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독일의 학생운동이 한국의 학생운동과 의외로 큰 차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에 놀랐던 분들은 아마 나뿐이 아니었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사회비판적이라는 것, 맑시즘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 토론하고 가두에 나가 시위하는 데 활동의 중점을 둔다는 것, 일반학우들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 점차 쇠퇴해가고 있지만 아직도 대학사회에서 꽤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등등 독일대학의 학생운동 모습은 한국대학의 학생운동 모습과 아주 유사하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전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독일의 학생운동이 우리나라의 학생운동과 많이 다를 것으로 생각하는 면이 있다.

물론 이들 독일 학생들에게 너희나라 학생운동이나 우리나라 학생운동이나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면 독일 친구들 역시도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동아시아는 아직 개인의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엄격한 권위주의문화가 지배하기 때문에 운동권내에 진정한 수평적 동지관계가 이루어져 있다는 내 주장을 믿을 수 없고, 사상의 통제가 심한 데다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도 실현돼있지 않은 한국 같은 나라에서 학생운동이 반독재운동이나 기성정당의 선거들러리운동과 같이 유치하고 저열한 수준을 넘어서서 이미 깊이 있는 사회변혁운동으로까지 발전해 있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나라 운동권의 권위주의문화가 그렇게 심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로서 선뜻 동의할 수 없고 (솔직히 밤늦게 술자리 같은 데서 운동권 후배가 같은 운동권 선배 멱살 잡고 대드는 일은 우리나라 대학에서 얼마나 흔한 일인가?) 독일운동권 애들 Flugblaetter를 읽어보아도 그리 수준이 높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위현장이나 시국강연회 같은 데서 연설하는 내용을 들어봐도, 맑스원전의 몇몇 구절을 추상적이고 감성적으로 인용하면서 무조건 기존사회질서를 싸잡아 비난하다가 이 사회구조를 모조리 때려엎으면 문제가 다 해결될 거라는 식의 유치한 결론에 도달하기는 독일 운동권 학생들도 한국 운동권 학생들과 거의 매한가지라 할 수 있다.

심지어는 학생회 애들 노는 모습도 너무 유사하다. 작년 6월 7일에 나는 함부르크 대학교 AStA 애들을 따라 (여기서는 학생회를 AStA라고 부른다) 베를린에서 대학수업료 도입반대를 위해 열렸던 전국연합데모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버스 대절해다 놓고 학생회 고위간부라는 애들이 무슨 노트 같은 거 들고 여기저기 체크하고 다니는 모습이나, 각 정파 및 단체별로 모여 깃발 들고 우루루 몰려다니다가 아무데나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 모습이나, 별로 아는 것도 없는 것들이 더럽게 말많고 아무한테나 마구 정치토론을 제안하면서 걸핏하면 마이크 붙잡고 학우여러분 동지여러분을 외치는 것이나 너무 옛날 우리 학교 학생회 애들을 빼다박은 듯해 웃었던 기억이 난다.

더 볼만 했던 것은 여기 학생회 좌파 그룹에 참여하고 있는 몇몇 우리 교포자녀들 같은 경우 생김새와 목소리가 한국적이어서인지 소름끼칠 정도로 정말 우리나라 운동권애들과 똑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특히 내가 아는 수잔네라는 교포 2세 여자애는 이곳 함부르크 대학 운동권 애들 중에서도 가장 과격하고 정통 맑스주의적인 좌파그룹의 핵심멤버로서,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우리나라 운동권 여자애들 특유의 목쉰 듯하면서도 당찬, 전투적인 어조로 일장연설을 늘어놓아 나를 웃기곤 했는데, 정말이지 한국어가 아니고 독일어를 쓴다는 것 하나만 제외하면 수수한(?) 용모나 칙칙한 옷차림이나 중성적인 이미지나 모든 것이 우리나라 운동권 여자애들의 복사판이나 다름 없었다.

실제로 여기 독일 학생운동의 역사는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역사와 그리 큰 차이를 갖지 않는다. 마치 우리나라 대학에서 동학농민운동, 의병항쟁, 3.1운동을 거쳐 1920년대 이후 잠재적 역량을 길러오던 좌익학생운동이 해방 이후 남한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급격히 조직화되었던 것처럼, 독일 역시도 맑스 사후 점차 세력을 불려가던 좌익학생운동은 1831년 괴팅엔대학에서 이루어진 학생소요사태를 전후하여 독일 주요대학 내에 뿌리를 내려오다가 분단 이후 서독에서 베를린 (특히 베를린자유대학)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었다. 물론 그 구심체는 1946년에 조직된 이른바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 (SDS)이었으며, 처음 이 단체는 사민당의 영향하에 있었지만 그래도 당시의 사민당이 비교적 좌파원리에 충실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정통좌파지향을 유지하면서 독일학생운동을 대표하기도 하였다. - 참고로 1947년과 1948년 SDS의 의장직을 수행했던 함부르크대학의 Helmut Schmidt는 나중에 사민당에 입당하여 서독의 다섯번째 수상(1974-1982)이 되었다. -

동서독 분단후 서독은 Konrad Adenauer의 강고한 반공정권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밀어붙이며 미국과 소련에 의해 구축된 냉전질서 속에서 철저히 미국에 빌붙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다행히 경제야 급속히 재건되었지만 동독과의 냉전적 긴장상태는 독일인들의 자유로운 정신활동을 왜곡하고 있었고, 반공을 명분으로 나찌부역자들이 독일사회에서 버젓이 활개치는 부작용을 야기하고 있었다.

당연히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은 이에 대해 많은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으며, 소련을 축으로 한 국가사회주의 진영도 민주주의를 말살한다는 점에서 잘못을 저지르고는 있지만, 미국을 축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도 그리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심화하고 있다는 비판적 의식에 공감하게 되었다. 당시의 자본주의 진영은 완전한 시장경쟁을 보장하지도 않으면서 교묘히 기존 권위주의 세력을 옹호하고 있었고, 제3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깡패와도 같이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1960년 이후 냉전적 세계질서는 조금씩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미 1960년 4월 한국에서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4.19의거를 일으켜 친미독재정권을 갈아엎은 다음 점차 남북통일운동을 벌여나가려 하고 있었고, 미국의 경우 적극적인 군비확장을 추진하던 Eisenhower가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난 다음 새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민주당의 J.F. Kennedy는 학교에서의 인종분리 기타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인권법안을 작성하여 통과시키고, 소련의 Khrushchyov와 함께 자유민주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의 평화공존을 표방하며 모스크바와 워싱턴간에 직통전화를 설치하고 미소 핵무기실험중지협약을 맺는 등 탈냉전의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서독에서는 사실상 자기 1인의 마음대로 정당정책과 독일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비타협적으로 군비재무장을 관철하고 사회주의권과의 대립을 조장하던 Konrad Adenauer수상에 대한 국민적 염증이 확산되면서, 1961년 총선에서는 집권당인 기민/기사련의 의석이 드디어 과반수 이하로 떨어지게 되었다. 1962년 10월에는 당시 서독 국방장관이던 기사련(CSU) 소속 Franz Josef Strauss의 무기구입관련 뇌물수수의혹을 진보좌파지 슈피겔이 폭로하였는데, 이것이 국가반역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슈피겔지 발행인인 Rudolf Augstein과 슈피겔지 군사문제 전문기자인 Conrad Ahler가 구속되자, 서독 전역의 진보지식인과 대학생이 언론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일제히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이른바 슈피겔사건 Spiegelaffäre).

결국 Strauss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진상을 밝혀내고, Strauss의 장관직퇴임 및 Augstein과 Ahler에 대한 수사의 종결이라는 빛나는 성과를 이끌어낸 서독 좌파들 사이에서는 이제 냉전적 국가질서를 시민들의 이상주의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마침 그때 미국에서 사회보장제도 및 의료보험제도의 확대를 추진하며 수정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실업을 극복하던 J.F. Kennedy는 1963년 베를린을 방문해 냉전질서의 종식을 다짐하며 "저는 베를린사람입니다 (Ich bin ein Berliner)"라고 선언한다. (이때가 J.F.K.에게는 최고의 전성기였다고 많은 이들은 얘기한다.)

물론 1963년 11월 선거유세 도중 Kennedy가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피살당하고 1964년 10월 Khrushchyov 역시 실각하면서 세계질서는 다시 냉전적 분위기로 돌아선다. 하지만 이렇게 급속한 경제성장기와 짧은 균열기를 거쳐 바야흐로 '보수적으로 철저하게 관리되는' 안정기로 이행하던 세계정세 속에서 잠시 숨을 죽이던 젊은 지성들은 Beatles와 Rolling Stones의 거친 비트록음악 속에서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으며, 이런 상황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반공보수의 색채를 극심하게 띠던 기민/기사련의 인기는 다시 추락하고, 드디어 1965년의 총선에서는 독일의 유일야당인 사민당이 의석수를 8년전의 169석에서 202석으로 33석이나 늘리며 눈부신 약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수여당인 기민/기사련이 위기에 처하자 좌파정당인 사민당은 놀랍게도 기민/기사련과의 대연정(grosse Koalition)에 참여해버리고 만다. 이 연정으로 기민/기사련과 사민당은 유일한 군소야당인 자민당의 반대와 상관없이 자기들끼리의 타협만으로도 심지어 개헌까지 실현할 수 있게 되어, 과연 국회의원이란 자들이 이렇게 국민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서 자기 멋대로 무원칙하게 야합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시민들로부터 제기되기에 이른다.

사실 1959년부터 고데스베르크강령을 통해 이미 우경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사민당의 이러한 대타협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했지만, 이제 독일에는 정통좌파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대변할 만한 정치적 결사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셈이 되었다. 이에 대해 재야의 진보지식인들은 더 이상 기성정치인에게 기대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특히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SDS)은 여태까지 고수하던 사민당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대신에 여러 좌파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민의를 왜곡하는 구세대의 부르주아적 대의체제를 대체할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독자적 원외투쟁조직인 원외저항운동연합(APO)을 조직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 이들이 가졌던 가장 큰 문제의식은 대학개혁문제에 있었다. 그러나 점차 힘이 모아지고 지속적인 투쟁 속에 기성세대와의 갈등폭이 커지자 사회생활의 근본적 개혁(자유로운 생활형식)으로 관심범위를 확대하게 되었으며, 성에 대한 터부, 연장자에 대한 존경 등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적 인습에 저항하면서 이제 서유럽 학생운동은 단순히 학내민주화운동, 정치운동이 아니라 문화운동,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변혁운동으로 그 폭이 넓혀지게 되었다. ("나이 사십이 넘은 사람과는 같이 오줌도 누지 말라" "국민이 고분고분하면 국가의 버르장머리가 없어진다"는 등의 유명한 말들이 이때 이렇게 해서 나왔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정통 맑시스트들이거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의 '비판이론'에 심취한 좌파성향 학생들이었으므로, 이들은 점차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회주의의 입장을 취하면서, 소위 중도좌파적 국민정당으로 변신한 사민당의 온건한 사민주의와 선을 긋고 모든 기존의 권력과 지배구조를 타파하려는 급진적 사회변혁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를 위해 이들은 "장난꾸러기게릴라(Spassguerilla)"활동이나 연좌시위와 같은 새로운 시위방법을 개발하였는데, 여기서 보듯 이들에게는 이념 못지 않게 반권위주의, 반엄숙주의라는 문화적인 부분들이 무척 중요한 요소로서 고려되었다.

이때 미국에서는 이미 1964년에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형태로서, 잘 관리된 자본주의사회에서 탈주하려는 히피운동이 일어나 확산되는 중에 있었다. 그들은 국가기밀의 투명공개와 소비자정보 공개, 병역거부 등 민권운동에 강력히 동참했으며, 스쿨버스에 승차하지도 못하고 고급식당에 입장하지도 못하는 등 차별받고 있던 흑인들에 대한 모든 차별을 정치분야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속에서도 철폐하도록 요구했고, 일부는 이를 위해 무장투쟁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이 미국은 LA의 버클리를 중심으로 펼쳐졌지만, 서독에서는 이 운동이 우선 베를린으로 집중되었다. 동서베를린에 장벽이 둘러쳐지기 직전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극적 귀순(?)해 베를린자유대학 (사회학과) 학생으로서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 (SDS)의 핵심이론가가 된 Rudi Dutschke가 이 당시 베를린의 학생운동을 이끌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때 바다 건너 미국의 히피운동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독일의 운동권 학생들은 점차 서독정부에게 베트남전쟁 반대를 요구하면서, 이에 대해 기민/기사련/사민당 대연정이 비상조치령을 선포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67년 4월 미국 부통령 Humphrey가 베를린에 방문하자 서독의 대학생들은 첫번째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대연정은 이런 대규모 시위에 잔뜩 겁을 집어먹었으므로 경찰을 대거 투입해 시위대와 경찰간에 무력충돌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런 긴장상태 속에서 드디어 1967년 6월에는 이란의 팔레비국왕의 방문에 즈음해 이란의 친미독재정치에 반대하기 위해 학생들이 일으킨 데모에서 Benno Ohnesorg란 대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마치 1987년 서울에서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대학생들의 분노를 촉발했던 것처럼, 서독경찰의 이러한 강경대응은 사태의 확산을 야기했다. 급기야 1968년 2월 17일과 18일의 시위에서 학생운동 지도자 Rudi Dutschke는 수천명의 학생들 앞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사회(freie Gesellschaft freier Individuen)"를 창조하는 "세계혁명(Weltrevolution)"으로 나아가자고 외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서독 학생운동조직이 전세계에 좌파정부를 건설하려는 본격적인 혁명조직으로 탈바꿈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60년대말 서독의 학생운동조직은 1980~90년대 한국과는 달리, '전대협'이나 '한총련'과 같은 일사불란한 통일적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운동권 내에서 가장 과격한 테러리스트 분자들은 별다른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았고, 그 결과 Andreas Baader, Gudrun Ensslin 그리고 Thorwald Proll 같은 극단적 인물들은 1968년 4월 3일 밤 "베트남에서의 인간살육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을 깨뜨린다는 명분으로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 두 곳에다가 불을 지르는 돌출행동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테러리즘은 서독사회 전체를 분열시키고 긴장시켰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이때 운동권 학생들에게 동조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기성세대들은 일껏 일으켜놓은 경제부흥의 성과를 철없는 과격학생들이 다 날려버릴까봐 우려를 금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운동권 지도자에 대한 경찰 및 정보기관의 집중색출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당시 미국에서는 4월 5일 흑인민권운동의 기수 마틴루터킹 목사가 테러를 당해 숨졌다), 이런 와중에서 4월 11일 베를린집회에서는 뮌헨에서 온 Josef Bachman이라는 수수께끼 인물이 마침 자신의 갓 태어난 아들의 약을 사기 위해 약국으로 가고 있던 학생운동 지도자 Rudi Dutschke를 쏘아 치명상을 입히기에 이르렀다 (뇌손상을 입은 Dutschke는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시달리다 결국 1979년에 죽는다).

이 암살기도는 독일 학생운동의 절정이었던 "부활절소요사태(Osterunruhen)"를 점화시켜, 서독 전체가 아수라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독일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일간지인 Bild지와 Welt지, Berliner Morgenpost지, Hamburger Abendblatt지 등은 학생운동세력에 대한 편파왜곡보도를 일삼았는데 이들 신문들은 모두 Axel Springer사라는 언론재벌사에 소유된 신문들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언론의 소유집중이 편파왜곡보도를 조장한다고 보고, 이에 항의하기 위해 베를린과 함부르크 두 곳에서 이곳 언론재벌사 건물을 점거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벌어진 시가전에서는 400명의 시위대와 54명의 경찰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당시 상황을 녹화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면 그토록 질서정연한 나라이던 서독이 그때만큼은 정말 난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시가지에는 학생들이 충혈된 눈으로 떼지어 돌아다니며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때려부수고 교수들은 계란과 밀가루푸대를 뒤집어 쓴 채 유리창이 깨어진 자기 승용차 앞에서 학생들에게 두들겨맞으며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숲 속에서는 대학생들이 쇠파이프와 각목 등을 들고서 가라테 동작을 배우면서 거의 특공무술 비슷한 군사훈련을 선배들에게 받는다. 거리에서는 무장한 시위대가 화염병과 돌을 던지면서 경찰들과 맞싸우고, 박살난 신호등과 잿더미가 된 상점건물들이 으시시한 광경을 연출하는 게 당시 서독 주요 대도시들의 시가지 풍경이었다.

벌써 Benno Ohnesorg라는 학생이 사망하고 학생운동지도자 Rudi Dutschke마저 치명상을 입어 혼수상태를 헤매고 있던 상황에서 이제 이들 젊은 시위대에게는 "물건에 대한 폭력"(예를 들어 방화)이건 "인간에 대한 폭력"이건 아무런 차이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Andreas Baader와 Gudrun Ensslin이 주도하는 테러리즘 노선은 너무 과격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노선은 운동주체의 인격까지도 파괴하며, 적과 싸우다가 오히려 운동주체까지도 적을 닮아가는 결과를 낳는다는 자성론이 내부적으로 싹트게 되었다.

그 결과 경찰부대의 포위섬멸작전이 임박한 가운데 학생운동의 주력부대는 자진해산을 결행하고, 계속 남아서 끝까지 투쟁할 것을 주장하던 Andreas Baader와 Gudrun Ensslin은 쓰라린 배신감 속에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게 되었다. 이로써 거리를 뒤덮던 붉은 깃발과 체게바라 티셔츠는 종적을 감추기 시작했으며, 한때 반란의 열기에 도취했던 운동권(Sponti)들은 운동의 참담한 실패를 목격하고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그 운동주체들이 주장하던 수많은 것들, 민주적 대학개혁, 비상조치법 도입 반대, 미디어 무굴제국의 해체, 그리고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 등의 요구사항은 형식적으로 볼 때 그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짧은 1년 기간의 격렬한 혁명으로 서구사회는 유럽의 전후사가 1968년을 기준으로 완전히 나뉠 만큼 획기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교수들의 지위는 학생들의 친구나 마찬가지 지위로 격하되었고, 연인들은 길거리에서 공공연히 키쓰와 애무를 즐기게 되었으며, 이런 가운데 기민/기사련과 같은 반공보수주의자들이 계속 정권을 담당하다가는 나라가 정말 남아나지 않겠다고 생각한 서독국민들은 중도좌파적인 사민당에게 표를 몰아주게 되었다. 그 결과 1969년 9월의 연방총선에서 사민당은 42,7%를 득표하게 되었고, 이로써 사민당은 기민련을 제치고 드디어 서독 제1당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사민당이 연정파트너를 기민/기사련에서 자민당으로 바꾸게 됨에 따라 20여년간 이어지던 기민/기사련 정권은 종말을 고했고, 이제 서독에는 새롭게 사민당정권이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신임수상 Willy Brandt는 사회국가(Sozialstaat)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중도자유주의정당인 연정파트너 자민당(FDP)의 의견에 따라 법률정책에 있어서 자유주의원리를 대폭도입하며, 기민/기사련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방정책을 추진하여 운동권 및 좌파들의 불만을 상당부분 해소하였다.

또한 Willy Brandt는 그간 학생운동에서 일어났던 범죄행위들에 대한 부분사면을 약속하였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1970년 3월 21일 SDS(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는 공식해산하였다. 그리고 이에 소속했던 학생운동의 중추세력들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장기간 고심하다가 부분적으로 기성정당에 흡수되는 길을 택하는데, 이는 "제도권진출(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로 표현되기도 했지만 다수의 운동권 학생들로부터는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꼭 우리나라 386세대 회장님들의 민주당, 한나라당 입당을 보는 듯하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그들이 재야에 남아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68년도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 68혁명의 결과적 실패를 심정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던 극단적 테러리스트들이 끼어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로 불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70년 6월 여성 저널리스트였던 Ulrike Meinhof가 감옥에 있던 Andreas Baader를 극적으로 탈옥시키면서 건설된 "적군파(Rote-Armee-Fraktion; 줄여서 RAF)"는 이러한 극단적 테러리스트 젊은이들의 집결체였으며, (적군파는 초기에 이들 남녀지도자 Andreas Baader와 Ulrike Meinhof의 이름을 따서 Baader-Meinhof그룹이라고도 불리웠다) 이 두 사람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제국주의적 시스템"과 NATO, 그리고 세계군산복합체에 대한 "무장투쟁"을 주창했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극좌의 입장을 취하면서, 실천적으로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사회구조 전복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자, 이제부터 우리나라 운동권들 중에 스스로를 '극좌(Ultra-Left)'로 자처하시는 분들, 앞으로 펼쳐질 '적군파'스토리를 잘 들어보시기 바란다).

이들 적군파는 극우민족주의에 대한 반대입장을 극단화했고, 그러다 보니 과격한 국제주의에 빠져들어 국제적 테러리스트 연대의 일원임을 자처하게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정말 중동에서 팔래스티나 전사들에 의해 군사훈련을 받았고, 프랑스의 Action Directe, 아일랜드의 IRA, 이태리의 Roten Brigaden과 같은 무지막지한 테러조직들과 실천적인 연대를 맺기도 하였다. 똑같이 테러조직이기만 하다면, 그리고 미국을 미워하기만 한다면 이념과 상관없이 (극우민족주의건 종교적 극단주의건 간에) 무조건 국제적 연대를 맺은 것이었다.

그래도 Andreas Baader와 Ulrike Meinhof를 지도자로 삼았던 초기의 적군파는 그나마 순수했던 면이 없지 않아서 과거 운동권출신들에게 묵시적 지지를 받기도 했고, 이러한 비활동적인 동조자들 중에는 오늘날 독일연방정부의 부수상을 맡고 있는 녹색당의 Joschka Fischer와 오늘날 독일연방정부의 내무부 장관을 맡고 있는 사민당의 Otto Schily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적군파가 계획적으로 인간을 죽이는 테러행위를 저지른다는 점에서는 일응 도덕적인 비판을 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군파가 극우나찌보다야 정치적으로는 더 옳다는 식으로, 다분히 동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던 것이다. (실제로 적군파의 테러에 희생된 사람들 숫자는 오늘날 네오나찌나 스킨헤드의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 숫자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리고 희생자의 면면도 대개는 사회저명인사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렇게 Baader, Meinhof, Jan-Carl Raspe 그리고 Ensslin 등 적군파의 1세대 지도자들은 일련의 폭발테러와 방화행위를 저지르다가 1972년 6월 체포되었다. 이러한 1세대 지도자들의 체포로 구심점 없이 잔류하게 된 단순무식 적군파 행동대원들의 투쟁목표는 이제 더 이상 정치적 사회적인 색채를 띠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뜨거운 동지애에 기반하여 구속된 적군파 동지들을 구출하는 것만이 그들의 당면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들은 Andreas Baader를 비롯한 자기네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요인암살을 협박하였고, 그 협박을 진짜로 실현하였다. 그 첫번째 희생물은 베를린 고등법원장이었던 Drenkman으로서 1974년 11월 10일에 저격되어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생각해보라. 법원장급 판사가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렇게 판검사가 운동권한테 테러당해 죽은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운동권들은 정말 준법적이고 평화적인 편이라 말할 수 있다.) 이후 1975년 4월 24일에는 스웨덴주재 독일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Mirbach와 참사관 Hillegaart가 대사관 건물에서 습격당해 죽었다.

아마도 이때 적군파들은 이러한 암살작전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적군파에 대한 동정여론이 확산되고 결국 자기들의 지도자들이 풀려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착각이었다. 당시 서독은 1972년 연방총선에서 사민당이 45,8퍼센트라는, 당 역사상 전무후무한 득표율을 올린 것에 힘입어 동서긴장완화와 사회복지정책을 힘있게 추진하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이에 위기의식을 가진 보수우익언론들은 적군파들의 이러한 테러리즘을 트집잡아 좌파에 대한 총공세를 벌이기 시작했고, 이러한 극좌파들의 테러행위는 사민당정권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수상이던 Willy Brandt의 비서 중에 동독스파이가 한 사람 있었다는 이유로 야당인 기민/기사련과 보수우익언론이 정권타도를 외치며 극한적인 투쟁을 벌이자, 결국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Willy Brandt는 불명예스럽게 수상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1976년 연방총선에서는 그간 야금야금 의석수를 잃어가던 기민/기사련이 20년만에 의석수를 크게 늘려 사민당정권을 위협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사민당 소속의 신임수상 Helmut Schmidt는 극좌파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강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1976년 5월 적군파 여성지도자 Ulrike Meinhof가 감옥에서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1977년 3월 29일에는 감옥 안에 있던 적군파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처우를 개선해달라며 단식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단식투쟁은 감옥 밖에 있던 적군파 잔당들의 테러행위를 촉발하여 1977년 4월 7일 Karlsruhe에서는 검찰총장 Siegfried Buback이 두 명의 동행인과 함께 총으로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국가공권력의 최고수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검찰총장까지 암살되었다는 점에서 서독의 우파들은 이제 국가질서 전체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치게 되었다.

물론 서독의 법조계는 이러한 테러리즘의 위협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1977년 4월 28일 Baader, Ensslin 그리고 Raspe는 2년간을 끌던 재판과정 끝에 결국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로도 수많은 적군파 멤버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법정최고형인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그럴수록 테러행위는 더욱 계속되어 1977년 6월 30일에는 독일굴지의 은행인 드레스너방크의 이사장 Ponto가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독의 운동권, 좌파들은 적군파의 테러행위에 심정적으로는 후련함을 느끼면서도 그 폭력집단과 자기들 사이에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데에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고, 시민들은 이러한 좌파 테러리즘에 대해 공포심과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1977년 소위 "독일의 가을" 때에는 적군파의 폭력성이 최고조에 달했다. 1977년 9월 5일 적군파는 독일경영자총협회 의장인 Hans Martin Schleyer를 납치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의 운전사와 세명의 경찰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러한 테러리스트들의 'Schleyer를 살리고 싶으면 우리 지도자동지들을 석방하라'는 요구에 대해 당시 서독 수상 Helmut Schmidt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록 사민당출신의 좌파수상이고 자신도 한때 운동권이었지만 이러한 극좌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했던 것이다.

급기야 1977년 10월 13일에는 91명의 승객을 태운 루프트한자 비행기 한 대가 4명의 팔래스티나 테러분자들에 의해 소말리아로 납치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럼에도 구속동지들이 석방되지 않자 4일후 인질범들은 비행기 기장을 총살했다. 이에 수상 Helmut Schmidt는 10월 18일 독일국경수비대 특공용사들을 모가디슈에 투입시켜서 테러분자들을 소탕하고 인질들을 구출해내었다 (Schleyer는 유감스럽게도 나중에 다른 곳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에 실망한 적군파 지도자 Andreas Baader, 그리고 Ensslin과 Raspe는 감옥에서 즉시 자살을 해버렸다.

이러한 현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지 학생운동 68세대들 중 나머지는 대안으로서의 시민운동에 투신하며 좌파 학생운동의 이미지를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서독의 좌파들은 환경보호, 반전반핵, 군축평화 등의 새 잇슈를 꾸준히 개발하는 가운데 비폭력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조금씩 운동역량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노력은 1980년 녹색당의 탄생으로 귀결되어, 이제 독일의 학생운동권들이 더 이상 비제도권에 숨어 있지 않고 중앙정치의 전면에, 독자적으로 나서게 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한편 1980년대 이후 적군파멤버들은 동독 정부로부터 훈련장과 은신처를 지원받았고 이러한 후원을 바탕으로 적군파 제3세대는 1980년대 중반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여전히 대인테러를 계속했는데, 그 테러에 희생된 자들은 외교관 Braunmühl, 지멘스사의 경영자 Beckurts (1986년), 도이취방크의 이사장인 Herrhausen (1989년), 그리고 통독과정에서 동독 산업시설의 민영화를 책임지고 있던 Rohwedder (1991년)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테러리즘은 더 이상 사회의 주목을 끌지 못하게 된다. 당시 독일은 Helmut Kohl의 보수 기민련이 최고의 인기 속에 안정적으로 정권을 담당하고 있었고, 사민당은 지리멸렬했으며, 68세대 학생운동권들의 대표성은 이제 누가 보더라도 적군파가 아니라 녹색당의 젊은 정치인들이 갖고 있었던 탓에 극우보수언론이 적군파들의 테러를 새삼 특별히 문제삼을 필요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이로써 적군파의 테러리즘을 사실상 가장 반가워하고 가장 잘 이용해 먹었던 것은 어느 쪽이었는지가 매우 분명해지게 된다.)

적군파의 테러리즘에 맞서는 가운데에서 서독정부와 서독의회는 법률을 바꾸고 새로운 특별법을 많이 만들어내었다 (안티테러파켓, 주요증인규정 등). 이러한 과정 속에서 헌법수호를 위한 연방관청의 강력한 개입이 이루어지게 되어, 이를테면 공직자사상검증(Radikalenerlass) 같은 제도가 서독에서 실시되었고, 그로써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의 공직진출이 제한을 받기도 하였다. 주목할 것은 이를 몇년 전부터 우리나라 조선일보에서는 서독에 선례가 있었다는 이유로 남한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건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서독 내부에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침해라는 측면에서 많은 반론이 있었고, 결국 사상검증제도는 1975년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으로 판정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독일에서 가장 보수적인 주(州)인 Bayern만은 계속 이 제도를 고수했으나, 그마저도 1991년 이를 완전히 포기했으니, 사상검증 제도는 독일땅에서 이미 사라진지 오래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더 이상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적군파 잔당들은 1992년 4월 10일 "경제와 국가의 지도적 대표자들에 대한 공격"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적군파 테러는 통독이후로도 계속되었으나, 적군파의 사실상 마지막 지도자였던 Wolfgang Grams가 죽고, Birgit Hogefeld마저 1993년 7월에 구속되면서 적군파는 완전히 와해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사이에 비폭력주의와 환경주의를 표방한 녹색당은 잠시의 시련을 딛고 세력을 급신장하여 독일 북부의 대다수 지방에서 사민당과 연정을 이루게 되었다.

1998년 4월 20일에는 마지막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떠돌던 적군파 멤버 한 사람이 팩스를 통해 로이터통신 기자에게 적군파의 해산을 알려왔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오늘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종료한다. 적군파라는 형식의 도시게릴라활동은 이제 역사일 뿐이다" 그 종료의 이유로는 전략적인 과오가 꼽혔고, 무엇보다도 적군파는 불법적인 무장투쟁 이외에 정치사회운동을 소홀히 해왔다는 게 그들의 오류로 지적되었다. 테러행위의 효과도 과대평가되었다는 반성이 있었으며, 당시 독일의 학생운동권들도 적군파는 실패한 조직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최근 들어 적군파 조직이 다시 재건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지만, 확실치는 않으며 그 활동도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

물론 오늘날도 독일의 학생운동은 아직 상당부분 맑시즘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리고 무시못할 숫자는 과거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공산국가의 건설을 꿈꾸고도 있다. 그러나 적군파의 실패가 가져다준 교훈으로 인해 이제는 그 어느 학생운동세력도 극단적인 폭력주의를 주장하지는 않고 있다. 특히 화염병이나 각목, 쇠파이프의 사용 같은 것은 독일 운동권학생들에게 거의 금기시되고 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긴 우리나라 운동권학생들도 오늘날 그렇게 폭력적인 시위문화를 고수하고 있지는 않다. 마치 독일의 68세대들이 대학의 개방, 동서냉전구조의 해체, 사회국가의 건설, 대학사회에서의 권위주의 타파 등을 자기네들 학생운동의 성과로서 크게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386세대들도 1987년의 직선제 개헌, 노동자임금인상 등의 성과에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며, 오늘날은 언론개혁과 외국인인권, 환경, 여성, 표현의 자유, 학벌철폐, 남북긴장완화 등으로 운동의 범위를 넓혀가며 다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활발한 NGO활동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민운동에 주체가 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학생운동과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을 전반적으로 비교해본다면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아직도 폭력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곳 독일에서 한국의 시위장면을 TV로 보고 있으면 독일친구들은 한국경찰의 불법적인 과잉진압을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학생 및 노동자시위대가 죄없는 경찰, 전경들을 향해 위험한 화염병과 돌을 마구 던져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있는 것 역시 똑같이 비난하는 모습을 옆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 내 독일친구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독일에서는 가장 과격하다는 적군파 애들도 사회저명인사들만 골라서 죽였고, 그렇게 죽인 사람 모두 합쳐봐야 30명도 채 안 넘어. 그리고 적군파에 소속된 좌파들은 좌파 중에서도 가장 무식하고 수준 낮은 애들이었고 숫자상으로도 극소수였어. 그런데 너희나라 좌파들은 저게 뭐야? 시위에 참여하는 절대다수가 불특정다수의 경찰에게 저렇게 생명에 위협적인 무기를 사용하며 폭력을 휘두르고, 그러고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안 느끼나보지? 저건 적군파보다도 더욱 무자비하고 무차별한 테러리즘 아냐?"

물론 한국운동권의 폭력주의는 남한의 공권력이 최소한의 국민저항권조차도 박탈해버리는 환경에서 좀더 비판을 유보받아야 할 필요성을 갖지만, 한국운동권의 권위주의, 관료주의 성향은 좀 다른 각도에서 비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87년 6월 항쟁 전에 어디서 재야 연대회의를 열었을 때 여러 재야원로들이 있는 자리에서 운동권 학생 하나가 "저희 아무개 의장님께서 사정이 있어서 조금 늦으시겠습니다"했다가 나중에 의장이라는 20대 초반 학생운동권 지도자가 나타나자 "의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라 외치고 이 말에 모두 기립했다는 촌극은, 마치 자기들끼리 똥별 달아주고서 장군 대우를 해주는 식으로 당시 우리나라 좌파운동권이 우익파시스트와 똑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만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오늘날 학생운동은 독일이나 한국이나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고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채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마치 한국에서 아직도 많은 대학의 총학생회를 좌파 운동권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독일도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생회 대의원 의석은 좌파 운동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이를 일반학생들도 대부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물론 모든 학생이 운동권이 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되고, 나는 개인적으로 '일반학우'와는 구분된 아상(我相)을 가지고서 투쟁을 선도해야 할 존재로서의 '운동권' 같은 개념은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대학생이란 자들이 가진 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같이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환상을 갖기 보다, 우리 사회의 경제력 집중과 빈부의 격차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이에 반대하기 위해 집단적 체험을 공유하는 기회를 대학시절부터 가져본다는 것은 무척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이미 확립된 복지제도와 민주주의 시스템을 가진 독일에서보다, 아직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시스템이 온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더욱 중요시될 수밖에 없다고 나는 가끔 생각을 해보는 중이다.

2001. 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