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지난번 내 글 '포르투갈전 승리를 보고도 지금 내 기분이 씁쓸한 이유'에 대해 약 이틀에 걸쳐 올라왔던 수백건의 반박글과 수천건의 인신공격성 사이버테러글들에 대한 내 입장정리가 있어야 할 듯싶다. 베를린리포트에서야 어떤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고, 그에 대해 일일이 대꾸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적어도 내 홈피를 방문하시는 분들께 대해서는 나 역시도 마냥 입만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수사는 지양하고, 간단간단하게 논점별로 내 입장을 밝혀볼 생각이다. 과연 이번 논쟁이 나로서 그렇게 성의를 보일 가치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 나의 지난번 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불만 중에 가장 큰 것은 역시 나에게 국적도 없느냐, 민족의식도 없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나는 당연히 국적이 있다. 민족의식 같은 것은 별로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떤 외국인이 우리 한국인을 욕하면 그에 대해 천천히 따져들거나, 대꾸할 가치도 없으면 그냥 비웃어주거나,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내 스스로 창피해하거나 하는 것이 다 내가 그놈의 '민족의식'인지 뭔지를 갖고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정말로 내게 '민족'에 대한 소속감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부끄러운 모습에 내가 새삼 창피해지거나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1.1. 특히 나의 동거인 Dirk녀석이 '전형적인 후진국문화, 파쇼문화의 유산', '그 자체로 병적인 증후군이요 한국사회에 전체주의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라고 말한 것에 대해 내가 아무 대꾸도 못했다고 나를 비판하시는 점에 대해서는 코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 글 어디서도 '아무 대꾸도 못했다'는 말을 쓴 적이 없다. 나는 '대꾸'까지는 아니어도 Dirk녀석과 그 문제에 대해 이전에도 심각하게 여러 얘기를 해봤고,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인의 심리 근저에 파씨즘적 요소가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와 상당한 의견접근을 본 상태이다. 설령 나와 그의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내가 매번 그 자리에서 즉각 말대꾸를 해줘야 할 의무는 없다. 내 입장이 좀 정리가 된 다음에 차분히 대꾸를 해도 늦지는 않다.
1.2. 사실 Dirk녀석의 그 말은 나름대로 일리도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오히려 그런 솔직한 비판을 해준 데 대해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줘야 할 판이었다. 물론 나는 평소 비판을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내가 독일을 비판하는 경우가 더 많다. Dirk가 한국에 대해 아는 것보다 내가 독일에 대해 아는 게 더 많다보니까 내가 독일비판을 더 많이 하는 쪽이다. 하지만 Dirk녀석은 나의 독일비판에 대해 무조건 화를 내기 보다는 나의 그런 비판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사실 Dirk는 독일이란 나라에 대해 별로 소속감도 갖고 있지 않고, 애국심도 별로 없는 부류에 속한다. 오히려 어떻게 한국여자 하나 사귀어서 맛있는 한국요리를 매일 좀 얻어먹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를 매일마다 귀찮게 구는, 그냥 그렇게 평범한 독일의 신세대청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1.3. Dirk가 독일민족 전체를 대변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나도 그 앞에서 한국민족 전체를 대변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내게 그런 의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한 개인이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은 법적으로 세금 잘 내고, 군대 안 빠지고 가고, 사회적으로 재산 해외도피 안 하고, 자녀 원정출산 안 하고, 그런 정도만 해도 충분한 것이다. 내가 만약 독일친구들 앞에서 맨날 바락바락 한국옹호만 하려 든다면, 독일친구들은 그런 나를 오히려 미친 놈으로 생각할 것이며, 더 후진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에게 '애국자'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딱딱하고 여유없는 놈'으로 취급받기 알맞을 것이며, 우리나라 국익을 실현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국적도 확실하고, 민족의식도 약간 있는 편이다. 하지만 무조건 우리나라 입장만을 외국인에게 관철시키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2. 또한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외국인의 관점은 그냥 참고만 하면 될 뿐인데, 그런 외국인의 관점을 동족비판에 써먹었다면서 나더러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한 점에 대해서이다. 그런 그들에 대해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사대주의'면 뭐가 그렇게 나쁘냐는 것이다. '사대주의'가 뭔지 알긴 아시느냐, 맹자의 '유지자위능이소사대(惟智者爲能以小事大)'란 말은 들어보신 적이나 있느냐, 등을 여쭙고 싶어 난 지금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
2.1. '사대주의'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정말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은 것 같은데, 나는 나의 조상들께서 당시 나름대로 현실적인 판단을 하셔서 '사대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아오셨던 것에 대해 별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를 않는 편이다. 물론 우리 민족이 그렇게 약소민족인 것만은 아니지만, 재수 없게도 지정학적 위치 자체가 워낙 절묘한 곳에 쳐박혀 있어서 어차피 이런 환경에서 "민족자주"가 환상이란 것은 이미 13세기 몽고의 침입, 16세기 임진왜란, 17세기 병자호란때에 여실히 증명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사대'가 아니었으면 우리 민족은 중국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처럼 한민족(漢民族)에 강제흡수되어버렸거나, 오랜 역사에 걸쳐서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매우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상태에서 허덕였을런지도 모른다.
2.2. 1998년 김대중정권이 수많은 국내 우량기업들을 외국에 팔아치우고 IMF의 지시에 따른 구조조정을 단행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를 '사대주의'라고 비판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나라가 만약 이러한 '사대주의'를 포기하고 북한 같은 '주체사상'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해보시라. 식량자급률이 30%도 안되고 에너지자급률은 20%도 안되는 우리나라 경제가 그 어떤 파탄상황에 직면하게 될지 대충 짐작이 가실 것이다. 1990년대 공산주의 경제권의 붕괴 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한이 만약 헛된 자존심과 자신감을 버리고 미국이나 일본한테 외교적으로 조금이라도 '사대(事大)'를 했다면, 그로써 조금이라도 국방비를 줄이고 민생을 안정시켰다면, 지금 북한의 수많은 동포들은 그렇게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2.3. 오늘날 세계에서 '사대'를 안하고 사는 나라는 오로지 세계최강대국인 미국, 13억 인구의 중국에다가 우리의 골칫덩어리인 북한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오늘날 유럽제국들이 다 '사대'로 먹고 살고 있고,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물론, 일본도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유럽에 '사대'를 하면서 국가존립을 보장받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사대'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은 국익에 반한다. 다만 어느 정도의 '사대'로 제한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며, 이는 개인의 인식 및 시각차에 따라 달라질 문제이다. (예를 들어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면서 각종 살인, 성폭행 기타 중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것에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든가, 구한말에 일본과 전쟁 한번 안 치러보고 열강에 도움을 구걸할 생각이나 하다가 국권을 빼앗겼던 것 등은 아주 고약한 '사대'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유림들이 중국에 문화적 우위를 인정한 것, 많은 한국의 대학생들이 외국유학을 나오기 위해 안깐힘을 쓰고 외국에 나와 여러 문물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가 볼 때 오히려 매우 유익한 '사대'이다.)
2.4. 설령 사대주의가 나쁘다고 하더라도 외국인의 관점을 그냥 참고만 해야 한다는 말은 웃기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난 물론 내 관점과 일치하지 않는 외국인의 관점은 이런 자리에서 거의 소개도 하지 않지만, 설령 내 관점과 다르다 하더라도 외국인의 관점으로 자국의 어떤 경향을 비판한다는 것은 조금도 금기사항이 아니며 오히려 추천하고 권고할 만한 사항이다. 오히려 유학생이라면 그런 관점을 국내인들에게 충실히 전달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비판'이 결여된 '참고'는 의미가 없는 '참고'일 뿐이다.
2.5. 내가 우리민족의 월드컵광기를 보고 '창피하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우리 민족을 '비난'했다고 우겨대시는 것도 웃기는 얘기이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께서는 제발 남의 말을 참고만 하려 하지 마시고, 남의 말을 통해서 정말 깊이 자기 생각을 재점검하기도 해보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 분들께서는 내게 되풀이해서 말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너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하면 너에겐 잘못이 있는 것이다.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사과하라."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 속에 이미 푹 빠져서 살아봤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운운하는 정말이지 나찌시대에나 나올 법한 말로 뒤범벅댄 '국민교육헌장'을 외워대고, 아침 등교시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며 태극기를 바라보고, '항상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 '중간만 가야 한다'고 교육받으며, '겸손'이란 이름으로 아랫사람을 억압하고 살아왔던 사람이다.
2.5. 내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하고 반성을 많이 해서 그런 가치관을 버렸는데, 단지 쪽수의 힘으로 밀어붙이시면서 나에게 그런 옛날의 가치관을 다시 되찾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내가 볼 때 폭력에 다름 아니다. 가치관이 다른 것은 사과의 대상이 아니다. 더군다나 반말과 욕설과 위협을 퍼부으면서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설령 사과를 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과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특히 '유학선배' '독일선배' '고대 선배'라는 이름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강요와 협박, 비하의 말들을 늘어놓는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 앞에서까지 내가 굳이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해야 할 의무는 없다. 오히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당신들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3. 또한 이번에 한국인들의 그 응원열기를 '집단적 놀이문화'로 미화하시는 분들에 대해서이다. '집단적 놀이문화'란 말은 상당히 neutral한 개념이란 생각이 드는데, 온국민이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솔직히 말해 1937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던 나찌의 군중집회나 지금도 북한의 평양에서 수시로 열리는 군중집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응원문화 때문에 다치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고 하셨지만, 결코 그게 무슨 자랑거리는 되지 않는다. 나찌시대의 군중집회에서도 다쳤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북한의 군중집회에서도 다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엔 모든 게 그렇게 질서정연하고 너무나 아름답게, 숭고하게 시작된다.
3.1. 나는 처음 티브이로 (컴퓨터기술에 의해 컬러로 재생된) 1930년대 나찌집회장면을 보았을 때, 얼마나 멋있는 장면인지 눈이 뒤집힐 뻔했다. '쿼바디스'나 '벤허' 같은 헐리웃영화에서 나오던 군중씬보다도 훨씬 멋있는 장관들이었고, '로마제국'의 부활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스펙터클한 모습들이었다. 금빛 찬란한 깃대와 붉은 깃발들... 똑같은 색상으로 통일된 군복을 입고 멋지게 진군하는 게르만전사들... 그것을 보고 역시 똑같은 색상으로 통일된 옷을 입고 나찌깃발을 흔들며 눈물 흘리고 열광하는 독일의 국민들... 물론 이런 장면들은 북한의 군중집회 실황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북한의 카드섹션들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세계최고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평양의 여러 건축물과 구조물들은 한국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거대하고 웅장한 것들이다. 세계에 정식공개만 된다면 평양시는 앞으로 동양의 '로마'나 '베를린'으로 불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북한의 여러 군중집회에서 벌어지는 통일된 색깔과 통일된 행동의 대제전 역시 보는 사람들이나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를 황홀하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3.2. 그런데 확인해둘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내면서 암암리에 형성된 공감대와 똘똘 뭉쳐진 힘은 결코 좋은 방향으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대개의 경우 그 힘은 우선 외국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국인에게로 향해지며, 그것도 아주 쥐도 새도 모르게, 하지만 아주 잔인하게 사용된다. 나찌도 처음에는 외국인에게 그 어떤 테러도 가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제거했던 것은 나찌에게 가장 격렬하게 반항하던 내국인 공산주의자들이었고, 그 다음에는 사민주의자들에게 탄압이 가해졌으며, 그 다음에는 자유주의자들과 기독교도들에게 탄압과 불이익이 가해졌다. 국가가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국민들이 알아서 자발적으로 그들을 왕따시키고 테러해버렸으며, 국가가 한 일은 방송으로 계속 똑같은 사상만 주입시켜서 그렇게 똑같은 생각밖에 못하게 된 국민들의 여론에 기꺼이 따른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국인부터 획일적으로 의견통일을 하고 사상단속을 한 다음에 유대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들에 대한 테러와 살육이 이어졌다. 북한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일단은 쁘띠비쥐기질이 있는 지식인들부터 처단했고, 그 다음에 지주계급들을 처단했으며, 그 다음에 남조선에 대해 침략을 감행했고, 그렇게 남조선까지 다 먹은 다음에야 미국인과 일본인들까지 모조리 쓸어내려 했다.
3.3. 한국의 평범한 회사원, 학생들에게 있어서 마땅히 스트레스 풀 데가 없다는 말 역시도 그런 위험한 열기를 정당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국사람들에게 도대체 스트레스 풀 곳이 왜 없는가?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 야구장도 가면서 스트레쓰를 풀질 않는가? 이따금 산에 올라 '야호'하고 소리도 쳐보지 않는가? 오히려 독일인들이야말로 한번 그렇게 소리 좀 쳐보고 싶어도 소리를 쳐볼 수가 없는 인간들이다. 독일엔 노래방도 거의 없고, 산도 별로 없다. 특히 나찌시대의 독일인들은 정말 스트레스 풀 데가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답답하고 미치겠는데 이를 어떻게 하나? 그런 스트레쓰를 푸는 최고의 수단은 뭐니뭐니해도 군중집회일 수밖에 없었다. 한번 참가해보면 그 짜릿한 맛을 도저히 잊지 못한다. 나찌시절 베를린올림픽때 독일인들도 그랬다. 그냥 즐거웠다. 애국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니까 뿌듯함까지도 느껴졌다. 하지만 원래 나찌즘이나 파씨즘이란 것은 그런 식의 단순한 즐거움과 재미 속에서 조금씩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3.4. 애국심을 매개로 한 국가대항전 스포츠경기에서의 군중집회를 브라질 '삼바축제'나 독일의 '러브 퍼레이드'에 비유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브라질 '삼바축제'나 독일의 '러브 퍼레이드'는 민족주의와 별다른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응원열기에 상투적으로 나붙는 수사들을 보라. "단군 이래 가장 기쁜 날"이라느니, "국운융성의 길이 열렸다"느니 하는 엄청난 말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말들이 과연 단순한 축제문화에 달라붙는 말들인가? "정작 응원하며 노는 국민들은 그런 거창한 개념에 대해 아무 생각도 못해봤다"는 말을 정말로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번 월드컵열기는 절대 단순한 놀이문화가 아니다. 오히려 민족주의가 우리 사회 전체에 더 깊게 확산되는 계기였다고 봐야 될 것이다.
3.5. 물론 민족주의가 꼭 나쁜 것은 아니며, 이번 기회에 레드콤플렉스나 지역감정을 완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다. 붉은악마의 응원에 따른 민족주의열풍도 그냥 이 정도 수준에서 끝나준다면 다행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우리민족의 냄비성향에 비춰볼 때 그렇게 귀결될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모든 총화단결에는 '누가 그 단결의 주도권을 잡느냐'가 항상 문제되게 돼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단결의 주도권을 잡고 나면 그 단결은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게 돼있다. 이번에 내 방명록에 퍼부어진 수천건의 사이버테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아주 위험한 형태의 민족주의로 발전해가고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3.6. 오는 6월 27일에는 베를린 한국대사관 앞에서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이 구속되어 있는 한국 노동자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항의집회를 연다고 한다. 월드컵과 무관하게 노동자들은 당연히 그런 집회를 열 수 있어야 하고, 자기들의 정당한 요구를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베를린리포트'에 올라온 어느 유학생(혹은 교민?)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여보소. 정신들 차리소. 이제까지 약소민족으로 세계의 그늘 속에서 발버둥쳐오던 무리 배달민족이 젊은 태극전사의 용감한 투혼으로 세계에 신화적인 존재로 화제에 올라 코리아의 열풍이 불고 있는 지금 노동투쟁을 한다니, 장소와 때를 보아 일들을 하소." ...
3.7. 자, 어떤가? 이래도 월드컵과 그로 말미암은 민족주의가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것인가? 이래도 노동문제, 정치문제와 축구시합은 별개의 문제일 뿐인가? 심지어는 이번에 젊은 층의 지방선거 투표참여율이 저조해서 한나라당이 사실상 우리나라 지자체 거의 전부를 싹쓸이해버린 것도 월드컵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나로서는 그저 기가 막혀 쓴웃음만 나올 따름이다. 당신들께서 정치적으로 어떤 견해를 갖건 그야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되는 게 아닌가? 명백히 정치문제, 민족문제, 노동문제와 관련돼있는 월드컵열기를, 왜 굳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빡빡 우겨대시는가?
이번 논쟁에 별로 흥미를 갖고 있진 않지만, 특히 나의 '태도'를 자꾸 문제삼으시는 분들께서는 먼저 자신들부터 '태도'를 바르게 하시고 나를 대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난 지금 익명이 아니라 거의 실명으로 싸우고 있다. 내 신상, 거주지 등은 완벽하게 드러나있고, 그 자체로 나는 당신들보다 훨씬 더 정정당당함의 요건을 갖춘 셈이다. 그런 내게 익명으로 숨어서 계속 싸움을 거시는 분이라면 그에 걸맞게 예절바른 모습을 보이든가, 도저히 예절을 못 지키시겠다면 실명이나 신상을 당당하게 밝히셨으면 좋겠다. 비겁자를 굳이 상대해야 할 의무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나한테서 비겁하다는 말을 듣기가 정말 싫으시다면, 그냥 실명이나 신상정보를 당당하게 드러내셨으면 한다. 그렇다면 나도 예의를 갖춰 한 수 배워볼 의향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나로서는 내 밀린 공부에나 힘쓰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인 것으로 생각된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런 식의 소모적이고 불공평한 논쟁은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2002. 6. 23.
위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
[월드컵논쟁]으로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