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게임

성기영 ('93)



시계는 아침 6시를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 인기척도 없는 병실,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따금씩 살랑살랑 커튼을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공기가 이제 막 익은 사과처럼 싱그럽다. 혜린은 아직 잠이 들어 있었다. 가끔씩 눈을 찡그리고 신음소리를 살짝 내뱉는 걸 보면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도 세 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것도 침대 옆에 보조의자를 하나 두고 거기에 앉아 침대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혜린은 벌써 며칠째 그렇게 불면(不眠)한 잠을 자고 있었다. 창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9월 초의 새벽공기는 이제 성큼 다가온 가을을 느끼게 해줄 정도로 서늘함이 배어있고, 저쪽 어디선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아직 들려오고 있었다.
혜린은 전신을 싸고도는 으스스한 한기에 잠이 깼다. 창문을 열어놓고 잤나 보다. 혜린은 몸을 일으킬 때 몸의 관절 하나하나에서 뚜뚝 하는 소리를 들었다. 온 몸엔 싸늘한 새벽공기로 인해 소름이 잔뜩 돋아 있었다. 혜린은 일어나서 창문을 닫았다. 커튼을 막 치고 돌아서려 할 때 건물 밖 저쪽으로 앰불런스 한 대가 요란하게 급히 병원 정문을 통과하는 게 보였다. 오늘 또 하루가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영호는 침대에서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 어젯밤 모습 그대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 누워있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이 병실에 제일 처음 들어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게다. 영호는 외상을 치료하러 가끔씩 다른 곳으로 실려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가족들이 같이 따라가고 나면 아무도 없는 빈 호실을 혜린 혼자서 지켜야 했다. 때론 1시간 정도로 짧게 끝나기도 했지만 어떨 때는 여섯 일곱 시간씩 병실을 비우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외상이 다 치료되어 이젠 하루종일 여기에 누워만 있다. 그때부터, 가족들을 대신해서 혜린이 밤새 영호 옆을 지키기 시작했다. 가족이래 봐야 먼 친척 형 하나와 그 형수, 그리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외삼촌, 이렇게 셋밖에 없었다. 그나마, 한 달이 넘게 계속된 영호의 입원기간 동안 외삼촌은 얼굴을 비치더니 사업이 바쁘다며 한 달치 입원비를 다 내곤 도망치듯 해외로 떠버렸고, 친척형도 영호의 치료가 어느 정도 끝나자 병원에만 매달릴 수 없다며 저녁때만 잠깐 들를 뿐이었다. 그래서 줄곧 병실은 형수와 혜린, 두 명이 번갈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혜린은 그 사람들을 야속하게 생각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영호는 고아였으니까. 그나마 돈 많은 외삼촌이 나타나 병원비라도 대줘서 치료라도 받게 해준 게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심정 같아선 이래저래 눈치 보이는 것보단 차라리 자기 혼자 영호 옆에 남아있으면 했다. 자긴 어차피 이번 일로 인해 학교에 휴학계를 낸 상태이니 언제라도 영호 곁에 남아 있을 수가 있다. 게다가 영호는 지금은 간병인이 많이 필요 없는 상태 아닌가. 낮엔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남아 있어 창문을 열었다가 저녁이 되어 서늘해지면 창문을 닫아주는 게 고작이니까. 영호의 대소변은 혜린이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병원에서 간병인을 딸려 주었다. 영호는 외상은 거의 치료가 끝났지만 지금은 이런 상태로 그렇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나 깨어나게 될까.
혜린이 창문을 닫고 막 의자에 앉았을 때, 간호원이 들어왔다. 한 간호원, 그녀는 어제가 철야근무하는 날이었다. 그녀의 얼굴엔 밤새 환자들과 씨름하며 이 병실 저 병실을 뛰어다닌 피곤한 빛이 역력했다. 캡을 눌러쓴 머리가 약간 헝클어진 채로 손에는 하나의 파일을 들고 들어온 그녀는 혜린을 보자 살짝 웃어주었다.
"안녕하세요."
혜린은 먼저 인사를 했다.
"내 꼴도 말이 아니지만 혜린씨도 제대로 못 잔 것 같군요. 그렇죠?"
"한 세시간 정도 잔 것 같아요."
"어젯밤에 잠깐 들렀는데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더군요. 그렇게 자면 더 피곤해요. 보조침대를 사용하라니까요."
"저만 편히 자는 게 미안해서......"
한 간호원은 이리저리 파일을 뒤적이고 영호의 팔에 꽂은 닝겔을 검사하다가 곁눈으로 혜린을 보며 씩 웃었다. 특별히 영호를 잘 돌봐주는 고마운 간호원이다. 한 간호원은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좀 쉬란 말과 함께 문 쪽으로 갔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문득 뒤돌아 서서는 말했다.
"영호씨가 빨리 깨어나서 지금 혜린씨가 고생하는 걸 봐야 하는데..... "
말을 마치고는 간호원은 나가버렸다. 혜린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정확하게는 두 명이지만 영호는 지금 혜린을 보아주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고 들어주지도 않는다.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혜린은 간호원이 남긴 한마디에 여운이 남았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보기에 안쓰러워서 위로한다고 한 말인 것도 같다. 혜린은 벽에 걸린 거울로 자기 모습을 보았다. 긴 머리는 약간 헝클어져서 어깨부터 허리까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었고 얼굴의 화장은 지워진지 오래여서 두 뺨은 발그레한 홍조를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눈은 쑥 패어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많이 말라 있었다. 혜린은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곤 씩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얼굴에서 나타나자마자 곧 씁쓸한 표정과 섞여 이상야릇한 얼굴이 되었다. 너도 많이 야위었구나. 혜린은 이런 몰골을 하고 어제 저녁 면회온 부모님을 뵈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어제 부모님이 병원에 찾아오신 건 영호를 보러 온 게 아니었다. 딸자식이 이틀 밤을 꼬박 병원에서 날밤을 샜기 때문에 걱정이 되고, 도대체 왜 이 고생을 하냐고 혜린을 꾸짖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런 부모님께 이런 몰골을 보였으니 .
혜린과 영호는 비오는 날 처음 만났다. 일년하고도 몇 개월전 봄, 철 이른 장대비가 갑자기 쏟아졌던 어느 날이었다. 영호는 버스에서 내리면서 우산을 갖고 오길 잘했다며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분주한 아침시간,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은 갑자기 쏟아진 비 속에서 적잖이 당황해 하며,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그냥 뛰어가거나 아니면 여학생은 가까운 가게나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서 비를 피했다. 영호는 느긋하게 우산을 받쳐들고 교문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모기 만한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저어기...... 잠깐만요."
영호가 뒤돌아보았을 때 빗속에서 한 여학생이 서있었다. 긴 머리칼 한 올 한 올에서 물방울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고, 이마에서 흘러내린 빗물은 속눈썹 부분에서 이른 아침 이슬 마냥 방울방울 맺혀져 있었다. 추운지 얼굴이 약간 파래진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입가에 번져 있는 이 학생이 바로 혜린이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우산 좀 씌워 주실래요?"
이제 갓 제대한 영호와 막 2학년에 올라온 혜린은 이렇게 만났다. 영호는 섬세하면서도 때로는 당돌한 면이 있는 혜린이 좋았고, 혜린은 무뚝뚝한 것 같지만 가슴 속 깊이 정이 많은 영호가 좋았다. 둘은 곧 학교에서 소문난 커플이 되었다. 영호는 사람들이 많은 곳은 싫어했다. 가끔씩 영화를 보더라도 이내 한적한 곳으로 와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난, 사람 많은 곳은 싫어."
"왜?"
"사람들 사이에 끼여 이리저리 걷다보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 단순히 사람들에 밀려 한 발짝씩 내딛는 것 같아. 혼자서 느긋하게 걸을 수도 없고. 사람들이 많은 것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내 생각을 못하게 하니까 싫어."
"무슨 생각?"
"그냥 별다른 생각은 아니야. 심각하게 명상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하루에 생각하는 시간이 전혀 없이 보낸다는 건 슬퍼."
그런 영호였지만 예외적으로 좋아하는 곳이 하나 있었다. 영호는 유일하게 사람 많은 종로의 밤거리를 좋아했다. 영호는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주는 밤거리의, 늘어선 노점상에서 지나가다가 슬쩍 한 두개의 물건을 사는 걸 즐겼다. 혜린은 충동구매라며 삐쭉거렸지만 영호가 사준 귀걸이를 하고는 좋아하곤 했다. 둘이 거리를 걸어갈 때 먼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건 언제나 혜린 쪽이었다. 영호는 팔을 잡히면 씩 웃으며 가만있을 뿐, 절대로 먼저 잡아본 적이 없었다. 혜린은 늘 그게 불만이었다.
혜린은 지난날의 추억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옛날처럼 행복했던 순간들이 다시 찾아올까. 혜린은 아직도 눈앞에서 잠만 자고 있는 영호를 보았다. 영호도 많이 말랐다. 얼굴은 핏기 없는 잿빛으로 그늘졌고 양볼은 푹 꺼져 있었다.
"이 학생이 너의 남편이라도 되니? 아직 깨어나지도 않는 환자를 밤새 지켜볼 필요야 없잖아. 잔말 말고 집에 가자."
"............"
어젯밤 아버지와 어머니가 찾아오셨을 때 혜린은 죄인처럼 아무말도 못했다. 딸이 얼굴도 잘 모르는 선배라는 사람 병간호로 거의 매일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고, 더구나 휴학까지 했다는 말에 아버지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었다. 병원까지 달려온 아버지께 혜린은 울면서 호소했다. 영호오빠에겐 제가 필요해요. 오빠는 지금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요. 게다가 오빠는 저를 구하려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혜린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는 울고 말았다. 옆에서 어머니는 해쓱해진 딸을 보고는 몰래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간신히 부모님을 설득해서 돌려보낸 후 혜린은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침대에 뿌리다가 잠이 들었었다.
혜린은 물끄러미 영호를 바라보았다. 숨은 고르다. 새근새근 잠든 아기 같다. 금방이라도 눈을 비비며 일어날 것만 같다. 혜린은 영호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댔다. 따스한 촉감이 입술을 통해 전해져 왔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을 때 영호의 뜨거운 호흡이 확 느껴졌다. 아직 살아있구나. 분명 아직 살아있어. 혜린은 몇 번이고 되뇌어 보았다.
끔찍한 악몽의 시작은 저주스럽도록 너무나 상쾌하고 화창하게 갠 어느 날에 시작되었다. 혜린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무던히도 영호를 꼬셨다. 결국 둘은 오후수업을 전폐하곤 자칭 한국최고라 하는 교외의 놀이동산으로 달려갔다. 자유이용권을 끊어 목에 걸고 혜린은 어린아이처럼 쉴새없이 이곳 저곳으로 뛰어다녔고, 사람이 비교적 적은 평일 날에 둘은 한껏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 둘은 정문을 통해 나왔다. 도로 가를 따라 쭉 곧은 도로를 따라 걸으며 둘은 아쉬움에 젖어 있었다. 혜린이 무언가를 사러 간다며 저만치 먼저 뛰어갔다. 영호는 앞에 가는 혜린의 긴 머리칼이 한 걸음 뛸 때마다 찰랑거리는 걸 보며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혜린은 그때까지 꿈같은 시간에서 깨어나지 못해, 자신의 머리 위로 보수공사를 하는 인근 공사장의 두꺼운 벽돌이 가느다란 쇠줄에 매달려 그물채로 운반되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벽돌더미가 혜린의 머리 위로 왔을 때 혜린은 영호의 고함치는 소리를 들었다. 혜린은 불행하게도 전혀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버렸다. 고개를 돌렸을 때 혜린은 영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영호는 달려오고 있었다. 혜린의 머리 위로 그물은 찢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들.
영호는 순식간에 혜린을 품 속에 깊이 안고는 몸을 움츠렸다. 자신의 넓은 가슴으로 혜린을 꼭 감싸쥐고는 팔다리까지 품 속으로 끌어당겼다. 이와 동시에 영호의 머리와 등으로 허공을 날아 퍽퍽 투박한 소리를 내며 수십 개의 벽돌들이 내리꽂혔다. 영호는 아픈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눈 앞이 서서히 아득해질 뿐이었다. 혜린은 완벽하게 보호되었다. 살갗 하나 긁히지 않았다. 혜린은 귓가에서 영호의 낮고 강렬한 신음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아득하게 사람들의 비명소리, 돌 구르는 소리, 공사장 인부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그리곤, 잠시 모든 것이 조용해졌을 때 혜린은 영호가 서서히 자기 쪽으로 쓰러지고 있음을 느꼈다. 영호의 목으로 끈적끈적한 액체가 넘어와 혜린의 목덜미를 적셨다. 누구 좀 도와주세요. 영호는 그렇게 쓰러져갔다.
혜린은 영호의 이마에서 입술을 뗐다. 영호는 여전히 숨을 고르게 쉬며 끝없이 잠들어 있었다. 혜린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영호의 뺨 위로 떨어졌다. 오빠가 날 안아준 건 그게 처음이었어요. 알아요? 그 동안 한번도 안아주지도 않고 손을 잡아주지도 않던 오빠가 먼저 날 보듬어 주었어요. 그것도 완전히 오빠의 품 속 깊이 안아주었죠. 난 행복해요. 정말로 행복해요. 이젠 손 안 잡아 준다고 칭얼대지도 않을 거고, 차갑게 대한다고 속 상해하지도 않을 게요. 남들과 같이 있을 때 괜히 못 본 척한다고 토라지지도 않을 거고, 여자는 자존심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쏘아붙이지도 않을 게요. 그러니, 제발, 한번만 더 날 봐줘요. 눈을 뜨고 한번만 더 날 보고 귀찮게 군다고 해줘요. 한번만 더 못난이라고 놀려줘요. 제발 한번만 더 . 더 이상 바라지 않을 게요. 제발.
혜린은 눈을 돌리고 말았다.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창가로 더듬더듬 가서 커튼을 열어 젖혔다.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마주했다. 그래도 눈물은 흘렀다. 햇살은 혜린의 목을 감고 돌아 영호에게 쏟아졌다.
"콜록...... 푸후 .... 콜록콜록 ......... "
혜린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분명 기침소리였다. 이 방에서 기침을 할 사람은 자기 외엔 영호밖에 없었다. 영호는 몸을 꿈틀대며 기침을 하고 있었다. 깨어났다! 혜린은 자기 눈을 의심하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마에 키스하고, 눈물이 뺨에 떨어지자 의식이 되살아났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영호는 지금 그렇게 깨어나고 있었다. 혜린은 눈물을 닦았다. 뿌옇게 흐린 눈으로 영호를 만날 순 없었다.
"오빠 ........ 오빠 ........ "
혜린은 이 말밖엔 할 수가 없었다. 영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한참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여긴 어디지요?"
혜린이 그렇게 기다리던 순간이지만 영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는 뜻밖의 말이었다. 혜린을 보며 웃어주지도 않았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았다. 혜린은 그 동안 영호가 깨어날 때의 모습을 상상해왔지만 그 속에도 이건 없었다. 하지만 실망도 잠깐, 혜린은 기쁨에 넘쳐서 영호의 눈에서 그리고 말투에서 전과 다르다는 낌새를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다.
"병원이에요, 오빠."
잠시 다시 침묵이 흘렀다. 영호는 여전히 의심쩍은 차가운 눈초리로 혜린을 쳐다볼 뿐이었다.
"오빠 .... 라고 ........ 그렇다면 당신은 저의 친동생입니까?"
영호는 기억상실증이었다.

영호는 퇴원했다. 외상은 완전히 치료되어 겉으로 보기엔 완전한 정상인이었다. 옛날처럼 넓은 가슴에 살짝 그을린 피부를 그대로 지닌 채, 목 뒤쪽엔 약간의 수술자국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머리 속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기억이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채,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병원에선 퇴원하여 옛집에서 옛날과 똑같은 삶을 계속하다 보면 기억이 되살아날 거라 했다. 영호의 병실은 영호가 퇴원한 후 두 시간도 안되어 다시 다른 환자로 채워졌다.
영호는 자신이 살던 집에 왔다. 방에는 책상 하나와 침대, 그리고 책장 하나가 놓여있고 벽에는 액자 하나와 다 완성된 퍼즐그림 하나가 걸려있었다. 고호의 자화상이었다. 귀를 잘라버리고 붕대를 감은 고호가 영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방이 영호의 방이라고 알려주는 건 책상 위에 놓여있는 사진 하나밖에 없었다. 사진 속에서 자신과, 며칠 전까지 병원에서 자신을 간호해준 여학생이 같이 웃고 있었다.
"혜린.... 이라 했던가..... ?"
영호는 가만히 되뇌어보았다. 순간 무언가 언듯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스치고 지나갔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영호는 책장 앞에 섰다. 전공서적이 첫째와 둘째 줄에 가득 꽂혀 있었다. 영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저런 걸 공부한단 말인가? 아무 책이나 꺼내 펼쳐 보았다. 붉은 색 볼펜으로 꼼꼼히 자를 대고 밑줄을 그은 게 보였다. 웬 한자가 이렇게 많지? 영호는 별 이상한 걸 다 공부한다고 생각했다. 그 윗줄에는 시집과 소설책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문학을 좋아했나보군. 이번에는 책상으로 가서 책상서랍을 열어보았다. 쓰지 않은 편지지가 몇 장 있고 학교에서 온 가정통신문이 두 장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자물쇠에 채워진 일기장이 있었다. 열어보려 했지만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영호는 순간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의 방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영호는 이 방의 주인 몰래 들어와서 이것저것 들춰보고 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 하나하나 캐기 시작하는 사립탐정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실은 조사하는 사람과 조사 당하는 사람이 동일인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동일인이 아니라 동일인이어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영호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범인을 찾고 보니 그게 바로 자기였다는 식의 난해한 추리소설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순간에도 무언가가 계속 영호의 머리 속을 스치고 사라졌다는 사실과 이 방에서는 자신의 체취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영호는 아물아물거리며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들에 의해 미칠 것만 같았다.
영호는 끝도 없는 미로찾기를 그만두고 길가로 나왔다. 이제 막 어스름이 지기 시작한 거리에는 하나둘씩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다. 영호는 아까부터 자신의 방에서 본 일기장만을 생각하고 걷고 있었다. 그 자물쇠 번호를 생각해낼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수첩이나 지갑 속을 뒤져보아도 번호는 나오지 않았다. 영호는 계속 그 번호만을 생각하며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영호의 주위에는 차츰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밀리면서 영호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사람의 물결을 따라 걷고 있었다. 옛날의 영호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했다는 사실을 지금의 영호는 알 리가 없었다. 최소한 지금의 영호는 사람들이 많건 적건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냥 아무런 감정 없이 옛날의 느낌과 기억을 상실한 채로 사람들 사이에 묻혀 걷고만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걷고 있는 영호마냥, 영호의 좌우로 표정을 상실한 수많은 인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영호는 문득 혜린이 생각났다. 그 여자라면 혹시 일기장 번호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여자와 같이 있으면 생각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호는 혜린에게 전화를 했다.

영호와 혜린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걷고 있었다. 둘은 도통 말이 없었다. 이젠 전처럼 혜린도 영호의 손을 잡지도 않았고, 영호도 거리에 늘어선 노점상을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영호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차곡차곡 채워갔던 기억의 책은 이제 앞부분은 모두 찢겨져 흩어지고 백지로 남아있는 뒷부분만 가득했고, 앞부분의 찢겨진 기억의 조각들은 갑자기 눈앞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이 불쑥 영호의 머리 속에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영호는 그 멀어져 가는 기억을 붙잡아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내 사라진 기억의 조각들은 다시 새로운 조합을 이루어 또 다른 모습으로 영호에게 다가왔다. 영호는 완전히 기억을 잃어버리든지 아니면 모든 기억을 되찾든지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우리 저기 들어가요."
영호는 혜린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까페. 약간 어두운 조명에 전체를 나무로 짠 약간 무거워 보이는 까페였다. 사람은 별로 없었다.
"너무 무겁고, 너무 조용하지 않니?"
"........"
혜린은 잠자코 영호만 바라보았다. 저긴 영호가 제일 좋아하는 곳인데 .
"우리 둘이 여기서 자주 만났어요."
영호는 잠자코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내가 자주 왔던 곳이라면 여기서 무슨 기억의 끄트머리라도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혜린과 같이 있는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우리가 자주 앉던 곳이 어디였지?"
혜린은 잠자코 창가 쪽 테이블로 갔다. 한사람이 메뉴판을 들고 왔다.
"이전에 우리가 시키던 걸로 똑같이 시켜 줘."
혜린은 그 까페에 앉아있는 한 남녀를 보았다. 둘은 언제나 다른 것을 시켰다. 그리고는, 양쪽을 번갈아 가며 각각 반씩 나눠 마셨다. 이건 그들만의 방식이었다. 남자는 주로 마티니를 시켰고 여자는 핑크 레이디 아니면 싱가폴슬링을 시켰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가 핑크레이디를 시킬 때면 자기는 그걸 못 먹는다고 투덜거렸다. 주문한 것이 나오면 빨대를 한쪽에 모두 꽂아서 둘은 얼굴을 맞대고 웃으면서 맛을 즐기곤 했다. 어느 날인가는 여자가 자기 빨대에다 빨대포장종이로 예쁘게 리본을 매고 있었다. 남자는 조그마한 대롱에 예쁘게 리본을 매는 여자가 너무 귀여워 한참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여전히 조그맣고 하얀 손가락을 움직여 리본을 매고 있었다. 남자는 이유를 물었다. 여자는 약간 수줍은 미소를 띠며 짧게 대답했다. 구별해야 하잖아.
혜린은 마티니 하나와 싱가폴슬링을 주문했다. 혜린은 영호가 이것의 의미를 알아주기를 원했다. 옛날 행복했던 순간을 하나하나 재현하면 거기서 영호의 흩어진 기억을 짜 맞출 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영호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다. 영호는 처음으로 아니 기억을 잃은 후 처음으로 혜린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에 희고 깨끗한 피부, 긴 머리가 어깨를 덮어 허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예쁜 얼굴이라 생각했다. 웃을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하얀 이빨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영호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혜린을 만나는 것도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데 어떤 계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기에 만날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영호는 기억과 함께 감정까지 모두 잃어버렸다.
"내 것은 어느 거지?"
주문한 것이 나왔을 때 영호는 물었다. 예전의 사이에서는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지금의 영호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우린 같이 마셔요."
이 말을 영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물끄러미 혜린만 쳐다보았다. 혜린은 잠시 후 잠자코 마티니를 영호 쪽으로 밀었다. 실망이 혜린의 가슴속에 채워졌다.
혜린과 영호는 각각 자기 앞에 놓인 것만 마셨다. 혜린은 몇 모금 입술만 적시고는 그만두었다. 영호는 그 동안 어떻게 사귀었고, 어딜 자주 갔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옷 입는 법이랑 음식, 습관 등에 관해서만 물었다. 혜린은 영호의 일기장 번호를 알지 못했다. 기계적인 문답이 끝나고 둘은 무미건조하게 일어났다. 혜린은 추억의 장소가 더럽혀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영호는 혜린을 만난 게 헛수고였다고 생각했다.
둘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거리엔 지나가는 사람들로 혼잡했다. 혜린은 익숙지 않은 많은 사람들로 인해 불쾌했다. 영호랑 혜린은 지금까지 한적한 길로만 다녔다. 둘만의 시간을 많은 사람들로 인해 뺏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혜린은 사람들이 싫었다.
"야, 이 사람들 봐. 신나는데..... "
영호는 정말 신나는 표정이었다. 영호는 어느새 사람들을 즐기고 있었다. 영호는 혜린에게 사람들 사이에 끼여들자고 했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다시 살아났다는 느낌이 오는데. 이 사람들 다 어디서 나온 거지? 아까는 이렇게 많이 있지는 않았는데 "
"오빠는 원래 사람들 많은 곳을 싫어했어요."
"옛날에는 싫어했어도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이렇게 좋은 걸. 활력을 주는 것 같아."
영호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자꾸만 나아가고 있었다. 혜린은 자꾸만 뒤에 쳐졌다. 처음엔 한 명이더니 나중에는 두 명, 세 명이 둘 사이에 끼여들었다. 혜린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오빠, 같이 가요."
영호는 뒤돌아 서서 혜린을 기다려주었다. 물론 손을 내밀어주지는 않았다. 기다려주는 게 혜린에게 베푸는 최대한의 친절이었다. 영호는 확실히 변했다. 혜린은 자신이 없었다. 영호의 기억을 되찾아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예전의 영호는 영원히 되찾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영호는 기억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감정까지 상실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 사람은 분명 영호가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밀리고 밟히면서 혜린은 자신이 단순한 길 안내원으로 전락한 느낌을 받았다. 영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길을 안내해 줄 뿐, 영호에게 있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그 동안 고생하며 간병한 대가가 이것이란 말인가?
언젠가 영호는 혜린의 생일날에 1,000개 짜리 퍼즐그림을 맞추어 선물한 적이 있었다. 고호의 '해바라기'라는 작품을 밑그림으로 한 퍼즐이었다. 혜린은 자신이 지금, 언젠가 선물 받은 적이 있는 그런 퍼즐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 조각난 기억의 조각을 제자리에 끼워 맞춰야만 하는데, 맞추다 보면 자꾸 다른 자리, 엉뚱한 곳에 끼여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밑그림 자체가 다른 그림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원래 다른 그림은 아니었는데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지면서 자꾸만 새로운 기억으로 바뀌고 있었다. 기억과 함께 모든 감정을 상실한 영호. 지나간 추억은 혜린 혼자만 간직하기엔 너무 벅찼다. 혜린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혜린은 열 손가락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자신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아련한 기억들이 부담스러웠다. 그것들이 계속 빙글빙글 돌며 혼돈스럽게 했다. 영호는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오빠, 전 집에 갈 께요."
간신히 영호를 붙잡고는 말했다. 영호는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치 걸어가는 혜린을 보며 영호는 목이 말라옴을 느꼈다. 인근에 가게가 보였다. 영호는 가게로 가서 음료수를 하나 집었다. 지갑을 펼쳤을 때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긴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 왼쪽 어깨 앞으로 내어놓은 채 영호를 보며 한 여자가 살며시 웃고 있었다. 영호는 저만치 걸어가는 혜린과 지갑 속의 사진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만치 걸어가는 혜린의 머리 결이 걸을 때마다 찰랑거렸다. 영호는 예쁘다고 생각했다. 사진 속의 인물이 벌써 저만큼 멀리 가버린 혜린의 뒷모습에 자꾸만 오버랩되어 나타났다.

1995.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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