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의 글은 2002년 5월 11일 저의 개인낙서장에 올렸던 독일신문논설 번역글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독일의 금속노조 위원장인 Klaus Zwickel은 얼마전 재미있는 풍경을 하나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자꾸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주장하자 그에 맞서 그는 "파업의 유연화"를 주장하며, 노조원들에게 작업장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태업을 하는 유연한 노동쟁의의 모습을 보여주게 하였던 것이다.

사실 지난 7년간 독일의 노동운동은 거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리고 독일의 노동운동이 그렇게 침체하고 있었던 동안 독일의 노동자 임금은 거의 제자리에 머무른 반면, 독일 경영자들의 보수는 거의 50%나 오를 수 있었다.

작년(2001년) 독일의 경기는 무척 침체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경영자들의 임금은 단지 상징적으로 평균 2%만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그들 최고경영자들은 설령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워낙 구변이 좋은 사람들이어서 마치 자기가 더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던 회사를 구해낸 것처럼 선전했고, 노동자들 역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예를 들어 Deutsche Bank의 최고경영자인 Rolf Breuer는 작년 한해 연봉이 무려 130억원이었다. 그동안에 독일의 노동자들은 겨우 1년에 돈 몇백만원 더 받아보겠다고 파업투쟁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그런 높은 CEO연봉의 배후에는 경영자와 노동자들 간에 아주 미묘한 계산이 깔려 있었으며, 그런 우스꽝스러운 타협은 어쩌면 독일의 노동자들이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현재 독일사회의 밑바닥에는 새롭게 무산계급의 두터운 층이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오랜동안 잊혀졌던 극한적 계급갈등의 위험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절대 독일의 노동자들이 오늘날 무산계급의 지위로 떨어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노조원들은 노조지도부를 향해 자꾸만 파업을 요구하고 있고, 노조지도부 역시 옛날 산업사회 초기때의 표준적 요구사항인 "회사 사정이야 어떻건, 노동자들의 능력이야 어떻건, 모든 노동자들에게 똑같이 더 많은 임금을!"을 들고 나오고 있지만, 그로 인해 신규고용은 자꾸 억제되고, 일자리수는 점점 줄어들고, 결국 수많은 젊은이들이 실업자대열에 설 수밖에 없게 되어, 그 실업자들이 어느새 거대한 무산계급의 층을 형성해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금속노조는 파업을 통해 어떻게든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이윤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러한 기업이윤은 기업이 기계를 더 많이 사용하고, 노동자를 더 적게 고용할수록 더 커지게 돼있는 법이다. 오늘날 독일의 상황에서 임금이 더 오르면 오를수록, 기업은 더 많이 기계에 의존하려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노동자의 수는 더욱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금속노조는 이런 아이러니를 사회가 보다 단결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독일의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로 점차 이해관계가 갈리고 있고, 독일의 국민 역시 취직의 기회가 있는 자와 없는 자, 미래가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자꾸만 분열해가고 있는 중이다. 그 어떤 정규직 노동자도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라든가 '해고의 자유 확대' 같은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임시직 노동자들을 위한 고용보호나 실업자를 위한 취직기회의 확대 같은 데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그런 한에 있어서 독일의 노동조합들이 주장하고 있는 '전사회적 연대의식' 같은 것은 단지 말장난에 그칠 뿐이다.

어쩌면 사회적 정의는 오늘날 "일반적인 고임금"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추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은 90년대에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나라들(미국, 영국, 네덜란드, 아일랜드 등)이 극명하게 보여준 바 있다. 미국, 영국 뿐 아니라 아일랜드, 네덜란드까지도 기적적인 일자리창출을 위해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임금삭감과 정리해고제 도입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그로 인해 노동자수입의 차등폭은 예전에 비해 더 커졌으며, 경기호황의 대부분 이익은 은행원, 변호사, 경제컨설턴트들에게로 돌아갔다. 사회 하류층은 일자리를 얻긴 했지만, 예전보다 더 적은 임금으로 더 많은 노동을 감내해야 했고, 이는 옛날에 그냥 실업자로 집에 눌러앉아있거나 세금 안 내고 불법노동을 했던 것보다 그들에게 더 열악한 삶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사실상 그 나라들은 아주 여러가지 방법으로 저임금노동의 확산을 허용했다. 그 나라들의 사회시스템은 실업자들에게 직업을 가지도록 강제하면서, 실제로는 아주 적은 임금밖에 보장해주지 않았다. 노조는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 하에 '모든 노동자를 위한 임금인상'의 요구를 거두어들였지만, 그 결과 노조는 와해되고 노조의 단체협상권한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영국, 네덜란드의 노조들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제자본주의와 파우스트의 거래를 해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나라들은 실업문제라도 해결함으로써 보다 많은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고정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제공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반면에 독일은 아직도 "실업자경력"이란 말이 나올 만큼 실업문제가 치유되지 않고 있다. 사회보장기구의 적자는 이미 Kohl정부 시절에 산더미처럼 커진 상태이고, 대규모실업으로 인해 하류계급의 사회적 소외감도 점점 고조되고 있다. 노동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600만 명의 젊은이들이 불법노동 이외에는 그 어떤 노동도 하지 못한 채 썩어가고 있지만, 너무나 커져버린 재정적자의 규모는 이들을 모두 구제하는 데 부담이 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거대한 사회국가시스템은 부익부빈익빈을 차단함으로써 가난한 자, 못 배운 자에게도 최소한 기본적인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가난한 하류층 집안에 태어나 직업학교를 거쳐 늦깍이로 법과대학에 들어가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현재 독일수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Gerhard Schröder의 일대기는 독일사회에서 아직도 계층간 이동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적어도 중고교 및 대학교의 학비가 무료이며, 대도시와 지방도시의 격차가 거의 없다는 독일의 사회환경은 이러한 폭넓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보장해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독일에서도 어느샌가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최근의 경제자료들은 독일도 언젠가부터 계급사회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서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실업이 만연함에 따라 하류계급의 자녀들은 취직의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하고 있다. 그로 인해 중소도시에서 태어나 수준 낮은 학교를 다니고 학력 낮은 부모로부터 그 어떠한 사회적 인맥도 물려받지 않은 어린이들은, 대도시의 부유한 고학력가정에서 태어나 수준 높은 학교를 다니고 화려한 사회적 인맥을 물려받은 어린이들에 비해 사회적 출세의 기회를 현저하게 제한받고 있다.

심지어는 대도시 내에서도 부유한 동네와 가난한 동네의 구분은 점점 선명해져가고 있다. 부유한 동네는 갈수록 부동산가격이 오르는 반면, 가난한 동네는 갈수록 범죄율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취직 등에 있어서 사회적 장벽은 자꾸만 높아져가고 있고, 고용주들은 개인적 인맥으로 추천받은 사람을 점점 더 선호해가고 있다. 결국 같은 계급출신이 아니면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세습받을 수 없는 현상이 독일에서도 점점 더 심화되어가고 있다.

물론 독일은 그러한 불평등을 억제하기 위해 그만하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나라에 속한다고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노력 중에서도, 강력한 노동조합에 의해 실현된 고임금정책 같은 것들은 노동시장에 부담을 주고, 실업자의 수를 늘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독일사회에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독일사회는 점점 그 활기와 동력을 잃어가고 있고, 직업을 가진 자와 직업을 가지지 못한 자로 국민 전체가 양분되어가고 있다.

일찌기 Kohl정부와 Schröder정부는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바로 그 노력들은 노동시장을 경직시켰고 그로 인해 독일 사회는 이처럼 불평등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독일의 노동조합은 일괄적 노사협약과 높은 최저임금의 전통을 고수했고, 동독과 서독의 균형발전을 위해 동독에서건 서독에서건 똑같은 노동에 똑같은 임금을 지급하도록 요구했지만, 그 결과 나타난 것은 대규모의 실업, 특히 동독지역에서의 대량실업이었다.

이제 독일의 금속노조는 더 많은 임금과 고용안정을 요구하려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누구의 불이익으로 돌아가겠는가? 독일의 노동조합이 요구한 해고제한과 임금인상안이 관철된다면, 신규고용은 계속 억제되어 독일 내에서 실업자의 수는 결과적으로 계속 더 늘어나게 된다. 만약 독일의 모든 현직 노동자가 이런 식으로 각자의 노동조합을 통하여 임금인상과 정리해고 반대를 주장하며 파업을 하고 자기들의 요구를 관철시킨다면, 앞으로 독일의 거의 모든 젊은 대학생들은 정말 몇십년 동안 아무런 직업을 갖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경영자들도 마찬가지다. 경영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간에 여전히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 그들 경영자들은 최소한 미국의 경영자들이 받는 만큼의 보수를 받으려고 하는데, 그들에게 그런 막대한 연봉을 주도록 허락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각기업별 노사경영협의회에 참가하는 노동자대표들이다. 경영자들과 그렇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협상을 벌이기 위해 노동자대표들은 사회전체의 비용으로 경영자의 연봉을 기꺼이 올려주는 것이다.

우스운 것은 그렇게 경영자의 연봉을 크게 올려준 노동자대표들 가운데에는 위에서 소개한 금속노조 위원장 Klaus Zwickel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9세기 이래로 이어져온 독일노동운동의 전통을 고수하며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맞서 파업의 유연화라는 기상천외한 대응책을 계발해낸 우리의 Klaus Zwickel... 과연 오늘날에 있어서 계급갈등이란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노동운동이란 오늘날 독일과 같은 환경에서 과연 진보적인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더 보수적이고 우파적인 것인가?

2002.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