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점에 서다

이민서 ('99)

첫 번째 남자의 이야기

'꿈을 꾸었어.
그런데 무슨 꿈인지 기억이 안나'
그가 말한다.
'이상하군, 뭔가 사라져버린 것 같아. 알 수 없는 통증이다'
그는 계속 말한다. 나는 듣고 있지 않다.
'음... 둔중해. 온 몸이.
그러나 아프다는 말은 어색하군. 나는 아프지 않아...? 그런 걸까? 사소한. 그래, 아주 사소한...'

나는 고개를 돌려 창을 본다. 쏟아지는 빛. 빛은 서서히 줄어든다. 그대로 멎는다. 세상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일요일이다. 일요일 그리고 창에 낀 먼지. 서로 닮아있다. 일요일이라. 익숙한 빛. 그리고 일요일.

'난 나갈거야'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이미 듣고 있지 않다. 나 역시 대화를 원하고 있지 않다. 그와 나 사이에 놓인 공간 사이를 채우는 느릿하고 텅빈 기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대화를 하고 있지 않다.

'언제쯤 들어올건가'

'열쇠는 내가 잠그지. 그대로 누워있어'

쏟아지는 빛 속에 그는 눈을 감고 있다. 그는 빛 속에 파묻혀 부서지는 나른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건 내게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지. 아마도 한때는. 그는 그 자세로 누워 있곤 하였다. 나를 쳐다보지 않는 그 각도에서. 그는 아름다웠다. 그렇게 아스라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젠 그 감각이 살아나지 않아. 오래된 거지. 아주 오래전부터. 더 이상의 감동은 없다.

'설거지가 쌓여있어.'

문턱을 넘어서며 던진 의미없는 울림이다. 내 음성은 착지한다. 아주 느릿하게 부유하던 먼지처럼. 일요일이다. 모든 것이 무언가를 결여한 이 공간엔 느릿한, 아주 느릿한 무언가가 굴러다닌다. 그러나...

그만, 그만하자구. 무엇을?

열쇠를 잠근다. 금속성의 소음. 그것은 너무 견고하고 싸늘한 척하는 일종의 부드러움.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한동안의 소요. 누군가와 흡사한 것을 나는 안다.

방금전까지 그를 바라보았던가. 이 집을 나서면 전혀 실감할 수 없다.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사실만큼이나. 기억은 한점으로 몰려든다. 소실점을 향해 걸어가는 길 위에 내가 있다. 나란 인간의 기억이. 환영처럼 잦아드는 한동안의 몽환. 비현실적으로.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라진 것들. 앙금만을 남긴채 사라지는 순간들이 몰려온다.

나는 머리를 비워내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길을 걷고 있다. 일요일 오후. 머리를 비워내고 싶었다. 하얗게. 갑자기 몰려드는 환영은 감당할 수 없다. 때때로는 그것을 무척이나 원했지만. 이유없이 메스꺼워 진다. 지워버리고 싶다. 사방에서 잔잔한 소음이 들리는구나. 오늘이 일요일이라했다. 나는 이 순간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오늘이 오늘이라는 것만큼이나 감지하기 힘든 것이 있을까. 모든 오늘은 오늘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전에 사라져버린다. 내가 잃어버린 과거. 생생하게 와닿기도 전에 그토록 빨리 스쳐보냈던 과거란 놈은. 차라리 느끼지 못했던 것이 나았던.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사라져버린, 아니 시간이 흐르고 나는 같이 흐르지 않았을 뿐. 가끔 딴곳에 머물거나 헤맨다. 그래. 그렇게 멈추지 말아라.

갑자기 햇빛이 내게 와 닿는 것을 느낀다. 일요일. 그리고 햇빛. 생생하게 날 관통하는 촉감 끝에 비로소 내가 서있음을 자각시켜주는 그것이다. 오래전부터 내가 그리워하는 유일한 것. 나는 멈춰선다. 바로 이 자리에서.

가끔 똑바로 바라보고 싶었다. 눈이 너무 부시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다. 결코 쉽지 않아. 그러나- 그러나- 나를 생생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 눈이 멀도록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저곳으로부터 내 안구로 내리꽂히는군. 그 먼 거리를 그렇게 곧게 달려와 내 눈에 꽂힌단 말이지.

그건 끓어오르고 있는 별이었다.
별이었어.
별.
생소한 울림.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겠다.
그러나 아름답군. 몹시 아름다워.

역시 멈추기엔 적당한 곳이 아닐는지 몰라. 누군가 또 날 치고 지나가는군.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바로 여기에서 멈추고 싶었다. 바로 이곳에서. 나는 원했다. 그를 바라보는 것을. 그건 바로 이순간. 이장소에서.

아, 기억이 날듯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언젠가 이런 기분으로 무언가를 바라본 적이 있었군 그래.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는지도, 그렇게 강렬한 기분이었는지도 모르겠군. 이제 사라져버린 기억 어느구석엔가. 은밀하게 저장되었던거겠지.

그래도 아직 조금은 남아있었군. 무언가 알수 없는 것이. 또 누군가 날 건드리고 지나간다. 비키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이곳에 멈춰섰다. 바로 이순간 이 장소에서. 난 비키지 않겠어. 왜냐하면 이곳이야. 다른 어느곳이 아닌 바로 이곳.

예전에 가만,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기분으로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오래된 것이다. 그 향기. 시간이 박제된 순간으로 달아 없어질 그 기억. 그러나 안타깝게 기억이 나질 않아. 나는 존재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 꿈처럼 때론 교묘하고 무참하였다. 가끔인데도 들어갔다 나오기에도 벅차. 나는 때때로 익숙한 길에 갇힌다. 그건 어딘가로 향하는지 알지 못할 통로. 몹시 구불구불하다. 그리하여 나는 어디선가 어두워지는 통로에 선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갑자기 그가 지금쯤 무엇을 할지 궁금해진다. 그와 내가 룸메이트가 된 이래로 생활은 서서히 바뀌어왔다. 모든 것이 늘어졌다. 길게 잡아 늘여진 시간, 그것은 처음엔 아주 조금씩이었는데 이제와선 감당할 수가 없다. 아니 거기에 몸을 맞추게 된 거니까 이미 나 또한 잡아늘여졌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권태도 아닌 마르고 부석부석한, 그리고 다소 황량하지만 나른하고 견딜만한 익숙함. 이상하게도 늘어져버린 시간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게 된다. 늘어져버린 육신, 죄악처럼 널려있는 영혼. 그것은 무기력한 것과도 다른 것이다. 무기력이라기엔 자족적인 폐쇄회로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스스로 그 생활에 탐닉하는 중이다. 나는 이제 그 부석부석한 마른 공기, 먼지 쌓인 창틀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침잠(沈潛)에 익숙해 있다. 그건 삶의 긴 과정을 견뎌내기 위한 걸지도 모르지. 내가 태어난 세계의 묵묵한, 잔잔한, 소소한 그런 것들을. 그러나 나는 이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땐 가끔씩, 아주 가끔씩 슬퍼도 한다.

그는 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나 또한 그를 신경쓰지 않는다. 서로에게 하는 말은 언제나 일방적으로 내던지는 배설물일 뿐. 그와 나 사이에 연계되는 지점은 없다. 그러나 예전에 나는 그의 동물같은 아름다움에 감동한 적도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 생생한 감각은 죽어버렸지만. 그의 눈빛속으로 함몰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지만. 지상으로부터 유예된 순간 드러누워 깊은 호흡을 내뱉는 것. 그 순간이 가버리고 나면 또다시 복귀해야하는 일상이 있다. 한 템포 늘어진게 다르다면 다를까.

그때 길가의 소음이 나를 뚫어버린다. 날카로운 목소리다. 나는 저런 종류의 날카로움을 알아. 그건 늘어져버린 육신의 경련같은 거야. 신경증의 발작은 결국은 슬픈 거지. 자신을 위한 노력이 어리석게 느껴지고 탈출욕이나 배설욕, 뭐 이런 것들로 상쇄되어 스스로 무너져가는 것, 우리는 이런 걸 위해서 살아가는 게 아닐거야. 분명히 다른 게 있을 거야. 우리에게 남은 무언가가. 알 수 없는 것이. 그런 전조가 보일땐 빨리 어떻게든 해야 할 텐데. 그래 어떻게든.

그러나 나는 알고있어.
다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어디로든.
내가 지나온 시간의 분해되버린 조각들 속으로는.
분해된 것, 기묘한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건. 우리가 그것을 이미 끝장난 것이라고 알게 될 때부터지. 회한이라는 단어는 감미로워. 그안에서 질식사하고 싶을 정도로.

이런! 저기 다가오는 얼굴이... !
몹시 낯이 익어. 왜 그를 연상하는 걸까?
뭔가, 뭔가가, 느릿느릿하고 나른한 짐승같은 자세가...
나는 알고 있어. 그를.
그런 느낌이 든다.
그의 걸음걸이. 그리고 그의 눈빛이.
나를 보는 군.
아니다. 나를 보고 있지 않아.
날 보지 않지만 날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눈. 그건 날 관통하는 눈빛이야. 그것도 그와 닮았군.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는, 저런 미지의 초연함. 내가 언젠가부터 건너뛰어버린 그것. 시간이 뒤틀린채 엉겨붙어있는, 회한처럼 부드러운 눈빛. 그는 날 보지 않아. 난 그를 세우고 싶다. 난 이곳에서 저 눈빛을 계속 바라보고 싶어. 날 보지 않는 저 눈빛이 뿜어내는 무언가를. 그래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말이야. 그러나... 그러나!

이대로 스쳐가는 건가. 그러고 싶지 않다. 갑자기 통증이 오는군. 그의 눈빛은 영원으로 박제되어 있다. 빛이 잦아들고 어두워지는 세상. 빛 아래 묻어둔 해저처럼. 몽환처럼 비현실적인 침잠. 멈추고 싶어. 이건 통증이다. 내 촉수를 건드리고 흩어지는 섬세한 生의 느낌. 내가 살아있음을 오랜만에 재현시켜주는 이 생생한 아픔. 천천히 울리는군. 그러나 그는 스쳐가는 건가. 저렇게 단단한 눈빛으로 내 몸을 관통하여 우주로. 사라져버리는 건가. 아 멎는다. 통증이. 이 아픔이 훓어가는구나. 지나가는구나. 그 찌르는 듯한 날카로움이 둔중하게 온몸을 타격하고. 그런식으로 사라지는구나. 통증이 멎어버린다. 그 아픔을 끝으로 이상한 구멍이 나는거지.

그러나. 그러나. 그는 완전히 지나가버렸다.
아픔이.
끝난 건가.
아픔이.
그러나 다시 한번 재현시켜보고 싶다.
그건 기묘한 눈이었어.
말할 수 없는 향기로 가득찬.
그만두자구. 다시 찾아오는 그것을.
그렇게 지나감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 것들을.
그래 이제 멎어 버렸다.
어디선가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생각이 나질 않아. 그리운 느낌이군.
이상한, 아주 낯선 기분이 든다.
오늘 아침 그가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었다. 한 번으로 지나가 버리는 거로군. 돌아오기는 이처럼 쉬운 것. 그리고 또한 어색한 것. 원하지 않는 재귀 끝에 쏟아지는 갈증. 갈증이다. 나는 원하고 있었어.

그리고 이렇게 오랜만에 무엇인가를 느껴보았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부딪혔던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쏟아지던 그것을. 나는 아마도 진심으로 무엇을 기대하였던 것 같다.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을.

이제와선 다 헛된 치기였어.

그렇게 지나간 시간들을 잘라버리고 새로 시작한다. 남은 것이 늘어진 테이프라 아쉬운거지. 그것뿐. 난 방금전에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나 찾자마자 흘려보내고. 그리하여 돌아올 수 있었다. 이곳으로. 숨 쉴 수 있는 이곳으로.

나는 걷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는다.
도마뱀의 꼬리를 끊는 연습을 한다.
필사적으로.
공허한 쾌락의 끝을 좆아 사막을 횡단하는 도마뱀.
여기까지 오기위한 生은 점점이 명멸하는 자국들. 커다란 구멍이 난 대륙이다. 나는 머리를 들고 걷는다. 그저 걷고 있을 뿐 아무런 생각도 없다.

아니다. 꼬리없이 사막을 건너는 도마뱀처럼, 사막 속에 명멸하는 모래알처럼 의미없이 아름다운 순간을 향해 난 기다랗게 펼쳐 있다. 갈증. 이 지독한 목마름. 이것을 없애기 위해 나는 머리를 들고 걷는다. 나는 어떤 것을 보았는지 잊었다. 잊어버렸어.

나는 잊었다.
환영처럼 나는 걷고 있다.
유폐된 기억. 풍경 저편으로 사라지는 기억.
기억의 은밀한 부름에 때때로 나는 이상한 기분이 된다.
잊어버린 순간들이 어느날 겹쳐온다.
영원히 박제시켜 버렸던 꿈과 같은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난 걷는다. 난 계속 걷고 있다.
끝이라는 미지의 공간을 넘는 경계.
있지도 않은 목마름을 증발시켜 버리는 긴 작업.
난 걷고 있다. 그리하여 걷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위에 덧씌워진 환영같은 기억조차 증발시키리라. 난 걷고 있다.
> 그리하여 난 걷고 있다.

두 번째 남자의 이야기

빛이 말갛게 보이는 군, 말갛게 끓어오르고 있다. 투명하지만 저기 빛나는 투명함 속에는 무언지 이물질이 낀 듯해. 이 곳으로부터 저 창까지. 유리를 투과한 공간의 너비만큼 가득 채운 무언가가 나를 잡아먹는군.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안락한 오후다. 몹시 안락해. 근육은 느슨하게 풀리고 오후의 나른함이 조수처럼 밀려온다. 느낄 수가 있어. 햇빛이 쏟아지는 오후. 이런 편안한 기분이 된다는 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지. 가끔은 이런 종류의 안락함이 주는 쾌락이 죽음만큼 아름다울 거란 생각이 들어. 죽음처럼. 늘 우리가 지고 다니는 유한함의 근원, 그것이 내 등 뒤에서 속삭이는 쾌락. 이처럼 감미롭게 부패해가는 과정이라면 그것은 삶보다 아름다우리.

나는 삶을 알 수 없었을 뿐이야. 잡히지 않는 것으로서의 삶을. 모두가 쉽게 삶이란 어떤거라고 운운하지만 그것은 이미 냉각되버린 정의에 지나지 않아. 진짜 살아있는게 아니지. 그렇지 않은가. 삶이란 추상이 아니야. 우리가 지껄이는 삶은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난 나가고 싶어진다. 지금 이순간 말이야. 죽음이나 삶을 생각하게 되면 갑자기 어떻게든 해야 할 것같은 불안이 따르지. 무언가를, 그래 무언가 좀 더 생생한 것을 경험하고 싶어지는 거지. 대개 그런것들은 나의 존재의 증명이니까 말이지.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봄으로써 이 비현실을 벗어던지는 작업.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로 환치시키기도 하고 현실을 비현실로 변질시키는 내밀한 작업말이지.

그녀를 기다리는 일을, 갑자기 참을 수 없어진다. 난 나가겠어. 그래.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일을 하는 거지.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일을. 우습군. 우스워. 아까까지만 해도 나는 원하고 있었어. 그녀를 기다리는 일을.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 볼 생각을 했지.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단조로운 리듬이 나를 기쁘게 하지 않았던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작고 아름다운 界의 형형한 빛, 거기에 취하는 그 느낌을 그리워했지. 그건 내게서 찾기 힘든 견고한 안정감이야. 그것이 날 받혀주는 동안만이라도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그것이 주는 안정감은 날 붙들어. 내가 살아 있는 한 존재라는 것이 다가오고, 언젠가 세상이 더 생생하던 시절로 再歸하는 것만 같아서. 그래 아주 오래전. 언젠가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그러나 그녀도 하나의 습관처럼 변해가고 있어. 내 생활의 일부가 된다는 건 아주 슬픈거야. 익숙해지자마자 모든 게 하나의 부담이 되어가는거지. 그 생생함의 정수를 잃고 갑자기 욱신거리는 자국만 남아버려. 혹은 퇴화된 기관이 내게 옛날을 상기시키듯 무료한 감상만 남는 거지. 모든 진실은 천천히 붕괴한다. 내 손끝이 스쳐가는 자리마다 진부해지는 일상뿐. 그러나 난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해 본 적이 없어. 그렇게 썩어가는 쾌락만을 추구할 뿐 어떤 시도도 하고 있질 않다고. 그리하여 난 천천히 각혈하고 더 천천히 죽어가는 거지. 속력속에서 돌아버린 거나 다를 바가 없잖아. 조금은 고통이 필요할 거야. 그래. 숨쉴 만큼이라도 고통은 필요하다고.

난 나가겠어.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녀를 기다린다거나 하는 것이 하나의 구속으로 화하기 전에 체험해야 할 진실이지. 의무같은 건 사람을 눅눅하게 만들고 마침내 썩어나가게 하지. 내가 그녀를 기다린다는 것은 의무가 아니잖아.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소소함에 얽매여 모든 것을 버리는 작업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보다 좀 더 다른 무언가가. 그것보다 좀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 거야. 그래, 어쨌든 지금은 나가야겠어.

그러고 보니 이 까페 밖으로 펼쳐진 오후가 참으로 낯설군. 또 그 생소함으로 인해 그만큼 아름답다. 이 길을 종종 다니곤 했는데, 이런 기분이 된 건 처음이야. 몹시 나와 어울리는 배경같고 동시에 이렇게 나와 다를 수가 없다. 내가 다니곤 하던 길, 익숙해 있을 땐 절대 다가오지 않는 생생함이 차오르는군. 오랜만이야. 아주 오랜만. 세상이 다가와서 말을 거는 일이.

이러고 길을 걸어보니 생각이 난다. 조금쯤은 세상이 다감한 눈빛을 할 시절이. 그땐 네가 옆에 있었어. 네가 옆에 있었지. 오랜만에 생생해지는 건 통증과 함께 오는군. 어쩌면 우리는 고통속을 헤맬 때 살아있는 건지도. 네가 생각이 나니까, 그래 참으로 오랜만에 이런 아픔이 관통한다. 회한은 인간의 기억과 맞물려 있지.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 그것은 참으로 교묘하고 아름답다고. 널 생각하게 되니까 또다시 회한이 몰려와. 회한. 다른 어떤 말로도 대체할 수 없을 회한 말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어떤 기억속으로 스며들고 번져나오는 감상. 널 생각하면 무거워지는 압감과 함께 쏟아지는 회한말이지. 난 널 기억하고 있어. 적당히 윤색된 기억이라해도. 아마 진실은 가버렸겠지. 그러나 난 널 기억한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야. 세상을 살면서 여지껏 그다지 뚜렷한 게 없었는데. 그래도 자꾸 회한을 갖을 만한 무언가가 내게 남아있었다는 것이.

그래, 다행이다. 그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은 내 안에 가득 차 오르게 하는 어떤 시원한 것. 노래를 부르고 싶도록, 시처럼 생생한 그 무엇. 빛이 이렇게 풍성하게 오후를 채우고, 난 걷는 거지. 노래를 부르면서. 그리고 널 기억하면서. 생생한 순간에 난 멈추는 거지. 이 순간에 난 눈물을 흘려도 좋고 또 죽는 것도 괞찮겠지. 언젠가 네가 이렇게 날씨좋은 날이면 질식할 것처럼 기쁘다고 말했지. 아주 단편적으로 얽힌 기억들과 그리고 그 때의 내 감정같은 게 멋대로 떠오른다. 나는 때때로 부끄럽기도 했고 분노하기도 했어. 너와 함께 있을 땐 세상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했어. 그런 격렬함은 날 살아있게 했는데. 이젠 자주 찾아오지 않아.

넌 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길을 걷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냥 존재'하고 싶어했어. 그냥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나는 이미 알게 되었지만. 그냥 존재하는 건 내가 가장 원했던 일이기도 했지. 충분히 머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고, 또 욕망을 넘어서야 하는 것. 나는 그걸 넘어설 수 없어. 그래서 인생의 절반쯤을 쓸데없는 의무따위를 행하며 흘려보내고. 남은 시간에는 뿌리뽑힌 자로서 피곤함에 찌든 생활을 하다가. 그래 그런식으로 흘러가고 남는 시간에 또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고.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생각하다가 진짜 삶도 죽음도 다 놓쳐버리고 껍데기만 남는거야. 차라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처음이라면 좋을 텐데. 혹은 끝이라면, 끝이라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면 좋을 텐데. 나는 망상을 하고 그리고 잠을 자게 되지. 밤을 보내는 것은 다음날을 기다리는 까닭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기 위해 지나가는 것.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난 이제는 아무것도 느끼질 않아. 생활에 몸을 맞추면서 살아. 정확히 말하면 사는 게 아닌거지. 시시하게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중일 뿐. 네가 생각이 났어. 넌 내 영혼의 일부였던 듯. 혹은 내 기억에 의해 조작된 환영이었던 듯. 언제나 회한과 함께, 통증과 함께 온다.

즐거운 오후에 나는 길을 걷고 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싶을 정도로. 아, 너무 즐겁고 생생해. 그리고 눈물이 나는 오후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가슴이 쑥쑥 쑤시는 통증과 함께 생을 살고 있단 말이다. 언제나 그렇게 오는 거지.

"이 봐! 이런데서 또 보게 되는 군"
"아!"
"왜 여기서 서 있는 거지? 위험하잖아."
"......"
"차조심 하라구. 이친구야. 항상 그렇게 넋 놓고 다니지 좀 말라구!"
"......"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이상한 표정이군, 아니 어디 아픈가?"
"아니. 아니야."
"아니기는, 어디 아픈가보군."
"그렇지 않아. 아니라구. 아프기야 하지만 거기가...... 그래, 그러고 보니 아프다."
"어디가 아픈가? 내가 병원이라도 태워다 줘?"
"아니야. 됐어. 그만 가보게"
"그만 가라니 자네 아픈 게 맞다면서"
"아니야. 어딜 가던 길인데 난 급하다고. 빨리 가봐야 해서 그럼 난 먼저 갈께"

갈 곳이 있었다? 그래 난 갈 곳이 있었어. 어딘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래, 나는 모른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가는 거야. 그것이 바로 갈 곳이지. 갈 곳이 아니고 또 무어란 말인가.

난 분명히 아픈거다.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군. 너를 생각하면서 그런 거다. 아직 무언가 남은 것이 있었다. 알 수 없는 것이. 아직도 내게 남은 무언가가.
태양이!
태양이다.
저기 저렇게 빛나는 것.
그래 아까부터 날 따라다니던 것이로군.
저기 저 아름다운,
강렬하여 쳐다보기도 힘든 그것.
그건 별이지
끓어오르고 있는 별이야.
별
회한

별
별이라구.
끓어오르고 있는 그건 울림
오, 묻어나는 건 무얼까.
알 수 없는 그것.
내 생의 정수에서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는 그것.
빛이 눈이 부시다.
아.
난 똑바로 쳐다볼 테다. 난 똑바로 쳐다보겠어.
눈이 차라리 멀어버리도록
이 곳에서 나는 똑바로 쳐다볼거다.
몹시도 아름다운 저건

그래, 울리는 것
울려버릴 그것이 필요했어.
울어서 긴 여운 끝에 조금 스산해질 무언가.
알 수 없는 그것.
빛이여.
날 꿰뚫어버려라.

세 번째 남자의 이야기

나는 동면(冬眠)을 위해 심장의 속도를 늦추었다. 숨과 맥박이 천천히 느려진다. 호흡은 푸르게 물드는 듯 하다. 냉각되는 시야. 죽음이 어깨를 거쳐 가슴을 지나 온 몸으로 내려앉는다.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는다. 서서히 내려가는 체온을 희미하게 감지한다. 나는 우주를 헤맬 때와 마찬가지로 무력하고 캄캄하였다. 그 순간 펄떡이는 물고기를, 오래전에 본 자료에서 본 그것을 기억하게 된다. 깊은 잠으로 빠져들기 전에 나는 마지막 영상을 붙들었다. 생생하게 내게 다가온 그 물고기. 그리고 한 계절에 걸친 잠. 아니 좀 더 긴 잠. 그래 세기를 건너뛰든 아니든 나는 잠들다가 깨어나리.

2158년 3월 1일 13시 0분 0초에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났다.

긴 잠에서 깨었다. 그런데 기분이- 기분이 이상하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 날 엄습했다. 동면에서 깰 때면 기억의 일부는 자동으로 소실된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보통때와 달랐다. 내가 지시하지 않은 기억까지도 모두 사라져 버린 듯하다. 그래, 분명히 사라진 건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던 게 아닌거다. 분명히 이번에는 내가 원한 망각이 아닌 모양이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다. 뭔가 잃어버렸다는 것이- 내가 원하지 아니한 어떤 것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그것이......

잠에서 깨자마자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기분이 날 휩싸다니. 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몸은 아직 굳어있고, 어쩌면 뇌도 그런지도 모른다. 아,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아. 난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지금 이곳을 나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직 몸은 풀리지 않았고 눈도 제 기능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공간을 가득 채운 뿌연 것. 내 시야는 온통 뿌옇다. 나는 이렇게 누워있다. 그런데 뇌는 이상하게도 에러를 일으킨 듯, 이 곳을 나가고 싶다는 신호만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아. 근육이 몹시 간지럽고 나른하다.

살과 근육, 뇌와 장기로 이뤄진 하나의 고깃덩이. 인간이란 것은 정의할 수 없는 족속이겠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그런 정의가 어울린다. 몸이 모두 풀리고 이 나른함도 가시고 나면 나는 이 얼얼한 그리움을 덜어낼 것인가. 잃어버린 기억이 못내 나를 사로잡는 그리움 말이다. 잠을 깨고 오랜만에 호흡할 대기가 그립다.

몸은 급속도로 해동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아주 지리하게 느끼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이곳에 누워있을 것처럼. 아마 나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랬을 거란 느낌이 든다. 언제부턴가 깬 나로부터 단단히 갇힌 꿈. 나는 꿈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다. 언제부턴가. 일어나서 지난 밤에 꾼 꿈이 생각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억하려 애써 본 적도 없다. 아마 동면하는 동안 어떤 꿈이 날 스쳐갔는지도 모른다. 그건 아마 영영 잃어버린 것이고 그래서 나는 지금 괴로운 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건 기묘한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제 깨져버린 것. 내 생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배설물의 자취. 등뒤에 끌고 다니면서도 다시는 볼 수 없을. 나는 그러한 존재의 비밀을 꽤 슬프고 아련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

산다는 것이 우연한 배반의 연속이듯, 꿈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연히 스쳐가고 또 우연히 돌아오기도 하는 그것이 지금 나와 함께 누워있었다. 모든 꿈이 나와 함께 걸어다닌다.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숨쉬면서도 그렇게 멀리 있는 나의 분신들인 거다. 나는 그것을 찾고 싶어도 언제나 닫혀있다. 요즘처럼 내가 갇혀버린 시기가 없었다. 요즘은 모두가 내게 생생하지 않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날 내맡긴 채 서 있을 뿐. 나는 정확히는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 감각은 자동 반응 기제처럼 기계적이고. 나는 그걸 제대로 활용할 만한 기회가 없다. 그냥 숨을 쉬고 일을 하고 또 사회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냥 그런 일들에 묻혀 나 자신이 원래 어땠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한때 인간과의 만남이 주었던 생생함은 이제 퇴화되버린 것처럼 모두 무미건조하다. 이번 동면은 하나의 거대한 단절이었는데, 그 단절조차 아무런 느낌이 없을 정도로 나는 변해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 동면을 계기로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단절을 통해 도달하려 했던 깨끗한 상태가 아니라. 기억을 잃어버림으로써 도달하려 했던 그런 쾌적함이 아니라. 왜일까. 그리고 무얼까. 나는 중요한 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와선 그게 무언지 안다는 게 더 괴로운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일어나고 싶다.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다.

나간 후엔 나는 무엇을 할까.

지금은 봄일 거다. 추위는 가시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봄. 봄의 어느 하루의 휴가. 그런 날엔 무엇을 할까. 그러고 보니 나간 후에 나는 무엇을 할지도 모른다. 봄이고 낮이겠지. 햇빛이 있을 것. 운이 좋다면 날씨가 좋을 것. 그냥 그런 '통째로의 오후'가 놓여 있다. 나는 무엇을 할까.

나는 무엇을 할까.

나는 어쩌면 흥미있는 영상 자료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면 내가 만나고 싶은 인간을 만나러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리. 오랜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지. 그러나 나는 무엇을 할까.

무엇을.
무엇을 할까.
이 공간을 벗어난 후 무엇을 할까.
언제나 그랬듯이 전원 까페로 산책을 나가도 좋겠고.
언제나 그랬듯이 집에서 자료 화면이나 보아도 좋겠고.
그러나 이젠 찾아오지 않는다.
아주 운이 좋다면 '살아있고 싶어라.'
나는 무엇을 할까.
조금도 모르겠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없다.
울리는 무언가가.
인간이어도 좋았다.
인간이 아니어도 좋았다.
울릴 수 있는 무언가가.
나를 관통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다가와서 날 깨어있게 한다면.
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 텐데.
나는 살아있고 싶다.
이 순간만이라도.

그러나 오후는 '통째로 놓여있고'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라. 오후가 지나기 전에 무엇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러나 운이 좋아야겠지. 나는 그냥 서 있고 무언가가 다가오길 바라지만. 아주 운이 좋아야겠지. 나는 살아있고 싶어라.

그저 한 순간만이라도.
그저 한 순간만이라도.

1999.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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