업, 비디오산업, 술집, 클럽으로 이어지는 여러 산업들. 성의 상품화에 대한 논쟁은 페미니즘계열의 여성운동가들에게는 일찍부터 제기되어왔던 문제였으며, 그것은 문학을 비롯한 제예술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문제는 이성(異性)이 존재하는 인간사회에서 엄연히 존재해왔고, 존재하고, 존재할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심리학과 역사학, 사회학 등의 망라된 분석이 요구되므로 여기에서는 문화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의 성의 문제만을 보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한국의 상황은, 누차 얘기했듯이, 자본주의의 단계가 무시된, 급격한 발전 속에 있으며, 아직까지도 물질과 정신의 전도현상은 성숙한 의식으로 해결되기에는 너무도 먼 숙제다. 가부장적 문화와 그 안에서의 여성운동의 자각, 다시 영화와 광고 속에 가득찬 섹시신드롬. 이 속에서 성은 돈과 거의 맞먹을 정도의 종교가 되어버렸고, 이것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단지 문화적 제한이 아닌 개인의 자유보장차원까지 침해한다는 뜻의 어려운 결과를 낳고 있다. 이미 '쾌락으로서의 성'과 '출산으로서의 성'은 상당한 분리를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현시대의 대중문화들은 대중들의 정치무관심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그 속에서의 매스미디어들은 시대에 맞는 남성의 모습, 여성의 모습을 계속 주입하며 유행을 만들고 세련된 가장 속에 숨겨진 성의 모습을 거의 명확하게 펼쳐보인다. 그러한 영향들에게서 자유로워지기 힘든 현대의 젊은이들은 익명화된 도시 속에 거대한 성문화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즉 현대의 성문화는 공동의 욕구, 인간본연의 욕구로서의 의의를 상실한 채, 각종 음란산업과 더불어 변질되고 있다. '과연 사회 속에서의 공공복리와 개인의 자유라는 측면을 어떻게 조화시켜 갈 것인가'만을 생각한다고 성문화에 대한 사회적응력이 창조되지는 않는다. 여지껏 크게 대두되지 못하고 뒤에서만 이뤄지던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사회구조적 탐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성문화 또한 사회 속에서 다수가 살아가는 모습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6.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현대문화란 대중에 의해 이뤄지는 대중문화적 속성을 띄고 있으며 그 형태도 복잡다단하다. 그 파급의 영향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다가오고 있으며 세계는 가까워졌지만 오히려 개인은 더욱 고독해지는, 즉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고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변형이기에 커다란 충격도 없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간혹 상상을 뛰어넘는,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들이 속출되면서 가치관이 혼란스러워지고, 서야할 올바른 자리를 알 수 없는 현대인들에 의해 그 실체를 종잡을 수 없는 현대문화. 과연 현대문화적 생태들이 올바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평가하기란 어려울뿐더러 대안의 제시가 없는 평가는 문화에 있어서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역사의 변증법적 흐름 속에서 인간의 모습은 순환, 반복된다. 발전하는 시대상 속에서 그것을 반영하고 때로는 실천하는 문화는 갈수록 더해지는 인간소외 속에서 더욱 낯선 모습들로 변해갈 것이다(신세대라는 사고도 그러한 낯선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속에서 생활하는 우리 자신은 그다지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들의 모습도 그와 함께 변해갈 것이기 때문에. 1994.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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