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8-27 14:16:42
물론 교수의 자리라는 것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이긴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리 추천할 만한 직업은 못 되는 게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 받고 공부할 수 있다'는 특권 이외에는 매일 육체노가다 중에서도 상노가다인 강의노동이란 걸 죽어라고 해야 하고,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며, 요즘은 초등학교 애들을 가르치는 것도 솔직히 '내가 애들을 가르칠 자격이 되나'하는 양심의 가책때문에 살얼음을 밟는 기분일 판인데, 애들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인 대학생들을, 그것도 학점까지 매겨가며 가르친다는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고 구역질 나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미 나이가 마흔여섯살이 되어 남들 같으면 '에이~ 피곤한데 빨리 은퇴해서 꽃밭이나 가꾸고 자연이나 벗하며 살았으면...'하고 소망해야 할 처지인 Hegel이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라는 땡보직 중에서도 땡보직을 집어던지고 그 힘들고 부담스러운 대학교수 직업을 자청한 것은 정말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학문적 야심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학문적 난제에 대한 독창적 해결책을 제시해 세계적으로 진리탐구의 물줄기 자체를 확 바꿔버리는 학자로서의 대성취는 꼭 교수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이뤄낼 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좀 기괴하게 들릴 얘기일지는 모르겠지만, Hegel생전의 Descartes, Spinoza, Hobbes, Berkley, Hume, Rousseau, Voltaire나, Hegel 사후의 Marx, Engels, Sartre, Benjamin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세계의 유명한 철학자들 대부분은 교수자리 같은 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그냥 자기 혼자 글이나 쓰면서 자유기고가로 활동한 사람들이 다수였다 (심지어는 박사학위조차도 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똑똑하던 Kant도 교수자리에 오른 이후에는 그 직위가 주는 무게에 짓눌려 약 12년간을 버벅댄 적도 있었을 정도로, 교수자리란 것은 학문활동에 방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 자리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egel이 교수의 자리에 오르기를 그렇게 희망했으며 교수자리에 오르고 나서 자신의 저술활동을 중단하긴커녕 오히려 더욱 활발하게 진척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Hegel이 천성적으로 교수체질의 인간이어서 꼭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어야만 컨디션이 더 살아나는 그런 스타일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까지도 자아내게 한다. 아 왜 대학원 같은 데 다닐 때 보면 가끔씩 그런 애들 보이지 않는가?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20대 중반 석사과정시절부터 목에다 깁스하고 후배들 구름처럼 몰고 다니며 교수처럼 겉늙은 표정으로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아주 의젓하게 폼잡고 다니는 애들...
그러한 Hegel이 드디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인 대학교수 자리에 앉았으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기분이 잔뜩 Up되었을 것임은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Hegel이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교수직함을 내걸고 출판했던 책 역시도 "XXX에 관한 일고찰" 같은 소박한 책이 아니라 초짜교수답지 않게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철학백과사전)"이었으니,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 변증법적 논리 하나만 가지고서도 이 세상 모든 지식과 모든 학문의 원리를 다 포괄해낼 수 있으며, 자신은 그런 방대한 책을 자기 혼자 힘만으로도 써낼 수 있다는 그 특유의 자신감을 표출한 셈이었다.
물론 이 책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의 제1부는 그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던 '논리학(Die Wissenschaft der Logik)'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 부분은 그의 전작이었던 '논리학'을 짧게 압축해서 써놓은 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소논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독일에서는 이를 "Kleine Logik"이라고 부름),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뭐든 크고 자세하게 써놓은 게 더 좋은 책, 무게 있는 책인 양 믿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에 (예를 들면 Brox교수의 민법책은 잡서이고, Larenz교수의 민법책은 대작이라고 믿는 식) 어떤 분들께서는 Hegel의 "소논리학"보다 Hegel의 "대논리학"을 먼저 읽어치우시고서 그로써 자신은 Hegel논리학을 다 깨우쳤다고 믿으시는 경우도 왕왕 발견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설령 "대논리학"을 이미 완전히 독파하셨다 하더라도 "소논리학"을 다시 읽어서 Hegel이 교수직에 취임한 이후에 어떤 식으로 자기 철학을 더 다듬어나갔는가를 살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이왕이면 "소논리학"을 "대논리학"보다 더 먼저 입문서로 읽으시거나 아니면 "소논리학"과 "대논리학"을 병행해서 읽으시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 생각엔 "소논리학"이 "대논리학"보다 더 후기작인 만큼 더 Hegel철학의 체계에 정합한 것도 같고, 문장도 "소논리학"이 "대논리학"보다 나같은 문외한이 이해하기에는 더 쉽고 깔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소논리학"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님 -_-;;).
하여튼 이렇게 제1부에서 "논리학"을 다룬 Hegel은 제2부에서 자기에겐 약간 낯선 분야인 "자연철학(Die Naturphilosophie)"을 본격적으로 다루어나가게 된다. 이 "자연철학"의 내용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제2부의 제1과에서는 역학(Die Mechanik)을, 제2과에서는 물리학(Die Physik)을, 제3과에서는 "유기물리학(Organische Physik)", 다시 말해 생물학을 다루고 있으니, 이런 걸 보시면서 많은 분들께서는 "와~, 철학자가 물리학, 생물학까지 쌈빡하게 다 알고 그에 관해 체계까지 만들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하고 감탄을 하실런지도 모를 일이겠다.
하지만 막상 제2부 "자연철학"의 부분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나면 많은 Hegel숭배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정신현상학"이나 "논리학" 등을 읽었을 때 Hegel에 대해 품게 되었던 숱한 환상들이 조금씩 부서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적어도 Hegel이 순수한 관념의 세계에서만 노닐 때에는 Hegel의 말이 그래도 좀 그럴 듯하게 느껴졌었는데, 이제 Hegel이 자연과 물질세계을 다루면서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자연현상들에 대해 그야말로 자기식대로 어처구니 없는 관념론적 설명들을 늘어놓는 데에는 '어라? 그... 그건 아니쥐~'하는 느낌을 일반인으로서 조금씩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Hegel은 Sex에 대해서도 하나의 Gattung(種)이 각 개체들 상호간의 부정적인 관계가 아닌 긍정적인 관계를 통하여 즉자대자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기 위해 일부러 두개의 성으로 나뉘어져서 각자의 삶에 결핍과 불편을 느끼는 상황에 처하고, 그 결핍과 불편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기와 다른 성에 대해 긴장 내지 열망을 갖게 되어, 그 긴장과 열망에 의해 서로에게 구애하고 서로의 성기를 통합(?)하여 변증법적으로 운동(?)함으로써 자기들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하는데, 이런 설명에 솔직히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면 Hegel에 대해 정말이지 단단히 미칠 각오를 해야겠다는 생각까지도 내게는 든다. Sex가 진화를 위한 것이라면 죽음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기본적인 의문은 그만두더라도, 일반적으로 생물학자들은 Sex가 유전적 다양성을 촉진할 수는 있어도 꼭 진화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예를 들면 진돗개랑 변견이랑 Sex해봐라. 뭔 진화가 일어나겠냐?), 진화의 조건은 오히려 Sex보다 부모의 유전자 가운데 우성적인 유전자의 성질만 발현되도록 하는 어떤 기전 같은 것에 더 달려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제2부 "자연철학"의 다음에 이어지는 제3부는 무엇이냐 하면 바로 "정신철학(Die Philosophie des Geistes)"이다. Hegel은 이 부분에서 주관적 정신학에 인류학, 정신현상학, 심리학을 잡아넣고, 객관적 정신학에 법학, 윤리학을 분류해넣었으며, 절대적 정신학에는 미학, 신학, 철학을 집어넣어, 철학을 '만학의 왕'으로 옹립해 놓았는데, 물론 그 분류의 타당성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긴 하지만, 비단 내 전공분야인 법학에 관한 설명들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에 관한 설명들을 읽어보더라도 이건 정말이지 황당한 망발들이 종횡무진으로 튀어나오는데는 전신을 뒤흔드는 듯한 웃음을 금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된다. 만약 나같은 민법학자가 갑자기 이 세상에 여태 없던 대백과사전을 나 혼자 집필하여 순전히 민법학자적인 시점으로 다른 모든 학문분야들을 난도질해놓고 오직 내 전공인 민법학만이 최고의 학문인 것처럼 마지막에 결론지어버린다면, 다른 학자들이 그것을 보고 느끼게 될 황당함이 대충 이와 비슷한 것일 수 있을려나?
하지만 이런 각론분야의 어처구니 없음을 제껴놓을 수만 있다면, "철학백과사전" 역시도 그렇게 만만한 책이라고는 단정지을 수가 없다 할 것이다. 특히 "철학백과사전"의 도입(Einleitung)부분은 Hegel철학의 엑기스가 녹아들어가 있는 주옥같은 명편이라고도 일컬을 수가 있는데, 이 도입부분에서 Hegel은 특히 현실적인 것(das Wirkliche)이 이성적인 것(das Vernünftige)이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그 유명한 화두를 던져서, 한국독자들로 하여금 이게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같은 말이 아닐까 하는 의문상태를 유발시키고도 있다:
"Was vernünftig ist, das ist wirklich, und was wirklich ist, das ist vernünftig."
사실 이 문장은 얼핏 읽기에는 굉장히 심오하게 읽히는 부분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불교의 열반과도 같은, 어떤 해탈과 초월의 경지를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이 세상 만물을 모두 생긴 그대로 '냅두라'는 말로도 들릴 수 있는 것이며, 장자(莊子)도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려 하지 마라(鶴脛雖長 斷之則悲)"고 일갈했듯이, 따지고 보면 Hegel의 이 말도 말되는 소리 아니겠냐는 생각을 가져볼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Hegel의 이 문장은 불교의 열반이나 노장의 '도(道)' 같은 개념과는 아주 거리가 먼, 다시 말해 현실초월적인 소리라기 보다 현실추종적인 주장임을 금방 깨닫을 수 있게 된다. 왜? Hegel은 이 세상 현실이란 것을 자연이 아니라 이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Hegel은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현실의 본질을 왜곡했거나 백번 양보해도 현실에 관해 반쪽의 진실만을 담고 있는 주장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이란 것은 이성적이긴커녕 오히려 굉장히 일그러진 것이고 현혹과 혼돈으로 가득찬 것이며, 주체의 의지나 이성과는 상관없이 철저히 불합리한 편견이나 이기적인 본능이나 우연적인 사건들에 따라 휘둘리는, 지극히 못 미더운 것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하필이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낮이나 밤이나 전쟁의 공포 속에 시달려야 하고, 죽으나 사나 그들 큰 나라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이 현실은 이성적인 것인가, 아니면 비이성적인 것인가?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학벌, 가정환경이 좋지 않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힘이 없으면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앉은뱅이처럼 참아야 하는 이 사회의 현실은 과연 이성적인 것인가, 아니면 비이성적인 것인가?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를 가장 뿌리 깊게 지배하고 있는 지역주의의 현실은 과연 이성적인 것인가, 비이성적인 것인가? 아직도 동성동본의 결혼을 금하고 있거나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금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법적 현실은 과연 이성적인 것인가, 아니면 비이성적인 것인가? 부잣집에 태어난 누구는 자택이나 사무실에 편안히 앉아 레스토랑에서 와인 마시고 룸살롱에서 양주 마셔가며 태평하고 우아하게 살아도 수억원의 돈을 매달 손쉽게 버는 반면에,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누구는 시장통에서 공사판에서 뼈빠지게 일해도 백만원 남짓의 월수입에 만족하면서 매일 콩나물값 몇백원에 악다구니를 벌여야 하고, 카드빚 몇백만원에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가압류를 해제하라며 제 온몸에 불을 지르고 분신해야 하는 이 현실은 과연 이성적인 것인가, 비이성적인 것인가?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해 Hegel이 아주 천연덕스럽게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정당한 것"이라는 식의 보수주의적 사고를 옹호한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를 들면 학벌 낮은 사람이 우리 사회 속에서 차별받는 현실은 학력고사라는 평등한 경쟁의 장에서 그들이 변명의 여지 없이 패배, 낙오했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여성이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것은 여성이 천성적으로 남성보다 속좁고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숙명으로 알고 참아야 되는 것이며, 1980년 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이 학살당한 것도 그들 전라도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소수자에 불과한 자기 주제를 망각하고 지들 갯땅쇠들 가운데서 대통령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감히 시건방을 떨었기 때문에 꼴좋게 학살당한 것이라는 보수주의자, 수구주의자들의 논리나 Hegel의 논리가 다른 게 대체 뭐가 있겠는가?
노동자들이 지지리도 못사는 것은 그들이 어리석고 게으르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차별받는 것도 그들 복이 그것밖에 안되는 것이니 할 수 없는 것이며, 어느날 갑자기 황당한 오해를 받아 집단몰매를 맞고 죽은 사람이나 어느날 밤 갑자기 동네깡패들에게 집단강간당해 피투성이로 죽어간 여대생 역시도 어딘가 하여튼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맞아죽었거나 그녀의 평소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윤간당하고 죽은 것이라는 등등의, '나 몰라라'하는 식의 무책임한 사고. 이러한 "아니땐 굴뚝에 연기 나랴" "그냥 그러려니~"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감수해" 같은 현실추수적, 기회주의적 사고를 Hegel이 철학적으로 고상하게 정당화했다면, 그러한 나의 주장은 너무 지나친 것인가?
거꾸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라는 Hegel의 주장 역시도 내게는 완전히 비겁한 발언으로 들리기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래 이성이란 것은 굉장히 골치 아프고 까다롭고 엄격한 것으로서 그 작용을 위해 많은 정신력과 자기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이성적으로 행동한 사람이 현실적으로 자기가 의도하고 계산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을 할 수 없고,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부르기 십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중기의 혁신적 유학자이며 도학사상가였던 조광조가 당시의 수구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 등 강력한 개혁정책을 목숨 걸고 추진했던 것은 후세사가들도 인정하듯이 당시 조선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점들에 비추어 이성적으로 지극히 올바른 행동이었다. 만약 본능과 쾌락을 쫓았다면 무시무시한 훈구세력들과 적당적당히 타협하고 녹봉이나 받아먹으면서 오래오래 지 목숨 보전하고 사는 것이 상책이었겠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옳은 게 옳은 것이라고 누군가 외쳐야 할 사람은 당시에 분명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이었느냐 하면 조광조의 지나치게 곧고 바르기만 한 직언에 대한 중종임금의 염증, 그리고 이를 눈치 챈 훈구세력들의 중상모략과 중간세력들의 수수방관, 그리고 그로 인한 조광조와 그 추종자들, 그리고 그들 삼족(三族)의 몰살이었고, 이로써 조광조는 대의명분과 논리, 원칙에서는 승리했을지언정 현실정치에서는 개혁을 추진하지 않은 것만 못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말게 되었다. 이성적으로는 조광조 그가 철저히 옳았을지 몰라도 그 방법론적 측면에서 자기 주위 사람들의 감정적 환심을 얻거나 중상모략에 똑같이 악의적 비방으로 맞받아치는 등의 선동적 술수를 부리는 데는 그가 실패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오늘날의 국내정치에서 이성적이란 것은 재벌 및 지역주의세력의 정치개입을 배제하는 것이고, 오늘날의 국제외교에서 이성적이라는 것은 미국의 전횡을 막고 독재테러국가들을 민주화시키며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런 식의 올곧은 이성에만 순진하게 의지했다가는 현실적으로 어떤 결과를 감수하게 될지 그것은 정말 생각하기에도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같은 정치환경에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지 않고 지역감정에도 타협하지 않으며 꼿꼿하고 원리원칙에 입각한 정치만을 추구한다고 할 경우 총선에서건 대선에서건 그 정치인의 선거운동은 심각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는 영원한 정치적 패배로 이어져 본의 아니게 자기보다 더 수구적인 정치인들의 승리를 방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원래 이 땅의 유권자들은 자기지역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자기에게 설렁탕 한 그릇이라도 사준 후보에게 표를 던지려는 성향을 갖고 있으며, 이런 현실 속에서 원리원칙만 따지다가는 '독불장군에게 미래는 없다'거나 '도덕적 결벽주의자가 뭔 정치를 해?' 소리나 듣기 딱 알맞기 때문이다 (노무현? 노무현도 정치비자금문제에선 자유롭지 않다는 게 내 판단이다. 작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돈 쓴 게 얼만데~).
또한 국제외교에서도 부도덕한 모든 전쟁을 반대하려고만 들다가는 강대국에게 완전히 찍혀 한마디로 개피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올해초에 벌어진 이라크전을 생각해보자.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전쟁은 전근대적인 혼란과 어두움, 무지와 본능에 계몽과 이성의 빛을 비추기 위한 의로운 전쟁이 아니라 앵글로색슨족들의 깡패적 패권주의를 관철해내기 위한 벌거벗은 야망의 전쟁에 다름 아니었다. 그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그 어떤 명분도 사유도 이성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정권이 그 전쟁에 파병을 거부할 수 있었는가? 그 전쟁에 파병을 거부했다가는 당장에 국가의 신용등급이 곤두박질치고 수출이 급감하는 등의 경제적 희생과 미국의 영변핵시설 폭격 등 감정적 보복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평화와 정의를 위해서 노무현이 파병을 거부하고 부시정권에게 이성적으로 설득을 시도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당시 상황이 부시에게 누가 이성적으로 설득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될 상황이었는가?
물론 Hegel에게 있어서 '현실적인 것'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현실적인 것'과 의미가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현실'이란 곧 경험적 현실을 말하는데, 이미 Hegel은 경험론자들에게 있어서 사실로 보이는 것이 결코 이성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비이성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했던 바가 있기 때문이다.
Hegel의 주장에 따르면 경험론자들은 산만하게 흩어진 부분적 사건들만 현실로 볼 수 있을 뿐 전체로서의 현실을 인식하지는 못하는 자들이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흔히 이 세계의 현실이 약육강식의 원리, 힘의 원리를 표현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Hegel이 보기에 이는 지극히 일면적인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 현실 속에는 건설판 막노동꾼의 아들로 태어나서도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판검사로 출세하는 입지전적 인물들도 존재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차별받는 것 같아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쌀밥에 고깃국에 초고속 인터넷도 즐기면서 부자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아니면 부자들보다도 오히려 더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현실도 볼 수가 있게 된다. 그런 긍정적인 측면 역시도 우리는 함께 들여다봐야 하고, 감정적이거나 권모술수적인 측면도 인간과 역사의 발전단계에 있어서 다 나름대로는 존재의 의의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다 함께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Hegel의 입장인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은 그렇게 단정적으로 불공평하다거나 비이성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어떻게 보면 비이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현실들도 변증법적 논리에 따라 그 전체를 포괄해서 사유해나가다 보면 다 나름대로의 맥락과 이유들을 갖고 있는 것이 되어 종국에는 현실의 이성적인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현실은 Hegel이 볼 때 어떤 절대정신의 뜻에 따라 아주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계획과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움직여지는 것이고, Hegel의 이성 역시도 Kant식의 쪼잔하고 도덕적이며 결벽적인 이성이 아니라 이 세상 온갖 꾸정물도 다 집어삼킬 만큼 통이 크고 능글맞고 음흉한 이성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현실과 이성의 전체구조를 변증법적으로 모두 다 파악할 수 있기까지 우리는 쉽게 어떤 단정을 짓지도 말고 실천도 하지 말아야 하며 그저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요, 이성적인 것은 모두 다 현실적인 것이로다~"하는 알쏭달쏭한 말이나 중얼거리면서 오로지 자기 머리 속에서 이 세계를 전체로서 해석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기울여야 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Hegel은 이성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이성은 모든 실재성일 수 있는 확신성이다(Die Vernunft ist die Gewissheit, alle Realität zu sein)."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인간은 변증법을 통해 이성으로 모든 실재를 확신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그러므로 이성은 당연히 현실과 동의어가 되고 현실은 이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의미이다.
물론 모든 실재성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현실성의 전체에 참가해야 할 것이므로, 개인이 보다 더 높은 단계의 이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더 많은 현실성의 전체에 참가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자면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는 하청업체의 시다바리 노동자는 현실성의 전체에 참가하는 폭이 적으므로, 현대그룹 모두를 총괄하며 현대그룹 전체의 현실을 한 눈에 보고 있는 정주영 같은 오너, 기업주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시다바리 노동자야 알미늄휠이나 라디에타나 에어휠타나 라이너, 머플러, 피스톤 같은 거 만드는 것밖에 아무것도 모르지만, 정주영은 그 알미늄휠이나 라이너나 머플러나 피스톤이 자동차의 어느 부분 속에 들어가고 그것이 어떤 모습의 자동차로 만들어지며, 그것이 시장에 어떻게 판매되어, 현대라는 전체기업이 어떤 방향으로 이윤창출을 하게 될지 그 전체상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체제를 예로 들어본다면 두만강변 어느 수력발전소에서 수압관로나 만지고 있는 노동자보다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정일이 더 이성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김정일은 그깟 수력발전소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민군 용사들도 보고, 협동농장도 보고, 대륙간탄도탄도 보고, 능라도경기장도 보고 모든 것을 다 보기 때문이다. 수력발전소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북한내 모든 노동자, 군인들이 다 그렇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김정일의 총체적 이성과 총체적 주체성을 따라갈 수는 없게 돼있기 때문에, 김정일이 살아 있는 한 지도자동지 김정일보다 더 이성적인 자가 북한에서 나올 수는 없게 돼있다. 따라서 김정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늙어죽을 때까지 '영명하시며 자애로우시며 인민을 사랑하시는 주체깃발, 광명성, 위대한 지도자동지'역할을 계속할 수밖에 없고, 정주영이건 김정일이건 그 밑의 노동자, 인민들보다 잘 먹고 잘 살며 기쁨조 여자들과 놀아날 수도 있는 이 현실은 불공평한 게 아니라 지극히 이성적인 현실이라고 봐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건 전대협이나 한총련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이다. 백만애국학도의 자주대오, 불패의 구국강철대오 전대협이나 한총련에 소속된 모든 학우들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다 똑같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전체를 바라보는 정도에 따라 현실적으로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다시 말해 이 사회의 변혁을 꿈꾼다 하더라도 변증법적 논리에 따라 이 사회의 총체성을 파악하는 의식수준은 그 강철대오 내의 계급, 활동경력, 통큰(?) 정도에 따라 층층이 나뉘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 인자들의 의식수준은 결국 이 사회현실, 학생운동의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의 폭과 더 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너그러운 품성, 다채롭고 포괄적인 경력 등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으므로, 밑바닥에서 찌라시나 만들고 팜플렛이나 돌리고 전경방패에 찍히기나 하는 꼬바리, 하빠리 투사들은 그들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과학생회장보다 낮은 단계의 의식수준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과학생회장은 그를 통솔하는 단과대 학생회장보다, 단과대 학생회장은 그를 총괄하는 총학생회장보다, 총학생회장은 그를 통할하는 서총련의장보다 변증법적으로 더 낮은 단계의 의식수준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의식수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전대협 의장 내지 한총련 의장은 자연스럽게 "민족을 불패의 영광으로 이끄는 향도성이시며 조국통일의 구성이시며 남조선학생운동사에 다시 없을 성스러운 반미민족주의투쟁을 이끄시는 위대한 장군님"으로서 백만구국학우들 모두로부터 민족영웅으로 옹립되고 추앙받아야 할 필요성과 필연성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에 거역하는 무리들은 분열주의자, 종파분자, 미제의 끄나풀들로서 남한사회의 변증법적인 통합에 장애가 되는 인물들이며, 한번 높은 의식단계에 오른 사람은 거의 모든 현실적 행동들이 다 이성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으므로 역대 의장들은 계속해서 한총련내 상임집행위원회 등을 통해서 후배들의 활동방향을 조종하고 운동권내 중심으로서 영원무궁토록 활약을 할 수가 있게 된다. 그들은 한때나마 학생운동의 '전체'를 인식하고 장악했던 사람들로서 그들의 영용함과 자애로움과 통큼(?)은 다른 하빠리 전사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Hegel이 말했던 현실성의 전체라는 것은 이렇게 물질적이고 속세적인 개념이 아닐 수도 있다. Hegel이 말한 현실은 오히려 굉장히 관념적인 것이라고 봐야 하며, Hegel에게 있어서 이념은 곧 정신, 영성이고 이 세계에서 근원적인 본질은 물질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영혼, 영성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의 참여나 변혁운동에의 참여보다는 모순적 현실을 관조적으로 꾸준히 종합하고 통일해나감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전체에 맞는 의식으로 계속 고양시켜나갈 때에 개인은 절대적 인식을 얻게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영혼, 영성에게 있어서 그 대상이라 함은 물질세계가 아니라 곧 영혼, 영성 그 자체일 뿐이고, 이러한 영성은 그 영성 자체의 불완전한 점, 모순된 점 등을 스스로 극복, 갱신해나가는 과정에서 현실적이고 절대적인 것, 그리고 전체적인 것으로 발전, 진화하는 존재가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은 이로써 절대적이고 전체적인 진리, 스스로 사고하는 이념이 된다(Diese Einheit ist hiermit die absolute und alle Wahrheit, die sich selbst denkende Idee)."
사실 이러한 Hegel의 인식은 거의 종교적, 신비적 인식과 흡사하면서도 뭔가 이신(理神)적인 느낌을 갖게 만드는 점이 있다. Spinoza처럼 절대적인 어떤 것을 떠받들면서도 그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일치감과 함께 둘 간의 상호 피드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Hegel의 절대이념(Die Absolute Idee)은 그 내부의 요소들이 전체와 온전히 조화된 관계를 이룬다는 점에서 Spinoza의 신(Gott)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도 볼 수가 있다. 왜 그런가?
Spinoza에게 있어서 신은 Spinoza의 그 범신론적 철학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실체에 불과한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각각의 부분으로 나뉘어진다면 그 각각의 부분들은 원래의 실체가 갖고 있던 본성을 보유한다고 보장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Spinoza에게 있어서 이 세계의 여러 부분들은 전체, 또는 신 (또는 수령)과 사실상 따로 노는 것이 된다.
그러나 Hegel에게 있어서 전체와 부분이 따로 논다는 말은 절대로 성립할 수가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Hegel에게 있어서 전체와 부분은 유기적으로 상호연관되어 있으며 부분 없이 전체 없고, 전체 없이는 부분도 없는 운명공동체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난 사실 이런 점에서는 Hegel보다 Spinoza에게 더 끌리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생각에 전체와 부분은 어떤 필연적이고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든지 서로 갈라져 따로 놀 수도 있는 관계로서, Spinoza처럼 전체 없는 부분도 당연히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 이에 관한 Hegel의 원문을 한번 읽어보기로 하자:
"Spinoza가 신을 신과 세계의 통일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오히려 신이 생각과 물질세계의 연장의 통일이라고 말한 점을 도외시한다면, 그 첫번째의 전혀 서투른 방식에 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Spinoza의 체계 속에서 오히려 현실적인 실재가 없는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세계만이 규정되어 이러한 체계가 무우주론, 무세계론으로 간주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로지 신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은 최소한 무신론에 대해서 주장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Abgesehen davon, dass Spinoza Gott nicht [so] definiert, dass er die Einheit Gottes und der Welt, sondern dass er die Einheit des Denkens und der Ausdehnung (der materiellen Welt) sei, so liegt es schon in dieser Einheit, selbst auch wenn sie auf jene erste, ganz ungeschickte Weise genommen wird, dass in dem Spinozischen Systeme vielmehr die Welt nur als ein Phänomen, dem nicht wirkliche Realität zukomme, bestimmt wird, so dass dieses System vielmehr als Akosmismus anzusehen ist. Eine Philosophie, welche behauptet, dass Gott und nur Gott ist, dürfte wenigstens nicht für Atheismus ausgegeben werden.)"
따라서 Hegel이 말한 절대이념이나 전체 같은 것은 Spinoza의 신보다 Aristoteles의 신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봐야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Aristoteles에게 있어서 신은 모든 사물들이 그것을 향하여 가고 있는 궁극적 선과 같은 것으로서, 인간은 다들 나름대로 어떤 신적인 성질을 그 안에 가지고서 신과 교감하는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Hegel의 절대이념 또는 절대자도 Aristoteles의 신과 거의 비슷하며, 단지 거기에 Hegel 특유의 변증법적인 것만을 추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 Hegel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다른 모든 타자들과 온전히, 온전히 일치시킬 수 있고, 그로써 자기 스스로에 대해 온전히, 온전히 알 수 있으며, 그로써 자기 스스로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온전히, 온전히 사고할 수 있고, 그런 변증법적 방식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체, 절대이념까지도 온전히, 온전히 인식할 수 있게끔 끊임없이 진화하여, 궁극에 가서는 신 또는 위대하신 수령동지가 되어 자기 아래 모든 것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Hegel의 원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신은 단지 자기 스스로를 아는 한에 있어서 신이다. 그의 자기 앎은 나아가 인간들 속에서의 그의 자기인식이며 인간의 신에 대한 앎이고, 신 속에서의 인간의 자기 앎으로 나아간다. (Gott ist nur Gott, insofern er sich selber weiß; sein Sichwissen ist ferner sein Selbstbewusstsein im Menschen und das Wissen des Menschen von Gott, das fortgeht zum Sichwissen des Menschen in Gott.)"
이런 부분들을 읽고 있다 보면 Hegel의 주장은 곧 '신은 모든 것을 다 알아. 인간도 절대인식을 얻으면 거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지. 따라서 절대군주, 총통각하, 위대한 지도자동지 역시도 거의 신과 같은 존재일 수 있는 거야' 같은 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된다. 물론 어떤 분들께서는 이런 사고나 언어가 정치적으로 색채를 달리하고 프리즘을 달리하는 무수한 의견들을 하나로 결집하는 어떤 근원적인 사고, 근원적인 언어로서 우리에게 사랑과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Hegel의 이런 사고, 이런 언어는 여러 사람 골로 보낼... 끔찍하고 위험천만한 것으로서, 분수를 모르는 언어라고까지 말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Hegel은 현실의 부분보다 현실의 전체에 절대적 우위를 두고서, 우리의 인식이 현실의 부분에서 현실의 전체를 향해 고양되는 가운데서 우리의 영혼이 절대정신으로 진화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얘기를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의 현실이란 것은 마치 미로와도 같아서 전체적인 조망이 거의 불가능하고 그 안에서 방향감각조차도 잡을 수가 없게 돼있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그 안에서 열나게 변증법적인 종합을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변증법적 운동의 방향이 과연 정확한 것인지의 여부는 전혀 보장받을 수 없으며, 결국 그 안에서의 변증법적 '운동'이란 변증법적 '방황'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고, 설령 우리가 그러한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 언젠가 현실의 전체성을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그 조망은 마치 섬광처럼 금방 스쳐가버려서, 그것이 이미 지나가버리고 난 뒤에는 아무리 명징한 의식으로 변증법적 통일을 계속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진리가 아닌 허위만을 거듭 보게 될 뿐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쓸모있는 것은 보편적 매개라든가 전체적 조망이라든가 하는 것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때로는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경험에만 머무를 수도 있는 널럴하고 유연한 사고 같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체를 자기가 모두 다 포괄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 이러한 파편적 경험의 다발들을 열심히 스케치하고 그것들을 볼만하게 가공해 외부에 형상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나아가서는 충격적으로 각인시켜 그러한 충격들이 대충 알아서 전체에 긍정적 작용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그런 개별적인 노력들을 하는 것이 Hegel처럼 모든 경험의 나무도 구체의 숲도 다 자기 진화의 발판으로서 깔아뭉개고 그저 추상의 산꼭대기로만 올라가 저 높은 구름 위 하늘궁전의 절대적 꼭대기로 점프해 오르는 것보다야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내게는 든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보기엔 그렇다. 우리가 현실에서 관찰하는 가장 작은 부분들이나 가장 하찮은 개체들조차도 나머지 전체 세계와 거의 맞먹는 무게를 갖고 있으며, 그 하찮은 개체 하나의 작동원리는 나머지 전체의 작동원리와 전혀 상이하거나 전혀 무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헌법은 모든 법의 상위법인 듯 보이지만, 헌법을 안다고 해서 민법, 상법, 노동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행정법, 경제법을 모두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민법, 상법, 노동법, 행정법 등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헌법의 이해가 시작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얼핏 보면 철학은 만학의 왕인 것처럼 보이지만, 철학을 다 안다고 해서 법학, 경제학, 사회학, 문학, 역사학, 심리학, 물리학, 생물학, 의학 등 수많은 학문들을 Hegel처럼 모두 다 알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개별학문들을 Hegel처럼 모두 알아야만(?) 그때부터 비로소 철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각자의 부분들이 나름대로의 고유체계를 다 갖고 있기 때문에 그 파편적인 체계 하나만 어느 정도 알아도 그 학문의 방법론 한가지를 현실에 써먹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예를 든다면 Hegel 변증법 같은 거 전혀 모르는 산부인과 의사라 하더라도 의대수업 열심히 받고 인턴과정 성실히 밟고 산부인과 레지던트과정 착실히 밟고 하면 이쁜이수술이나 낙태수술, 제왕절개수술 등으로 자기 직업윤리를 실현하고 돈도 벌고 그로써 이 사회에서 기본적인 인간구실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아니 의사같이 잘 나가는 직업 뿐만이 아니라 하다 못해 정화조청소업자(일명 '똥퍼')라 하더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노하우(예를 들어 대변이 가득 들어있는 정화조에 응집제를 투입하거나 활성오니로 흡착하거나 공기펌프로 대변을 빨아들이는 등의 요령)와 직업윤리(단 한 바가지의 dung을 푸더라도 제대로 퍼야 한다), 그리고 자기 직업에 대한 존엄과 자부심(우리는 가장 더러운 곳에서 가장 깨끗한 것을 지향한다)은 다 존재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똥퍼'보다 대통령각하나 철학계 최고의 원로가 더 존엄하고 고차원적인 인식에 올라있다고 무조건 말할 수는 없으며, 그런 주변적 개체들의 일(정화조청소)에 어떤 문제(악취, 대변누출 등)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반론적인 문제(예를 들면 충성심, 애국심의 부족이나 도덕성의 부재, 정도를 밟지 않는 요즘 젊은 것들의 안일한 정신자세 따위)라기 보다는 그 개체 특유의 기술적이고 특수한 문제(응집제의 화학적 농도변화에 따른 정화조의 악취, 원심펌프의 잦은 마모로 인한 대변누출 등)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Hegel의 철학은 근대국가(자본주의국가건 공산주의국가건 하여튼 근대국가)의 완전한 기능연관과 획일화, 통일화된 체계, 그리고 그것을 선도하는 어떤 절대적 권위와 그 권위의 포괄적 전능성을 정당화하려는 철학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렇게 하나로 통일되는 질서에 편입되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을 살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속성, 지나친 개념화와 조직화에 편입되지 않고 아무리 완전한 체계라 하더라도 그 체계에 도저히 동화될 수 없는 비동일자, 특수자로서의 예외적 인간성을 강조하려는 철학적 시도는 Hegel철학의 독소를 제거하는 데 매우 유용한 방법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Hegel의 변증법은 은근히 인식의 위계를 정당화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요소는 관념과 사상에 있어서 독선적 지배구조,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일부 혁명적 지식인들의 지적 만용, 동일성의 폭력과 과도한 권력지향까지도 함께 조장한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게 된다. 물론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현실과 이성을 독특하게 등치시키는 Hegel의 현실관은 참여적 현실관이 아니라 관조적 현실관으로도 볼 수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현실관은 반드시 보수주의나 방관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무책임한 요소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는 부분 역시도 비판지점으로서 결코 빼놓을 수는 없다 할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Hegel의 '철학백과사전'은 전작 '논리학'에 이어 연속 대박을 터뜨렸으며, 이로써 Hegel은 교수취임 이후 불과 1~2년만에 Fichte, Schelling 등등 쟁쟁한 선배, 동료 철학자들을 제치고 독일철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로 우뚝 설 수가 있게 되었다. 그 결과 Hegel은 당시 Fichte 사후 공석이 된 Berlin대학의 철학교수 자리에까지 취임을 하게 되었는데, 이건 우리나라로 치면 예를 들어 경북대 철학과 교수직에서 국립서울대 철학과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 일로서 (특정학과를 비유해서 매우 미안하게 생각함) Hegel 개인으로서는 이만저만한 영광과 경사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
원래는 이번 회에 Hegel에 관한 정리를 다 마치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밀려오는 졸음때문에 Hegel의 저서 한 권 밖에 정리를 못하고 나머지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다. 하여튼 얘기가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으니, 다음 회에서는 Hegel의 '법철학원리'를 대충 건너뛰고 (그러나 '법철학원리'는 내 전공과 관련이 깊은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더 상세하게 파헤쳐서 다루어볼 생각임) Hegel의 '역사철학강의'를 짤막하게 다룬 다음 Hegel에 관한 모든 정리를 마무리짓기로 하면서 이만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도록 하겠다. 다음 회에서는 정말로 이번 씨리즈를 끝낼 생각이니 이번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기 바라면서... =ㅅ=
2003. 8. 27.
- 이하의 글은 2003년 7월 11일부터 2003년 9월 29일까지 저의 "개인낙서장"에 일곱편으로 나누어 게재했던 저의 Hegel에 관한 잡글을 거의 있는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
고래 wrote:
꿈에도 열망하던 대학교수의 자리에 오른 뒤 Hegel은 이미 '논리학'책으로 독일 전역에 떨쳐진 자신의 명성을 더욱 더 본격적으로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단순히 'Dr. Hegel'이 아니라 'Prof. Dr. Hegel'이 되어, 여기저기서 'Herr Professor (교수님)'소리 들어가며 자신의 유명세를 좀 더 폼나게 누리고, 더 폼나게 자기 사회적 영역을 확장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Hegel-W Bd. 8, S. 47.
*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Hegel-W Bd. 8, S. 388
*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Hegel-W Bd. 8, S. 133-134.
*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Hegel-W Bd. 10, S.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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