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신림초등학교
내가 무려 6년이란 시간동안 학적을 두었던 신림초등학교는 서울 남부의 산동네(어쩌면 서울의 최남단), 신림1동의 산비탈에 세워진 매우 커다란 학교였다. 한 학년 학급이 19~21학급이나 되었고, 전교생수는 무려 7,000명이나 되었으니, 학교라기 보다는 거대한 공단이나 아파트단지와 같은 분위기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당시 신림초등학교의 시설은 - 70년대 후반의 우리나라 초등학교 모습이 대부분 다 그러했겠지만 -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졸업하는 그날까지도 화장실은 재래식이었고('화장실'이라기 보단 '변소'라고 부르는 게 더 나았으리라), 그 많은 학생수에 비해 운동장은 너무나 비좁아, 체육시간 같은 것은 일주일에 한번 합동체육이라고 해서 조회대에 올라서신 선생님 한 분께서 체조를 하시면 몇천명의 어린애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그 동작을 닭처럼 따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교실은 워낙 모자랐기 때문에 오전오후를 갈라서 두 학급이 나눠서 써야 했다. 한 학급에 학생수는 대개 60명이었지만, 교실이 비좁아 서로 잔뜩 붙어서 앉아야 했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는 앉은 자리에서 빠져나오기조차도 힘이 들 정도였다. 학교 윗쪽으로는 고아원이 하나 있었고, 학교 아래로는 무허가 연립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소위 '난민촌'이라고 불리우던 판잣집마을이 있었으므로, 대부분 그런 고아원이나 달동네, 판자촌의 단칸방에서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던 내 어린 시절의 급우들은 한결같이 가난했다. 한겨울에도 얇고 헤어진 옷을 입고 새파랗게 얼어서 등교하는 애들이 많았고,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안 되어 점심을 굶는 아이들도 매우 흔했다. 대개의 경우 그 초등학교에서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던 애들은 서울대 교수의 아들딸들이나(그곳 신림초등학교에는 유난히도 서울대 교수의 자식들이 많았다), 초중등학교 선생님들의 아들딸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께서 교육자가 아니셔서 그랬는지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는 반장후보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공부를 잘 못했다. 학교에 학생수가 워낙 많아 아이들이 선생님의 강의내용을 노트에 제대로 받아적는지, 숙제를 꼬박꼬박 해오는지는 거의 확인이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초등학교 시절 숙제를 해간 일이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험때가 되어도 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건 나뿐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여서, 다들 집안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수업준비물조차 못 챙겨오는 애들이 많았고, 더군다나 방과후에 학원을 다닌다는 애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초등학교 시절 내내 공부에 전혀 스트레쓰 받지 않고, 그 흔한 과외 한번 받아보지 않은 채 6년의 꿈결같은 (그러나 궁상맞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집은 관악산 지류, 해발 약 100미터 정도의 고지대(쉽게 말해 달동네)에서도 가장 윗부분에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3분만 걸어가도 바로 산이었으며, 그 덕분에 나는 내 동생이나 내 친구들이랑 함께 거의 매일마다 산에 올라 무성한 수풀 사이를 헤치고 아카시아 가시에 얼굴과 손등을 마구 찔리면서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놀았다. 여름에는 방아깨비, 여치, 사마귀, 가을에는 잠자리도 잡았고, 겨울이면 나무판때기 하나 구해서 매일마다 한도 끝도 없이 미끄럼을 타며 놀았다 (진짜 초고속 눈썰매장이 따로 없었음). 망까기, 짬뽕, 딱지치기, 자치기, 숨바꼭질, 땅따먹기, 다방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도 많이 했지만, 돌이켜보면 역시 산 속을 뛰어다닌 기억들이 제일 많이 난다. 그밖에도 나는 내 동생과 거의 매일마다 배드민턴을 하고 놀았고, 부모님께서 사다주신 고무공과 싸구려 야구글러브, 싸구려 야구배트 등을 가지고 야구도 자주 하고 놀았다. 그러나 동네가 워낙 비좁은 산동네였기 때문에 배드민턴을 하건 야구를 하건 절대 힘껏 팔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절대 공이 멀리 날아가지 않도록 그냥 갖다맞추는 데만 신경써야 했기 때문이다. 축구 역시 동네가 워낙 비좁았기 때문에 거의 할 수가 없었고, 배구는 배구네트를 만들 수가 없어서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와 내 당시 친했던 친구들 중에 축구나 배구에 탁월한 소질을 발휘한 애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강슛이나 강스파이크를 때리려 해도 이 공이 저 아랫동네까지 굴러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 까닭이었다. 대신에 권투나 주먹싸움 같은 것은 다들 너무나 즐겨서, 교실내에서건 복도에서건 아니면 방과후에 산 위에 올라가서건 주먹으로 서로를 때리는 짓은 다들 너무나 잘했다. 공을 때릴 때는 그토록 힘을 아끼던 친구들이었지만 사람을 때릴 때는 다들 인정사정 하나 봐주지 않아, 당시 그런 식으로 싸움캐리어를 아주 확실하게 늘려가던 내 초등학교 친구들 중에서는 나중에 아예 그쪽 방면으로 직업을 정한 친구들이 아주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행정구역상으로만 서울시민이었을 뿐, 실제로는 전형적인 촌놈으로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된다. 다리통이 비정상적으로 두꺼워질만큼 산을 많이 오르내렸고, 집 주위엔 논밭과 양계장이 있어 흙냄새와 닭똥냄새를 지겹게 맡고 살았다. 아스팔트 포장도로까지 나가려면 몇십분을 걸어내려가야 했으며(특히 겨울철 산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빙판길로 변해버리면 대단한 불편을 겪었음), 버스는 명절때만 몇번 타보았을 뿐이었다. 콜라나 사이다는 소풍때만 마셔보았고, 햄버거 같은 것은 뽀빠이만화에서나 보고 이름을 들었을 뿐이지 그런 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빵빵거리는 자동차 소음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시내'라고 불렀는데, 그런 곳에 한번 갔다 오고 나면 그 혼잡함과 시끄러움에 놀라서 꼭 하루이틀 몸살을 앓았다. 어떻게 보면 나와 내 초등학교 친구들은 지방의 꽤 괜찮은 중소도시 출신 아이들보다도 더 구석지고 낙후된 공간에서 성장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내 그런 성장환경이 지금 나에겐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패스트푸드나 청량음료(신경발작의 원인이 되는 것들), 자동차소음이나 매연 등으로부터 거의 차단된 채 성장했다는 것은(물론 매연 대신에 연탄가스를 많이 마시고 살았지만) 내 신경을 안정시키고 내 정신과 육체를 그나마 덜 더럽게 만드는 데 공헌했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비록 산동네에 살긴 했지만,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전형적인 서울 변두리 달동네 빈민굴처럼 집들이 층층으로 다닥다닥 붙은, 비좁고 각박한 동네가 아니라, 각각의 단독주택들이 제법 넓은 마당을 갖고 서로 꽤 멀리 떨어져 있던 동네였으며, 집들이 허름하긴 해도 나름대로 개성들이 있었고, 가까운 산에서 아카시아나 진달래, 산딸기를 따먹을 수 있을 만큼 자연친화적인 공간이라 볼 수도 있었다. 비록 수도가 잘 끊기긴 했지만, 펌프로 지하에 있는 차고 깨끗한 물을 끌어올려 마시기도 했고, 어머니께서는 집 근처 텃밭에서 무공해 농작물을 재배하시거나 산에서 갖가지 나물을 캐와 신선하고 맛있는 반찬거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오늘날 서울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들도 개성을 상실하고 자연으로부터 유리된 채 획일적이고 무미건조한 회색공간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보통인 것을 감안하면, 나는 어린 시절 정말 다채롭고 자연에 가까운, 서울 시내에서는 정말이지 가장 축복받은 장소에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연극, 오페라는커녕 그 흔한 개봉관영화도 한번 보지 못한 채 자라났다는 것도, 얼핏 보면 내 감성을 문화적으로 천박하고 빈곤하게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내 예술적 감각(?)을 아주 자연적이고도 소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몇년 전(독일유학 나오기 직전) KBS방송의 '은실이'라는 드라마를 매주 월,화요일 밤마다 보면서,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어느 시골극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촌스러운 사건들에 굉장히 매료되었던 바 있었는데, 그 이유도 어쩌면 내가 어릴 적 살던 신림동이란 동네가 마치 시골동네처럼 동네 전체에 극장은 정말 3류 재재개봉관인 '신림극장' 하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상영되던 싸구려 방화나 외화를 본다는 것이 우리 마을사람들에겐 거의 유일한 문화적 경험일 수밖에 없었던 데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또한 피아노학원이나 주산학원은커녕 그 흔한 미술학원조차도 다니지 않은 채 초등학교시절을 보냈다는 점 역시도 나에겐 어찌 보면 상당한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점수 따기 위한 공부 같은 것에 거의 무관심했으며, 긴밀한 스케쥴이나 꽉 짜여진 틀 같은 것에 별로 얽매임 없이 자랐는데, 이러한 초등학교 시절은 나로 하여금 공부나 성적에 대한 강박관념으로부터 상당부분 자유로울 수 있는 심성을 어릴 때부터 길러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공부를 이 나이때까지 계속 할 수 있는 여유 역시도 그 시절이 일찍부터 마련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의 첫번째 모교라 할 수 있는 신림초등학교는 졸업후 내가 두번 다시 찾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나에게 그리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진 못했던 학교라고 할 수 있었다. 우선 그 학교건물들은 미적인 면에서 너무나 추하고 을씨년스러웠으며, 입지도 북향이었기 때문에 채광이 안되어 어둡고 스산했고, 교실과 운동장의 공간들 역시 내가 어떤 정신적 여유를 찾기엔 너무나 비좁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내 초등학교 시절을 되돌이켜볼 때마다 내가 방과후에 뛰놀던 학교 뒷산, 소나무와 아카시아나무숲이 제법 울창했고, 가끔은 굴참나무나 너구리도 눈에 띄곤 하던 그 야트막한 신림1동의 야산만을 떠올릴 뿐이다. 신림초등학교의 그 딱딱한 벽돌건물들, 비좁던 교실과 어둡던 운동장 등은 별로 내 기억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곳에 다시 한번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 역시 지금 내게는 쉽게 나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곳은 너무나 단조롭고 비인간적이기만 하던 환경이었기 때문에, 내가 억지로 기억하고 찾아가보려 해도 내 무의식의 어떤 한 부분이 그런 회상을 계속 가로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