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착각은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성격을 가진 남자들에게 사랑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식의 편견이다. 그러나 그런 성격의 남자들일수록 더 외로움을 타게 마련이므로 오히려 어딘가에 몰두할 대상을 더욱 더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보통이다. 거기다 그가 자기절제가 강한 사람이기까지 하다면 더욱 난해하고 비극적인 사랑을 꿈꾸고 그렇게 자기를 학대하는 가운데에서 자기 자부심을 확인하곤 하는 법이다.

Lancelot은 Guenevere를 처음 본 순간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녀가 곧 Arthur의 왕비가 될 여자임을 알아차린 이후로는 차갑게 시선을 외면해버린다. 자기 인생에 갑자기 엄습해온 이 고약한 운명이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지를 그 짧은 순간에 다 알아차려버린 것이다.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이런 바보스러운 일이 결국 이때에, 이런 식으로 일어나고 말다니... 그리고 그렇게 끔찍한 올가미에 걸려 난감해 하고 있는 Lancelot의 표정에 의아해하고 있던 Guenevere의 옆에는, 이 모든 광경을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는 Morgana (Helen Mirren 분)가 서있었다. 바로 Cornwall과 Igrayne의 사이에서 난 딸 Morgana였다.

Arthur의 씨다른 누나인 Morgana는 Uther에 의해 집안이 풍비박산 난 후 가난과 외로움 속에 성장한 여자였다. 다행히 귀족 Uryens (그는 아버지의 원수 Uther를 죽여 그녀의 복수를 해준 사람이기도 하다)의 후처가 되어 남부럽지 않은 부귀를 다시 누리게 되었지만, 늙고 추악한 Uryens에게 매일밤 육신을 농락당하는 젊은 통닭 신세도 끔찍한 것이었고, 더군다나 그녀의 기억 속엔 비참했던 어린 시절, 자신의 모든 꿈이 일순간에 부서지고 파멸하던 때의 충격과 고통이 화인처럼 깊이 박혀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가증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물론 그녀가 착하거나 우둔한 여자였다면 Arthur가 이룩한 새로운 평화 속에서 과거의 어두운 기억은 잊고 늙은 귀족의 후처로서 평범하게 자족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워낙 영특한 여자였고, 욕심과 야망이 한도 끝도 없던 여자였다. 다른 평범한 귀족집 딸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리광도 부리고 사치스러운 호강도 누리며 행복하게 자라날 동안 자기는 폭군 Uther와 음흉한 마법사 Merlin의 농간 때문에 비극적인 유년을 보내야 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선천적으로 뛰어난 마법사로서의 소질이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아버지의 죽음을 성 안에 앉아서 마치 육안으로 보듯 선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능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뜨린 Merlin보다도 더 뛰어난 마법사가 되어보고 싶었고, 아버지의 원수 Uther의 피를 물려받은 Arthur를 죽인 다음 Arthur를 대신하여 자기가 권력을 잡아보고도 싶었다. 물론 지금 세상은 평화롭다고 다들 칭송하지만 그녀처럼 야심 넘치는 여성에게는 이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상이 이기적인 남자들만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불공평한 세상일 뿐이었다. 언뜻 보기엔 평화롭다고 해도 많은 억울한 희생을 그 뒤에 숨기고 있는 부조리한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불합리가 Merlin의 공작때문이라면 마법사 Merlin은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마땅했다. 그의 교활함만 없었다면 Morgana의 유년시절 가졌던 소박한 꿈이 왜곡되거나 파괴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기에 Merlin은 Igrayne과 Morgana 두 여자의 인생을 다 망쳐놓고도 하찮은 여자의 인생 따위는 대의를 위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무자비한 사고를 갖고 있는 남자였다. 그렇게 파렴치한 남성우월주의자인 마법사 Merlin을 어떻게든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넣어야만 Morgana 자신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은 그를 이길만한 힘이 없었으므로, Morgana는 그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여성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그를 유혹하기로 한 것이다.

Morgana는 조용히 Merlin에게 접근한다. "전 Merlin님을 기억해요. 제가 Merlin님을 첨 봤을 때 전 조그만 소녀였죠. 그리고 당신은 절 끝내 떨쳐버리신 채 제 동생을 데리고 가셨죠." Merlin은 씩 웃는다. Morgana는 가지 비슷하게 생긴 열매 하나를 들고 Merlin에게 묻는다. "이것은 Mandragora이지요? 마법을 위해 쓰이는 것이고요." Merlin은 조금 놀란다. 그리고 둘은 이렇게 마법에 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급속도로 친해진다. Merlin은 Morgana의 재능에 탄복해 하며 자기 마법의 거의 모든 비전을 Morgana에게 전수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 나라에 하나뿐인 마법사로서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적적하게만 살아온 Merlin으로서는 마법에 대단한 재능을 보이는 Morgana에게 마치 남매와 같은 진한 동질감을 느낄 법도 한 일이었다. 오래간만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물론 Morgana는 절대 선한 여자의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원래 모든 지혜로운 자는 지혜의 극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선과 악 모두에 발을 담그게 돼있는 법. Merlin 스스로조차도 자기가 선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자부할 수 없던 차에, 자기에게 원한을 품을 법도 했던 Morgana가 자기를 멀리하긴커녕 오히려 자기에게 어떤 식으로든 접근해준다는 것은 심지어 고마운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Morgana가 Merlin에게 접근을 하고 있을 동안 Lancelot은 뭘하고 있었을까? 그는 Guenevere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이길 수 없어 미치도록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Guenevere도 곧 결혼할 Arthur로부터 사랑받는 것과는 별도로 Lancelot으로부터도 사랑을 받고 싶다는 천진난만한 욕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Lancelot과 둘이서 말을 타고 숲 속을 거니는 틈을 타 그녀는 Lancelot에게 살짝 말을 건내고 만다. "Lancelot님. 모든 여자들이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들 모두가 당신과 결혼하기를 꿈꿔요. 이 Camelot성의 공공연한 비밀은 모든 여자들이 당신의 마음을 얻고자 원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Lancelot님은 그걸 알고 계시나요?"

Lancelot 입장에서는 Guenevere가 자기 애타는 속도 모르고 답답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으므로 Guenevere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는 무뚝뚝하게 답한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고독한 전사입니다. 전쟁과 결혼한 몸이고 죽을 때까지 싸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행한 운명입니다." 이런 말하는 게 Lancelot으로서는 장난이 아니었건만 Guenevere는 우습게도 Lancelot이 참 멋있는 남자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 세상 어느 여자도 당신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는 건가요?" Lancelot은 이에 대해 이를 악물고서 대답한다. "한 여자가 있긴 있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 쳐다보는 Guenevere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해버린다. "그건 바로 왕비님이십니다. 하지만 왕비님께서는 제가 이미 충성을 맹세한 국왕 전하와 곧 결혼하실 몸. 전 그러므로 앞으로 그 어떤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고 왕비님만을 생각하며 전장을 떠돌 생각입니다."

생각해보면 Lancelot이란 이 인간은 정말 미욱한 인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평생 결혼 안 하고 오직 한 여자만 생각하며 혼자 전장을 떠돌겠다니...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려고 작정을 해도 이건 너무 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르게 또 보면 Lancelot 같은 인간이 우리 주위에는 의외로 너무나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여린 마음을 갖고 있는 그들은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너무나 완벽주의적이어서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불행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자기가 불행해지는 길을 택하고 만다.

Lancelot은 자부심이 강한 멋쟁이 기사고 누구에게서도 좋은 말만 듣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결벽주의적 인간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대뜸 그녀에게 앞으로 자기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되진 않을까 그것부터 겁을 집어먹는다. 오순도순 아기자기한 가정생활 같은 것은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며, 자기는 평생 모험과 파란만을 찾아 떠돌아다녀야 하는 전사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여자를 사랑하고 그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그 여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이런 인간들은 지레 생각해버린다. 그냥 만만한 여자로 눈을 낮춰 결혼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완벽주의자의 사랑에는 절대 차선이란 있을 수 없다.

결국 이런 남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연애상대는 넘볼 수 없을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유부녀이거나 아직 튕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녀 정도가 가장 적합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남자로서 유부녀와 간통을 한다거나 유아를 성추행한다는 것이란 절대 불가능한 법이니 오히려 그런 식의 일방적이고 희귀하며 불행한 사랑이야말로 이런 남자에게는 더 안전한 것일 수도 있다.

Lancelot의 Guenevere에 대한 사랑이란 것도 고작해야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래서 Arthur와 마침내 Guenevere가 왕과 왕비로서 눈부시게 호화찬란한 결혼식을 거행할 때에도 Lancelot은 거기서 깽판을 놓기는커녕 늠름히 먼발치에서 결혼하는 그들을 지켜보며 서있기만 한다. 이처럼 못 말리는 댄디즘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정답은 그냥 내버려두면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런 인간들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살 만한 인간도 아니고, 그렇게 살다가 깔끔하게 죽든지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깨끗한 사랑을 이용해 왕국 전체를 무너뜨리는 음모로 활용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Morgana였다. 그리고 연이어 계속되는 풍년을 기념하기 위해 벌어진 Camelot성의 축연은 그녀에게 이러한 공작을 펼칠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Morgana가 수석기사 Gawain의 술잔에 몰래 마법의 약을 흘려넣고 있는 줄도 모르고 국왕 Arthur는 득의만면해서 마법사 Merlin에게 묻는다. "이보게, Merlin. 물어볼 게 하나 있네. 몇해동안 이 나라에는 평화가 지배해왔네. 농작물은 계속 대풍을 이루고, 헐벗거나 굶주리는 자는 하나도 없네. 모든 신민이 자기 분수에 맞는 행복을 누리고 있고, 어쩌다 일어나는 조그만 분쟁들은 매일마다 법에 따라 즉각 해결되고 있네. 말해보게, Merlin. 우리는 이미 모든 악을 정복한 게 아닌가?"

마침 졸고 있다가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Merlin은 대뜸 대답한다. "모든 악을 정복했다니요. 선과 악. 그들은 절대 서로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Das Gut und das Boese; Es wird niemals eine ohne andere geben)" 웅성거리는 좌중을 물리치고 Arthur는 웃으며 다시 묻는다. "그럼 그 악은 내 왕국 어디에 존재하는가?(Wo versteckt sich das Boese, dann, in meinem Koenigreich ?)" 모든 사람들이 겁에 질려 지켜보는 가운데 Merlin은 Arthur의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 질문인지도 모르고서 짤막하게 답하고 물러간다. "전하께서 전혀 생각지도 못하시던 그곳에(Immer dort, wo Sie es niemals vermutet haben),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immer dort)."

이때 마침 Morgana의 묘약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Gawain (Liam Neeson 분)이 탁자를 쾅하고 내리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외친다. "만약 우리가 평화와 정의를 달성했다면, 왜 이 자리에는 Lancelot이 없단 말입니까? 왜 그는 전하의 결혼 이후로 사사건건 핑계만 대고 방랑만 일삼으며 우리들의 잔치에 맨날 빠진단 말입니까?" 그리고 Morgana가 먹인 약기운에 정신이 나가버렸는지 다음과 같은 끔찍한 말까지 내뱉기에 이른다. "제가 보기에 Lancelot과 Guenevere 왕비는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둘 사이에 뭔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Lancelot은 궁중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모두 대경실색할 소리였으나 Guenevere 역시 보통 여자는 아니었으므로, 차분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말한다. "이런 일로 우리 모두가 놀라거나 화를 내서는 안돼요. Gawain경께서는 우리가 평화의 나태함에 빠진 이후 휘말릴 수 있는 헛소문에 대해 경고를 하신 것뿐이에요. 전하. 경의 선의에 보답하기 위해 제가 경에게 술잔을 보내드려도 되겠어요?" 그리고 Guenevere는 잔에 술을 따라 옆사람에게 주어 그 잔이 여럿의 손을 거쳐 Gawain에까지 가도록 한다. 그러나 무엇엔가에 홀린 Gawain은 그 잔에 담긴 술을 바닥에 쏟아버린다. Arthur는 분노하여 외친다. "내일모레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Lancelot은 궁중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왕비의 결백을 위해 Gawain과 결투를 벌여야 한다. 하늘은 결백한 자에게 승리를 약속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가운데 Arthur는 자리를 파해버린다.

Guenevere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Arthur의 행동은 전형적인 졸장부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냥 너그러운 왕답게 부하가 술자리에서 실수한 것 정도로 웃으며 넘어가도 되었을 일을,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괜히 자기 아내와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음의 궁지에 몰아넣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Arthur 입장은 달랐다. 그의 입장에서는 혐의의 상대가 하필 Lancelot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 Lancelot은 지성과 전투력의 면에서 Arthur보다 훨씬 나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비록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Arthur는 Lancelot에 대해 남몰래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Lancelot과 서로 사랑한다는 소문을 접하게 되었으니 Arthur의 순박한 가슴에 질투의 폭풍이 몰아치게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모질게도 Morgana는 Lancelot에게까지 마법의 손길을 뻗친다. 전갈을 받고 급히 말을 달려 Camelot으로 향하던 Lancelot은 도중에 어느 숲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자다가 어느 순간 웬놈이 자기를 죽이려고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Lancelot은 자기가 공격당하기 직전에 창을 들어 바로 그 자객의 몸을 꿰뚫어버리지만 그것은 꿈이었고, 그 꿈에서 깨어난 순간 Lancelot은 자기 벌거벗은 몸에 그 창이 들어와 박혀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창은 Lancelot의 위장을 관통하고 있었고 그 뚫린 자리에선 피가 무섭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마음의 죄에 가책과 공포로 가슴이 죄어들고 있던 Lancelot은 그 끔찍한 상처를 보며 외친다. "Guenevere, 난 내 자신과 싸웠던 거야.. (Guenevere, Gegen mich habe Ich gekaempft..)"

Lancelot이 그렇게 혼절해버린 사이 Camelot에서는 Gawain이 완전무장한 채 Lancelot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떠있건만 Lancelot은 올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제 꼼짝없이 Guenevere 왕비가 간통혐의로 화형에 처해지게 된 순간, 기다리다 못해 식당에서 잡일하고 있던 어린 소년 Perceval (Paul Geoffrey 분)이 나선다. "제가 왕비님과 Lancelot님의 결백을 위해 대신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년 Perceval이 그 자리에서 기사작위를 받고 결투에 나서기 직전, 담담한 표정의 Lancelot이 어느새 말타고 조용히 결투장에 나타난다. "꼬마야. 결백을 증명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다."

물론 Lancelot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의 갑옷 아래로는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Lancelot은 Morgana의 계획대로라면 이 부상으로 인해 Gawain과의 결투에서 패하여, Arthur는 순식간에 자기 아내와 자기 오른팔 모두를 잃어야 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기본실력이 있었기에 Lancelot은 결국 Gawain을 꺾어눌러버리고 만다. 그리고 Gawain으로부터 자기 결백을 인정받은 뒤에 Lancelot은 열과 고통으로 곧 쓰러져 버리고 만다. 이미 많은 피를 흘린 그는 상처가 너무나 깊어 도저히 살 가망이 없을 정도다. 아니 살 가망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동안 충분히 마음을 찢어가며 미칠듯 시달려왔던 그로서는 도무지 살려고 하지도 않는 중이다.

이 광경을 보고서 Guenevere의 마음은 Arthur에게서 Lancelot에게로 완전히 옮아가버린다. 뭔가 어렴풋이 다가오는 위험에 매혹되면서, 자기 혼 속에 숨은 또 다른 맹목적인 힘을 그녀는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녀는 처음 Arthur의 용감함과 당당함에 끌려서 그와 결혼했던 터였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Arthur는 마법사 Merlin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꼭둑각시에 불과했고, 비록 국왕의 자리에 올라있다고는 해도 기사 Lancelot에 비하면 개인적 실력으로나 인간적 매력으로나 훨씬 처지는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Arthur는 아내가 결백을 의심당한 순간 남편으로서 아내를 두둔해줄 생각은 안하고 Guenevere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위험한 결투를 명한 바 있었다. Arthur 입장에서야 물론 "내가 왕으로서 행동해야 할 때는 당신의 남편일 수 없소(Wenn ich mich als Koenig benehme, kann ich nicht Dein Mann sein). 법은, 나의 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해야 하는 거요(Das Gesetz, mein Gesetz muss alle Leute binden)."라고 변명할 수 있었겠지만, Guenevere 입장에서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 Arthur로부터 감정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Arthur는 기본적으로 옹졸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반면 고독과 피로로써 유부녀인 자신에 대한 사랑을 억누르기 위해 고된 방랑생활을 일부러 하고 있던 Lancelot은 결투를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와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었다. 물론 Lancelot 역시 천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남자이긴 마찬가지이고, Guenevere를 구하러 온 것도 자기 멋에 사는 이런 인간의 특성상 Guenevere를 사랑해서라기 보다 자기 명예를 지키고 자기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달려온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인생에 상처받고 배신당한 남성의 마음 깊은 곳에 반드시 숨어있게 마련인 사랑의 진실을 간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애정을 아는 여자였던 Guenevere는 Lancelot의 고뇌를 깊이 동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성적인 위안의 손으로 이미 자신의 포로가 되어버린 채 고통받는 Lancelot을 간호하여 결국 그를 살려내기에 이른다.

Guenevere의 손이 Lancelot의 배에 뚫린 상처를 어루만지는 과정에서 Lancelot과 Guenevere의 마음 속에는 이제 금지된 육욕까지 싹트기 시작한다. 선천적으로 소심하고 준엄한 성격을 타고난 Lancelot으로서는 딱하게도 이 욕정을 이겨내는 방법으로서 오로지 자학과 도피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Lancelot은 Arthur에게 작별을 고하기에 이른다. "한 곳에 정주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하는 삶은 저에게 맞지 않습니다. 저에겐 숲 속을 헤매며 방랑하는 삶이 더 어울립니다." 그리고 Lancelot은 쓸쓸히 떠나간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가장 나은 해결책을 택한 셈이었다.

그러나 Guenevere는 Lancelot이 떠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 정신 내부에 그동안 쓰지 못했던 여러 힘과 색과 소리들을 발견하였고, 그 바깥에 있던 이성과 상식의 자물쇠를 열어 자신의 본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Guenevere는 격류와 같은 불꽃이 자기 자신을 불태우는 느낌에 부들부들 떨며 외쳐대었다. "나는 이제 겁나지 않아요. 나는 이제 그 따윈 무섭지 않아요. 나는 못질한 관 속에 갇혀 있었던 것만 같아요. 지금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어요. 이 몸, 이 마음은 내 것이에요. 내 몸, 내 자유로운 몸. 내 자유로운 마음. 내 힘, 내 아름다움, 내 기쁨 ! (Ich habe keine Angst mehr. Mir ist, als sei ich in meinem Sarg eingenagelt gewesen. Jetzt atme ich auf; dieser Koerper, dieses Herz gehoert mir. Mein Koerper, mein lieber Koerper. Mein freies und liebefuelltes Herz. So viel Glueck ist in mir !)" 그리고 그녀는 혼자서 말을 달려 Lancelot이 떠난 길을 용감하게 뒤따라간다.

이걸 본 Morgana로서는 Lancelot의 결투 승리와 건강회복으로 모든 것이 다 글렀다고 생각하던 차에 뜻하지 않게 기회가 주어진 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연애사건을 더욱 증폭시켜 Arthur를 정신적 자학 속에 빠뜨릴 수만 있다면, 그토록 굳건하게 보이던 Arthur의 왕국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 분명해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연애사실을 폭로하며 당장 Guenevere의 뒤를 밟으라는 Morgana의 부추김을 받고서, 이제 Arthur는 분노하여 년놈을 모두 죽이고야 말겠다고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때 금방 달려와 두 사람이 눈맞아 떠나건 말건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고 한낱 스캔들이나 가십거리에 불과할 뿐이니 대범하게 내버려두시고 국정이나 챙기시라고 권하는 Merlin에게까지도 Arthur는 홧김에 독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난 배신당했고 외롭게 남겨졌다. 내 아내에 의해, 내가 가장 사랑하던 친구에 의해. 그리고 Merlin 당신에 의해.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바로 Merlin 당신의 배신이 컸을지 모르지. 당신은 내가 하필이면 내 부모의 더러운 불륜으로 태어나게끔 만든 장본인이었고, 싫다는 나를 굳이 왕으로 옹립했다가, 지금은 나에게 이와 같은 비참을 안겨준 배후조종자이기 때문이지."

지금까지 Arthur는 Merlin의 꿈이자 희망으로서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Arthur에게서 이러한 사실을 부정당했다는 것은 이제껏 진행시켜온 Merlin의 모든 계획이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혹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Merlin은 대꾸한다. "전하를 배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전하 자신입니다. 전하께서는 저 먼 옛날 Excalibur를 뽑아들고 일국을 통일하기 위해 용감히 나섰던 그 어린 소년을 배신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토록 긴 전쟁과 혼란에 시달리며 이 나라에 평화를 가져올 국왕이 나타나주기를 기원했던 이 땅의 민중들을 배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어코 Guenevere를 붙잡기 위해 떠나는 Arthur를 보면서도 Merlin은 완전히 낙담하진 않는다. Lancelot은 의로운 인물이므로 결코 위험한 불장난은 하지 않을 것이며, Arthur 역시 너그러운 인물이므로 Guenevere를 곧 용서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Arthur에게는 아직 Excalibur가 남아있다. 엑스칼리버를 갖고 있는 한 Arthur가 이룩한 평화와 안정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인간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미 다 끝난 것이다. 이제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의 법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 Merlin에게 Morgana가 다시 접근한다. 외롭고 지친 Merlin의 눈에 자기의 닮은꼴 여성 Morgana는 그날따라 유난히 친근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아무것도 모르고 Merlin과 똑같이 불운한 마법사의 길을 가려 하고 있는 이 애처로운 여자 Morgana ! 비록 어리석고 천박하긴 하지만 미래에 대한 발랄한 활력을 갖고 있는 이 천진한 이기주의자의 입술에 Merlin이 키쓰하려는 순간 Morgana는 키쓰를 살짝 거절한다. "Merlin. 당신은 제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어요(Sie wissen, was ich brauche). 저는 진짜 마법의 비밀을 알고 싶어요(Ich moechte das Geheimnis der wahren Magie wissen)."

그 동안 Merlin은 Morgana에게 다른 모든 마법의 비밀을 다 가르쳐주었지만 가장 중요한 마법의 주문, 용을 부르는 주문만큼은 그녀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상태였다. Merlin은 씁쓸히 웃으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다. "인간들은 몰라. 그들의 기쁨과 슬픔이 서로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그들의 행복과 불행이 서로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하지만 Morgana. 넌 정말 내가 너의 어리석은 장난을 여지껏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자기보다 약한 자를 잡아먹으려 하는 것. 그게 바로 너의 마법이야. 나의 마법은 너와 달라. 나의 마법은 거대한 계획이야."

Morgana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Merlin의 품에 안긴 채 앙탈한다. "나의 바보같은 마법사님. 제 몸을 님께 드리고 싶어요. 우리의 첫날밤을 기념할 만한 멋진 방을 만들어주세요. 빛나는 크리스탈로 벽을 만들고, 여지껏 어느 인간도 본 적이 없는 붉은 불꽃과, 금속으로 만든 가구와, 보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방을..." 그리고 그녀의 소녀스러운 환상 속에서 위험하나마 어떤 행복과 위안의 가능성이 빛나는 것을 본 Merlin이 정말로 그와 비슷한 동굴같은 방을 만들어주자, Morgana는 그 벽면에 마침 Merlin이 궁금해하던 Arthur와 Lancelot 그리고 Guenevere의 현재 모습을 환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당시 Guenevere는 벌써 숲 속에 들어와 Lancelot이 잠든 곳에까지 도착해있었다. 놀라 일어선 Lancelot은 Guenevere에게 묻는다. "왜 절 따라오셨습니까? 왕비전하께서는 Arthur왕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를 파멸시킬 생각이십니까? 이것은 법이 금하는 일입니다. (Warum ? Sie wollen Arthur zerstoeren, und uns.. Das Gesetz verbietet es.)" Guenevere는 답한다. "사랑이 원하는 일이에요(Die Liebe verlaengt das)." Lancelot은 양심과 도덕에 자기 마음을 되풀이 가책하며 말한다.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Es gibt Dinge ueber die Liebe)." 하지만 Guenevere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뽐내며 옷을 스르르 벗기 시작한다. "나는 딴 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에요(Ich glaube, ich bin eine andere).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거에요(Ich erkannte es nicht). 나는 내 자신을 모르고 있었던 거에요(Ich kannte mich nicht). 여자에겐 그 어떤 것도 사랑보다 더 소중할 순 없는 거에요! (Fuer die Frauen gibt es nichts ueber die Liebe!)"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남자라 하더라도 사랑의 문제에 관한 한은 언제나 여자의 최종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결정은 어쩌면 사랑보다 생명의 문제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명을 연속시켜야 할 신성한 의무를 갖고 있는 여자가 한번 어떤 남자를 자기 몸 속에 품기로 결심하면 그 이후는 두 사람에게 있어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Lancelot은 이미 자기 정열의 불꽃을 억제할 순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오늘 하룻밤만은 이 사랑하는 여인의 양 무릎 사이 움푹한 곳에 자기 모든 머리를 쉬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다음에 이 사랑하는 여인을 Camelot성으로 돌려보내든지 한다면 Arthur에 대한 자기 죄책감도 용서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둘은 발가벗은 몸이 된 채 서로의 숨을 입으로 들이마시고 얼어붙은 듯 번쩍거리는 밤하늘 아래서 뜨겁게 하나가 되기 시작한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Merlin의 입가가 덜덜 떨린다. "이럴 수가..."

한 시간, 두 시간, 일 세기라도 지난 듯한 긴 포옹을 마치고 평화롭게 잠든, 정말이지 너무나도 아름다운 두 사람의 나신 앞에 국왕 Arthur가 소리도 없이 Excalibur를 들고 다가와 무겁게 멈춰선다. 망연자실하여 서있던 Arthur는 충혈된 눈으로 엑스칼리버를 번쩍 들어올린다. 그리고 두사람의 부둥켜안은 나체 사이 아주 좁고 얇은 틈에 정확하게 엑스칼리버를 꽂아넣고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나버리고 만다. Arthur 역시 검술이 상당한 사람이라 엑스칼리버는 두 사람의 몸 사이를 꿰뚫고 두사람이 잠든 땅 속 깊숙히까지 들어가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피부 어느곳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Lancelot이 먼저 자기와 Guenevere 몸 사이에 있는 제왕의 상징 엑스칼리버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문득 Lancelot은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죄를 저질렀는지 알게 된다. 주군과 그의 아내로부터 명예와 행복을, 한 가정과 한 국가로부터 평화와 질서를 빼앗아 버리다니 ! 만약 Lancelot이 의로운 자가 아니었다면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손에 넣은 엑스칼리버를 절망적으로 휘두르며 Arthur를 죽이고 자기가 왕의 자리에 올랐겠지만, Lancelot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기를 죽일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푼 Arthur의 덕에 부끄러움을 느낀 그는 그 자리에서 벌거벗은 채 숲 속으로 도망쳐버리고 만다. 혼자 남겨진 Guenevere는 이 예상치 못한 Lancelot의 비겁과 남편의 자학에 그저 오열할 뿐이고, Merlin 역시 이 광경을 보며 충격을 금치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