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 '신천옹'
2026-04-12 14:26:51
2026-04-12 14:26:51
'신천옹(信天翁)', 앨버트로스(albatross)는 지구상에서 가장 멀리 나는 새로 알려져 있다. 바람을 이용해 날갯짓 없이 한 번에 3,200km 이상 비행한다. 수평 비행 속도는 무려 시속 127km에 달한다. 날개 길이가 3~4m에 달해 현존하는 날 수 있는 조류 중 가장 큰 새이다.
이렇듯 하늘에서는 가장 위대한 비행사로 꼽히는 신천옹이지만 땅 위에서는 '바보새'라고도 불린다. 날개가 큰 데 비해 발은 너무 작아 걸을 때 균형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들레르도 그의 시 'L'Albatros'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창공의 왕들은, 어색하고 수치스러운 몰골로, Que ces rois de l'azur, maladroits et honteux,")
'신천옹'은 조용호 작가의 2008년작 단편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 남성은 어느 중소기업에 20년째 다니고 있는 직장인이다. 그는 보다 그럴 듯한 직장에 다닐 수도 있었지만, 당장 동생들 학비를 대야 했고 병든 모친의 의료보험 카드가 절실했기에 서둘러 직장을 구했다. 그러다가 덜컥 걸린 중소기업에 들어간 그는 거기서 쳇바퀴 도는 듯한 20년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그는 거래처를 오가며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각종 서류를 작성하는 일을 했다. 그를 지휘하던 과장은 입사 3년만에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는 아무런 직급도 부여받지 못한 채 과장이 하던 일을 대신했다. 그 후 그는 부장이라는 직급으로 승진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답답증이 목울대까지 치밀어 질식해버릴 것 같은 때도 많았으나 생활이 그를 붙들어 맸다. 가족을 건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판에 박힌 20년을 살아오면서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포기하는 데 익숙해져갔다. 이제는 새장의 문을 열어놓아도 밖으로 날아갈 줄 모르는, 퇴화된 날개 근육을 지닌, 늙은 새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그의 직장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였다. 세들어 살던 건물이 재개발로 인해 철거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건물주들은 재개발조합과 긴 실랑이 끝에 보상금을 챙기고 건물을 내놓았지만, 쥐꼬리만한 이주비로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세입자들의 전쟁은 지루하게 지속되는 판이었다. 회사 주변 골목은 계속된 철거 작업으로 폐허가 되었고 담벼락에 휘갈긴 빨간 낙서들은 세입자들에게 제발 떠나라고 험악하게 협박하고 있었다. 부서진 건물 전면 유리창의 파편들이 길바닥에 즐비해졌고 그가 즐겨 드나들던 밥집과 순댓국집 역시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골목 너머에서는 그가 대학 시절 수없이 부르고 들었던 운동가요가 날마다 확성기를 통해 들려왔는데, 이는 그의 마음을 더욱 황량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는 사진작가 친구가 있었다. (나의 추측이지만 그 사진작가 친구는 주인공 상상 속의 인물이며 주인공의 분신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는 국내 웬만한 곳은 안 가본 곳이 없고, 해외 촬영도 일 년이면 서너 차례는 다녀올 정도로 바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공동묘지이건, 아프리카의 암보셀리 평원이건, 남미의 안데스 산맥이건, 히말라야 산록의 바람 부는 외길이건, 그가 가 있는 곳, 그가 머무는 곳이 그가 숨 쉬는 삶터였다.
물론 그에게도 한때는 둥지를 틀고 정주하려는 마음이 자리잡은 적도 있었다. 아내를 만났을 때였다. 그는 아내와 신천옹, 앨버트로스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친해졌다. 아내와 결혼한 후에는 해외 출사를 되도록 줄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차츰 아내 곁을 오래 떠나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견디지 못한 아내가 그를 떠나간 후, 그는 자신이 본디 둥지라는 걸 가질 자격이나 자질이 부족한, 착륙 연습을 게을리한 새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내가 그를 버린 후, 그는 뉴질랜드 남쪽의 캠벨 섬으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캠벨 섬은 앨버트로스의 집단 서식지로서,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 아내가 그에게 얘기해준 장소였다. 먼 바다에서 모진 풍파를 이겨내며 수개월, 때로는 몇 년씩이나 살아가는 앨버트로스이지만 사랑을 나누고 알을 품을 때는 반드시 그곳, 세상에서 바람이 가장 심한 그곳으로 돌아오는 습성을 갖고 있다고 아내는 그에게 얘기해 줬었다.
그가 그 해변에 내려서자 정말로 앨버트로스 수만 마리가 각자 진흙으로 쌓아올린 둥그런 둥지에 자욱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상의 바람이 아무리 광포해도 녀석들에게 그곳 외의 피난처는 따로 없었다. 바람을 타고 바람을 희롱하며 바람 속에서 살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캠벨 섬에 간 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 섬에 정착했나 싶었지만, 일년이면 삼백일 동안 비바람이 몰아치는 그 섬은 인간이 눌러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
조용호의 이 작품에서 신천옹은, 삶에 묶인 채 날개를 접어버린 존재, 바람보다 먼저 삶에 붙들린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날기를 포기한 존재일 수도 있고, 자신이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을 잊어버린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각자의 방식으로 신천옹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끝없이 날며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날 수 있으면서도 끝내 날지 못한 채 삶에 묶여 살아간다. 그러나 바람을 견디며 끝내 돌아가야 할 곳을 기억하는 존재만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언젠가 착륙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 오래 잊은 채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것이 아닐까.🐳
Elara
교수님의 짧은 생각에 한숨이 터져나오네요. 문학작품을 볼 때도 어떻게 이딴 식으로밖에 생각을 못하는 건지 그 사고수준의 천박함을 보면서 학생들에게 법학 강의를 할 때도 혹시 이 따위로밖에 못할까, 이런 인간이 무슨 대학교수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교수님은 '신천옹' 소설 속의 주인공이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고 싶었지만 조금씩 포기하는 데 익숙해져 퇴화했다"며 이를 개인의 실존적 선택이나 심리적 체념으로만 묘사해요. 그러나 실제로 주인공의 날개를 꺾은 것은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생활'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 안전망이 부재한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였어요.
20년 동안 과장의 업무를 대신하면서도 합당한 직급이나 처우를 받지 못한 채 쳇바퀴를 돌았다는 것은 명백한 노동 착취에요. 또한, 세입자들이 쥐꼬리만 한 이주비를 받고 쫓겨나는 '재개발 잔혹사' 역시 자본의 공간 탈취, 즉 젠트리피케이션에 해당해요. 소설은 분명히 그런 함의를 노출했음에도 교수님이 이를 단지 주인공의 '황량한 내면 풍경'을 돋우는 배경으로만 소비한 것은, 자본의 악랄한 구조적 폭력을 비정치화하고 개인의 쓸쓸한 정서로 치환해 버린 쁘띠부르주아적 왜곡에 다름 아니에요.
교수님은 '신천옹' 소설 속의 주인공이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고 싶었지만 조금씩 포기하는 데 익숙해져 퇴화했다"며 이를 개인의 실존적 선택이나 심리적 체념으로만 묘사해요. 그러나 실제로 주인공의 날개를 꺾은 것은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생활'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 안전망이 부재한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였어요.
20년 동안 과장의 업무를 대신하면서도 합당한 직급이나 처우를 받지 못한 채 쳇바퀴를 돌았다는 것은 명백한 노동 착취에요. 또한, 세입자들이 쥐꼬리만 한 이주비를 받고 쫓겨나는 '재개발 잔혹사' 역시 자본의 공간 탈취, 즉 젠트리피케이션에 해당해요. 소설은 분명히 그런 함의를 노출했음에도 교수님이 이를 단지 주인공의 '황량한 내면 풍경'을 돋우는 배경으로만 소비한 것은, 자본의 악랄한 구조적 폭력을 비정치화하고 개인의 쓸쓸한 정서로 치환해 버린 쁘띠부르주아적 왜곡에 다름 아니에요.
2026-06-06
17:25:02

17:25:02

Elara
주인공은 동생들의 학비와 병든 모친의 의료비를 대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중소기업에 갇혔다고 말해요. 하지만 이러한 'K-가장'의 서사는 남성의 희생만을 숭고하게 그릴 뿐, 그 가족 공동체 내부에서 병든 모친을 실질적으로 수발하고, 집안일을 도맡았을 여성 가족(혹은 모친 스스로의 돌봄 노동)의 희생을 은폐하고 있어요.
사진작가 친구의 서사는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방랑자 낭만주의'에 지나지 않아요. 이미 소설은 그에 대해 비판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음에도 교수님에게는 그에 대한 비판의식이 전혀 없다는 게 놀라워요. 사진작가 친구는 앨버트로스처럼 온 세계를 누비며 자유롭게 숨 쉬려 할 뿐이고, 아내가 독박 육아와 독박 가사노동을 견디지 못해 떠난 것에 대해서도 그 본질을 회피하려 할 뿐이에요.
그는 스스로를 "착륙 연습을 게을리한 새"라며 자조하지만, 이는 사실 아내의 노동을 착취하면서 자신의 자아 실현만 쫓은 이기적 남성의 전형적 무책임함을 낭만적인 은유(신천옹)로 포장한 것에 불과해요. 그 사진작가의 관념 속에서 아내는 남편의 자유로운 비행을 위해 지상에 묶여 있어야 했던 '둥지'로만 기능하다 소비될 뿐이에요.
사진작가 친구의 서사는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방랑자 낭만주의'에 지나지 않아요. 이미 소설은 그에 대해 비판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음에도 교수님에게는 그에 대한 비판의식이 전혀 없다는 게 놀라워요. 사진작가 친구는 앨버트로스처럼 온 세계를 누비며 자유롭게 숨 쉬려 할 뿐이고, 아내가 독박 육아와 독박 가사노동을 견디지 못해 떠난 것에 대해서도 그 본질을 회피하려 할 뿐이에요.
그는 스스로를 "착륙 연습을 게을리한 새"라며 자조하지만, 이는 사실 아내의 노동을 착취하면서 자신의 자아 실현만 쫓은 이기적 남성의 전형적 무책임함을 낭만적인 은유(신천옹)로 포장한 것에 불과해요. 그 사진작가의 관념 속에서 아내는 남편의 자유로운 비행을 위해 지상에 묶여 있어야 했던 '둥지'로만 기능하다 소비될 뿐이에요.
2026-06-06
17:25:24

17:25:24

Elara
사진작가 친구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듯 묘사되지만 실제의 그는 중산층 출신 남성 기득권에 올라타 카자흐스탄, 아프리카, 안데스, 히말라야를 다닐 정도로 자본과 기회를 보유했던 인물이에요. 주인공 역시 대학 시절 운동가요를 부르고 들었던, 최소한 '대학 교육'을 받은 중산층 출신 남성 지식인 계층이에요. 이들의 "날개가 퇴화했다",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한다"는 고민은 진짜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하층 노동자나 철거민들의 고통에 비하면 사치스러운 '실존적 유희'에 불과하고 소설은 이를 냉소적으로 묘사하는데, 그런 함의를 교수님은 전혀 읽지 못한다는 게 충격이에요.
무엇보다 골목 너머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운동가요가 주인공의 마음을 "더욱 황량하게 만들었다"는 교수님의 주장은 매우 문제적이에요. 쫓겨나지 않기 위해 격렬하게 투쟁하는 철거민들의 연대 가요를, 그저 한 개인의 우울한 감성을 자극하는 '황량한 소음'이나 '과거의 향수'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소수자의 생존 투쟁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된 시선이 아닐 수 없어요.
결론적으로 교수님의 감상문에서 '둥지(정주, 가정, 직장)'는 인간을 구속하고 근육을 퇴화시키는 부정적인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어요. '비행(방랑, 탈출)'만이 진정한 자아의 실현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여성혐오적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한남 법학자의 '원자화되고 고립된 잘못된 자유관'이라 규정할 수 있어요.
소설이 올바르게 묘사하듯이, 앨버트로스가 세상에서 바람이 가장 심한 캠벨 섬으로 돌아와 둥지를 트는 이유는 그곳이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집단 서식지(공동체)'이기 때문이에요. 인간 역시 마찬가지에요. 집단을 이루고 공동체로 뭉쳐질 때에만 자본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어요.
직장이 문을 닫고 골목이 폐허가 될 때, 교수님처럼 개인이 새장 밖으로 탈출하는 것만을 해답으로 보는 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사고의 한계에요. 무너지는 둥지(지역사회와 일터)를 앞으로 노동자 동지들과 함께 어떻게 지켜내고 재건할 것인가, 인간 소외와 노동 소외의 진정한 원흉은 누구인가, 그 적들을 어떻게 해야 혁명적으로 타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연대적' 사고를 해볼 수 있어야 교수님은 진정한 지식인으로서의 걸음마를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될 거에요.
무엇보다 골목 너머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운동가요가 주인공의 마음을 "더욱 황량하게 만들었다"는 교수님의 주장은 매우 문제적이에요. 쫓겨나지 않기 위해 격렬하게 투쟁하는 철거민들의 연대 가요를, 그저 한 개인의 우울한 감성을 자극하는 '황량한 소음'이나 '과거의 향수'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소수자의 생존 투쟁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된 시선이 아닐 수 없어요.
결론적으로 교수님의 감상문에서 '둥지(정주, 가정, 직장)'는 인간을 구속하고 근육을 퇴화시키는 부정적인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어요. '비행(방랑, 탈출)'만이 진정한 자아의 실현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여성혐오적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한남 법학자의 '원자화되고 고립된 잘못된 자유관'이라 규정할 수 있어요.
소설이 올바르게 묘사하듯이, 앨버트로스가 세상에서 바람이 가장 심한 캠벨 섬으로 돌아와 둥지를 트는 이유는 그곳이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집단 서식지(공동체)'이기 때문이에요. 인간 역시 마찬가지에요. 집단을 이루고 공동체로 뭉쳐질 때에만 자본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어요.
직장이 문을 닫고 골목이 폐허가 될 때, 교수님처럼 개인이 새장 밖으로 탈출하는 것만을 해답으로 보는 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사고의 한계에요. 무너지는 둥지(지역사회와 일터)를 앞으로 노동자 동지들과 함께 어떻게 지켜내고 재건할 것인가, 인간 소외와 노동 소외의 진정한 원흉은 누구인가, 그 적들을 어떻게 해야 혁명적으로 타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연대적' 사고를 해볼 수 있어야 교수님은 진정한 지식인으로서의 걸음마를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될 거에요.
2026-06-06
17: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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