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요건에 대해서
2019-07-25 21:21:15

법률관계에 변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일정한 원인(causa)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게 일정한 권리ㆍ의무가 발생ㆍ변경ㆍ소멸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반드시 일정한 법적 원인이 일어나 있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법적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법률효과는 일어날 수 없다(Cessante causa cessat effectus). 이러한 관념은 스콜라철학의 인과관계 이론이 중세 법학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각주: 이에 관해서는 Söllner, Die causa im Kondiktionen- und Vertragsrecht des Mittelalters bei den Glossatoren, Kommentatoren und Kanonisten, in: SZ 77 (1960), S. 187 ff. 참조.) 법의 세계는 일종의 규범적 세계로서 반드시 먼저 일정한 합리적 정당화의 사유가 있어야 개념이 만들어져 실현되기 때문이다.(각주: Zitelmann, Irrtum und Rechtsgeschäft, 1879, S. 214 ff.) 만약 이러한 정당화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법개념은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누군가가 법적 원인 없이 법을 원용한다면, 이는 단순히 일시적인 존재, 외적인 우연, 비법률적 현상, 또는 거짓과 현혹이 표현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각주: 이에 관한 법철학적인 설명은 예를 들면,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1, S. 19.)

근대 이전에는 이러한 법률상 원인이 아무런 제약 없이 특정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급조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때 사람의 소박한 법감정에 따르면, 지금 당장 어딘가에서 형평에 어긋난 일이 발생했다면 이는 법으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 해결방법이 언제나 형식적 의미의 법률 또는 계약에 예정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각주: 이에 관해서는 Seitz, Biologie des geschichtlich positiven Rechtes im Kulturleben der Gegenwart, 1906, S. 373.)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불운 또는 이익충돌의 상황에서 그때그때 실질적 공평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뭔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인간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그때그때 법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강제로 적용하게끔 할 필요가 있었다.(각주: 예를 들어 계약이 이행되는 과정에서 어느 일방 당사자에게만 사고가 발생하였다면, 설령 상대방의 계약위반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 사고로 인한 손실을 쌍방이 분담하거나 더 부유한 상대방이 모두 전보하도록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관념이 그와 같았다. 또는 어느 계약의 결과 일방만이 그 계약이익을 전유하였다면, 아무리 그 전유에 관해 당사자 쌍방이 합의를 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이익을 쌍방이 골고루 나눠 갖도록 누군가가 나서서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관념이 그와 같았다. 또는 형식적 의미의 법률에 범죄로 규율된 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사회 구성원 다수에게 범죄로 받아들여질 만한 행위를 저지른 자가 있을 때, 누군가가 나서서 그를 감옥에 가둬야 한다는 관념도 그와 같았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법은 실제적, 구체적인 것이 되었으며, 과거처럼 무제약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정언명제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게 됐다.(각주: 이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 Carnier, Kurze Geschichte der Staats- und Rechtsphilosophie, 1856, S. 169.) 이제 법의 출발점은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로 바뀌었다. 법의 체계는 각 인간의 의지가 그 스스로에게서 발현시키는 자유의 체계로 개조되었다.(각주: 이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 Rossbach, Die Perioden der Rechtsphilosophie, 1842, S. 237.) 그 결과로 법은 일정한 제약적 틀에 생동하는 사안을 끼워 넣는 구조로 전환되었다. 법은 개인의 자유의지가 서로 충돌하고,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대상과 사례의 특별한 속성에 개인의 자유의지와 그 행위가 관계 맺는 과정에 적용되는 일반개념의 체계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법을 인간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국가는 사전에 일정한 권위와 절차에 따라 권리의 성립과 효력을 위한 요건을 형식적으로 정해야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근대화 이후의 법은 도덕과 달리, 형식적으로 고정된 틀에 사전 유보되어야 했다. 이로써 법은 권력의 전제와 독단에 영향받지 않게 되었으며, 예측가능성과 투명성, 그리고 확실성을 담보할 수 있게 되었다. (각주: 이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 Binder, Grundlegung zur Rechtsphilosophie, 1935, S. 134.)

이로 말미암아 법은 자유로운 인간 간에 맺어진, 하나의 거대한 약속 같은 게 돼버렸다.(각주: 이에 관해서는 Siegel, Das Versprechen als Verpflichtungsgrund im heutigen Recht, 1873, S. 52.) 누구든 약속으로 합의된 조건을 지키면 보상을 받고, 그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 약속은 개인 간의 사적인 계약으로 성립할 수도 있었고, 국민의 대표인 입법기관이 제정한 형식적 법률로 성립할 수도 있었다. 그러한 계약이나 법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의무를 부담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 누구도 법적 원인 없이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에 대해 청구권을 취득하거나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당사자 간의 계약이나 법률규정으로 정해진, 일정한 제약적 사안을 ‘법률요건’이라 부른다.




다음글
  2019/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