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의 글은 "Spiegel"지가 아니라 "Zeit"지를 참고로 하여 제 개인낙서장에 2002년 5월 19일날 올렸던 글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요즘은 한국과 일본에서의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붐이 불어서 독일의 신문에서도 일본에 관한 기사를 많이 게재하고 있다 (한국에 관한 기사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에 관한 기사는 한국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내용이 주류일 뿐이다. 요즘 나는 독일친구들에게서 매일마다 '개고기 먹고 싶지 않냐?'는 인사를 듣느라 죽을 맛이다. 이래서야 우리나라가 힘들여서 월드컵을 유치한 보람이 있나, 원...). 이번 호 Zeit지에서는 일본의 경제회생에 관한 읽을 만한 기사가 나와 나의 관심을 끌었는데, 아직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경제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으로만 아는 데 비해 이 기사는 상당히 낙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이 기사는 먼저 일본경제가 왜 갑자기 세계경제의 레이더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는지, 왜 일본의 상품들이 세계백화점의 진열대에서 더 이상 매력을 갖지 못하게 되어있는지에 대해 일본 국내적인 관점에서 조명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보기술에 의해 새로운 문명기가 펼쳐지고 있는 21세기의 시대에 일본은 미리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지난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경제의 기세는 욱일승천, 언제 미국을 앞질러 세계최강국이 되느냐는 단지 시간문제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전세계가 일본의 수출경쟁력에 몸을 사려야 했고, 그때까지 세계최고로 일컬어지던 독일의 카메라산업은 일본의 Canon사에 의해 완전 개박살이 나고 말았다. 미국과 독일의 자동차산업을 비롯한 전세계의 모든 산업들이 일본산업에게 '넘버원'의 자리를 넘겨줘야 할 상황이었고,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세계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빌빌 기어야 하는 시대는 곧 도래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러나 기나긴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이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극동의 일본을 키워줘야 했던 시대도 끝나게 되었다. 일본의 오랜 수출초과현상과 기록적인 외환보유고에 대한 항의표시로 미국과 유럽은 엔화의 가치를 거의 폭력적으로 절상했으며, 삽시간에 일본의 상품은 수출경쟁력이 절반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 뒤에 이어진 거품경제의 붕괴. 그때까지 미친 듯이 상승하던 일본의 주가지수와 부동산가격은 거의 수직적으로 폭락하기 시작했으며, 다시 되돌이키고 싶지 않은 일본의 암흑기가 도래하였다.

1990년 이후 12년의 세월동안 일본경제가 기록한 수치를 들여다보면 그저 참담함이란 말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다. 일본의 주가지수인 Nikkei지수는 1989년 38,915까지 치솟았으나 현재는 11,600 선에서 맴돌고 있다. 일본에 대한 투자가 예전의 3분지 1에도 못 미치고 있다는 뜻이다.

파산도 늘어나고 있어, 작년에만 해도 일본 내에서 2만개가 넘는 회사가 부도를 내고 쓰러졌다. 물론 이런 파산건수는 지난 12년 동안 거의 매년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실업문제도 심각하여, 1990년까지 거의 완전고용상태를 자랑하던 일본의 실업율은 작년 12월 기준으로 5.5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물론 독일을 비롯한 유럽권에 비하면 실업율은 양호한 상태인 것 같으나, 330만명이라는 일본의 실업자인구는 실제보다 훨씬 축소되었다는 견해가 많다. 많은 일본친구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의 실질실업률은 거의 10%에 육박한다고 할 정도이다.

재정적자도 심각한 수준이다. 공공채무는 일본국민총생산의 135%에 달하고 있으며, 현재의 회계연도는 아직 끝나지도 않았지만 벌써 공공채무가 일본국민총생산의 140%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독일이나 미국도 재정적자와 정부채무가 심각한 수준이지만, 일본에 비하면 그 비율이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은행과 보험사의 채무도 워낙 커서 그 총액이 400조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런 이유로 국제신용평가기관은 일본의 신용도를 이제 아르헨티나, 보츠와나와 같은 단계에 올려놓고 있다. 이렇게 채무가 많다 보니까 일본의 은행들은 어느 기업에도 투자를 더이상 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그 결과는 전국적인 투자의 부재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일본의 경제가 4년째 마이너스성장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가는 자꾸만 떨어지고 있고, 그에 따라 기업의 이윤과 임금도 자꾸만 떨어지고, 실업은 늘어가고, 소비는 더욱 위축되고, 그래서 물가는 자꾸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바로 작년에도 일본경제의 규모는 1%나 축소되었다. 미국이나 독일 같은 나라가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 해도 1%의 성장은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데 비하면, 일본의 경제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7천7백달러로서 세계최고수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이는 유럽최고의 부자나라인 독일의 2만2천8백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이며, 앞으로 몇십년간 일본경제가 뒷걸음을 친다 하더라도 독일이 일본을 앞지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물론 독일도 서독지역만 따져놓고 보면 일본에 그리 뒤지지 않는다 - 필자주). 거기다 일본은 아직도 세계최고의 채권국으로서, 아무리 채무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의 이자수익을 전세계로부터 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일본인들의 거듭되는 엄살에도 불구하고 전세계는 일본에 대해 그리 큰 걱정을 하지는 않고 있다.

물론 최근 중국의 경제가 무서운 기세로 일어서고 있고, 동남아의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중동의 산유국들의 영향력 역시 여전하다지만, 아직도 일본 국민총생산은 아시아전체의 60%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 싱가포르, 홍콩, 대만을 아시아의 4룡이라 부르지만 이들의 국민총생산을 모두 합쳐도 일본 국민총생산의 반의 반에조차 미치지 못한다. 중국경제가 아무리 크다지만, 그 어마어마한 중국대륙의 경제규모를 다 합쳐도 일본경제규모의 3분지 1에도 채 못미친다. 거기다 이번에 월드컵을 아무 무리 없이 준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의 일본을 경제위기상황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는 이번 월드컵특수로 인해 약간의 경제호황이 찾아오는 기미도 일본경제에 보이고 있다. DaimlerChrysler, BMW, Porsche 그리고 Ferrari와 같은 고급자동차회사들은 여전히 일본에서 짭짤한 매상고를 올리고 있고, 이건 Armani나 Fendi, Gucci, Valentino 같은 명품회사들이 일본에서 아직도 자기네 전체매상의 절반 가까운 액수를 벌어들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물론 DaimlerChrysler, BMW, Porsche 그리고 Ferrari에서 생산한 고급자동차를 몰고 Tokyo나 Osaka와 같은 대도시를 드라이브하는 운전자들은 일본의 그 유명한, 푸른 천막촌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 대부분의 강가나 공원가에 수없이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천막촌은 일본 전국에 최소 3만명이나 존재하는 무주택자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으며, 특히 Tokyo의 Yoyogi공원 지하철역에서 내린 외국인 관광객들은 끝없이 펼쳐져있는 푸른 플라스틱벽을 보고 놀라게 되는데, 이 플라스틱벽과 공원의 철조망 사이에는 수많은 무주택자, 부랑자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의 임시거주자들은 매일마다 날품팔이로 몇천원 정도의 돈을 벌고 있고, 그것으로 간신히 요기를 하거나 그것조차 벌지 못하면 얼마 못가 굶어죽는다. 이들을 바로 옆에 두고 많은 일본인들이 소풍과 산책을 즐기는 광경은 일본사회의 분열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태껏 웬만한 사회주의국가보다도 더 평등한 중산층의 나라로 인식되어온 일본을 이렇듯 갈갈이 쪼개어버린 것은 지난 1980년대 후반 거품경제시대에 부동산투기, 증권투기로 단단히 한몫 본 신상류계층들 뿐만이 아니다. 세계화라는 압력 속에서 지금까지 신성하게 지켜져왔던 연공서열주의(Senioritaetsprinzip)와 종신고용의 원칙(die lebenslange Beschaeftigung beim selben Unternehmen)까지도 격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추세이다. 오늘날 그 어떤 젊은 일본인도 자기 회사가 자기를 정년은퇴때까지 계속 먹여살려주리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자신조차도 회사에 대해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지는 않는다. 이는 그들의 부모가 불평없이 자기 모든 여가와 가족생활을 희생했던 것과 너무나도 비교되는 생활패턴이지만, 점점 더 많은 일본인들이 노동의 기회에서 점차 떨어져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자꾸만 붕괴하고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상황을 보면서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점점 정치 및 경제분야에 있어서 근본적인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믿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사실 2차대전 후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번도 정권을 잃어본 적이 없는 정당인 일본의 자민당은 이러한 일본경제침체의 원흉으로 불리울만한 정당이었다. 정, 관, 경의 유착으로 표현되는 일본지도층 특유의 '철의 삼각공조(Die Kooperation innerhalb dieses eisernen Dreiecks)'는 필연적으로 부패를 낳기 마련인데, 그 중심에는 자민당의 엘리트정치인들이 서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건설재벌과 자민당간의 오랜 유착관계이다. 일본은 공공 건설계획에 심지어 미국이 국방비로 지출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돈을 지출한다. 자민당이 대부분 의석을 장악하고 있는 외진 촌구석까지 불필요한 교통망이 거미줄처럼 짜여져 있으며, 고속철도나 공항이 자리잡고 있고, 고속도로가 뚫려있다. 건설재벌과 자민당의 밀접한 관계는 한쪽이 뇌물을 주면, 한쪽이 그것으로 정치자금을 삼아 금권선거로 매번 집권하는 관계로써도 표현된다. 물론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전부 국민들의 혈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는 동경대법대 출신의 전횡 및 유착과 낙하산인사에서도 드러난다. 다시 말해 동경대법대를 졸업한 일본최고의 엘리트들은 대장성(우리나라로 치면 경제기획원)으로 들어가서 경제관료가 되거나,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변호사를 거쳐 자민당 국회의원이 되거나, 재벌회사에 취직, 엘리트 셀러리맨이 되어 각계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 다음, 천하제일 동경대법대의 자랑스러운 동창회에 모여 이권을 주고받고 이들끼리 일본의 모든 것을 다 헤쳐먹는 것이다. 거기다 이들 중에서도 부패의 핵심고리를 이루는 고위경제관료 출신들은 55~60세 정도 되어 관직에서 정년퇴임한 뒤에도 결코 사회활동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정년퇴임 뒤에는 자기가 그동안 관리하고 있던 회사에 고문으로 취임하여, 정부를 상대로 한 로비스트로 활동하는 것이 그 예이다. 예를 들어 재무부차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고위관료는 정년퇴임후 재벌은행의 고위직에 취임한 다음, 동경대법대 후배이자 행정고시 후배인 차기 재무부차관에게 여러가지 막후로비를 행사하는데, 이러한 관행을 일본에서는 "Amakudari"라고 부른다. 이 말은 원래 "하늘에서 내려온(vom Himmel herabsteigen)"이란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돈벌이의 면에서 이들의 수입은 사실 하늘로 치솟는다고 보아야 한다.

관계와 재계 사이의 통제가 아닌 협조, 같은 기업체 끼리의 경쟁이 아닌 담합은 이렇듯 '일본주식회사(Japan AG)'의 근대화를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동안 "행정적 지도(administrativer Anleitung)"로 이모저모 돌봐주면서 저리의 자금을 융자해주고, 위기시에는 재정보증을 서주는 식으로 끝까지 밀어주던 행정부 및 국회(실질적으로는 동경대법대 동창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일본산업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악랄한 노동조건(특히 노동시간)으로 노동자들을 쥐어짜 신기술을 개발하고 값싼 상품을 개발하여 세계를 석권하였지만, 이러한 범죄적 담합도 그 한계에 봉착한 이상, 이러한 정경유착의 오랜 폐습은 하루빨리 척결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다.

이렇듯 일본의 경제개혁이란 다시 말해 국가와 경제간의 오랜 유착관계를 청산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는 다시 말해 대규모 공공기업들의 사유화과정으로써도 표현될 수 있다. 교통산업이건 발전산업이건 우편산업이건 전신산업이건 모든 국유화된 산업들을 민간의 경쟁에 맡기도록 풀어주고, 그로써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정부의 채무를 획기적으로 경감하는 것이다.

더욱 시급한 것은 금융시장의 개혁이다. 정치권과 관료권의 그 어떤 압력으로부터서도 벗어나, 망해가는 기업에게는 절대로 돈을 꿔주지 않고, 싹수 있는 유망한 기업에게는 이렇다할 정치권의 압력이 없어도 과감하게 돈을 꿔주는 은행만이 금융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대수술을 해야 한다.

사유화(Privatisierung), 탈규제(Deregulierung), 경쟁(Wettbewerb). 이러한 세가지 구호는 마치 독일에서처럼 일본에서도 개혁정책의 핵심구호가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수상 Koizumi Junichiro는 이를 기치로 하여 전국민의 열렬한 지지 속에 수상으로 당선되었고, 압도적 득표율로 일본총선에서 자민당승리를 이끌었다. 수상으로 취임한 뒤 1년 동안 그는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영국의 Thatcher가 했던 것처럼 일본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려고 했다.

그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금융개혁이었다. 은행을 건전화해서 400조에 이르는 일본은행의 악성채무를 2004년까지 모조리 없앤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재정의 안정이었다. 지금껏 무수히 남발되던 국가보조금의 지급을 매년 300조원 정도로 제한하고, 공공건설계획도 10% 가량 축소하여 정부채무를 줄여나가겠다는 구상이다.그 다음은 우편산업의 개혁이었다. 일본의 우편산업은 비단 우체업무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가장 큰 은행업무를 겸하기도 했는데, 이를 과감히 사유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감한 개혁안은 침체에 빠진 일본경제를 다시 살린다는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그는 이러한 개혁안으로 작년 4월에 Hashimoto Ryutaro를 제치고 자민당의 수상후보가 되어 결국 일본의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사실 Hashimoto Ryutaro가 동경대 법대 출신의 전형적인 자민당 엘리트정치인이었던 반면, Koizumi Junichiro는 고작해야 게이오대학(우리나라로 치면 연세대)밖에 나오지 못한 사람이다. 어느 모로 봐도 그는 수상감으로서는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민당 기층간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당고위층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마지막 희망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혼자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기질이나, 파격적인 언행 등의 전혀 정치인답지 않은 포즈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의 서구화된 리버럴한 면모는 언제나 G-8 정상회담에서 재미없는 모범생처럼 경직된 모습만을 보이던 예전의 일본수상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일본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Koizumi열풍도 언제부턴가는 급격히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그의 개혁구상은 취임첫달부터 장애에 부딪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그의 개혁정책은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1월달에는 국민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그리 능력은 있어보이지 않던 여성 외무부장관 Tanaka가 그녀의 부하와 갈등을 빚었다는 이유로 Koizumi수상으로부터 해임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Koizumi의 지지율은 급격히 떨어져, 한때 80퍼센트를 넘어서던 그의 지지율은 이제 40퍼센트까지 하락한 상황이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자민당 내부의 실력자들이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의 뒤에 있던 자민당의 실력자들은 Koizumi에게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만약 무언가를 하겠다면, 우리는 너를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협박을 계속하였으며, 그로 인해 Koizumi는 지난 1년 동안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어떻게 보면 Koizumi는 열정이야 넘쳤을지 몰라도 쟁쟁한 정치계 거물들을 요리할 정치적 전략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그는 맨날 말로만 떠들 수밖에 없었고, 좋은 이미지만 팔고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대중기만술은 언젠가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다수 일본국민들은 진심으로 Koizumi가 뭔가 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지만,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제 Koizumi에게서 실망하고 등을 돌려버린 상태이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그러한 국민들도 Koizumi의 개혁이 막상 자기 밥그릇을 건드릴 것 같으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oizumi의 개혁이 전혀 아무런 성과도 없었느냐 하면 사실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폐쇄적 사회(Geschlossene Gesellschaft)"라 불리우던 일본의 분위기를 국제개방적 분위기로 바꾸어 놓은 것은 빼놓을 수 없는 Koizumi의 업적이다. 예를 들어 일본 자동차 회사의 빅5 가운데 세 개의 회사가 그동안 외국의 합자회사에 팔렸는데 (Nissan은 프랑스의 Renault에, Mazda는 미국의 Ford에, Mitsubishi도 미국의 DaimlerChrysler에 팔렸다. 오로지 Toyota와 Honda만이 아직도 경영의 주권을 지키고 있다), 그 결과는 일본경제의 회복에 확실히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Nissan은 3년 전만 해도 파산일보직전에 있던 회사였지만, Renault에게 팔려간 뒤로 새로 취임한 회장인 Carlos Ghosn은 수천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모든 공장의 문을 닫는, 한마디로 일본인회장이라면 전혀 꿈도 꾸지 못했을 개혁을 밀어붙여 회사를 구해냈다. 올해초에 Ghosn은 Nissan자동차 역사에 다시 없을 기록적인 순익을 올려줌으로써 여러 일본인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칭송을 듣고 있다.

Mitsubishi자동차의 Rolf Eckrodt 회장도 Ghosn의 방법을 그대로 쫓아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Mitsubishi 자동차 역시도 다시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Eckrodt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일본이 지난 60년대 중국처럼 "일종의 문화혁명(eine Art Kulturrevolution)"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본은 세계화가 요구하는 템포에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중년세대들에게 기죽지 않고 거침없이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으려면, 그리고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으려면, 홍위병 같은 것이라도 조직하여 기성의 유명인물들에 대한 사정없는 숙청이나 인신공격, 마녀사냥이라도 감행해야 일본의 분위기가 살아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그는 Koizumi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면서, 그런 기괴한 성격의 소유자만이 일본처럼 원만하고 겸손하며 눈치만 보는 인간만이 넘쳐나는 나라에서 뭔가 한 건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Koizumi의 야심찬 개혁 가운데 하나인 우편산업의 개혁은 지금 자민당 고위층들의 반대에 의해 상당한 위기에 봉착해있다. Koizumi는 비단 우편업무 뿐만 아니라 우체국에서 겸하고 있는 금융업무까지도 민영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일본내 모든 민간저축의 3분지 1을 소화하고 있는 우체은행을 민영화하는 것은 사실 그의 힘에 많이 부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우편산업 종사자들은 오랜 기간 자민당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표밭이었다. 만약 우편산업을 민영화하여 대다수 우편산업 종사자들을 정리해고시키기라도 했다가는, 다음 총선에서 자민당은 완전히 군소야당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편산업의 개혁은 Koizumi가 죽느냐 자민당이 죽느냐를 가르는 일종의 벼랑끝 혈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채무의 축소에 있어서는 Koizumi의 치적이 눈에 두드러진다. 그 무시무시한 Financial Services Agency (FSA)에게 의뢰하여 일본은행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한 결과, 일본의 금융산업 역시도 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으며, 공적 자금도 130조원이나 비축하여 은행의 파산에 대한 대비도 충분히 갖춘 상태이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일본경제의 완전한 붕괴를 두려워하곤 했지만, 이제 그 어떤 경우에도 일본의 경제가 총체적 파산상태에 처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일본경제는 분명히 개혁을 시작한 상태이며, 새롭게 번영할 수 있는 모든 거시경제적 조건들을 빠르게 갖춰나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 비틀거리기는 하는 것 같지만, 일본경제는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런 총체적 개혁의 성공은 사실 일본의 오랜 역사에서 한두번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그 결과가 더욱 믿음직스럽다. 예를 들어 1868년의 Meiji유신을 통해서 일본은 단시일내에 서구화라는 개혁을 이루어냈고, 단숨에 세계열강으로 발돋움했었으며, 1945년 태평양전쟁의 참패 뒤에도 일본은 다시 한번 총체적인 개혁에 성공하여 다시 세계 제2의 강대국으로 올라섰던 바 있다.

따라서 이번에 일본이 개혁에 또 한번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일본은 이미 17~18세기에 쥘부채와 도자기를 전세계에 수출하던 그 시절부터 세계최고의 하이테크를 보유하고 있던 나라였다. 세계최저의 문맹률과 세계최고의 교육열, 그리고 이번에 상처입은 자존심 역시도 일본의 재도약에 원동력이 되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필자주- 사실 도자기는 우리나라 도공들이 임진왜란때 일본에 끌려가 만들어낸 것이었고, 교육열도 일본보다는 우리나라가 더 높은데...)

열렬한 민족주의자로도 알려진 Koizumi수상은 얼마전 국회연설에서 천황 Hirohito의 어록을 주저없이 인용함으로써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불어오는 저 눈바람에도 소나무는 굴하지 않고 서있다." 동경에서 일하고 있는 한 유럽출신의 기업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일본인들은 이번에 자기들에게 주어진 숙제도 착실하게 모범적으로 잘 풀어낼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그 질문에 대해서 그 기업가는 이렇게 답했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남아있을 뿐이다..."

2002.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