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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윤효정 ('95)
96년 3월 *일 오늘도 동전 뿐이다. 우연히 집에 오는 길에 친구를 만나서 이것뿐이다. 돈이 충분히 모이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되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허름하거나 음침하거나 소름돋는 곳이어서는 안된다. 96년 3월 *일 한동안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도대체 지하라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버스를 탄다. 덜컹덜컹 세상이 흔들거린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엉켜붙은 간판뿐이다. 홍수다. 풍요 속의 빈곤이며 약에 쓰려던 개똥이다.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다. 96년 3월 *일 오늘도 동전뿐이다. 다른 버스를 타기로 한다. 바둑판 같기도 하고 경지정리한 논 같기도 한 간판들이 늘어섰다. 이 버스가 마음에 든다. 무언가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찾았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줄 몰랐다. 96년 3월 *일 돈 모으기가 힘들다. 이 사실은 온갖 잡 생각에 온몸을 축축하게 만든다. 게다가 냄새까지 나는 듯하다. 장마철에 잘못 말린 빨래처럼 말이다. 레코드 가게를 지나면서 레코드를 사고 싶었다. 예술이란 게 지나친 사치처럼 느껴졌다. 부루조아들의 전유물이지 싶었다. 부루조아가 필요하다. 물론 상대적 부루조아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부루조아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96년 3월 *일 돈을 빌리려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유를 말할 수는 없다. 그 눈빛을 참을 수 없다. 이해를 매체한 눈빛을 견디기 힘들다.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시바삐 돈이 필요하다. 필요 앞에선 뭐든 무릎을 꿇는 거다. 이해를 바라는 것은 우습다. q라면 이해해줄 수도 있는 사람이다. 나한테 분명 실망할 거다. w라면 동정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담 주기 싫다. e라면 여기저기 말하고 다닐 것 같다. r이라면 너무 이해하다 못해 내가 느끼면 그대로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아예 잘 모르는 사람이 좋겠다. 96년 3월 *일 ㄴ의 전화번호를 알아보기도 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나? 전화할 때마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건 싫다. 아주 애처롭게 보이도록 말한다. 푸념을 늘어놓으며 돈이 없어서 절망적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아니다.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우선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왜냐고 물으면 짧게 대답한다. r이라면 ㄴ의 전화번호를 알 거다. r이 전화번호를 물어보면 의아하게 생각할 거다. 그러면 나는 목소리를 떨며 아무일도 아닌 듯이 말할 거다. r한테 알리면 안된다. 적어도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96년 3월 *일 월급을 기다리기도 한다. 내 상태가 악화되어도 어쩔 수 없다. 96년 3월 **일 월급을 가불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갔다 와야 한다. 모든 게 분명해지면 r한테 얘기할 거다. 버스를 타면서 무서웠다. 인생은 빠징고다. 모 아니면 도다. 무서울 건 없다. 그곳은 한산했다. 눈빛들을 피할 필요가 없다. 편안해진다. 유럽 어딘가에 거짓말을 하면 손을 자르는 석상이 있다고 한다. 그 석상은 입을 벌리고 있고 사람들은 그 속에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한다. 손은 잘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고 손이 잘려나가길 기다리다가 손은 잘리지 않는 걸 믿는다. 알고 있는데 믿지 못한다. 난 내가 그 병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그곳을 가도 달라질 건 없다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도 진찰대에 누워 아프다고 말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 96년 3월 **일 돈이 남는다. 돈을 위해 위에 구멍난 훈장을 달았다. 콩쥐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먹을 걸 쑤셔넣는다. 나한테는 개구리친구가 없다. 구멍은 때워지지가 않는다. 개구리 친구가 아니라 올챙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눈물이 난다. 먹으면서 우는 건 질색이다. 내가 필요할 때 r이 없다. 외면하고 싶지만 필요하다. 96년 3월 **일 r을 만났다. 어색했다. r이 화를 낸다. 눈물이 났다. 속이 아팠다. 그곳 얘기를 안 할려고 했는데…… 그러면 끝나는 건데……. 96년 3월 **일 사람과 사람이 만났다. 눈빛은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며, 이해는 바랄 필요가 없는 거다. 1996.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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