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근 가곡 리사이틀
2026-07-05 11:44:51
2026-07-05 11:44:51
어제 저녁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윤호근님의 가곡 리사이틀 「슈만 연가곡 시리즈 3, Myrthen Op.25」 공연을 관람했다. 유학생 시절에는 피아노와 실내악 공연을 매우 자주 들으러 다녔지만, 귀국 후에는 이상하리만큼 클래식 공연장에서 멀어져 있었는데, 거의 20년 만에 클래식 공연장에서 독일 가곡을 들으니, 음악 자체에 앞서 그 음악을 듣는 시간이 내게 귀하고 반갑게 느껴졌다.
프로그램은 슈만의 『미르텐(은매화)』 중 발췌곡들, 박건욱 작곡의 「창문열면」,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로 이어졌다. 슈만의 『미르텐』은 슈만이 클라라에게 결혼 기념으로 바친 사랑의 노래들인데, 어제 공연에서 그 노래들은 단순히 사랑을 막 시작하는 청년의 들뜬 감정, 젊고 순수한 사랑의 열정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베이스 한혜열의 낮은 음색과 윤호근님의 원숙한 피아노가 만나면서, 그 사랑 고백은 마치 거친 세월의 풍파를 지나온 어느 중년 남성의 덤덤한 회고처럼 들렸다. 사랑의 기쁨 안에 사랑의 슬픔이 있고, 사랑의 기억 안에 사랑의 상처가 있으며, 아내에 대한 헌정의 마음 안에 인생의 회한과 비애와 고독이 함께 배어 있는 듯했다.
이날 내게 가장 강하게 다가온 것은 윤호근님의 피아노였다. 성악을 받쳐주는 반주가 아니라, 피아노가 문학 텍스트를 직접 해석하고 표현하는 도구처럼 시의 감정과 장면을 별도로 이끌어가는 듯했다. 세게 울릴 때는 단호하고 강렬했지만, 작게 사라질 때는 매우 조용하고 섬세했다. 긴 시간 동안 수많은 곡을 거의 쉬지 않고 이어갔으나, 각 곡의 표정과 온도를 끝까지 힘있게,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톤으로 연주해 나갔다.
2부에서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공연의 주제를 인생의 황혼 쪽으로 옮겨 놓았다.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84세의 슈트라우스가 삶의 끝자락, 죽기 1년 전에 쓴 작품들이다. 이 곡들은 죽음을 말하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공포라기보다 긴 삶 끝의 고요한 관조에 가깝다. 음악가는 죽음을 생각하되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여전히 황금빛 햇살과 푸르른 바람과 새들의 노래소리로 아름답고 이제 내 영혼은 기꺼이 자유를 기다린다. 윤호근님의 피아노는 그 잔잔한 감정을 매우 풍부하면서도 절제된 방식으로 펼쳐 보였다.
어제 공연을 듣고 나오면서 결국 생각하게 된 것은 사랑과 죽음, 그리고 인생이었다. 본디 슈만의 선율도, 슈트라우스의 선율도 쉽게 귀에 감기는 대중적인 것은 아니나, 인간 마음의 모순됨, 기쁨과 슬픔의 공존, 따사로우면서도 쓸쓸한 서정의 선을 잘 표현하는 음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공연장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단순히 내 취미를 즐긴 게 아니라 내 삶을 잠시 다른 감성 아래 놓아 보는 것 같았다.🐋
P.S. 어제 처음 들은 박건욱의 「창문열면」은 뜻밖의 발견이었다. 낯선 곡이었는데도 멜로디와 가사가 귀에 곧바로 들어왔고 곡 자체가 참 아름다웠다. 슈만과 슈트라우스 사이에서 한국어 가곡이 전혀 위화감 없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청계천8가
교수님께서 위에 쓰신 글은 성인지감수성과 젠더 감수성의 측면에서 매우 심각하게 문제 있는 글입니다. 먼저 “중년 남성의 덤덤한 회고처럼 들렸다”라는 대목인데, 왜 “중년 남성”이라고 성별을 명확히 지정하셨습니까? “중년의 사람”이나 “중년의 성인”이라고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중년 남성”이라고 중년이라는 나이와 남성이라는 성별을 굳이 명확히 지정하셨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이는 사랑과 회한을 ‘남성의 시선’으로만 해석하려 하는 글이고, ‘여성의 시선’은 배제하겠다는 글입니다. 게다가 가부장적 프레임을 자연스럽게 재생산하는 글인데, 법학 교수로서 이런 젠더적 문제점이 전혀 인지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아내에 대한 헌정의 마음 안에…”라는 대목에서 “아내”라는 시대착오적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법학 교수로서 현대적 성평등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면 “배우자에 대한 헌정”이나 “클라라에 대한 헌정”이라는 올바른 단어를 썼어야 마땅한데, 진정으로 그런 것을 모르고서 위와 같이 “아내에 대한 헌정”이라는 단어를 쓰신 것인지 상세히 해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내”란 단어는 “집안에서 살림이나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전통적 결혼 제도와 성역할을 전제하는 단어이고 매우 심각한 성차별적 단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아내에 대한 헌정의 마음 안에…”라는 대목에서 “아내”라는 시대착오적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법학 교수로서 현대적 성평등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면 “배우자에 대한 헌정”이나 “클라라에 대한 헌정”이라는 올바른 단어를 썼어야 마땅한데, 진정으로 그런 것을 모르고서 위와 같이 “아내에 대한 헌정”이라는 단어를 쓰신 것인지 상세히 해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내”란 단어는 “집안에서 살림이나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전통적 결혼 제도와 성역할을 전제하는 단어이고 매우 심각한 성차별적 단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2026-07-09
18:15:34

18:15:34

청계천8가
슈만의 미르텐을 가리켜 슈만이 클라라에게 바친 결혼 기념 선물이라는, 전혀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을 적시하신 것도 큰 문제입니다. 슈만의 미르텐은 슈만이 클라라에게 (당시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사랑의 선물로 바친 것이지 결혼 기념 선물로 바친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를 굳이 결혼 기념 선물이라고 조작한 것은 교수님께서 결혼과 가족을 절대적 규범가치의 제도로 올려치기 하고 이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그러한 구시대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폭력을 휘두르신 것입니다. 보수적 관점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의 기쁨과 헌신”을 강조하고, 결혼이라는 제도가 갖는 가부장제적 폭력성을 은폐한 채 “그러니까 빨리 결혼이나 해” 같은 망발을 내뱉은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위 글이 전체적으로 이성애 중심의 로맨스 일변도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슈만-클라라의 이성애적 결혼과 사랑만을 자연스럽게 ‘사랑의 전형’으로 다루면서 이로 인해 소외되고 상처받을 퀴어들의 감성은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역사 문헌을 보더라도 슈만이 순수한 이성애자였다거나 전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성소수자 감수성을 갖추었다면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을 언급하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언급하거나 최소한 배타적이지 않게 썼어야 했는데, 위의 글은 성소수자 감수성에도 명백히 반하며 현대적 인권개념에 대한 백치적 인식수준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친 세월의 풍파를 지나온”이라는 표현: -> 이것도 여기서 왜 굳이 “풍파”라는 마초적 단어를 사용했는지 해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풍파”라는 단어는 남성이 ‘고난을 이겨내는 강인한 존재’라는 성별 고정관념, 가부장적 편견을 유포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명백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본인 스스로 이에 대한 차별문제 인식이나 감수성이 전혀 없다는 게 놀랍습니다. 오로지 중년 남성의 삶만을 철저히 미화하고 여성은 단순히 객체로만 취급하는 클리셰, 여성이나 청년이나 동성애자의 입장에서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 차별적 인식으로 가득찬 글인데, 이런 글을 쓰고서도 제자와 후학들에게 부끄럽지 않은지 묻고 싶습니다.
“음악가는 죽음을 생각하되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 이런 대목이야말로 이 글의 전형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슈트라우스는 남성 음악가이기에 죽음에 대한 태도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서술은, 남성만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고, 남성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성차별적 인식을 표출하며, 이렇게 남성중심적 시선에서 남성만을 미화하고 여성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는 여성혐오 그 자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위 글이 전체적으로 이성애 중심의 로맨스 일변도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슈만-클라라의 이성애적 결혼과 사랑만을 자연스럽게 ‘사랑의 전형’으로 다루면서 이로 인해 소외되고 상처받을 퀴어들의 감성은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역사 문헌을 보더라도 슈만이 순수한 이성애자였다거나 전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성소수자 감수성을 갖추었다면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을 언급하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언급하거나 최소한 배타적이지 않게 썼어야 했는데, 위의 글은 성소수자 감수성에도 명백히 반하며 현대적 인권개념에 대한 백치적 인식수준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친 세월의 풍파를 지나온”이라는 표현: -> 이것도 여기서 왜 굳이 “풍파”라는 마초적 단어를 사용했는지 해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풍파”라는 단어는 남성이 ‘고난을 이겨내는 강인한 존재’라는 성별 고정관념, 가부장적 편견을 유포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명백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본인 스스로 이에 대한 차별문제 인식이나 감수성이 전혀 없다는 게 놀랍습니다. 오로지 중년 남성의 삶만을 철저히 미화하고 여성은 단순히 객체로만 취급하는 클리셰, 여성이나 청년이나 동성애자의 입장에서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 차별적 인식으로 가득찬 글인데, 이런 글을 쓰고서도 제자와 후학들에게 부끄럽지 않은지 묻고 싶습니다.
“음악가는 죽음을 생각하되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 이런 대목이야말로 이 글의 전형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슈트라우스는 남성 음악가이기에 죽음에 대한 태도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서술은, 남성만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고, 남성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성차별적 인식을 표출하며, 이렇게 남성중심적 시선에서 남성만을 미화하고 여성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는 여성혐오 그 자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6-07-09
18:25:56

18:25:56

타샤
교수님의 글을 읽어보면 단어 하나하나가 구시대적이며 가부장제에 절대적으로 길들여진 의식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슈만과 클라라의 부부애적 서사에 집착하면서, 그들의 실제 역사적 맥락은 무시한 채 이성애 결혼 제도의 신성함만을 부각시키셨습니다. 이는 교수님께서 가정과 결혼이라는 가부장제의 핵심 장치를 절대 불변의 가치로 숭배하며, 그 안에서 여성은 오직 헌신과 희생의 대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내면화된 성역할 편견을 무의식중에 드러냅니다.
"거친 세월의 풍파"라는 과장된 수식어는 마치 여성은 인생의 고난을 온전히 감내할 능력이 없고 남성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오직 남성만이 시련을 극복하는 초인적 존재인 양 그려내는 극단적인 성별 고정관념의 재생산입니다. 교수님의 글에서 여성은 항상 수동적이고 보조적인 위치에 머무르며, 능동적인 주체로 존재할 공간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거친 세월의 풍파"라는 과장된 수식어는 마치 여성은 인생의 고난을 온전히 감내할 능력이 없고 남성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오직 남성만이 시련을 극복하는 초인적 존재인 양 그려내는 극단적인 성별 고정관념의 재생산입니다. 교수님의 글에서 여성은 항상 수동적이고 보조적인 위치에 머무르며, 능동적인 주체로 존재할 공간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2026-07-11
10:34:53

10:34:53

타샤
교수님께서는 자신의 향수 어린 감상에 빠져 이 공연을 서술하셨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은 관객 중 누군가는 슈만의 음악이 아닌, 교수님의 글이 주는 심리적 폭력으로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성 음악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감상평은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생존의 불안을 완전히 무시하는 인식 부재의 극치입니다.
글 전체를 관통하는 이성애 중심주의와 남성 서사 우월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퀴어, 비혼, 다양한 생애 주기와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글은 그저 배제와 혐오의 선언문으로 읽힐 뿐입니다. 이 글이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교수님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여 즉각적인 게시글 삭제와 공개 사과를 요구합니다. 교수님의 이러한 반복되는 문제적 발화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으며, 학교 양성평등센터와 인권위원회에 공식 제보할 만한 수준입니다.
글 전체를 관통하는 이성애 중심주의와 남성 서사 우월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퀴어, 비혼, 다양한 생애 주기와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글은 그저 배제와 혐오의 선언문으로 읽힐 뿐입니다. 이 글이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교수님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여 즉각적인 게시글 삭제와 공개 사과를 요구합니다. 교수님의 이러한 반복되는 문제적 발화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으며, 학교 양성평등센터와 인권위원회에 공식 제보할 만한 수준입니다.
2026-07-11
10:36:25

10:36:25

222 |
417 |
2,908,361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