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우리는 도무지 사회적 정의가 무엇이길래 이걸 갖고 집권당인 사민당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날 정도가 되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사실 우리나라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적 정의는 그냥 법률을 엄격히 적용하여 정경유착과 부패구조를 근절한다는 것 정도로 인식되어 있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사회적 정의는 '법대로'라는 소극적 의미 이상이 아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정의라는 말은 5공시절 민주'정의'당의 예에서 보듯 누구나 제멋대로 갖다붙여도 되는 말이었다. 5공시절 사회적 정의의 상징이 바로 '광주학살'과 '삼청교육대'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무지 이런 말장난 같은 개념을 갖고 논쟁을 벌일 꺼리나 있는지 의심스러워질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확실하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유럽에서 '사회적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부자에게서 덜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계급은 이 사회적 정의를 명분으로 혁명을 하거나 총파업을 단행했고, 이건 정말 국가체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서운 개념으로서,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어감의 차이를 생각해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유럽에서 '사회적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평등'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다른 모든 유럽 좌파 정당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민당 정강에서도 이러한 '사회적 정의'는 수입, 소유권, 권력의 분배에 있어 보다 많은 평등을 요구한다는 것으로 확실하게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적 정의'는 오랜 동안 유럽 좌파들의 사고의 핵심축이었고, 그토록 위험스럽게 바뀌어가고 있는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굳건한 닻이어왔다.

어쨌든 이러한 사회적 정의에 관한 논쟁은 사민당 차원을 떠나 독일 전체를 달구었지만, 아이헬과 리이스터의 설득력 있는 논리는 사회적 정의의 의의를 미국과 영국식으로 새롭게 변화시켜가고 있었다. 이에 사민당 좌파는 자기네들의 생각을 결집시켜줄 지도자를 필요로 했지만 사민당 좌파의 명실상부한 수장인 오스카 라퐁텐은 이미 정계를 떠나버린 상황이었다.

라퐁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시계바늘을 1998년으로 되돌려야 한다. 당시 총선을 앞둔 사민당 내에서 당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던 사람은 사실 슈뢰더가 아닌 라퐁텐이었다. 하지만 이름부터가 프랑스 발음인 데다가, 얼굴도 별반 잘 생긴 편이 아니었던 라퐁텐은, 자기 대신 대중적 이미지가 더 갖춰진 슈뢰더를 독일연방수상으로 밀었고 결국 당선시켰다. 물론 라퐁텐은 아직 사민당 당수자리를 움켜쥐고 있었고, 적녹연정에서 그가 거머쥔 자리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재경부 장관직이었다.

그런데 연정 출범 이후 위르겐 트리틴의 스모그제한정책과 크리스틴 베르그만의 교육휴가유연화정책은 모두 "나는 독일경제에 해가 되는 그 어떤 정책도 용납할 수 없다"는 슈뢰더에 의해 폐기처분되었다. 이는 환경정책의 강화와 친노동자적 사회정책의 강화를 주창한 라퐁텐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라퐁텐은 그냥 참고만 있었다. 기민련의 콜보다는 그래도 슈뢰더를 수상으로 앉혀놓는 게 더 낫고, 자기는 아직 사민당 당수자리를 거머쥐고 있기에 시간은 충분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대신 라퐁텐은, 한국의 IMF사태에서 보듯 날로 위험해지는 국제투기자본에 대해 국제적 제재조치를 강구하고 싶어졌다. 프랑스 재무장관 슈트라우스-칸, 일본 대장상 미야자와 등과 연대해, 갈수록 난폭해지는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슈뢰더는 블레어, 클린턴과 손을 잡고 '슈뢰더-블레어 의정서' '미래계획 2000'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라퐁텐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말았다. 사실 미국, 영국의 신좌파와 손잡은 슈뢰더가 미국, 영국의 가장 중요한 소득원인 국제금융투기를 제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에 더이상 참을 수 없어진 라퐁텐은 드디어 1999년 3월 11일 재경부 장관직은 물론이고 당수직까지 집어던지고 고향에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슈뢰더와 사민당 각료들이 사정하며 말렸지만, 그의 입장은 '바보같은 녀석들과 같이 못 놀겠다'는 것이었다. 라퐁텐이 사퇴한 재경부 장관직은 결국 사민당 우파진영의 아이헬이 잽싸게 들어가 앉았다. 당수직은 슈뢰더가 물려받았다.

지도자도 없이 지리멸렬해진 사민당 좌파였지만, 그래도 스카펠리스-스페어크 등은 자기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스카펠리스-스페어크에게 사민당 우파의 태도, 즉 사회적 정의를 미국과 영국에서 말하는 기회균등의 개념으로 재정립하려 하는 태도는 경험적으로 보아도 말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스카펠리스-스페어크는 그의 딸이 2년전에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갔었을 때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미국 학교에서는 글쎄 어린이들의 안과치료를 위해 애들을 다 모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세상에 안과치료조차도 보험에 들지 않는 미국같은 나라를 독일이 따라가려 한다니,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한동안 유럽을 휩쓸던 광우병파동을 보라. 이건 대처의 규제완화 정책이 빚어낸 부작용이 아닌가? 철의 여인 대처가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를 거의 뿌리뽑다시피 해버렸을 때 런던 시내 곳곳에서 수없이 굶어죽어가던 대영제국 국민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사민당 우파는 여유만만했다. 그동안 많은 납세자들이 세금이 아니었으면 흑자였을 가계가 세금으로 인해 적자로 돌아서는 것을 보며, 좌파가 말해온 사회적 정의라는 말에 회의를 느꼈을 것이라 본 것이다. 더군다나 콜 정권이 자라나는 후손들의 비용으로 방대한 복지재정을 충당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예의도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기네들의 정책은 모든 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사민당 우파는 확신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정책을 그러한 의미에서 '세대간의 계약'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사민당 좌파가 보기에 재정이 그토록 적자라면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걷어 메꾸는 게 옳은 일이었다. 거기다 실업급여를 줄일 경우, 그를 통해 실업자들이 헐값으로라도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까지 떨어뜨릴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정권교체시 슈뢰더에게 8백만 마르크짜리 비싼 선거캠페인을 지원해주었던 독일노총(DGB) 역시 배신감을 느낀 것은 매한가지였다. 독일노총 위원장 엥엘렌-케퍼는 노동부장관 리이스터와 만난 자리에서 정책의 수정을 요구했지만, 슈뢰더가 TV화면을 통해 이를 거절하자 드디어 슈뢰더 정권에 대한 퇴진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1998년 총선의 패배로 사민당에게 정권을 내준 기민련의 반응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여러가지 면에서 수구보수세력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대기업과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그들에게 사회복지 축소는 구미가 당기는 정책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민련의 입장에서 사민당의 개혁은 전혀 대기업과 고소득자의 이익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 많았으며, 사회복지를 축소한다는 것도 공약을 위반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기민련과 기사련은 적녹연정의 정책이 진지하지도 못할 뿐더러 견실하지도 못하다고 '사기꾼'스러운 정권에 대해 투쟁을 선언했다. 기민련의 선거포스터에는 오랜 속담 '거짓말의 다리는 짧다'를 약간 바꾼, '사기꾼은 숏다리(Betrueger hat Kurze Beine)'라는 만화가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유난히 다리가 짧은 편인 슈뢰더를 풍자한 것이다.

모든 여론조사기관은 유권자들이 사민당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음을 지적했다. 예측대로 유권자들은, 슈뢰더의 개혁이 시작된 이후 모든 유럽의회선거와 각종 지방선거에서, 압도적으로 기민련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후 단 한번도 사민당이 우위를 빼앗기지 않던 지역까지 모조리 기민련의 대승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슈뢰더가 사기꾼이라는 기민련의 말을 독일국민들은 옳다고 지지한 것이었다. 아무리 정당하고 필요한 개혁을 하고 있다 해도, 슈뢰더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은 잘못이라는 의미였다.

이로 인해 사민당의 개혁도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했다. 모든 외국인에게 일정요건만 충족되면 폭넓게 독일국적을 부여한다는 국적법개정정책도 본국국적을 포기한 외국인에 한한다는 식으로 후퇴시킨 것이 그 예이다. 사민당은 정권을 잡고 있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 이러다간 모든 지방선거를 기민련이 싹쓸이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음 총선에서 사민당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때를 즈음해서 이미 정계를 은퇴해 고향에서 늦둥이 아들이나 봐주고 있던 옛 사민당 당수 라퐁텐이 저서를 하나 발간했다. 전 독일 서점가에서 날개돋친 듯 팔려나간 이 책의 제목은 "Das Herz schlaegt links(심장은 왼쪽에서 뛴다네)"였다. 여기서 라퐁텐은 독일 사민당이 옛날 비스마르크와 히틀러의 박해를 받던 시절부터 꿋꿋이 지켜온 전통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게 무엇이겠는가? 라퐁텐은 이를 노동자의 형제로서, 그들과 연대함으로써 인간의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돌려서 얘기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사회복지혜택의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정책을 당장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라퐁텐은 이 책에서 1998년 총선결과에 대해, 독일 국민들은 기민련에서 사민당으로 정권을 교체하면서 염원했던 것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그것은 오늘날 임박한 독일의 정치경제개혁을, 전세계에 지배적인 영미의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방법으로 사민당이 수행할 것에 대한 위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슈뢰더가 블레어, 클린턴과 손잡은 것은 그간 콜 정권의 복지정책으로부터 수혜를 입고 있던 자들은 물론, 많은 좌파 지식인들에게까지 저항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지식인들은 영미가 주도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질서에 독일이 무비판적으로 편입되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퐁텐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발원하여 미국 거대금융자본 및 언론자본의 도움으로 전세계에 지배적 이념이 돼가고 있는 신자유주의, 또는 신보수주의에 맞서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키는 것만이 독일 사민당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작은 정부"의 요청이란 것도 결국 "작은 민주주의"의 요청에 불과하며,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을 최대한의 이윤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장의 결정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슈뢰더가 추진한 개혁에 대해, 앞으로 열릴 전당대회에서 슈뢰더는 왜 당의 다수에 의해 정립된 통치의 프로그램을 자기 멋대로 폐기하고, 영국의 블레어와 손을 잡았는지를 해명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라퐁텐이 보기에, 기든스의 "제3의 길"이 추구하는 '적응력'과 '유연화'란 말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밑에는 자본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단 라퐁텐 뿐 아니라 독일의 많은 좌파적 지식인들은 슈뢰더가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균등으로 사회적 정의를 재구성하려 한다면, 말 그대로 상속세부터 대폭 올려야 할 것임을 지적하였다. 왜 누구는 태어나서부터 바닥을 기는 반면, 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자기 선친의 성과 위에서 자기 노력 없이 쉽게 출발하느냐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중노동으로 벌어들인 임금은 노력 없이 상속으로 얻은 재산보다도 더 무거운 과세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은 이런 철저한 기회균등의 점에서는 오히려 독일보다 더 평등하다. 세계에서 가장 돈많은 사람 중 하나인 미국의 증권업자 워렌 버핏은 무려 100퍼센트의 상속세를 물어야 했다.

또 주식거래의 시세차익에 대해서는 왜 세금을 물리지 않는가? 물론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시대에서 주식거래에 세금을 물리면 국가경쟁력을 해치게 되겠지만, 이 시대 가장 결정적인 부의 원천이 왜 조세로부터 제외되어야 하는지는 해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왜 증권거래로 땀 흘리지 않고 큰 돈을 번 사람들이, 은행의 비밀유지의무 덕분에, 임의로 신고하지 않는 한 세금면제의 혜택을 누리는가?

그리고 국가재정을 축소해야 하는 것은 인정한다 해도, 왜 하필 실업급여가 축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가 또한 문제이다. 사민당이 전통적으로 주장해온 것처럼 국방비를 줄이거나, 아니면 콜 정권이 만들어낸 쓸데없는 사회보장조치들을 줄이는 게 실업자복지축소보다 더 급하지 않은가? 경제학자들이 이미 지적해온 것처럼 콜 정권은 콜 수상의 덩치만큼이나 비대한 사회예산을 운용해왔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그 중 가장 작은 부분만을 주어왔다. 훨씬 큰 부분은 수많은 우회로를 거쳐 독일의 소위 "중산층"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노인, 병자, 실업자에 대한 고전적인 배려와 함께 교육, 육아, 주거, 의료보험을 국가가 돕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좌파들도 이것을 건드리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프로방스지방에 어학연수 가는 비용을 국가가 보조해준다든지, 대학의 시민교양강좌를 국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준다든지 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예를 들어 무료 결혼상담과 극장 관람권할인을 지원해주고, 앰불란스에서 응급환자 발 마사지 하는 것에까지 의료보험을 적용시키는 게 과연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해주는 것인가?

앞으로 슈뢰더 정권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나 역시 알 수 없다. 어쩌면 슈뢰더는 조만간 열릴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사민당 당원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르고, 의원들의 불신임 투표에 의해 조기에 실각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확인할 수 있는 게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독일의 좌파가 결코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슈뢰더는 지금 영국과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인다. 하지만 슈뢰더야 설사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민당 전체가 그 노선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고, 예를 들어 오스카 라퐁텐 같은 사람에게서 보듯 독일 사민주의의 전통은 사민당 좌파에게 있어 아직도 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제3의 길' 자체가 갖고 있는 중도주의적 한계로 인해, 슈뢰더가 도입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요소라는 것도 실상은 크게 제한되어 있다. 독일의 사회보장을 축소한다면 그럼 무엇을 더 축소한단 말인가? 의료보험? 말도 안된다. 교육제도? 하느님 맙소사! 설령 슈뢰더의 개혁이 사민당 좌파의 반발을 누르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미국과 영국에 비해 훨씬 높은 독일의 복지수준은 다음 세기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금도 그리 크게 삭감되지는 못할 것이다. 적녹연정이 다음 세기초에 무려 70개의 예외규정을 폐지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독일국민에게 조세는 큰 부담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사회적 빈곤층에 대한 혜택의 제공보다는 구조조정과 경제성장에 주력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많다. 하지만 독일과 우리는 레벨부터가 다르다. 지난 1세기 동안 독일정부의 사회보장을 위한 지출은 무려 35배나 늘어났고, 노동자들의 평균수명도 45세에서 76세로 늘어났다. 휴가기간도 무려 5배나 늘었다. 독일정부는 최소한 이 정도의 바탕이 갖춰진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해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훨씬 열악한 상황에 있는 우리 노동자들의 지위를 더 낮추려 하고 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은 물론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한다는 사람들까지 독일 사민당을 그렇게 간단히 신자유주의로 평가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경솔함이 지나치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독일이 지금 신자유주의로 가는지는 더 두고봐야 한다.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가 오늘날 변화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메카니즘 자체가 자기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스스로의 전개과정을 밟아나가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독일의 정치에도 문제점은 많다. 하지만 독일의 정치가 우리나라에 비해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를 더 중시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거기다 '사회적 정의'에 관한 치열한 논쟁의 과정을 보면 독일의 정치는 심지어 학구적이고 철인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수많은 노숙자들, 삭감된 임금, 400만에 이르는 실질실업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배려를 등한히 하고, 정치의 기본적인 가치관부터가 전도되어 있는 우리 정치와 비교할 때 우리는 독일 정치를 무시할 자격이 없다. 무시할 경우 오히려 우리가 무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철저히 알아야 한다.

1999. 11. 15.

* 위의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 말씀을 주신 함부르크 대학교의 ㅅ선배님과 괴팅엔 대학교의 ㄱ선배님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