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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 ('94)
언제부턴가 내 작은 휴지통 안엔 미처 나비가 되지 못한 작은 애벌레가 살고 있었어 나는 알고 있었지 그 작은 애벌레는 아주 작은 알에서 나왔다는 걸 그리고 처음엔 아주, 아주 작았다는 걸 처음 알에서 깨어났을 때 애벌레는 …라고 느꼈어 그게 어떤 건지 말로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어 어쨌든 그건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느낌'이란 거였고, 애벌레는 살면서 다시는 그 느낌을 가져보지 못했고 그 느낌을 곧 잊어버렸지만, 나는 그때부터 이미 그를 …라고 부르기로 한 거야 …가 태어나던 때는 깊은 밤이었고 세상은 무척 고요했어 그리고 창가에 어른거리던 달빛을 느꼈을 때 …는 문득 자기가 사자라고 생각했어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사실 …는 사자가 뭔지도 잘 모르고 있었어 하지만 어쨌든 …는 언젠가부터 자기가 사자라고 믿고 있었고 만족하고 있었어 그리고는 우물우물 기기 시작했어 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야 그저 …가 할 수 있었던 건 기는 것 뿐이었고 달리 할 일도 없었거든 …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계속 좁은 휴지통 바닥을 기어다녔어 그리고는 끊임 없이 생각했어 정확히 어떤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도 자기 느낌을 말로 표현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사실 순간순간의 모든 느낌을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어? 어쨌든 …는 끊임없이 기었고 또 끊임없이 생각했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지난 십수년간의 그의 모습은 언제나 생각에 잠겨 끝없이 기는 모습이었고 그래서 때로 나는 그가 기다가 생각하는 건지 생각하다가 기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단 말야 세월이 흐르고 그에게 잠시 무심해져서 휴지통 속을 잘 살피지 않게 된 동안에도 그는 끊임 없이 기며 또 끊임 없이 생각했어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자라났던 거야 …는 아직도 자기가 사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사실 오랜만에 본 그의 모습은 훨씬 사자다워진 것 같았어 …는 아주 점잖았고 용맹했고 그리고 표시는 내지 않았지만 아주 커다란 꿈을 갖고 있다는 걸 난 알 수 있었어 그의 작은 눈은 꿈으로 가득 차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났고 그럴 때 나는 그가 진짜 애벌레인지 사자인지조차 알 수 없어졌던 거야 어느날 밤 무슨 소리에 잠을 깰 때까지 말야 그건 아주 깊은 밤이었고 세상은 아주 고요했어 창가엔 언젠가의 그 밤처럼 달빛이 어른거리고 있었고 그리고 …가 울부짖고 있었어 사실 사자가 어떤 건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그 소리는 내 작은 휴지통으로부터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고 그건 틀림 없는 사자의 포효였어 …는 애벌레가 아니었어 처음부터 사자였던 거야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그 이후로 나는 그가 울부짖는 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했고 그는 변함 없이 때 낀 휴지통 바닥을 부대끼며 생각에 잠겨 기어다녔지만 그때부터 나의 …는 이미 사자가 되어 있었어 그리고 사실 그는 정말 사자다웠어 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구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야 하지만 순간순간의 모든 느낌에 이유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겠어? 더구나 그 느낌은 그가 처음 태어나자마자 가졌던 '…'의 느낌과 어쩌면 조금은 비슷한 거였어 그게 어떤 건지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어 말로 표현하고 싶지도 않고 말야 내가 그를 통해 느끼는 것들 중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너무나 많은 걸 어쩌면 나는 그런 느낌을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작은 안도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어 단정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말은 빛나진 않지만 나비가 되어 내 작은 휴지통을 떠나가지 않는 …처럼 그만큼 더 소중할테니까 말야 그래 실은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내 소중한 …가 나비가 되지 못한 이유를 그리고 내 소중한 …는 처음부터 사자였음을… 내 작은 휴지통 속에는 아직도 …가 살고 있어 몇 해 동안 열어 보지 못한 그 작은 휴지통 안에서, 구겨져 버려진 내 어설픈 오만과 정직한 두려움 위로 …는 지금도 조용히 갈 길을 가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아직도 달이 밝은 고요한 밤이면 휴지통 속에서 울려퍼지는 내 포효 소리를 느끼며 휴지통 밖의 세계와 휴지통 속의 세계 중 어느 쪽이 더 큰 것인지 혼란스러워지는 거야 1994.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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