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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맨은 걷는다
황우현 ('94)
MD라는 꽉 찬 두 글자가 내게 의미하는 것은 남다르다. 486에서 펜티엄3로 급상승했던 올해 초의 컴퓨터 업그레이드와 함께, 선물로 받은 지 만 '하루' 되는 이 MD는 차원의 변화이다. 우습게 코웃음으로 넘겨버릴지 모르겠지만, 사상의 변화이자 철학의 변화이다. 이건, 내게는 예기치 못한 베수비오스 화산 폭발 못잖은 이야기다. 일본 관광객들의 필수 밀수 품목에는 '카메라'와 '워크맨'이 있었다. (아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코끼리밥통'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지만, 고등학생들 사이에 악명 높던 코끼리밥통을 빙자한 아주머니들의 포르노 촬영사건 때문인지, 한국 밥통 기업의 파이팅 덕분인지, 이제는 그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우리가족이 일본 관광에서 얻은 성과도 그와 비슷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쓰고 있는, 이제는 사장되어 보기조차 힘든 Nikon F401 카메라와... 그러고보니 워크맨을 사는 것은 포기했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워크맨이라면 콤포넌트보다도 비싼 고가의 장비(아마도 첩보용 녹음기를 떠올렸던가보다)로 생각하고 있어서, '사줄까?'라던 아버님의 고운 목소리에도 '아... 아니요!'라고 대답했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이모댁에 놀러갔었다. 격하고 낭만적인(소위 불효자의 전형을 걷는 반항적인) 인상이 강하던, 지금은 그런 성향을 버리지 못한 탓에 폭주(暴酒)로 젊은 나이에 명을 달리한 외사촌형이 있었다. 그 형이 조용히 자기 방으로 나를 불렀다. 이런 은밀함을 그 이후로는 느껴본 일이 없는데, 금주시대의 마피아들이 한적하고 어두운 강변에 검은 차를 대놓고는 뒷춤엔 한손으로 권총을 감추고 '거래'를 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고 상상한다. 이 때에 형이 뒷춤으로 손을 넣어 스윽 밀어내며 보여주었던 것은, 권총도 마약도 아닌 워크맨이었고, 그 눈부신 은빛(으로 기억하는데)과 네 글자, S, O, N, Y는 내겐 황홀함이었다. 결국 워크맨을 손에 넣은 것은 중학교 때였다. 엄밀히 말하면 워크맨은 아니었다. Walkman이란 SONY에서 생산되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니, 내가 가졌던 검은 AIWA는 뭐라고 불러야 옳을까? 여하튼, 그 물건은 한쪽 켠에 플레이, 스탑, 리와인드, 패스트 포워드 키가 오목조목 붙어있는 것이었고, 빨간 바를 움직여 주파수를 맞추는 라디오까지탑재되어있었다(물론 내 기억은 확실치 않다). 말하자면 꾹꾹이 테잎 플레이에 굴려 맞추는 라디오. 워크맨처럼 순식간에 인간의 마음을 휘어잡은 전자제품도 드물지 싶다. 덕분에 워크맨의 발전 또한 비약적이었다. 꾹꾹 누르던 플레이 버튼은 이제 살짝만 갖다 대도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경쾌함을 선사한다. 라디오 주파수는 디지털 숫자로 전면 액정에 전시되고, 0.25의 단위(Mhz던가?)까지도 구별해내는 치밀함까지 갖추고 있다. 가장 큰 변화(변혁이라고 해야겠다)는 선곡 기능. 이제는 길다랗게 이어진 테잎에서 원하는 곡을 쏙쏙 뽑아내 들을 수 있게 된 거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지만 워크맨은 그런 매력에서 CD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친구와 함께 워크맨을 구입하러 갔다. 아주 최근의 일이다. 난 절대로 최신형 워크맨을 권하지 않는다. "그저 플레이에 충실한 기계가 좋아." 선택할 것은 오토리버스(auto reverse; 테잎의 한 면이 끝나면 저절로 돌아가는) 기능과 라디오의 탑재 여부, 그리고 Bass음을 강조할 수 있는 키 정도. 오토리버스 따위의 기능도 필요없다고, 그리고 테잎을 꺼내 입에 물었다가는 뒤로 돌려 다시 집어넣는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것까지 강요할 수는 없다. 대개 5만원 이내에서 해결되는 도시락 모양의 워크맨을 권하면서 내구성을 그 이유로 들곤 하지만(전자 기능이 많으면 고장이 잦아!), 실은 다른 이유도 있다. 워크맨을 끼고 살던 시절, 이것은 군입대 전인 97년 여름까지를 이야기하는데, 내가 정말 음악과 가까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놈, 2년쯤 쓰고는 새로 교체되곤 하던 싸구려 워크맨 덕이었다. 심지어 독일 SIEMENS(지멘스 워크맨이란 건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에서 나오는 워크맨을써보기도 했는데, 일본의 획일적인 디자인과 음질에서 벗어난 기분은 묘했으며, 여지껏 나와 함께 한 워크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놈이다. 이 싸구려들을 통해 재생되는 나의 5000원짜리 테잎들은 한시간 반씩, 도합 세 시간의 등하교길을 끊임없이 장식했다. '끊임없이'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다, 고급 워크맨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매력이 바로 이것이다. 선곡기능의 부재. 테잎은 언제나 0분 0초에서 시작했고, 잠시간의 침묵을 거쳐 1번 곡, 2번 곡, 그리고 마지막 곡으로 쉼 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Nirvana의 네 장 앨범들이 재생되었고, Led Zeppelin의 Live가 이어졌다. '이 곡은 한 번 더 듣고 싶은데'라는 생각은 대개는 게으른 손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실제 몇 번씩 돌려듣는 곡들이 있었지만, 앞으로 돌리고, 노래 위치 확인하고, 다시 앞으로 돌리고, 확인하고, 이번에는 너무 돌아가서 다시 뒤로 돌린 뒤 또 확인하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다가는 어느 순간부터는 '아, 이때다!'하는 감이 생기고, 몇몇 아끼는 곡들의 정지 위치에 감이 오는 그런 손맛에 전율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라, 리와인드로 덜덜덜 돌리다가는 스탑 버튼을 뚝! 누르고, 다시 플레이를 누르면 원하던 곡 바로 앞부분의 짧은 적막으로 이어지는 짜릿함을!) 끝없이 이어지는 테잎 한 장의 반복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불편함 이외에는 없다고 쉽게 넘겨짚을 수도 있겠지만, 말했다시피 쉽게 넘겨짚었을 뿐이다. 혹 개인적인 경험에 치우친 건 아닌가 싶지만, 돌고 도는 테잎 속에서 느껴지는 친밀감은 무엇보다도 강하다. 버스 한 구석에 몸을 구겨넣고는 내 귀에 꽉차는, 예를 들어 Blind Melon의 CD 역시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선곡이 가능한 워크맨이라든지, 심지어 원하는 곡 순서대로 플레이할 수 있는 프로그램 기능을 가진 CDP는 기껏해야 내게 두어 곡, 10여분만을 할애할 수 있을 뿐이다. CDP가 내 손에 들어온 이래로 차분히 앉아 앨범 전체를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리고 컴퓨터의 업그레이드와 함께, 또 냅스터(Napster; MP3 file을 공유하는 프로그램)를 사용한 이래 그런 경향은 더욱 뚜렷하다. 원하는 곡을 찾아 듣는 즐거움은 있지만, 그건 단지 BGM(Back Ground Music)일 뿐이다. 삶에 스타카토를 주는 짧은 곡들이었지, 삶 자체, 그 음악의 뒤에서 묵묵히 연주하고 노래하는 친구들과 사귈 수 있는 계기는 아니다. 지금만해도 나는 여차저차,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제대로 돌아가는 워크맨은 한 대도 없다. 물론 돌아가지 않는 검은 시체들은 네 다섯 구 정도 가지고 있지만. CDP로 엑기스만 쏙쏙 빼먹는 만행도 3년여 저질러왔고, 이제는 그나마 CD를 사기보다는 냅스터 검색기에 먼저 손이 간다. 그리고는 급기야 MD라는 기계를 손에 넣게 됐다. CD 앨범조차 들고 다닐 필요 없고, SONY사의 선전처럼 '나만의 음악'을 미니 디스크에 채워넣고, 심지어 MP3 파일들까지 이식시켜 들고다닐 수 있는 기계에 귀를 맡기게 된 것이다. 저사양이면서도 묵묵한 깊이를 가진 진득한 도스게임들을 버리고, 한 때 그렇게 씹어대기 바빴던 펜티엄식 고사양 3D 게임에 익숙해지는 데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듯 MD에 미끄러져들어갈 나다. 세상의 파도는 이렇게 만만치 않다. 2000.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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