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로서 보직을 맡는다는 것
2016-09-09 13:25:51

얼마 전 학교본부에서 나를 불렀다. 무슨 직책 하나를 내게 맡긴다고 하였다. 최근에 건강도 좀 나아지고 해서 건강이 나쁨을 핑계 댈 수도 없었고, 학교 집행부가 이번에 새롭게 출범하는 마당에 그간의 폐정(廢政)을 탓할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직책을 수락하고 말았다.

물론 학교본부 중앙에 들어가서 힘 쓰는 자리도 아니고 그냥 단과대학에서 살림하는 자리이다. 말 그대로 입사(入仕)라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 보직(補職)이고, 그릇된 언행과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害)를 줄 수 있는 자리이다. 고쳐 생각하니 옛날 유비(孺悲)가 공자를 불렀을 때, 그리고 제선왕(齊宣王)이 맹자를 불렀을 때, 두 분 다 병이 없으면서 병이 있다고 칭탁(稱託)하며 입사를 거절하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도 병이 있다 말했으면 이런 직책을 맡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문득 부끄러워졌다.

나의 스승님께서는 항상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또 남들에게 알리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냥 묵묵히 자기가 해야 할 공부에만 전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옛 스승님들은 모두 그러하셨다. 모양을 차림에 능란하지 않아 모양으로 인하여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셨고, 출세하는 데 교묘하지 않아 평생 연구실에만 머무르며 다른 곳에 나아가지 않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셨다.

공부하는 사람은 사무에 능할 필요도 없고, 백성들에게 명예나 칭찬을 얻을 필요도 없으며, 웃사람을 받들어 관등(官等)을 얻을 필요도 없다. 홀로 아무 일 없이 자기 공부방에 들어앉아 교육과 연구에만 힘쓰면 된다. 어쩔 수 없이 보직을 맡게 되면 물론 그 역할에 성실해야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거기에 헌신하여 학자로서의 본분을 잊고, 불필요한 명예나 권력이나 재물의 맛을 보지는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옛 스승님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었다.

오늘까지 임기가 겨우 9일 지났다. 앞으로 남은 임기 1년 11개월 20여일을 어찌 보낼까 하는 아득함이 벌써부터 느껴진다. 그래도 일단 맡은 일이니, 주어진 임무에 가급적 성실할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보직업무에 몰입하여 '배우는 자'로서의 내 본분을 잊지는 않도록 할 것이다. 어떻게든 임기가 끝나면, 그 즉시 일개 평범한 학자로 돌아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겸손하게 공부하며 지낼 생각이다.

나에게 가장 재미 있는 일은 역시 책 읽고 글 쓰는 일이다. 어린 학생들이 읽을만한 뭔가를 만드는 일이 내게는 가장 재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 이번 여름에도 '알기 쉽게 풀어 쓴 물권법'이란 초급 강의교재의 제2판을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맡은 보직 임기 동안은 책 만드는 일도 쉽지 않을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이 많이 되고 있다.










정구태
학장 취임을 경하드리며, 숙대 법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립니다!!^^
2016-09-13
22:01:21




1stwhitewhale
정구태님께/ 감사합니다. 조선대학교 법과대학의 발전도 함께 기원하겠습니다. :-)
2016-09-15
01: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