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의 글은 "베를린리포트"가 아니라 "함부르크 한인학생회" 홈페이지에 2002년 1월 16일날 제가 올렸던 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건 제4차 세계대전입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독설적 비평가이자 유명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로 알려진 프랑스의 사회학자 Jean Baudrillard는 지난 9월 11일날 미국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기존하는 체제에 대한 당연한 저항이라고 담담하게 평가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테러리즘의 정신(L'esprit du terrorisme)"이라는 그의 글이 프랑스 및 세계 전체에서 커다란 스캔들을 불러일으킨지 4개월이 지난 후 이제 미국의 대테러전이 미국의 승리와 전쟁의 세계적 확대로 이어지는 현상황에서 그의 의견을 다시금 물었다. (1월 16일자)

SPIEGEL: Baudrillard씨, 당신은 9월 11일날 벌어졌던 뉴욕과 워싱턴의 테러에 대해 "당연한 일"이었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당신은 미국이 그 참을 수 없는 헤게모니적 월권으로 전세계의 파괴적인 악감정을 부추겼다고 주장하기도 하셨습니다. 지금 Taliban정권이 붕괴하고 Bin Laden이 한갓 도망자신분으로 전락한 이 시점에서 당신은 아무런 주장도 철회하실 필요를 느끼지 않으십니까?

Baudrillard: 나는 아무것도 찬양하지 않았고,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의사전달과 지식전달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난 단지 어떤 과정을 분석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세계화란 것이 그 무제한적인 팽창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파괴해가는 과정에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SPIEGEL: 이번 사태를 직접적으로 야기한 범인이나 테러리스트에게 이번 공격의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Baudrillard: 물론 행동했던 연기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러리즘과 그로 인한 심리적 공황의 유령은 그러한 행동에 대한 반응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보복전은 미국이 그전부터 때려부수려고 노리고 있던 가시적인 대상에 집중되었습니다. 하지만 9월 11일날 발생했던 그 사건은 그것이 함축하는 의미에서 볼 때 절대 그런 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Afghanistan에 대한 폭격은 완전히 부적절한 보복이었습니다.

SPIEGEL: 미국은 어쨌든 Taliban정권의 야만적인 억압을 종료시켰고, Afghanistan민중에게 평화 속의 새출발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당신의 동료인 Bernard-Henri Levy씨는 그렇게 보시던데요?

Baudrillard: 제게 상황은 그렇게 분명해보이지 않습니다. Levy씨가 보여준 낙관적 세계관은 제게 낯선 것입니다. 그는 마치 B-52폭격기가 세계정신의 사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 위에서 축배를 들었습니다.

SPIEGEL: 이 세상엔 정당한 전쟁이란 없는 겁니까?

Baudrillard: 없습니다. 전쟁의 정당함이란 말은 그 자체 상반된 면을 갖습니다. 전쟁은 가끔씩 정의감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심지어 그러한 정의감은 거의 언제나 전쟁을 일으키는 공식적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떤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고 가장 올바른 견해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그 결과는 보통 그것을 일으킨 자가 상상했던 대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SPIEGEL: 미국의 시민들은 이번에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성과를 얻었습니다. 수많은 Afghanistan시민들은 현실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Baudrillard: 더 자세히 들여다보십쇼. 모든 Afghanistan여성들이 챠도르를 벗은 것은 아직 아닙니다. 그들 고유의 봉건적 사회체제는 여전히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Taliban정권은 붕괴했지요, 물론. 그러나 테러조직 al-Qaida의 국제적 네트워크는 지금도 온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괴수 Bin Laden은 죽었건 살았건 간에 지금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러한 사라짐은 그에게 신비적인 힘을 불어넣어, 그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초자연적 환상을 갖게 할 것입니다.

SPIEGEL: 미국이 Bin Laden의 결박당한 모습이나 시체를 TV에서 보여줄 때에야 비로소 승리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Baudrillard: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문제많은 스펙타클이 될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는 순교자의 역할을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만인의 눈 앞에 내보인다고 해서 그의 마력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문제되는 것은 테러리즘에 대한 통제, 민중에 대한 통제 또는 혁명적 단체의 박멸 이상의 것입니다. 그 내용은 벌써 형이상학적인 것이 돼버렸습니다.

SPIEGEL: 왜 당신은 World Trade Center의 파괴가 그냥 어느 눈먼 광신도들의 자의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이었다고 받아들이시지 못하는 겁니까?

Baudrillard: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재앙이 문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건의 상징적인 의미는 여전히 남습니다. 그렇게 볼 때만이 그 사건이 일으킨 열광과 환희의 이유를 해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는 종국적인 질서, 종국적인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거부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World Trade Center의 쌍둥이탑은 이러한 종국적인 질서를 완전하게 체현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SPIEGEL: 그에 따르면 테러리즘적인 광기는 그보다 더 광적으로 변모해버린 어떤 시스템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으로 설명되는 것입니까?

Baudrillard: 그 시스템 자체는 그 자신의 완전한 요구 속에서 가공할 반격의 객관적 조건을 제공했습니다. 원래 세계화의 조류 속에 내재했던 그 망상은, 마치 불평등한 사회가 범죄자와 정신병자를 양산하듯 수많은 미치광이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이러한 현상들이 그저 악의 현상으로 드러납니다. 테러리즘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것은 Afghanistan을 고향으로 삼고 있는 게 아닙니다.

SPIEGEL: 당신은 세계화와 그것에 대한 저항을 질병의 과정, 심지어 자기파멸의 과정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런 표현은 그 분석에 있어서 도덕적인 부분을 완전히 도외시한, 선정적인 성격을 혹시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Baudrillard: 저는 제 나름대로 철저히 도덕주의자입니다. 제 나름대로 분석에 대한 도덕을 갖고 있고, 공정성에 대한 의무감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참기 곤란한 어떤 것을 은폐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진실로부터 가로막고, 핑계거리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선과 악의 대립 건너편에 있는 어떤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번 일어났던 그 테러사건을 있는 그대로, 모호함에 빠지지 않으면서 분석하려 합니다. 그것을 할 수 없는 자는, 역사를 도덕적으로 왜곡하는 오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SPIEGEL: 하지만 테러행위가 당신의 주장대로 불가피하게, 사실상 운명적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그러한 이유만으로 책임이 없는 것입니까? 그러면 책임을 져야 할 주체는 아무도 없게 되겠군요.

Baudrillard: 제 분석의 개념은 양면적입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그 언어들은 제 자신에게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인과 테러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행위가 될 것입니다. 테러리즘은 계급적 억압과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한 이 시대의 혁명형식이 아닙니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 어떤 명분을 위한 투쟁도, 이슬람의 근본주의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폭력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SPIEGEL: 그런데 세계화가 왜 자기 자신에게 모순이 되어야 합니까? 왜 당신은 세계화가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복지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파괴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Baudrillard: 세계화가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은 유토피아적인 시각이고 어느 정도는 과대광고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시스템도 전적으로 긍정적일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긍정주의적인 유토피아사관은 지극히 살인적인 것이었습니다. 마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보여줬던 것처럼.

SPIEGEL: 당신은 정말 세계화를 20세기의 피비린내 나는 파시즘체제와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Baudrillard: 세계화는 옛날 식민주의가 그러했던 것처럼, 엄청난 폭력 위에 기반해있습니다. 그것은 서구인 대다수에게 이익이 될지는 몰라도, 전세계적으로 향유자보다는 희생자를 더 많이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은 원칙상 모든 나라를 마치 Afghanistan처럼 해방시켜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방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해방입니까? 그런 식으로 행복하게 된 사람들은 그 대가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장기간 군복무에 종사해야 하고, 어떤 때에는 테러까지 당해야 합니다.

SPIEGEL: 당신은 세계화를 식민화의 한 형식으로 간주하면서, 서구문명의 지나친 확산으로서 비판하시려는 겁니까?

Baudrillard: 세계화는 지금 계몽의 종착점이요, 모든 모순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찬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세계화는 모든 가치를 상품화될 수 있고, 금전화될 수 있는 교환가치로 전환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지극히 폭력적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독특한 것, 독자적인 것, 그와 함께 다른 모든 고유문화와 마침내는 모든 비금전적인 가치까지 전부 철폐하는 데서 이상적 상태로서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세계화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쇼. 이런 점에 있어서 저는 휴머니스트이고 도덕주의자입니다.

SPIEGEL: 세계화를 통해서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들이 실현된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Baudrillard: 세계적이란 말과 보편적이란 말은 아주 확실히 구분해야 합니다. 계몽사상이 정의한 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란 초감성적인 이상입니다. 그러한 가치는 자아를 그의 자유와 대립시키는데, 그 이유는 자유란 것이 자아에게는 부단한 임무이고 책임이며, 단순한 권리와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이란 말 속에는 그러한 책임이 완전히 결여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총체적인 거래와 교환의 작위적인 체계에 불과합니다.

SPIEGEL: 세계화는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물질화시킨다는 것입니까?

Baudrillard: 세계화는 인간을 해방시킨다고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릴 뿐입니다. 모든 룰의 철폐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룰을 시장의 법칙 정도로 제한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자유에 대한 대립이며, 다시 말해 환상입니다. 존엄, 명예, 의무감, 희생정신 같은 오랜 귀중한 가치는 그 안에 더이상 들어있지 않습니다.

SPIEGEL: 그래도 세계화가 인권을 무제한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은 이러한 소외과정 속에서도 신뢰할 만한 요새 하나를 만들어주지 않습니까?

Baudrillard: 저는 인권이란 것이 세계화과정에 통합되면서 그것이 알리바이로서 기능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권은 법률적이고 도덕적인 상부구조에 속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선전일 뿐입니다.

SPIEGEL: 그러니까 기만일 뿐이란 말씀이시죠?

Baudrillard: 반어적이지 않습니까? 오늘날 서구세계의 정치적 이해가 인권개념을 타자의 정복을 위한 무기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이런 모토로 말이죠. 우리의 가치를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서구세계는 제3세계에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이유로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지만, 실제로 그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자유를 위한 자치적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 명령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자유를 명령에 대한 복종에 연관시켰던 Kant의 정언명령을 우스꽝스럽게 변태시킨 것입니다.

SPIEGEL: 그러면 (후쿠야마가 말했던) 역사의 종말(완성), 민주주의의 절대적 지배란 세계적 독재의 새로운 형식일 뿐이겠군요?

Baudrillard: 예, 맞습니다. 그 어떤 저항도 인정할 수 없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지배란 불가능합니다. 테러리즘은 그 어떤 다른 저항수단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 일어납니다. 모든 체제는 자기에게 거슬리는 모든 것을 테러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 느끼게 돼있습니다. 서구의 가치란 것은 상반된 면을 갖는 것입니다. 특정한 역사시점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고 진보를 이룩할 수도 있으나, 다른 역사시점에서는 스스로를 왜곡하게 돼있고 종국에는 자기 스스로 모순에 빠지면서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SPIEGEL: 세계화라는 원천적인 테러리즘에 대한 저항이 정말로 해결불가능한 것이라면, 테러리즘에 대한 보복전쟁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겠습니까?

Baudrillard: 미국 대통령 Bush는 동지와 적이라는 대칭개념을 재발견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미국이 과거에 익숙했던 구도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현재 미국인들은 이번 전쟁을 마치 늑대떼로부터 자기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전쟁인 것처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그런 사고방식이 효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진정한 적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전선은 없고 불가침의 국경도 없습니다. 진정한 적은 우리 문화의 핵심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동안 세계의 전쟁은 세번의 흐름을 따라왔습니다. 첫번째는 제국주의적 이익을 둘러싼 민족간의 전쟁, 두번째는 파씨즘적 망상으로 인한 국가간의 전쟁이었으며, 세번째는 체제와 이데올로기간의 냉전이었습니다. 이제 네번째 세계대전은 인간문명의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SPIEGEL: 그러면 이번 전쟁은 당신의 견해에 따르면 승리가 불가능한 겁니까?

Baudrillard: 아무도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성을 최소한도로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지, 어느 편이 이기는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테러리즘은 그 어떤 정치적 계획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종국적 목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한 테러리즘은 사실 현실이면서도 모호한 것입니다.

SPIEGEL: Bin Laden과 그의 이슬람 추종자들은 Allah의 은총에 의한 엄격한 이상사회를 꿈꾸고, 그런 사회를 위한 설계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Baudrillard: 어쩌면 그들을 테러리즘으로 몰아넣은 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모든 Islam전문가들이 그런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9월 11일의 테러를 저지른 공작원들은 그 어떤 요구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Islam근본주의는 어떤 목표가 있다기 보다, 단지 세계화를 거부하기 위한 징후적 형식일 뿐입니다. 그 추종자들은 구체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려 하기 보다, 그들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어떤 것에 그저 저항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SPIEGEL: 모든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는 어떤 식으로든 문화적 진화가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고려해보실 수는 없습니까? 서구문명의 세계적 팽창이야말로 그러한 발전적 진화를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까?

Baudrillard: 왜 당신은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주장하시지는 않으십니까? 문화는 언어와 같습니다. 모든 문화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로 완전한 예술작품입니다. 우월한 언어와 열등한 언어의 위계구조는 없습니다. 그런 문화적으로 독특한 부분들을 보편적인 가치에 따라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세계공통언어의 구현을 주장할 수 있지만, 그러한 단일화 속에는 절대적인 위험이 존재합니다.

SPIEGEL: 근본적으로 당신은 도덕적 진보의 이상을 부인하고 있군요. 그러면 당신이 지키고자 하는 유일한 것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도 지닐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선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악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아적이면서도 범죄적인...

Baudrillard: ... 예, 맞습니다. 독자적 특유성이란 모든 형식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악랄한 것도 폭력적인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특유성은 하나의 예술작품입니다. 저는 전적으로 선한 문화와 전적으로 악한 문화가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숙명적인 일탈은 물론 일어날 수 있지만, 선과 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악은 선이 늘어나는 그만큼 비례적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과학적 이성의 영역을 제외한 부분에서 진보의 개념이란 사실상 문제가 있습니다. Montaigne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 인간성 속에서 악한 부분을 제거하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생활의 기본조건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Würde man das Böse im Menschen beseitigen, zerstörte man die Grundbedingung des Lebens)."

SPIEGEL: 지옥이 없으면 천당도 없고(Kein Himmel ohne Holle), 천벌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keine Rettung ohne Verdammnis ). 그러한 이원적인 세계관은 비관주의나 운명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Baudrillard: 운명주의는 세계에 대한 나쁜 해석을 제공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체념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체념하지 않습니다. 저는 미래에 대해 확실하고도 명징한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게임의 룰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에 관한 한 저도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자입니다.

SPIEGEL: 하지만 당신의 악에 대한 인식은 당신을 악과 싸우게끔 만들지는 않을텐데요?

Baudrillard: 악과 싸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의 무리를 쳐부순다는 식의 일은 저에게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은 불가분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운명적입니다. 우리 운명의 구성부분입니다.

SPIEGEL: 왜 서구문명은 악의 존재를 그렇게 감당하지 못했고, 그것을 몰아내려 하거나 부정하려고 그렇게 애썼다고 생각하십니까?

Baudrillard: 서구문명권에서 악은 불행과 마찬가지인 것으로 간편하게 해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아와 부정, 억압과 같은 불행들은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러한 징악의 의지는 인문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비장하면서도 온정 어린 전망이었고, 또는 약자에 대한 영원한 동정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악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그 자체입니다. 불행은 절대로 가져서는 안되는 세계의 모습인데, 서구인들이 악을 불행과 동일시하게 된 것은 20세기에도 계속 이루어진 산업의 발전 덕분이었습니다.

SPIEGEL: 불행은 개량이 가능하지만,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합니까? 악이 물리쳐지지 않는 한?

Baudrillard: 불행은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그리고 악은 인간의 합리성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서구세계의 환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술적인 완벽성이 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 인간은 이 세계의 도덕적인 완벽성과 완벽한 미래까지도 가능하다고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환상에 따르면 모든 것은 구원되어야 합니다. - 그 속에 이 시대의 민주주의라는 이상이 존재합니다. 심지어는 인류의 생물학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완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전자의 개량도 가능하게 됩니다.

SPIEGEL: 서구문명이 신을 통한 구원의 신앙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Baudrillard: 그건 원래 지금까지의 모든 논점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질문입니다. 악이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제게 자극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악이 일단 존재한다, 그건 당연한 사실입니다. 왜 선이 존재하는가? 기독교에 따르면 그것은 본래 기적입니다.

SPIEGEL: 그래서요? 신을 통하지 않고 그것을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Baudrillard: 이미 여러 사람이 신을 통하지 않고 그것을 설명해보려 했습니다. Rousseau와 그밖의 18세기 철학자들이. 물론 아주 명쾌한 것은 아니었죠. 선을 정당화하기 위한 최선이며 가장 간편한 가정은 신을 전제하는 것이었죠. 서양인들에게 신은 민주주의와 마찬가지의 것이 되었습니다. 가장 결함이 적고 따라서 가능한 모든 해결책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나은 것.

SPIEGEL: 만약 누가 듣는다면, 당신은 중세시대 순결파 이단들이 갖고 있던 사고와 통해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Baudrillard: 아 예, 전 순결파의 세계관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약간 마니교도이거든요. ...

SPIEGEL: 밝음과 어둠, 선과 악의 영원한 공존을 긍정하신다는 점에서...

Baudrillard: ... 예, 그런데 순결파는 물질세계를 악마에 의해 창조된, 악하고 나쁜 것으로 생각했죠. 동시에 그들은 신의 존재, 신성한 것과 완전한 것의 가능성을 믿었다는 점에서 저와 달랐습니다. 물론 그러한 시각은, 악을 단지 선의 들러리로서 점점 더 빛을 잃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정통 기독교의 시각보다 훨씬 더 신선한 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SPIEGEL: Baudrillard씨, 대담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2002.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