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웃들

이민서 ('99)

손바닥 위로 물이 산산히 흩날린다. 빛이 반사되어 물방울들은 순결한 흰 빛으로 부서진다. 어느새 그것들은 타일 벽을 촘촘하게 채웠다. 잔잔한 구형의 물방울들로 욕실 벽이 완전히 뒤덮였다. 그는 유심히 그것을 바라본다. 일부러 샤워기를 놓는다. 연결된 호스는 혼자 힘으로 물줄기의 강한 흐름을 버티지 못하고 격렬하게 몸부림을 친다. 갑자기 시야를 가리는 물방울들. 희뿌연 증기 사이로 어즈러이 분무하는 물. 그것들은 순간 그의 동공에 아름답게 어린다. 그는 그 꿈틀대는 물줄기가 자신을 완전히 적시도록 멈춰 있다. 흠뻑 젖도록 흠뻑 어디까지라도 적시도록 그냥 서 있는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물을 천천히 잠그고 몸을 닦는다. 계속 전화가 울린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는 시끄러운 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타월로 구석구석 물기를 제거한다. 전화벨 소리가 드디어 그친다. 그는 천천히 나온다. 옷을 입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 있다.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시선. 그는 날렵하게 옷을 걸쳐 입은 후 열쇠를 챙겨 밖으로 나온다. 금속성의 울림에 조용한 표정이 약간 일그러진다. 무의식적으로 한쪽 입가를 올린다. 그 순간 눈이 잔인한 팔월처럼 빛난다. 그의 눈은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초연함과 그것을 벗어버리려는 격렬함이 뒤범벅이 되어 몹시 인상적이다. 그러나 곧 그 특징적인 강렬한 빛이 한층 사그라든다. 그는 표정을 가다듬으려고 깊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올린다. 보기 좋게 기른, 약간 길어보이는 앞머리, 옅은 갈색의 가느다란 머릿결이 섬세한 인상을 준다.

툭툭 바지에 붙은 먼지를 털고 계단을 잰 걸음으로 내려온다. 1층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누군가와 가볍게 팔꿈치를 부딪힌다. 그는 생각에 잠겨 그냥 지나친다. 상대 역시 무심코 한번 뒤돌아보고 그냥 스쳐간다. 부딪힌 남자는 복도를 두고 마주 보는 바로 앞집에 살고 있다. 서로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꽤 긴 시간을 함께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관심이 때로는 차라리 정다운 것이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시선을 쳐들고 멈칫 선다. 그러나 곧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간다. 현관 문이 쾅 닫히면서 그 둔중한 울림이 복도에 퍼진다. 어두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문은 몹시도 적막하다. 여기는 한낮에도 빛이 잘 들지 않는다. 계단이 연결되는 지점에 창이 하나 있긴 했으나 먼지 낀 좁은 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은 이곳에 오래도록 누적된 질척한 어둠과 한기를 걷어내기에는 턱없이 양이 적었다. 그러나 이곳에 그러한 침묵은 더할 수 없이 어울린다. 그 고요함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언어다. 비록 침울한 고통으로부터 시작된 상흔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두 문은 마치 영원히 그럴 것처럼 마주 닫혀 있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그것만이 어울릴 뿐이다. 그곳을 드나드는 인간을 이 장소가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문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듯 기묘한 포즈로 함께 고요함을 즐기고 있다. 참으로 상투적이며 한편 역설적인 것이다. 서로 잠겨 있는 두 집의 언어가 묘한 동질감을 지닌다는 것, 한 집의 고독과 다른 한 집의 고독이 똑같은 침묵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그 침묵은 이미 하나의 언어다. 그 외에 서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대들의 벽 안에 단단히 칩거하고 있는 존재들은 서로를 몰라야만 한다. 실로 경쾌한 외면이 필요한 시대다. 파랗고 뜨거운 밤, 환하고 차가운 불빛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온다. 항시 그 거리를 뛰어다니는 익명의 존재들은 알고 있다. 그것은 어떤 감정을 배태하고 있지 않아서 모두에게 즐겁다. 그러나 밖은 몹시 눈이 부시리라. 혼미해질 것이다. 전신은 잠시만이라도 기억에서 해방되고 나른해져 할 말을 잃으리.

아파트를 빠져나와 그는 건물 밖에서 잠시 멈춰 선다. 눈이 부셔 미간을 약간 찌푸렸지만 오후 햇살이 어두움을 껍질채 환히 벗어 버리듯, 순간 표정이 한 톤 밝아진다. 잠시 그는 눈을 똑바로 태양에 맞춘다. 찡그린 얼굴을 고정시킨 채 서 있다. 그는 한숨을 깊이 내쉬지만 즐거워 보인다.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러나 깊이 내뱉는 숨은 단지 근심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상냥한 숨결, 짙게 물든 깊은 바다색의 표정에 한숨이 바람이 되어 내려 앉는다. 그는 천천히 걸어간다. 은회색의 차를 탄다. 차는 늘씬하게 미끄러진다. 날씨가 몹시 쾌적하다. 상큼한 공기가 차체에 말랑하게 붙었다가 천천히 몸을 따라 미끄러진다. 그의 차는 빛을 우아하게 반사시킨다. 그 몸짓은 정적을 차차 걷어낸다. 먼지가 약간 날리는 길, 잡다한 소음 속으로 접어들면서 죽음처럼 붙어 있던 그림자들이 무너진다. 그의 차는 다른 차들과 섞인다. 그는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속도를 전혀 느낄 수 없다. 늘어진 테입에서 들려오는 좋아하는 곡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것은 실제보다 곡을 아름답게 들리게 한다. 어떨 때는 그것이 오히려 묘한 배신감을 주기도 하지만.

차 안에 타고 있는 그는 여전히 시선을 아주 먼 곳에다 둔다. 가벼운 냉소를 걸치고 있다. 그의 입가는 의외로 표정의 변화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 듯 그는 냉소를 물고 다닌다. 거기에는 순수한 무언가가 아직 위태롭게나마 얹혀있는 듯 했다. 그는 차 안에 혼자 있지 않은 듯이 앉아 있다. 그 자세는 누군가에게 말을 계속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차와 함께 차 이상의 것과 함께 그 자신 이상의 것과 함께 달리고 있다. 그는 어쩌면 고독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그것을 완벽하게 모르고 살아가는, 그렇기에 절대로 고독하지 않은 족속인지도 모른다.

차는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는 바퀴는 억지로 실수하게 하려고 해도 그리되지 않는다는 듯 교활하며 노련하다. 굴러가는 움직임 속에는 거기 얹힌 그의 무게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분명 알고 있다. 그는 그녀에게로 가고 있다. 움직임 속에 기대와 절망은 교대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결국 완전한 무엇 하나도 될 수 없는 굴러가는 순간일 뿐이다. 고통을 지혈하기 위해 단단히 그 부위를 감싸 쥐어야 할 완전한 정지의 순간이 다가온다 해도, 순수하게 굴러가기만 하는, 무게가 얹히지 않는 움직임들이 인생을 이미 메꾸고 있기 때문에. 그는 통째로 그녀를 향해 다가서고 있다. 그는 좌절을 예감한다. 그것을 수없이 경험했고 그 고통을 알고 있다. 고통은 인간에게 뿌리 채 안겨 온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다. 그는 불현듯 오늘 하루를 다 알아 버렸다. 그러나 그는 통째로 굴러간다. 무게 없이 미끄러지는 바퀴에 얹힌 무게 없는 존재로서 한없이 경쾌하게 굴러간다. 그는 스스로 멈출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예의란 무엇일까 그는 잠자코 그것을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그녀를 보고 싶은지 그 자신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는 그녀를 원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많은 것을 경험했다. 그녀 뿐 아니라 인생에서 수없이 주어지는 좌절과 그것에 걸쳐진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그는 사랑이라는 말로 세상에서 허락하는 야비한 길을 택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는 지도 모른다. 어떤 욕망에 부질없이 매이기는 하지만 그는 감히 그것을 무엇이라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솔직하다. 아직은 날 것의 싱싱한 냄새를 가지고 있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살기 위해서 그는 무던히 노력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녀가 몹시 그리웠다. 그리고 이 순간 또한 한없이 피곤하여 차의 방향을 돌리고 싶은 기분도 든다. 그는 그녀를 보고 싶고 동시에 보고 싶지 않으며 좌절을 피하고 싶으면서도 한편 좌절을 향해 순종하고 싶다.

그는 그녀와 약속한 지점에 다다랐다. 그는 차를 주차시키고 차에서 빠져나온다. 그의 몸놀림은 오늘따라 민첩하다. 그러나 그 재빠른 동작들 사이에는 수많은 정지의 망설임이 배어있다. 그는 이미 알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기대와 절망의 교차는 이미 낡은 것이며 그는 그것을 피할 수 없이 살아 낸 것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

그는 까페에 들어 간다. 전면이 창이라 까페 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밝고 아늑하다. 여기는 한낮을 통째로 전시해 놓은 듯 아름답기 그지 없고 풍성한 빛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종종 그녀와 여기에서 만나곤 했다. 오늘도 여기서라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느껴진다. 그는 안심이 되어 둘러 보았다. 그녀가 이미 와 있었다. 그는 편안하고 유쾌한 기분이 든다.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자 환하게 미소를 터뜨려 준다. 그녀 역시 가느다란 웃음으로 답례한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어딘가가 어색하게 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녀는 오늘 날씨처럼 화사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보자 초조한 빛이 짧은 경련처럼 스친다. 절망이 하얗게 부서지면서 지나간다. 흰 광선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꺾일 때 경계를 구분하기 힘든 여러 색들을 한꺼번에 내뿜는다. 그 광경은 정말 아름답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다. 필요 이상으로. 그녀 얼굴에 절망과 함께 뒤섞인 환희를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녀는 떨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녀는 허약해 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는 갑자기 그녀가 가엾어진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정말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픈 충동을 왈칵 느낀다. 그는 그녀에게 이 순간 만큼은 몹시 절실한 연민을 품는다. 그는 그 감정을 곧 떨궈내어 버리겠지만. 그러나 이 순간 만큼은 한없이 그녀가 가여웠다. 참을 수 없이. 그는 좀처럼 그 감정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입가가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입술을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다. 그녀는 그의 얼굴의 섬세한 냉정함과 거기에 서린 차가운 칩거의 여운만을 읽는다. 그것은 최근 그가 앓아온 병 때문인지 다소 침울하고 한랭한 것이다. 그녀에게 수치와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종류의.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그를 보고 마음이 아프다. 그가 달고 나온 고통의 전신만을 응시한다. 그녀는 그의 아픔과 뒤섞인 기대의 변종들을 읽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의 의사소통은 어딘가 일그러져서 도무지 복구할 수 없었다. 오늘 그는 들어오면서 그녀를 보고 웃었다. 햇빛처럼 눈부시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웃음의 여운을 스펙트럼에서 좀처럼 분리해내지 못한다. 그녀는 지나치게 긴장했다.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근심에는 그의 몫보다는 그녀 스스로를 위한 것이 더 많았다. 그녀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열이 있는 것처럼.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어울리는 장식처럼 허영처럼 얼굴에 두른 슬픔은 과장도 아니고 더더구나 허위도 아니다. 꼭 그만큼의 몫으로 애초부터 그를 위해 남겨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 어느때보다도 환하게 아름답다. 그는 그걸 안다. 사실 더 이상의 말은 한 마디도 필요없다. 서로를 자세히 관찰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는 잘 알 수 있으니까. 이 순간에는 오랜만에 완전한 공명이 가능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긴 시간을 할애하면서 준비해온 날인만큼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누구보다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 하루를 예감했다. 좌절의 몫과 그 좌절 뒤에 주어질 어떤 복잡한 생의 순간들에 그들이 어떻게 서있을지를.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천천히 예비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상기한다. 그녀의 슬픔은 축소되어 간다. 조그맣게 응축되는 서글픔. 사라지는 시간에 그녀는 안녕을 고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녀를 잠시 바라본다. 그들은 여태까지의 시간에 서로가 걸어 왔던 수많은 기대, 거기까지 이르는 데 소요된 고통과 노력을 무너뜨리면서 만족한다.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아 꽤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킨다. 계속 응시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침묵이 차라리 어울림을 알았다. 그 침묵은 말하기 힘든 모든 것들을 섬세하게 표현하기에 그들은 그것을 감히 깨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일어 선다. 아무 말 없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 본다. 시선이 잠깐 부딪히면서 그녀가 먼저 웃어 보인다.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그에게 아쉬움과 미련을 떠넘긴다. 하지만 영영 그녀는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은밀한 진실들이 지워진 박제일 뿐이라하더라도, 그러나 이 순간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직도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충분히.

그는 그녀가 나가는 것을 바라볼 때 엄습하던 따스하고도 절망적이던 순간을 하나씩 떨구어 낸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눈을 감고 미소를 짓는다. 동시에 그것은 깊은 절망일 것이다. 어떤 끝이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좌절은 원래부터 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좌절이 기대의 또다른 이름일 수 있음을 미리 알아 버리는 인간도 있다. 그는 한량없이 기쁘고 슬프리라. 그는 좌절을 통째로 음미한다. 늦기 전에 이 좌절을 다시 들이키려고. 그는 그녀가 사라진 후의 적막과 공허를 흡수한다. 한동안 그녀와 함께 빛났던 날들 사이사이에도 스미던 그 상처같던 공허가. 그녀의 자유로운 해방을 그는 가슴 아프게 여긴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너무나 이해하기 쉬운 배반이다. 우리의 생이 그처럼 서로에 대한 깊은 상처로 메꿔져 있다는 것, 거기서 흐를 수밖에 없는 풍족한 슬픔과 쿡쿡 쑤시는 통증, 밤에 홀로 있음에 강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영원한 염증에 대해 익숙한 미소로, 또 익숙한 절망으로 답례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는 모든 것들을 익히 알고 있다. 그는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그녀에게서 비롯되어 그녀에게서 끝난 날들의 길이만큼 울고 싶어진다. 입 끝을 타고 눈물이 천천히 흘러 내린다. 그러나 그는 눈물은 시간만큼 길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게 여태까지처럼 쉽게 끝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금방 딱지가 앉고야 말겠지. 그는 부드럽게 자신을 쓰다듬고 싶다.

그는 생각한다. '지금은 모든 것이 괜찮아. 그러나 통증에 대해서는 정말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어. 나는 정말로는 아무 것에도 익숙해질 수 없을지 모른다. 아주 하찮은 집착이었다 해도. 이처럼 사소한 좌절에 대해서도. 우리는 참으로 무딜 수가 없어 그래서... 인간이란 인간이란 - 굴러가는 차 바퀴 위에서 무게를 없앤 스스로에게서 고독 이상의 무엇을 발견해. 순간들을 모두 자유롭게 날려 보내고 싶어하는 존재인지라. 그러면서도 그것에 가지는 회한의 무게라니. 기억에 짓눌리는 것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나약한 존재이면서도 그것 없이는 더더욱 쉽게 죽어 버릴 나약한 존재인지라. 나는 지금도 눈물을 그대로 흩뿌린다. 산산히 흩어져서 어딘가에 증기처럼 고여라. 그녀를 보낸 것은 그녀를 붙들고 있던 시간들보다 더 나은 선택이었지. 내가 만약 그녀를 진짜로 좋아했었다면 혹은 아니었다 해도 말야. 아직도 모르겠어. 그 감정을 무어라 부를 수 있었을까. 나는 알 수가 없어. 그러나 그녀를 보낸 것은 여태까지 그녀에게 배려했던 어떤 것보다도 잘한 일이었음을 이제 알겠어. 예전과는 훨씬 다른 선택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매순간마다 진실로 내게 요구되었던 것임을 알겠다는 거야. 그녀에게 필요한 자유만큼 내게도 앞으로 역시 고통이 필요하다고.

나는 이제 오늘 하루를 이해하고 있어. 인생을 이해하기보다 오늘 하루를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눈물이 계속 흐르도록 내버려 두리라. 밤에 통증이 엄습하더라도 이젠 누군가로부터의 위로는 영원히 없더라도. 그 고통은 내게 주어진 원래의 몫이었다. 그렇더라도 생은 지속되고 나는 그것에 나를 송두리째 내맡기면서 알게 되었다. 약간 미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아 나는 이제부터 고통을 멎고 흐르게 하고 억지로 지혈하고 하는 것들을 이제부터 이제부터 시작할 것이다. 많은 망설임이 회한만큼 진득하게 몸에 붙어다니지. 그러나 나는 알게 되었다. 생은 지속되고 나는 가리라.

그는 일어나 까페를 나온다. 그는 차를 가게 앞에 내버려 둔 채 걷기 시작한다. 그는 거리를 막막하게 걷는다. 그는 눈물을 멎게 한다. 그러나 고통은 멎지 않는다. 그는 거리를 한없이 걸어 다닌다. 햇살이 가물가물해져 어둠이 깔릴 때까지 그는 몇시간이고 걷는다. 걷는 것은 호흡과 상념을 완전히 잊게 하고 또 재생시킨다. 완전히 몰입하는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그는 막막한 곳을 막막하게 응시하며 계속해서 걷는다.

그는 어두워지자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들어간다. 표를 끊어 역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전철을 타지 않고 역 내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전동차가 뿜는 불빛을 가느다랗게 응시한다. 그 불빛은 길게 일그러지면서 멀어지고 가까워진다. 길고 커다란 소음이 그를 안심시킨다. 그는 그 자세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일어나 차를 탄다. 그는 차 안에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문에 비스듬히 기댄다. 습관대로 앞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린다. 그의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은 몹시 부드럽게 미끄러져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 그는 아무 생각을 안하고 가지런하게 드리워진 앞머리를 만지작거린다. 통증이 한결 가벼워졌고 때때로 잊혀질 듯 깜박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곧 밤이 오면 자신을 강하게 두드릴 것임을 안다. 그래서 그는 가느다랗게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는다. 비스듬히. 그는 오늘 하루 지치지 않았다.

그의 바로 옆에서 앉아 있는 한 남학생은 그를 올려다 본다. 그 남학생은 고등학생 쯤 되보이는 앳된 얼굴에 호기심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문에 꼼짝 않고 문에 기대 선 남자를 구석구석 훓어 본다. 그는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채 막막한 시선을 멀리 두고 있다. 남학생은 그의 책에서 눈길을 돌려 그가 내릴 때까지 네 정거장 내내 줄곧 살펴 보고 있었다. 세 정거장 쯤 지나자 그는 갑자기 시선을 느끼며 남학생을 마주 내려다 보았다. 그 소년은 멈칫하며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곧 시선을 똑바로 마주 대한다. 그의 얼굴엔 호기심의 무례한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약간의 도전적인 빛과 함께 솔직한 미소를 띠며 똑바로 마주 본다. 호감을 표시하는 그런 수줍은 미소. 그러나 그는 차가운 시선을 그에게 정면으로 보낸다. 그는 아직 지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종류의 가벼운 위로를 즐길 마음이 없다. 솔직하고 무례하게 거부의 시선을 전달한다. 정면으로 쏘아 보고 그는 다시 시선을 밖으로 멀리 돌린다.

곧 내릴 역이 가까워졌다. 그는 내린다. 뒤돌아서 나오면서 그는 가볍게 웃었다. 장난스러운 기분이 잠깐 스쳐갔고 그 끝에 갑자기 씁쓸한 고통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다가 왔다. 그는 밖으로 나온다. 지하철 역을 나오는 계단에서 잠깐 아는 얼굴과 스친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팔꿈치를 가볍게 부딪혔던가. 아아.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까 그 소년이 왠지 예전의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녀와- 그래, 그녀와 닮았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보낸 당돌한 시선과 같은, 꼭 그 눈빛이었다. 그처럼 풋내 나는 설레임과 기대를 잔뜩 품고서. 자신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는 아직 기대와 수시로 교차되는 절망을 깨닫지 못한 것뿐이지. 그건 참으로 알기 힘든 신호야. 언제나 돌아오게 마련인 지점을 잠시나마 망각하게 해주는 즐거운 설레임이지. 그 소년이 잠시 내게 보냈던 그 시선은 언젠가 내게 다가왔던 모호하고 낯선 그리고 싱싱한 충만함을 가져다준 속삭임과도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 내가 잊고 있던 게 있었어. 언젠가 그 신호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게 있어. 그것으로부터 시작되는 환멸의 길고 고통스런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그건 결코 나로 인해서도 그로 인해서도 그녀로 인해서도 아니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원망해서도 원망하지 않아서도 안 되며 둘 다 고통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지. 정말로 고통이 시작되는 것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야.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 소년에게 우호적인 눈빛으로 어떤 교감의 환상을 선물해줄 수도 있었어. 그러나 그것의 진실을 후에 추궁받게 되지 않으려면, 아니 차라리 내게 그런 일말의 진실이라도 남아있다면 거짓을 선택하는 게 나을 때가 있지.

오늘 나는 명멸하는 절망을 힘들여 껐어. 다시금 시작하게 된 거야. 그 절망을 꺼버리고 새로운 절망을 켰지. 그 소년은 결국 그만의 몫으로 할당된 고통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겠지. 더 이상 변명은 유효하지 않다. 때때로 좌절이 불러오는 욕구 불만은 고립된 인간에게 지나치게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서로의 문을 열고 그것으로 인해 잠시 서로를 기만하며 고통의 책임을 그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더욱 싫다고. 그런 시시한 변명이 오늘만큼은 지독히 혐오스러워. 내 자신에게 용납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만은 내가 절망을 끄고 키면서 그 간극만큼 괴로움을 짊어진 날이다. 오늘만큼은. 그 소년에게 어떤 연민을 품게 되고 그녀에게 그만한 연민을 품게 되고 나 자신에게도, 원래 내 몫으로 주어진 고통을 도로 가져온 날이다. 그런 날 어떤 꿈에서든 나는 무너지리라. 통째로. 이 고통이 누구를 잠재우랴. 누구를... 그저 우리는 홀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오늘처럼. 오늘 그 소년과 나처럼. 그녀처럼. 그처럼. 지나쳐온 인간들처럼. 그리고 나머지 숱한 좌절들처럼.

그는 어느새 아파트 층계를 올라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열쇠 소리를 내면서 문을 잠그고 들어간 후 적막이 흘렀다. 그 적막은 잠시 지속되다가 사그라들듯이 복도의 한기를 감싼다. 마주보는 집에서 트레이닝 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나온다. 그는 앞 머리를 쓸어 올리고 한 숨을 쉬면서 밖을 걸어 나간다. 밤의 상쾌한 공기 가운데 성큼성큼 걸어 어둠 속을 내려 간다. 그는 트레이닝 복에 달린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가벼운 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가 달리는 뒤로 마주 보는 현관 문은 서로를 안온하게 기대게 하려는 듯 침묵 속에 안식하고 있다. 밤을 달고 미끄러져 나오는 젊은 남자가 계단을 뛰듯이 내려가다가 한 여자를 스쳐간다. 팔꿈치를 부딪히고 지나가는 그녀는 긴 생머리가 앞으로 쏟아지는 것을 부드럽게 손가락을 집어 넣어 쓸어 올린다. 그녀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잰 걸음으로 층계를 올라간다. 그녀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 밑에 설명할 길 없이 가중되는 죽음을 세차게 치워버리려는 듯한 고통스런 격렬함을 지우지 못했다. 그녀가 초조하게 걸어 올라가는 계단은 멀리까지 이어져 있는 듯, 그녀는 한숨을 다시금 편안하게 내쉰다. 죽음을 내뱉아 버리는 단단한 의지의 한숨, 그 한숨 끝에는 어떤 기대가 - 절망의 뒷편에 교차되는 부질없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녀가 올라가는 층은 그들의 바로 윗층이다. 그들은 오늘 이전에 한번도 서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있었다 해도 서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 하루와 하루에 실리는 무게에 지탱하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다시금 부드럽게 쓸어올린다.

그는 아파트 밖으로 나와 쾌적한 밤 공기를 들이마신다. 그는 차차 힘차게 뛰기 시작한다. 모자를 눌러쓰고 그는 도로를 달려간다.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은 아직도 꽤 된다. 그리고 그는 팔꿈치를 부딪히는 만남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달린다. 땀들이 정신없이 흩어진다. 그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는 점점 속도에 몸을 싣는다.

1999. 가을

"회원별 산문 모음"으로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