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학적 소질은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한다.

독일유학에 관련해서 내가 요 근래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독일에 나가기 전에 어학은 어느 정도나 하고 나가야 하느냐, 현재 아베체데 밖에 모르는데 독일에 가서 몇달 정도면 독일어를 마스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거기에 곁들여서 독일어공부를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느냐는 질문도 굉장히 많이 받았다.

여기에 대해 답변 드리자면 그건 각자 사정에 맞춰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 독일에 와서 가만히 관찰해본 결과에 따르면, 마치 군대에서 축구만 했다 하면 처음부터 서정원, 홍명보처럼 날라다니는 애들 있고, 어떤 애들은 몇년을 뛰어다녀도 개발 신세를 못 면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처럼, 개인별로 어학에 관련된 소질이나 적성은 차이가 워낙 커서, 어떻게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매우 힘들다.

(2) 어학습득 속도의 개인차

단적으로 말해, 나이가 좀 어리고 머리가 반짝반짝하고 어학에 소질있고 성격 쾌활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독일어를 훨씬 더 빨리 배운다. 거기다 독일에 와서 한국사람과는 거의 관계를 갖지 않고 대신 독일인 남자친구만 사귀어서 그와 거의 죽네 사네 비슷한 정도의 정신적, 육체적 연애관계까지 간 여학생들은 불과 1년도 안되어 거의 현지 독일인들과 유창하게 독일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수준에까지 실력이 오르곤 한다. 반면 나이가 서른살 정도 돼 독일에 유학와서 어학에 소질은 별로 없고 박사논문은 빨리 써야 되고, 그래서 맨날 도서관에 틀어박혀 전공서적이나 읽고, 주말이면 한국사람들과 어울려 술이나 퍼먹는 대다수 유학생들은 10년이 지나도 독일어수준이 즉석에서 자기소개도 제대로 못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심지어는 장기 유학생이면서도 라디오, 티브이에서 나오는 가장 간단한 독일어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역시 드물지 않다.

(3) 국내에서 가급적 많이 하는 것이 좋은가?

대부분의 경우 독일어는 국내에서 어느 정도 해가지고 나오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꼭 획일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국내에서 기초과정은 물론 중급과정까지 모두 마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천적으로 어학소질이 부재하고 더군다나 국내에서 독일어를 배워도 정말 이상하게 배워서 발음까지 희한하게 망쳐버린 사람들은, 독일에 와서 독일어로 떠들어봤자 알아듣도 못할 소리만 한다고 개망신만 당하고 결국 독일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때 처음부터 다시 배우려 해도 이미 잘못 배운 게 인이 박혀버려 잘 고쳐지지도 않는다). 반면 국내에서 독일어는 정말 아베체데밖에 모르던 사람이라도 독일에 와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열심히 어학수업 따라가고, 특히 여학생의 경우 독일인 남자친구 사귀고 하면 일상언어부터 시작해서 아주 실전독일어로 금방 야무지게 실력을 갖추게 된다.

(4) 꼭 어학을 유창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독일에 와서 독일인들과 반드시 유창하게 의사소통을 해야만 하는가도 쉽게 답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물론 유창하게 독일어를 한다면 나쁠 것이야 없겠지만, 이것은 독일유학을 온 목적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사과정으로 들어와 빨리 박사논문 쓰고 귀국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현란한 회화능력보다는 어려운 전공서적을 술술 읽어낼 수 있는 독해력과 함께 지적이고 고급스러운 표현을 적절히 구사하며 박사논문을 쓸 수 있는 작문능력이 더 우선이다. 반면 사업적 목적으로 독일에 왔거나 통역과정을 밟으러 독일에 온 사람인 경우는 독해력이나 작문능력보다는 청취, 이해력과 회화실력이 더 우선이다. (참고로 우리 주위에 흔히 보이는 독일어 회화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들이 독해력도 그와 마찬가지로 좋으리라고 단정해선 안된다. 그들 중엔 의외로 형편없는 독해력과 천박한 어휘력만을 갖고 있는 경우도 꽤 있기 때문이다.)

(5) 언어표현의 방식도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독일유학의 목적이 주로 학문적인 데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전공학문에 관한 전문용어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에 관한 문제만 토론할 수 있으면 되지, 그 외의 잡다한 것까지는 전혀 알 필요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언어구사력도 정확하고 명료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데만 중점을 두어 길러야 한다. 반면 독일유학의 목적이 학문적인 것보다는 다양한 문화를 습득하고 자기 안목과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쪽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한우물만 파는 것보다 방대한 분야에 걸쳐 빠짐 없이 골고루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정확하고 명료한 것 못지 않게 중의적이면서도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표현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 물론 그때문에 유학기간이 전반적으로 아주 길어지게 되지만...

(6) 이상적인 어학공부 방법도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사람마다 취미와 적성이 모두 다르므로 이상적인 공부방법 같은 것도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 같은 경우는 문학과 시사정치분야 토론에 취미가 있고 지루한 것은 못 참는 성미라 주로 독일소설책이나 시사잡지 정치면 읽기, 영화감상 및 그에 관한 독일친구들과의 난상토론 등을 통해서 어학실력을 기른 편이었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원래 지루한 것을 잘 참는 성격의 인간이라면 회화 테이프를 구입해서 몇십번이고 반복해서 듣거나 질 나쁜 학원강의에 결석 없이 성실하게 참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난 절대 그렇게 못해~).

그밖에 스포츠광이라면 독일에 와서 하루종일 스포츠중계만 보거나 스포츠잡지를 사보는 것도 좋으며, 컴퓨터광이라면 컴퓨터책을 보고 그 설명을 보면서 몇번이고 컴퓨터를 뜯었다 조립했다 하면서 독일어를 익혀도 좋다. 남달리 색을 밝히는 스타일이라면 도색잡지와 에로영화로 독일어를 익힐 수도 있고, 술 마시고 사람 사귀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주정뱅이인 독일친구들을 몇 명 사귀어 맨날 술 퍼마시고 떠들면서 독일어를 배울 수도 있다.

(7) 한국에서 어학을 많이 했을 경우의 장점

앞에서 꼭 어학을 한국에서 많이 하고 올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대개의 경우는 한국에서 어느 정도 독일어를 익혀갖고 독일에 온 사람들이 유학생활을 더 재미있게 하고 자기 어학실력도 독일에 와서 오히려 더 가속적으로 늘린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아무래도 기초바탕이 있어야 그것을 밑천으로 실력도 더 불릴 수 있는 것이지, 아무런 기초도 없는 가운데서 무조건 용기만 갖고 독일에 들어와 독일어 해보겠다고 덤비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유학초기의 쓰라림만을 결과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독일어가 기초도 돼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독일에 오시는 분들은 어학과정 내내 한국사람들 아니면 똑같은 외국인 친구들(일본인, 중국인, 스페인계 등)하고만 어울려 다니다가 선진학문을 접하긴 커녕 어학시험조차 통과 못하고 울면서 한국에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반면 어느 정도 어학실력을 갖춘 상태에서 독일에 온 사람들은 고참 유학생들로부터 도움받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모든 일을 척척 해결하면서 독일인 친구들과도 자력으로 어울리곤 한다. 한국인들보다는 독일인 친구들과 더 많이 어울리다 보니까 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독일어를 배우게 되고, 그 결과 독일에 와서 비약적으로 가속을 붙여 자기 독일어실력을 늘리는 것이다.

(8) 아무래도 독일인들과 많이 사귀어야 좋다

그러면 한국에서 독일어실력을 늘릴 때에는 어떻게 늘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가? 역시 가장 빠른 지름길은 독일인 친구를 사귀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환학생으로 온 어린 독일인도 좋고, 대학교나 어학원에서 독일어강사를 하는 나이든 독일인이라도 좋다. 친구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출혈을 감수하고 그들에게 돈이라도 팡팡 써서 그들을 친구로서 사귀어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엔 혼자서 책 아무리 많이 읽고 독일문화원 아무리 많이 다녀보았자 그것만으로 독일어가 느는 일은 절대 없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교수님들께서 마련해주신 독일어 과외그룹이나 독일법강좌 등에서 만난 독일인 강사들과 독일어로 대화하면서 독일어를 늘렸던 비율이 내게는 절대적으로 더 컸다. 그때는 그들이 말끝마다 한국인을 멸시하듯 발언하는 게 너무나 귀에 거슬려 그들과의 사귐이 정말 싫고 짜증도 났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억지로라도 그들과 대화 나누며 접촉했던 것이 내 독일어에는 큰 보약이었던 듯하다.

물론 독일에 와서도 독일인과 직접 사귀면서 독일어를 늘려야 한다. 나는 아예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어느 동년배 독일인과 둘이서 같은 집에서 공동생활하며 1년 5개월째 살고 있는데, 당연히 내 독일어공부에 도움이 아주 많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9) 일하면서 독일어를 늘린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반면 친구관계가 아닌 업무 및 금전관계로 습득하게 된 독일어의 경우는 독일어실력 향상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접시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써빙 보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독일어가 늘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지극히 제한된 범위의 몇몇 독일어만 반복해서 숙달될 뿐이다. 의심스러우면 맥도날드 햄버거가게에서 써빙보는 외국인 아르바이트생들 독일어 한번 들어보라. 이미 같은 장소에서 본 지 1년이나 지났는데도 발음은 예전의 식민지발음 그대로고 조금만 어려운 얘기를 해도 여전히 못 알아듣는다. 그런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는 너무나 차갑고 사무적이어서, 아무도 그들에게 제대로 된 독일어를 가르쳐주려 하지도 않고 그들의 발음을 고쳐주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국 돈 없는 자는 독일어도 못 배우는가? 열받지만 "그렇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귀중한 시간은 접시 닦고 플로어 닦고 손님들에게 휴지나 갖다드리면서 허비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피곤하니까 쓰러져 자고 그러면서 한해 두해 세월은 지나가고, 이러다 나이만 헛먹어 한국으로 울며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 독일에 계신 우리 한국교포 분들께서 생각보다 독일어를 잘 못하시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듯하다. 그렇게 처절하게 고생하시면서 우리 한국의 경제재건에 기여하시느라 독일어를 배울 겨를이 없으셨던 것이다. 물론 우리 유학생들도 독일에 유학와서 햇수를 더해가면 갈수록 점점 그 교포분들의 모습을 닮아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0) 한국사람을 안 사귀어야 독일어가 느는가?

이것도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분들은 오히려 독일에 와서 한국사람들과 많이 사귀어야 독일어실력이 더 좋아진다고 말씀들을 하신다. 왜냐하면 한국사람들을 통해 나름의 정보를 많이 얻어야 독일인들과 대화할 때 얘깃거리도 더 많이 만들 수 있고, 또 어차피 독일에 있는 한국사람들은 얘기할 때 독일어와 한국어를 무차별하게 섞어서 쓰므로 그것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독일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말하자면 여기 함부르크 유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고 독일인들하고만 접촉하며 살아가는데, 그분들의 독일어가 한국사람들끼리 더 어울려 다니는 분들의 독일어보다 훨씬 더 나은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 나 역시도 한국분들과 몇시간 얘기 나누고 나면 그 뒤로는 독일인들과 만나 다시 독일어로 얘기할 때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어떤 분들은 한국사람들과 가끔씩 어울려 회포를 풀어야만 기분이 좋아져 독일인들과의 독일어도 잘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글쎄, 결국 이것도 개인의 성향차이로 귀결되는 것일까? 하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모처럼 독일까지 유학 와서 너무 한국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모습은 확실히 보기가 안 좋은 것 같다. 많은 한국유학생들은 분명,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한국사람들끼리만 모여, 그저 한국말이 하고 싶다는 이유로 미친 듯이 자기 얘기만 하려고 다투며 스트레쓰 해소하는 데 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11) 독해력과 작문실력은 어떻게 늘리는가?

많은 분들은 독해력의 경우 무작정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늘리고, 작문실력의 경우는 논문 쓸 때 해당되는 독일어문장을 그때그때 짜깁기하는 것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별다른 작문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끼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학적 재능이 뛰어난 여학생들은 마치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처럼 글도 그렇게 팍팍 써버리기 때문에 특별히 독해력, 작문실력 배양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이런 분들은 이미 독일어로 생각하고 꿈까지 꾸는 단계에 돌입한 분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글도 아니고 학위논문을 쓰는 데 있어서 일상대화하듯 구어체로 글을 팍팍 쓸 수는 없다. 그래서 나같은 경우는 특히 작문실력을 위해서 독일어사전에다가 중요표현 공식들을 그때그때 깨알같이 메모하고, 밤이면 집에 돌아와 연습장에 되풀이해 쓰면서 달달 외우는 공부방법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테면 언제든지 내가 쓰고자 하는 표현들을 사전만 보고 금방 공식에 끼워맞춰 쓸 수 있게끔 수집, 정리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너무 무식하니, 별로 여러분들께 권하고 싶지는 않다. 어학재능에 자신이 있으시다면 차라리 독일어로 생각하고 꿈꾸는 능력을 더 기르시라고 권하고 싶다. 어학은 공식에 따라 맞춰서 쓰는 수학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유분방한 생명체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2001.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