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崎 論(미야자끼 하야오 論)

박세준 ('93)




첫 만남

1993년 5월, 그러니까 법대 1학년 첫 축제때 나는 학교의 모 영화써클에서 주관하는 일본만화상영회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공대 캠퍼스 과도관의 한 강의실을 빌어서 거행했던 조그마한 상영회였던 데다가, 마침 그날 오후에 축제의 하일라이트인 입실렌티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저녁에 있을 짜릿한 일들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단지 지루하진 않을 타임킬링'이라는 생각을 했을 따름이었다. 검은 커튼으로 어두컴컴해진 강의실의 문을 열고 살금살금 들어가 책상에 앉았을때 이미 상영을 시작한 만화는 웬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였고, 사막의 배경에 웬 괴물들이 있는 것이 꼭 SF소설 '듄'인것 같았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그것은 잔잔한 충격이었고 또한 감동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바로 '바람의 계곡-나우시까'였고 충격탄은 바로 '미야자끼 하야오'라는 작자에 의해 제공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날 나는 나머지 두 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와 '붉은 돼지'를 모두 다 보았고 끝내는 입실렌티에 늦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의 학회지편집때 '천공의 성 라퓨타'에 관한 감상문을 제출하였다.

지금은 '미야자끼 하야오(宮崎 駿)'라는 이름은 식상하리 만큼 많이 알려진 이름이 되었고, 일본만화를 얘기할때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재패니메이션의 거대한 산(山)이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의 작품이 재밌다느니, 하늘과 비행의 묘사에서 내 어린날 꿈을 찾았다느니 식의 얘기를 지껄이면 또 그딴 소리냐며 짜증마저 내려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므로 쓸데없는 작품감상은 배제하기로 하고 전제로만 해둔다.

그의 삶

마치 무슨 만화의 캐릭터처럼 생긴 미야자끼 하야오(이하 미야자끼로 한다.)는 1941년 1월 5일 도꾜에서 태어났다.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강의 3국동맹의 붐을 타던 시대에 군수공장의 장(長)으로 일하던 아버지 덕택으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미야자끼는 1945년 일본항복과 함께 기울어진 가세속에 빈곤한 유년기를 보내게 되는데, 당시 그의 어머니는 척추카리에스(결핵균이 척추에 들어가 생기는 병)에 걸려 병상에서만 누워 지낸 관계로 그는 아버지와 함께 4형제가 모두 가사를 분담하는 형태의 집안구조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여느 전형적인 예술가들처럼 내성적이고 예민했던 미야자끼는 '메트로폴리스','아톰대사','로크의 모험기'등의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에 의해 감화되고 그 중에서도 '태평양의 X 포인트(53년)'와 후쿠시마 데츠지의 '사막의 마왕(52년)'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이르러 미야자끼는 만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게 되고 습작만화들을 그리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일본 만화계는 하나의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토에이(東映)동화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白蛇傳)(58년)'의 탄생이었다. 바로 이 작품이 미야자끼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들어 놓았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백사전'은 단순한 만화가를 넘어 애니메이터로서의 자극을 준 작품이었다는 점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미대진학을 포기하고 가쿠슈인 대학의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한 미야자끼는 전공보다는 그림에 몰두하며 아동문학써클에 가입, 자신의 만화관을 굳히게 된다. 그리고 1963년 대학을 졸업한 미야자끼는 그해에 바로 토에이동화에 입사하여 에니메이터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고, '멍멍충신장(63년)'부터 일을 시작한다. 단순 동화담당이었던 그는 '걸리버의 우주여행(64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급기야 도에이 노동조합의 서기장을 맡기에 이른다. 이 노동조합에서 미야자끼는 훗날 콤비로 이름을 날리게되는 타카하타 이사오(高畑 勳)(아하 타카하타로 한다.)를 만나 서로친교를 쌓아가는데, 사상적인 면에서 박식한 타카하타로 부터 미야자키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68년)'의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미야자끼와 타카하타는 흥행실패라는 고난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장화신은 고양이', '하늘을 나는 유령선','동물보물섬'등의 작업을 통해 착실히 입지를 다지게 되고, 1971년 타카하타와 함께 토에이를 퇴사하여 A프로로 이적한다. 이 곳에서 '루팡3세'팀에 합류하여 연출을 맡은 미야자끼는 1972년, 1973년 극장용 단편 '팬더와 아가팬더'와 그 속편을 통해 확고한 위치를 잡는다. 그 후, TV 애니메이션 '알프스소녀 하이디', '엄마찾아 삼천리', '빨간머리 앤'등 타카하타가 연출했던 여러 시리즈에서 스텝으로 발을 맞추며 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인 그는 1978년 처음으로 독자 연출을 맡은 '미래소년 코난'에 이르러 평론가와 팬들 모두에게 대단한 반응을 불러 모으게 되지만, 1979년에 만든 그의 첫 감독 데뷔작 '루팡3세 카리오스트로 성'이 보기 좋게 실패함으로써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 휴유증은 무려 3년이라는 긴 공백을 안겨다 주게된다. 그 긴 공백을 깨고 미야자끼는 '바람의 계곡 나우시까'의 구상과 원작만화를 들고 화려하게 복귀하게 되는데 일본 애니메이션의 꿈의 메카라 불리우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으로 시작한 작품들은 그 이후 그야말로 미야자끼의 황금시대를 열게되고 '천공의 성 라퓨타(86년)', '반딧불의 무덤(88년)', '이웃의 토토로(88년)', '마녀의 특급배달(89년)', '추억은 방울방울(91년)', '붉은 돼지(92년)',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 폼포코(94년)', '귀를 귀울이면(95년)' 등은 평론가들과 관객들에게 엄청난 반응을 가지고 오게되며, 이는 미야자끼 마지막 작품이라는 '원령공주(97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해 무려 1200만명 관객돌파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물신주의, 공산주의

미야자끼의 작품에선 일종의 단단한 지반이 되고 있는 두가지의 사상이 보인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바로 물신주의(物神主義)사상과 공산주의사상이 그것이다. 이른바 신도(神道)로써 대표되는 물신주의사상은 어떠한 존재이든 그것을 물질화, 현실화시켜 그것에 의미를 두는 경향을 일컫는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 -예를 들면 천사나 마녀- 를 현실에 투영시켜 실존하는 존재처럼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가끔 '의인화'수법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 사상은 '만물에는 정령이 깃들여 있다.'는 생각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구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같은 작품에서 이러한 사상의 절정을 이룬다고 할 수있는데, 미야자끼는 이를 가상의 세계와 실존의 관객을 이어주는 고리로 사용한다. 그런데 이같은 방식은 가상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많은 작품 속에서 흔히 어느정도는 사용되는데, 이를 어색하지 않게 관객이 몰입하게하는 기술이 바로 미야자끼의 능력이다. 대학시절, 마르크스사상과 안보투쟁에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미야자끼는 1960년대의 여느 일본 대학생들처럼 사회문제의 대안은 공산주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토에이 동화의 입사동기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의 표상 디즈니에 대항하기 위해 입사했다고 밝혔다 하며 자신을 '심정 좌익(心情左翼-마음은 좌익이란 뜻)'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작품 상당수에서 인간의 공동체생활, 소규모 자치사회의 모습은 자주 비춰지긴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마르크스사상을 운운하는 것은 무리이다. 미야자끼는 상실되는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자신의 성장기, 아버지와 4형제가 가사를 분담해야 했던 시기를 떠올리며 그가 그리고 싶은 공간의 연출을 위해 정치적인 어떤 것과는 동떨어진 공동체사회를 그린다. 물론 그안에서도 약간의 권력지향적 행동들이 묘사되지만, 미야자끼의 공동체는 오히려 히피의 그것에 가깝고 그들의 공간은 폐쇄성마저 유지하는데 그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하늘도 상당부분은 히피들을 열광시킨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과 통하는 면이 많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재밌는 사실이 있다. 한국에서 미야자끼의 작품들이 상영이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문화가 아직 개방이 잘 안되어서가 아니라 문어발식 검열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이유는 그의 불순한 사상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애매한 이 잣대에 대해서 미야자끼의 작품은 한국에 있어서 마치 '사상의 자유를 수호할 투사'임에 틀림없고 우리들은 그가 던진 사상을 본받아 투쟁하겠다는 식의 소위 그 잘난 매니아들의 글을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던간에 한국에서 이같은 '쇼타임' 벌어지게 만든 미야자끼는 대단하긴 한가보다.

그의 여자들

미야자끼의 작품들에는 거의 대부분의 주인공이 소년, 소녀인데 소녀, 즉 여자주인공의 능력치는 남자주인공을 능가할때가 많다. 그의 작품에 등장했던 여자들의 특징은 참으로 강한 여성이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그들이 고집불통이고 이기적이냐 하면 그렇다기 보다는 항상 남자주인공을 내면 깊숙히 이해하는 모성애의 모습을 가지고 남자주인공을 리드하여 목적에 다다르게 해주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어필된다. 그의 이러한 히로인들은 정말 매력적이기 짝이 없는데, 이 때문에 그의 영화는 종종 패미니즘계열로 분류되기도 한다.(이런 평가는 '마녀의 특급 배달(89년)'에서 최고를 이룬다.) 그러면 무엇이 미야자끼에게 이 같은 한결같은 스타일을 구축하게 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밝지만은 않았던 그의 유년기에서 기인하는 듯 싶다. 난치병(척추카리에스)으로 항상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와 그로 인해 아버지와 함께 가사를 꾸려야했던, 내성적이고 심약했던 그의 내면에는 자신을 지켜주고 전부를 받아주는 강한 어머니상이 자리잡았을 것이고 그것은 바로 그의 이상형으로 자리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천공의 성 라퓨타(86년)'의 여두목 '도라'가 그가 그린 진정한 어머니상이라 말한다. 또한 미야자끼의 여친네들은 모두 연기를 잘한다.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나이에 맞게 행동하면서도 그러한 강한 모성애를 끌어낸다. 그러면서 시간이 갈수록 남정네들도 살아 숨쉬는 존재로 변하게 하면서 그의 캐릭터들은 하나 둘씩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스토리전개에 개연성과 힘을 실어준다. 곧 그의 여친네들은 믿을만한 선발투수진인 것이다.

하늘과 비행

영상매체를 이용해서 무엇을 한다는 이들에게 '빛'이라는 것과 '색'이라는 것은 영구미제의 과제물이다. 미야자끼가 산(山)과 같은 거대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애니메이션에서만, 그것도 자신의 세계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빛과 색의 활용이다. 미야자끼 하야오, 즉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은 컴퓨터 그래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폴리곤을 이용한 3차원 그래픽은 더더욱 기피한다. 이는 미야자끼가 원색계통을 혐오하기 때문인데, 그의 작품의 색채설정팀은 '투명감 있는 색'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색은 오로지 물감으로만 빚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야자끼는 원색계통, 즉 컴퓨터그래픽의 색과 빛은 천박한 싸구려라고 느낀다. 그래서 그가 만든 하늘은 투명하고 아름답다. 현실과는 다르고,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는 디즈니의 그것과도 자못 다른 '맛이 있는' 하늘이다. 그 하늘을 날고픈 욕구를 미야자끼는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집착하고 무언가를 날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의 비행씬은 날아다니는 것이 비행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도 마술에 걸린 듯 공중으로 뜨고 마녀와 천사도, 토토로 같은 괴물도 날수 있는 별의 별개 다 떠 돌아다닐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다. 나는 그의 이러한 비행씬 만큼은 정말 극찬하고 싶다. 그의 비행씬은 원근감있는 2차원 공간이 보여줄 수 있는 동영상의 극대치라 할 만하다. 공간 구성과 장면바뀜, 속도감의 3박자에 음악까지 더해져 마치 롤러코스터에 앉아있는 기분까지 나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그는 2차원 공간을 나누고 분리하고 잘라서 쓸 줄 안다. - 그의 이러한 재능은 유명듀오 '차게 & 아스카'의 'ON YOUR MARK' 뮤직클립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전매특허 명장면을 매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게 담을 수 있다는 것. 미야자끼가 스타일리스트인 이유다.

히사이시 죠

애니메이션은 일종의 종합예술이다. 영상이 아무리 잘 되어도 그에 맞는 소리를 입히지 못하면 그것은 무성영화보다 못하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까(84년)'부터 '원령공주(97년)'까지 스튜디오 지브리와 함께해온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히사이시 죠(久石 讓)(이하 히사이시로 한다.)는 미야자끼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소리의 은인'이었고, 그가 있었기에 지브리의 미야자끼 작품들은 마스터피스가 될 수 있었다. 미야자끼와 히사이시는 대화를 통해 스토리를 교류한 다음 테마의 이미지를 잡은 후, 영상제작의 세밀한 부분의 진행에 따라 테마를 삽입할 장면을 설정하여 테마를 완성하고 전체 사운드 트랙 앨범제작에 들어간다. 앨범에서 추가된 곡을 다시 적절한 곳에 배치하고 영화상영과 동시에 사운드 트랙도 정식앨범으로 발매하는 방식으로 일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거의 이 일은 히사이시 자신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한마디 덧붙이면, 히사이시는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총괄 프로듀서로 활약했을 만큼 지명도가 있는 인물이다. 역시 사건을 치는 사람에게는 든든한 동지가 있게 마련이다.(91년 빅히트를 기록했던 가수 윤상의 '이별의 그늘'의 표절논란은 바로 히사이시의 '천공의 성 라퓨타' 주제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메세지를 받아라

미야자끼영화는 절대 성인용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눈높이를 어린이에게 맞추지는 않는다고는 해도 그는 애니메이션에 항상 메세지를 담아서 전달하려 한다. 그리고 그 메세지들은 나름대로 명확하게 담겨있다. 미야자끼는 메세지의 전달욕에서 오는 드라마의 흐트러짐을 막기위해 아주 효과적인 장치를 해두는데, 그것은 적은 대사량이다. 그는 대사를 많이 억제시키는 대신 많고 빠른 움직임으로 관객의 얼을 빼며 극의 이해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스타일리스트인데, 속도조절에 있어서만큼은 정말이지 따를 자가 없을 것 같다. 어느 때 속공을 펼치고 지공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기습적인 빠른 속공 몇개가 상대의 얼을 빼며 점수차를 확 벌린다는 것도 알고있다. 그 순간 순간에 메세지를 주입하며 감동이 솟게 하여 그는 관객에게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고, 마지막 순간에는 지공과 타이트한 수비로 완전한 승리를 유도한다. 솔직히 나는 이 점이 기분나쁘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가 최소한 극장안에서는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세상에서 조물주처럼 군림하려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생각을 해본다. 우선 저 얼을 빼는 속공을 막기 위해 비판적인 관객은 런닝타임 내내 터프한 수비의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때를 봐서 우리가 속공을 해야한다. 어차피 상대는 최고의 수비를 할 것이기에 방법은 그거다. 그것은- 바로 메세지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치고 나가는 것. 그러나 메세지는 부정할 수 없이 보편적이고 타당한 '인간과 자연'이다. 정말 어렵다.

인종차별

미야자끼의 작품들에 관한 논란이 가장 큰 부분은 서양사대주의로부터 비롯된 인종차별주의에 관한 부분이다. 나는 이 부분 때문에 그의 보편타당한 메세지를 그대로 수용하기가 어렵다. 또한 미국 제국주의의 표상 디즈니에 대항하기 위해 토에이동화에 입사했다는 그의 청년시절의 말도 이부분에 있어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의 작품을 보면 유럽의 백인문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영국, '마녀의 특급배달'은 스칸디나비아반도, '붉은 돼지'는 파시즘이 판을 치던 1920년대의 이탈리아가 작품배경이다. 흑인, 황인종 같은 인물들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흰 살결에 훤칠한 사람들만이 생각할 줄 알고 서로 사랑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검은 피부는 촌스럽고 웃긴놈들이라는 생각은 일본 TV 애니메이션 - 알프스 소녀 하이디, 플랜더스의 개, 엄마찾아 삼천리, 빨간머리의 앤, 그리고 그 옛날 요술공주 샐리에 이르기까지 - 에서도 한동한 성행하였던 사상이었고 미야자끼도 그러한 작업을 했던 애니매이터들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수 없다. 게다가 그는 몇년전 한국인 비하 발언을 하여 그 잘난 매니아들사이에 논란의 불씨를 붙인 적도 있다. 그러한 자신의 서양을 향한 세련의 동경에서 탈피하려고 미야자끼 스스로도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실제로 '이웃의 토토로', '귀를 기울이면', '원령공주'등은 모두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세대가 그렇듯, 2차 세계대전중에 태어나고 혼란기를 겪으며 성장한 미야자키에겐 서구에 대한 동경과 열등의식은 참으로 넘어서기 어려운 한계였을지 모른다.

왜 그인가?

그렇다면 왜 미야자끼 하야오인가? 그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최고 흥행가라서? 다른 작가들이 한결같이 '우리는 미야자끼에게서 나왔다.'고 외치고 있어서? 도대체 왜?

최고의 흥행가는 화제만발의 사내가 될수는 있어도, 그가 반드시 최고의 작품을 한다는 보장이 없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일테고. - 혹시 누군가가 스튜디오 지브리의 흥행과 관련된 마켸팅전략이 탁월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은 엄청난 신지식의 소유자인 심형래에게 묻는 게 낫다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형들을 제시한 것은 바로 '철완 아톰'의 데츠카 오사무이지 미야자끼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미야자끼라고 말하고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는 확실한 스타일을 가진 만화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일본만화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데츠카 오사무는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지켜야 할 보편적 원칙과 표현의 정형을 세운 획기적인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미야자끼는 그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그의 극복을 지상과제로 삼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들은 그를 개성이 뚜렷한 스타일리스트로 성장시켰고, 데츠카 오사무의 '기초적인 그것중 일부'들은 미야자끼 하야오의 '특별한 그것'으로 변하여 새로운 성역이 되었다. 즉, 일찌기 미야자끼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데츠카 오사무를 극복하는 길이며, 엄청난 제작비를 투하하는 디즈니에 대항할 수 있는 길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미야자끼는 후배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는 하나의 산이 되었다. 이른바 '미야자끼 스타일'은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의 애니메이터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참으로 다가서기 두려운 소재들이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하면, 예를 들어 하늘을 나는 비행선을 정말 멋있게 표현하고 싶어하는 애니메이터가 있다면 그는 작업 내내 미야자끼를 의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와 비슷할라 치면 눈썰미 있는 관객들이 한결같이 '저건 미야자끼의 영향이군.'이라며 코웃음을 치고, '독창성 부족'이라는 창피스런 기사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다른 충격적인 비행씬을 위해 밤낮으로 고민할 것이다. 나름대로 새로운 스타일 정립에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공각기동대'와 '패트레이버'시리즈의 오시이 마모루(押井 守)도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앞에 큰 석두가 하나 있었는데 너무나 무겁고 딱딱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또 그 석두는 무지하게 시끄러워서 나는 거의 매일 밤낮으로 석두와의 말싸움을 벌였는데, 그 결과 나도 또 하나의 석두가 되어 간다는 걸 깨달았다. 그 우리 집 앞의 석두. 그가 미야자끼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럼 우리는?

미야자끼의 '자신만의 스타일 확립'이라는 작가관념은 우리에게는 시사하는바가 매우 크다고 할수있다. 그런데 현재 이에 대한 논의는 이제야 무르익는 듯한 느낌이다.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하고 나선 이명세감독의 '인정사정 볼것 없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인데, 이대로라면 흥행면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나는 얼마 전에 모잡지에서 아주 흥미롭게 본 기사가 있다. 기사 이름하여 '우리는 모두 꺼벙이에서 나왔다.' 맞는 말이다. 일본에서 데츠카 오사무를 추앙하듯, 우리도 우리만의 원류를 찾아 그 제시된 정형들을 묶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길창덕 선생은 정말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뚜렷한 철학이랄지 그놈의 메타포나 알레고리가 없어도 그는 명랑만화는 이런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장르의 정형들을 제시했으며 이는 후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새로운 스타일의 시도와 이제와서 부각되는 원류찾기 - 매치가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들려 하는 신선하다 느끼는 스타일들은 모두 어디서부터 나왔단 말인가. 게다가 나는 요즈음 '인정사정 볼것 없다'에 항상 '메세지의 부재'라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을 볼때미다 정말 이해가 되질 않는다. 왜 그렇게 메세지가 있길 바라는가? 소재가 무엇이고 주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답안을 제출해야 했던, 그래야 남보다 높은 점수로 기분 좋아할 수 있었고 똑똑하다 칭찬받던 우리의 국어교육때문인가. 아니면 답답한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구원과 희망의 손길을 원해서인가.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은 그러한 메세지가 있었기에 '한국적 폭력미학'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그래서 외국비평가들을 사로잡았나.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나왔는지도 정확히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스타일이란 매 작품마다 표류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거의 대부분 '새로운 도전, 그러나 범작 수준' 이란 말만을 되풀이 해왔다. 그러면 그렇지. 그것은 메세지도 없는 쓰레기니까. 골 빈 놈이 양아치짓하다가 지 감성만 믿고 지 멋에 찍은 영화일 테니까. 그러다가도 어렵사리 스타일을 표방하는 작가의 영화들이 어쩌다 외국에서 상이라도 한번 탈라치면 한국영화의 쾌거라며, 문화첨병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둥 호들갑들을 떤다. 이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싹 들어간다. 이 얼마나 지독한 문화사대주의인가.

아까 잠시 언급했던 오시이 마모루의 경우를 보자. 걸작으로 분류되는 그의 '공각기동대'는 사실 여러번을 봐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그 작품은 사람들을 지루하지 않게 빨아들이는 힘이 있으며, 미야자끼와 지브리가 기피해 마지않는 컴퓨터 그래픽의 원색을 동원, 새로운 세계를 우울하고 암울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폭력성과 퇴폐성까지도 잡아내지만 그것만이 목적인 작품이 아님을 느끼게 할만큼 미학적인 표현으로 일관한다. 즉, 오시이 마모루는 메세지를 던지려는 미야자끼와는 분명히 다르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스타일로 떠오르며, 미야자끼의 보편성 대신에 컬트성을 가진 장치들로 미야자끼를 극복한다. 만약 이명세가 이와 같은 마인드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찍었다면 우리는 그에게 표를 몰아줘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겐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원류가 무엇이지 찾지 못했다면, 혹은 찾았더라도 긴 단절의 기간으로 인해 그것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앞으로 극복해야 할 새 정형의 확립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헐리웃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뭐가 어쩌고 저쩌고. 국내의 평가에 크게 연연할 것 없다. 우리의 스타일리스트가 외국에서 상 한번 타고 계약체결하는 날엔, 저 영원한 우리의 드림 헐리웃에 노크라도 하는 날엔 그는 신지식인이 되는 무한한 영예를 안을 것이고 그 스타일로 정치를 하게 될 날도 올거니까. 메세지 없는 정치스타일? 기대된다.

작품연보


1963년
멍멍충신장 / 토에이 동화
늑대소년 켄 / 토에이 동화
1965년
걸리버의 우주여행 / 토에이 동화
소년닌자 바람의 후지마루 / 토에이 동화
허슬펀치 / 토에이 동화
1966년
레인보특공대 로빈 / 토에이 동화
1968년
마법사 샐리 / 토에이 동화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 토에이 동화
1969년
장화 신은 고양이 / 토에이 동화
하늘을 나는 유령선 / 토에이 동화
무밍 / 토에이 동화
비밀의 앗코창 / 토에이 동화
1971년
동물보물섬 / 토에이 동화
아리바바와 40인의 도적 / 토에이 동화
사루토비 엣창 / 토에이 동화
긴 양말의 삐삐 / A 프로
루팡3세 / A 프로
1972년
유키의 태양 / A 프로
아카도 류노스케 / A 프로
1973년
팬더와 아기팬더 / A 프로
팬더와 아기팬더
-비온날의 서커스 편 / A 프로
황야의 소년 이샘 / A 프로
사무라이 자이언츠 / A 프로
1974년
알프스 소녀 하이디 / 니혼 애니메이션
1975년
플랜더스의 개 / 니혼 애니메이션
1976년
엄마찾아 삼천리 / 니혼 애니메이션
1977년
초원의 아들 텐그리 / 니혼 애니메이션
너구리 파스칼 / 니혼 애니메이션
1978년
미래소년 코난 / 니혼 애니메이션
1979년
빨간머리 앤 / 니혼 애니메이션
루팡3세 카리오스트로성 / 텔레콤
1980년
신 루팡3세 / 텔레콤
신 철인28호 / 텔레콤
1981년
리틀 니모 / 텔레콤
1982년
명탐정 홈즈 / 무소속
쾌걸 조로 / 무소속
스페이스 어드벤처 코브라 / 무소속
1984년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 무소속
히타치CF두편 / 무소속
1986년
천공의 성 라퓨타 / 스튜디오 지브리
야나가와의 운하이야기 / 스튜디오 지브리
이웃의 토토로 / 스튜디오 지브리
1989년
마녀의 특급배달 / 스튜디오 지브리
붉은 까마귀와 유령선 / 스튜디오 지브리
1991년
추억은 방울방울 / 스튜디오 지브리
1992년
붉은 돼지 / 스튜디오 지브리
하늘색 씨앗 / 스튜디오 지브리
뭐야 / 스튜디오 지브리
1994년
헤이세이 너구리전쟁 폼포코 / 스튜디오 지브리
1995년
ON YOUR MARK / 스튜디오 지브리
귀를 기울이면 / 스튜디오 지브리
1997년
원령공주 / 스튜디오 지브리

1999.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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