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서울 중학교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반년전, 우리집은 드디어 가파른 산동네를 벗어나, 언뜻 보기에도 꽤 번듯한 주택가 아랫동네로 이사를 했다. 새 집은 남향인 데다, 방들도 널찍했고, 잔디밭과 정원, 수세식 화장실도 갖춰져 있었으며, 동네의 위치 역시 당시로서는 교통요지에 가까운 중산층 거주지역에 속해, 우리집은 이를테면 경제적으로 대단한 신분상승을 하게 된 셈이었다(비록 몇년도 못가 조밀한 연립주택들이 집 주위에 수없이 들어서, 그 좋던 동네도 얼마 못가 슬럼가 비슷하게 돼버리긴 했지만).

그리고 몇달 후에 나는 '서울 남서울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이 학교는 당시 신림동에서는 바로 건너편의 성보중학교와 함께 그래도 가장 부유한 집 아이들이 다닌다고 일컬어지던 학교에 속했다. 그곳 남서울중학교에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언감생심 꿈에나 그리던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초등학교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던 의사 아들딸들, 사업가 아들딸들 - 그들은 대부분 사립초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산아래 부자동네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서 내가 입학한 중학교에 합류한 아이들이었다. - 과 어울릴 기회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시대상황도 많이 바뀌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1970년대 후반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마지막 가쁜숨을 몰아쉬고 있던 일당독재 병영국가시절이었기 때문에, 초등학생들까지도 걸핏하면 운동장 같은 데 끌려나가 피켓들고 '맨~주먹 붉은피로 적~군을 막아내어, 붉은 괴뢰 쳐죽이자, 원쑤를 박살내자' 같은 구호를 외쳐야 했었고, 친구들과 정치에 관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얘기를 주고받았다가는, 눈이 휘둥그레진 선생님들에 의해 즉각 불려세워져 '너희 아빠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같은 다그침을 당하기가 일쑤였는데, 내가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에는 짧은 '서울의 봄'이 지나간 후 전두환정권에 대한 청년진보세력들의 지속적인 대항공세로 인해 그래도 사회에 조금이나마 자유화의 기운이 도입되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경제 역시도 1979년 2차 석유파동 위기 및 1980년 대규모공황의 여파가 지나간 후 그래도 당시엔 조금씩 회복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다 교복이 폐지되고 두발이 자유화된 덕에, 당시 중학생들은 거의 대학생처럼 머리를 기르고 옷맵시를 부리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더군다나 남서울중학교는 학교건물이 서남향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양지바른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있으면 따사로운 오후 햇볕을 몸에 가득 안은 채 여러 상념에 잠길 수도 있었으며, 그밖에도 본관 앞 정원에 아름답게 피어나던 꽃들, 특히 본관 좌측 현관 앞에서 봄마다 꽃망울을 터뜨리던 목련나무의 모습 역시도 지금 내 기억 속에는 아주 생생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남서울중학교는 그 화사하고 아름답던 경관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에게 어떤 통일적인 이미지를 주지는 못하고 있다. 내 기억 속에는 특히 '체육선생님'이라 불리우던 자들의 가학적인 폭력, 일부 히스테릭한 여선생님들의 불가해한 짜증 같은 것들이 불쾌할 정도로 강하게 남아있으며, 학생들간의 교내폭력도 그 정도가 무척 심해 그 시절 대부분의 '노는 친구'들은 거의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무법천지처럼 학교 안을 활개치고 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거의 졍글과도 같은 살벌한 약육강식 분위기가 별다른 대책없이 교내 곳곳에서 방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남서울중학교의 학생회간부라고 불리우던 일부 중상류층집안 애들 사이에서는 어떤 기묘한 배타적 엘리트문화 같은 것이 대대로 전수되고 있어 나를 상당히 낯설게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당시 남서울중학교는 남녀 각각 8반씩 분반을 함으로써 원칙적으로 남녀이성교제를 거의 불가능하게 하였는데, 각반의 반장, 부반장들, 다시 말해 한 학년에서 30여명 정도의 학생들에게는 간부회의니 간부수련회니 뭐니 해서 다분히 합법적으로(?) 이성교제를 허용해주는 관례가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1~2학년시절 여러가지 이유로 이러한 그룹에 낄 수가 없었던 나는 이때부터 약간 삐딱한 비주류기질 같은 것을 갖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시의 남서울중학교에는 갓 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학생들에게 비판적 사고와 민주주의적 태도를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시던 많은 젊은 교사분들이 계셨다. 그 분들께서는 당시 권위주의적인 학교 분위기 속에서 악전고투하시며 참교육을 실천하려 하셨고,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매우 풍부한 사색의 계기와 지적인 자극들을 제공해주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그 외에도 내 주위에는 독서나 신앙, 그리고 진실한 우정이나 건전한 토론 같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있던 여러 친구들이 나와 특별한 관계를 가져주기도 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어려운 가정환경에 속했지만 다들 인생에 대해 진지하고 하루하루를 선량하게 살아가고 있던 친구들이었다.

이젠 남서울중학교를 졸업한지도 어느새 까마득한 시간이 흘러버렸으나, 내 기억 속에서 남서울중학교의 추억은 생각보다 그렇게 먼 것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중학교 시절 나는 공부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시간을 독서와 사색에 투자할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내 중학교 시절의 영상 역시도 그만큼 내 기억 속에 더 깊이, 더 뚜렷하게 각인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도 당면한 대학입시 준비에 너무나 매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나 자신을 뒤돌아볼 여유는 많이 갖지 못해, 그만큼 시간도 더 빨리 흘러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남서울중학교는 내게 뭔가 확실한 이미지를 주었던 것은 아니고, 중학교 때 시절의 기억들도 내게는 그저 파편화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남아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 시절은 나에게 오히려 더욱 다양한 자기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그런 이유로 지금도 나는 그때 남서울중학교의 햇볕 가득하던 운동장과 스탠드를 간혹 그리워하고, 그 왁자지껄하던 교실 옆 창가에 혼자 턱 괴고 앉아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내 옛날 모습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게 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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