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정의에 관한 논쟁을 보면 우리는 독일의 정치가 얼마나 학구적이고 논쟁적으로 전개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 같으면, '사회적 정의'란 그저 공허한 정치구호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러한 사회적 정의에 관해 역사적 철학적으로 면밀히 파고들어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독일정치에서 '사회적 정의'는 거의 독일정치의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성장 후분배'가 당연시돼왔던 우리 정치현실에서는 이해가 잘 안되겠지만, 독일인들은 이미 우리보다 훨씬 가난했던 시절부터 사회적 정의문제를 경제성장보다 우선시해왔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고려는 독일인들에게 단순한 경제논리 이상의 철학적 가치에 관련된 것이었다.

사회적 정의에 관한 논쟁에서 사민당 좌파진영은 사회적 정의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실질적 평등으로 확장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곧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너무 적게 받아선 안 되고, 어느 누구도 너무 많이 받아선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정의는 배분적 정의와 교환적 정의를 다 포함하고 있었다. 교환적 정의란 국가가 개인의 보호,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약의 준수를 배려할 의무를 진다는 의미이지만, 이러한 교환적 정의는 정의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오히려 정의의 핵심은 "각자에게 각자의 분을"이라는 고전적 명제로서의 배분적 정의에 있었다.

이에 맞서 사민당 우파진영은 배분적 정의가 사회법의 근거가 될 뿐이고, 민법이나 형법 같은 기본법은 교환적 정의에 입각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한 고전 국가철학을 따른다 하더라도 배분적 정의는 기아와 궁핍을 완화하기 위한 명령으로서, 단지 국가를 소요나 폭동으로부터 보존하는 데 필요한 것일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국고의 지출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조차도 국방, 문화, 행정이 더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고, 필요에 따른 분배는 예외적인 요구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사민당 좌파진영은 반박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 주창되었고, 1848년 독일 노동자운동에서도 재확인된 자유, 평등, 박애의 3대 이념에서도, 평등은 다른 모든 이념을 압도하는 울림을 가졌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폭풍우와도 같은 산업화와 그로 인한 광범한 계층의 빈곤화의 결과로 대두된 "사회적 문제"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 하여금 근대적 의미의 복지국가를 설계하게끔 강제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국가는 이미 더 이상 도둑이나 잡아주는 국가가 아니었다.

이에 대해 사민당 우파진영은 프랑스대혁명 당시 쟈코뱅정권이 실현했던 평등주의를 보라고 반박했다. "공안위원회"가 지배하던 세상은 관료제가 없고 차별 없는 세상이긴 했지만, 그 상징은 "평등의 낫"이라 불리우던 기요틴이었다. 쟈코뱅정권은 유곽과 도박장을 폐지하고 경직된 가격통제를 시행하고 모든 시민들에게 강제로 "너"라고 부르도록 하고, 통일적인 의복규정을 만들었지만, 그러한 평등에의 광신은 테러로 끝났으며, 1년간의 피바람 끝에 그 열기도 고갈되고 말았다고 사민당내 우파는 주장했다.

사민당 우파진영은 이어, 두차례의 세계대전후 모든 계급대립과 사회적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가가 시민들의 일반적인 복지상태를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러한 주장은 독일 뿐 아니라 전 서구사회가 브레이크 없는 경제성장을 이루던 50년대, 60년대에나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복지국가는 국가가 방대한 채무를 떠맡는다는 개념이었지만, 경제가 호황을 이루고 조세수입이 늘어나는 한 별 문제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호황은 당연히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존 매이나드 케인즈의 적자재정이론도 원래는 경기가 후퇴할 때 국가가 재정을 늘리고, 경기가 호황일 때는 국가가 긴축재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사민당 출신의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슈미트 수상(공교롭게도 이들은 각각 뤼벡과 함부르크 출신으로 모두 북독일 출신들이다)은 애써 이러한 긴축재정의 필요성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야 했던 썰렁한 말로는 무엇이었던가? 사민당 우파진영은 주장한다. 사민당은 여태껏 독일의 복지국가를 전 독일국민을 눌러으깰 거인으로 성장시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평등은 실현할 수 없었다고.

사민당 우파진영의 신진세력이 생각하는 사회적 정의는 영미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에서 말하는 정의이다. 그것은 모든 시민들에게 공평한 권리를 주지만, 그 노력과 재능에 의한 차이는 인정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존 롤즈의 대표작인 "정의에 관한 일고(1971)"를 보면 "가장 가난한 자도 가장 부유한 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모든 사회적 지위가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 속에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을 때"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은 허용된다고 되어있다. 다시 말해 일정한 조건하에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차별의 증가는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된다는 뜻이다.

사민당 우파진영은 정부가 가난한 자를 일단 돕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고 말한다. 금속노동자나 항운노동자, 농부와 광부 등은 노동자이기 때문에 원조가 필요하다지만, 그러면 맥주양조자와 양봉업자 또는 담배업자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원조가 필요 없다는 말인가? 많은 재능있는 인력들이 오늘날 더 이상 많이 일해봤자 세금으로 다 빼앗긴다는 이유로 일을 조금밖에 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불공평을 새로운 특별규칙으로 억누르려는 모든 노력은 광범한 예외를 낳고, 동시에 새로운 노력을 요구한다. 결국 이는 더 많은 정의보다는 더 적은 정의를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사민당 우파진영 내에서도 재경부 장관 아이헬은 사회적 정의의 개념에 생태학적인 '영구보존성' '지속가능성'의 이론을 끌고 들어왔다. 무책임한 물, 공기, 지하자원의 남용을 주제로 삼은 70년대 환경운동처럼, 이제 정부재정도 고갈을 막기 위해 아껴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녹색당의 지지를 받았고, 전통적인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극복할 만한 새로운 이론으로 평가를 받았다. 전경련회장 등과 같은 경제로비스트들도 쌍수를 들고 이 이론을 환영했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자기를 괴롭혀오던 정부가 스스로 규모를 줄이겠다는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민당내 자유주의자들은 당당히 외친다. "왜 국가는 모든 개인의 위험을 지켜줘야 하고 모든 개인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찾아줘야 하는가? 이제 다음 세기에서 우리는 사민주의의 이상향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찾아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는 시민들이 보다 숨 좀 쉬고 살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한다. 사회적 정의는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균등일 뿐이다. 국가는 모든 시민이 시민적 법익과 제도에 접근하는 데 있어 신분, 인종, 성별 등에 따른 장애가 없게끔만 만들어주면 된다."

여기서 보듯 이러한 일련의 논쟁에서 궁지에 몰렸던 것은 사민당내 우파진영이 아닌 좌파진영이었으며, 오늘날 좌파진영 내에서도 그 논쟁의 결과 '사회적 정의'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큰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직되게 전통의 고수만을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진보의 이념을 개발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좌파 진영 내에서도 비판이 끊이질 않고 있지만, 사민당의 정강 내에서도 핵심적 개념인 '사회적 정의'가 이제 옛날과는 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당내 우파들 뿐만 아니라 좌파들도 이러한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