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자 우리]를 읽고 - 인간관을 중심으로 -

박정미 ('87)



나는 감탄했었다.

간결하고 섬세한 문체, 생생한 현장감각이 살아 번뜩이는 어휘, 통속적이지 않으면서도 아기자기한 이야기 전개, 풍부한 인물군상의 묘사, 그리고 구성을 힘있게 추동하는 건강한 혁명적 낙관성. 이 모든 것이 소설의 세계로 급격하게 빨아들이는 강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었다. 작가의 재능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자 알 수 없는 씁쓸함에 한동안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은 그 막힌 가슴의 실타래를 하나씩 뽑아내어 가닥을 추리고 잘 갈무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여 연속성을 이끌어가는 것은 노동자계급 출신의 노동자 계순이지만, 기실 주인공은 계순을 매개로 하여 등장하는 학출의 노동운동가이다.

미자와 경철, 순이, 이 세사람의 인물형에 작가는 세심히 신경을 썼으며, 이 세사람만으로도 발단, 전개, 결말은 충분하다. 그리고 이 세사람을 통해 계순의 사상적 행로, 참된 노동자로서 눈뜨게 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노동운동의 방향성까지도.

미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학내에서 써클활동을 하다가 시위주동으로 수배를 받게 되고, 의도한 바 구속 - 학운 정리를 밟지 못하자 위장취업으로 미싱대에 오르게 된다. 그녀는 '투쟁위주의 좌편향으로 기울어져 반짝 효과만 낼 뿐 아무런 성과도 낳지 못한 파업을 일으키고 필연적인 실패로 귀결되자 무책임하게' 그 현장을 떠나게 된다.

미자가 조직해낸 봉제공장 동료 계순이는 미자를 계기로 경철을 만나고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경철은 미자를 지도하는 조직의 단위 지도원인데 미자의 실패책임은 거의 경철이의 잘못된 지도와 노선에 기인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경철은 '화려한 언변에 관료주의에 찌들어있고 경직된 논리와 교조주의적으로 원전만을 암송하는 앵무새'로 그려진다. 그는 계순을 노동계급으로서 사랑하지 계순 그 자체 인간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던 탓으로 계순을 불행하게 만들고, 결국 계순은 그에게서 도망쳐 새로운 공장으로 이전하게 된다. 거기서 계순은 아주 새로운 인간형인 순이를 만나게 된다. 순이는 천사같다. 순이는 미싱사, 시다, 반장 모두를 따스히 보살피고 인간적으로 감화시키며 주도면밀하게 파업을 준비한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큰 문제점을 느낀 것이 바로 이렇듯 '인간 자체의 인간성'에만 맞추어지는 초점의 연결이다. 노동운동가를 묘사하는 데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사회변혁의 기본적 대립구도인 노동자-자본가의 모순구도도 자본가의 개인적 품성의 더러움을 통해 발현된다.

이것은 계순에 대한 경철의 사랑을 비판하는 관점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사회관계와 절연된 '사람 그 자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의 본질은 물고기가 몸담고 있는 강물이듯이, 계순이의 본질적 특성은 계순이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인 것이다. 그것은 계순이가 자라온 환경, 그 속에서 부대끼고 느껴온 경험과 관념, 그 속에서 형성된 성격, 의지의 방향인 것이다. 그렇다면 '계순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작가의 비판은 아무런 근거도 내용도 없는 공문구에 불과한 것이다.

경철의 잘못된 사랑은 '노동계급'인 계순이를 사랑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다시피 '노동계급인 계순이'가 '계순 그 자체'를 이루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계순을 대등한 삶의 주체로 인정하고, 연애관계의 핵심인 전면적 인격결합 속에서 상호비판하고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루어 함께 발전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데 있다. 즉 경철의 잘못된 여성관, 연애관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계순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 계순의 경철의 환상 속에서 행복해 하다가, 환상이 깨지자 쓰라린 환멸을 이기지 못하고, 그 당시 실의에 빠져있는 경철을 훌쩍 떠나버린 것이다. 그것은 결코 관계의 일주체로서의 책임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이 소설 속에서 그대로 인용해보자면 '혁명가가 되기 이전에 우선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그 말을 풀어보자면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가 될 것이다.

만일 이 대목을 두고 '지금은 난세이므로 집안에 틀어박혀 도를 닦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사회개혁이기 때문이다'라고 내가 반박한다면 둘 다 공자왈 맹자왈의 봉건적 인간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 될 것이다. 사회변혁은 자아의 완성 이후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정치적 과제가 경철에게서도 볼 수 있는 메마르고 공허한 자아, 너무나 미숙한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를 정당화해주는 것도 아닌 것이다.

운동, 곧 투쟁은 삶이어야 한다. 투쟁 속에서 삶은 풍부해지고 깊어지며, 투쟁 속에서 단련되고 강해지며, 투쟁 속에서 자아를 완성시킨다. 어떻게 투쟁하지 않는 인간이 참 인간으로 설 수 있을 것인가. 사람됨을, 나와 우리와 이 사회와 이 세계의 사람됨을 위하여 싸우는 자만이 사람됨을 얻는다는 진리를 이 책은 자칫하면 그르쳐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마치 참된 인간과 혁명가는 분리된 것이며, 전자는 후자의 준비단계인 것처럼 그 대화 속의 말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함정은 바로 이 단계론적 사고인 것 같다. 노동운동의 상황묘사 및 방향성의 제시에 있어서 이 책은 심각한 조합주의적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승리는 뿔뿔히 흩어져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조직적·통일적 노력 및 사고는 아주 하찮게 되어 있다. 오히려 경철의 조직적 사고는 종파주의 및 조직이기주의로 매도되어 있는 형편이다. 또한 거시적인 안목에서 전체운동의 흐름에 맞추어 투쟁을 결정하려는 경철 등의 과학적 정세분석노력은 알맹이 없는 허영으로까지 비추어지게 된다.

물론 미자의 노조결성투쟁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전술관, 연애관, 조직관은 미시적 한계와 비유물변증법적 사고에 갇혀 있었음에 비추어볼 때 어쩌면 작가가 너무 과장되게 묘사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이다. 그것도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서 말이다.

우리 시대의 노동해방문학이라면 모름지기 남한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의 심층부를 꿰뚫고 들어가 포괄적 시대상을 제시하고, 이 시대의 전형인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해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전진하는 노동자 계급의 상황과 그 상황의 최전선에서의 투쟁하는 혁명적 인간상을 그려내는 데 실패했다. 부르조아적 미학관점에서라면 어쩔지 몰라도, 내용이 형식미라면 별로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아니다.

1991.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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