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회는 장기판, 근대사회는 바둑판
2015-02-14 21:19:05
2015-02-14 21:19:05
어제 썼던 글 중의 일부:
"프랑스의 철학자 Gilles Deleuze(1925~ 1995)가 1980년에 쓴 책 ‘천의 고원 Mille Plateaux’에 보면 중세의 거래계는 장기판이고 근대의 거래계는 바둑판과 같다는 비유가 나온다. 실제로 장기판을 보면 모든 장기의 말들은 그 최초 위치부터가 고정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각자의 말들은 자기 신분에 맞는 본원적인 속성을 갖고 있으며, 이로부터 말들의 행동반경, 운동방향 등이 미리 결정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차(車), 포(砲), 졸(卒), 마(馬), 상(象) 등은 원래 타고난 정체성과 정해진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듯 움직이며, 궁(宮)의 사활은 게임 전체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등, 각각의 말들이 서로 다른 본질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말들이 각자의 법칙에만 따를 뿐이며, 왕(王)과 나머지 말들 사이의 위계가 확고하고, 그러한 정체성에 아무런 변화도 있을 수 없는 장기판은 마치 중세의 세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인간들 역시 신분과 계급, 그리고 직업에 따라 본성과 천분이 다 다르고, 죽을 때까지 그 태생적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둑알은 단순한 산술적 단위이며, 서로 차별화된 본질이나 정체성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고, 모든 바둑알들은 서로 평등하며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된다. 장기판이 상위의 황제권력을 보위하기 위해 각자 정체성이 고정된 계급들이 벌이는 신분차별과 역할제한의 게임공간인 반면, 바둑판에는 왕도, 귀족도, 평민도, 심지어 남녀의 성별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바둑알들은 어디든지 자기 마음대로 자리를 잡을 수가 있게 된다. 그저 각자의 포지션에 따라 때로는 허무하게 죽기도 하고 때로는 판을 끝내는 결정타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각자의 고정된 신분때문도 아니고, 각자의 타고난 능력때문도 아니다. 오로지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바둑알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얼마나 위치설정을 잘 하느냐에 따라서만 그 기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