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2-17 00:00:00
- 이하의 글은 2004년 2월 13일부터 2004년 2월 23일까지 저의 "개인낙서장"에 게재했던 저의 잡글 "사회적 시장경제"와, 그로 인해서 2004년 2월 24일부터 2004년 3월 9일까지 제 홈페이지 방명록에서 벌어졌던 여러 손님들과의 논쟁글들을 발췌, 요약해서 옮긴 것입니다. -
고래 wrote:
2. 3.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허구적 자유의 이념이 평등의 이념을 왜소화시키는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 모델과 대립되는 경제모델로서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김누리 교수가 제시한 위의 세번째 명제도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매한가지다. 우선 독일의 경제 모델이 미국식 경제모델과
다른 점을 굳이 찾는다면 교육과 의료 정도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 이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독일이나 미국이나
그리 큰 차이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는 교육과 의료부문조차도 독일이 좀더 '사회연대'를 강조한다거나
미국이 좀더 '자유시장'을 강조한다거나 그렇게 거칠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우선 교육만을 놓고 본다면 독일은 이미 수백년전부터 교육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나라이긴 했다. 특히 대학교육은 독일에 있어서 국가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국가엘리트들의 양성소라고 생각되어왔으므로,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라이벌 선진국들을 독일제국이 단기간에
따라잡기 위해서는 국가의 교육재정을 소수의 대학생들에게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마치 옛날 소련이나 동구권의
국가대표 체조선수들이 국가의 집중투자와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미국과 서구의 체조대표선수들을 간단히 눌러왔던
것처럼 국가관리로 국가의 인재들을 집중양산해내야 한다는 사고가 독일에서는 옛날부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기도 했다.
반면에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 교육은 사적인 재화에 속하는
것이었다. 교육이란 것은 그 피교육자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국가에게 이익으로 돌아가는 것은 별로
없으며, 설령 그러한 피교육자들의 숫자가 많아지는 게 국가에게 큰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비용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할 것이 아니라 그 피교육자들이 자체적으로 조달한 비용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매우 강한 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부터 영미권은 대학의 숫자나
대학생들의 숫자가 교육시장의 수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늘어났던 반면에 독일의 경우는 대학의 숫자도 적은 숫자로
고정되어 있었고 대학생들의 숫자도 적은 숫자로 고정되어있던 편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에 있어서 대학생들이란
국가가 국가예산으로 양성해야 하는 국가자원, 국가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지면 그
이외의 국민들에게 조세적인 측면에서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대학지원희망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대학생 정원을 마구 늘렸다간 그만큼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걷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대학생 정원을 비정상적으로 꽁꽁 묶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고나 할까? (마치 우리나라의
사법시험 합격인원과도 비슷하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경우 대학입학에서 탈락하는 자들을 선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기 때문에, 독일의 교육관청은 옛날부터 학력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에 들어가보려 하는 학생들을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예비고사 등의 시험제도를 통해 국가적으로 미리 걸러내는
것이 큰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의사야 어떻든 국가가 앞장서서 학력에 따른 국민간의 신분차별 및
국가적 혜택의 차별을 조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하지만 반대로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개인이 대학을 설립하건 안 하건, 대학을 가건 말건 그것은 국가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국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대학을 갈 수가 있었고, 많은 개인들이 사립대학을 세워
학생들의 등록금을 받아 교육사업을 할 수가 있었으며, 학력이 낮은 학생들은 이름이 없는 사립대학에, 학력이
높은 학생들은 이름이 있는 사립대학에 입학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민간대학간의 치열한 순위경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론 학생들이 그 사립대학에 등록금을 얼마나 내건, 그 돈을 아껴서 개인적으로 독학을 하건, 그것
역시도 정부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학생들이 돈이 많아서 그 사립대학 본관 앞에 잔디밭을 깔아주고
대학에 입학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과 사립대학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지 정부가 그 문제에 대해 신경써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독일의 대학들은 그 수업료가 원칙적으로 면제여서 가난한
학생들도 별다른 걱정 없이 대학에 진학할 수가 있었지만, 그 대신에 국가의 그러한 수업료면제혜택을 받는
소수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 개인들에게 항상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국이나 영국의
교육시스템에서는 단지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특정집단에게 국가가 특혜를 베푼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대신에 공부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가는 학생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독일처럼 국가의 공권력에 의한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의 재력에 따른 신분의
차별이 이루어졌던 셈이다.
하지만 크게 보건대, 독일이든 미국이든 공부를 잘해서 학업성적이 상위
5% 이내에 들어가고 중산층 이상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학생들이 웬만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데에는 큰
차이점이 없었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공부도 반에서 밑바닥을 기는 아이들이 어차피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는 점도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설령 독일에는 수업료가 없고, 영미권에는 수업료가 있고 하는
차이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독일처럼 국민들이 대학예산을 위한 세금을 국가에 지불한 대신 대학수업료를 안 내도
되는 것이나, 미국처럼 대학에 수업료를 지불하는 대신에 국민이 국가에 그만큼 세금을 덜 내는 것이나, 국민들
입장에서는 마찬가지인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독일은 68혁명 이후 좌파 대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미국처럼 대학의 정원을 대폭 늘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프랑스도 마찬가지이다), 이로 인해
독일과 미국은 대학생들의 숫적 두께 역시도 비슷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아직도 독일의 대학진학률은 미국의 그것에 비해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국립대학입시에서 떨어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사립대학들도 독일 내에서 많이 생겨났고, 국립대학이 미처 학과를 개설하지 못했던
특수전공분야의 사설 직업전문대학들도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이제 독일이나 미국이나 국민당 대학생의 비율은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독일에서도 국가의 입학허가를 못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대학에 진학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독일내의 높아진 엘리트교육수요에 따라 독일내에서도 미국처럼
고급엘리트교육을 지향하는 사립대학들이 점차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립대학들은 학생들한테서
비교적 비싼 수업료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일부 독일학생들은 이러한 독일내
사립대학들에 입학하여 보다 사적이고 특화된 교육을 받기를 희망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물론
독일헌법상 국가는 이러한 사립대학들의 설립을 막을 수가 없었으므로, 사실상 공교육을 위주로 한 독일의
교육체제는 사교육을 위주로 한 미국의 교육체제를 적절히 혼합하는 형태로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반면에 미국 역시도 이미 오래전부터 사교육 위주에서 사교육과 공교육을 적절히 혼합시킨
형태로 교육체계가 바뀌어가고 있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원래 미국은 1636년에 설립된 Harvard대학,
1701년에 설립된 Yale대학, 1746년에 설립된 Princeton대학 등의 역사 깊은 사립대학들이
명문대학으로 군림하며 대학교육을 주도하는 체제였지만, 1868년에 설립된 California주립대학(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Berkeley대학이다) 등 수많은 주립대학들이 비교적 적은 수업료를 받고 독일의
국립대학들처럼 상당히 높은 수준의 대학교육을 실시하면서 사립대학과 공립대학이 병존하는 시스템으로 점차
대학교육체계가 바뀌었던 게 사실이다. (이건 마치 독일의 주정부들처럼 미국의 주정부들이 국민들의 세금으로
조성한 막대한 교육예산을 주립대학에다 쏟아붓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미국이나 영국의 명문사립대학들
역시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강력한 장학제도를 실시하였으며, 학비융자제도 역시도 크게 발달하여, 이제
미국에서도 학력만 우수하면 아무리 집안이 가난하더라도 대학진학을 걱정할 필요는 없게끔 교육환경이 바뀌게
되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교육의 기회를 장학이라는
'시혜'로 바라보는 시각과 개인의 당연한 '권리'로 바라보는 시각 사이에는 원칙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미국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미국대학에서 그들이 받는 '장학금' 역시도 '시혜'라기 보다는 하나의 '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또한 독일에서 그 수많은 대학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독일국민들(특히 고졸학력에 자기 자식들도 대학에 보내지 못한 독일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국립대학생들이
누리는 그 무상교육의 기회 역시도 '권리'라기 보다는 일종의 '시혜'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이제 더 이상 교육문제만을 가지고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모델이라느니 미국은 자유적
시장경제모델이라느니 하며 차별성을 논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뿐이랴? 의료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물론 자유시장의 이념에 맞게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지 않고 있고, 독일은 그와
반대로 거의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고 있지만, 그것도 피상적인 고찰일 뿐이고, 그
실체를 들여다 보면 둘 간의 차이점은 그리 크지 않음을 금방 확인해볼 수가 있다.우선 독일의
경우를 보면 소득이 월400만원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국민은 의료보험에 원칙적으로 가입이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의료보험들도 워낙 여러가지가 있기 때문에 보험료도 천차만별이며, 소득이 대략 월400만원
이상 되는 사람들은 굳이 의료보험에 가입돼 있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13.5%의 보험료율에 따른
국민간의 소득재분배효과도 그리 크지가 않다. 다시 말해 독일의 의료체계는 사회주의국가들이 채택하는
무상의료체계도 아니고, 우리나라 같은 데서 채택하는 통합의보체계도 아니며, 민간보험회사간에 폭넓은 자유경쟁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쟁의 의료체계를 원칙적으로 택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무슨 대단한 '사회적
연대'를 운운할 수는 없게 돼있다는 것이다.
또한 독일내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외국인이나 실업자,
행려병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발달된 독일의료보험의 혜택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될 수밖에 없게 돼있으므로,
이들 중에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을 얻게 될 경우 그들은 혼자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독지가의
자선을 기다리거나 둘 중 하나를 기대할 수밖에 없게 돼있다. 물론 우리나라보다야 훨씬 낫긴 하지만, 이런
정도의 의료혜택이 우리가 말하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의료부문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한편 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은 전체인구의 84%가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대략 16%이다. 비록 미국은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지 않고
있지만, 어쨌거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의료보험에 가입이 되어있는 것이다. 또한 보험에 가입돼있지 않은 16%의
미국국민들 가운데서도 상당수는 지나치게 높은 보험료율을 혐오하는 고소득 자산가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머지
최하층 빈민들(대다수는 흑인이나 히스패닉계통)을 위해서는 많은 수의 자선병원들이 건립되어 무료진료활동을
벌이고 있는 시스템이다. 설령 그러한 자선병원들의 의료서비스가 그리 신통치 못한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포괄적 의료서비스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상당수의 외국인이나
실업자, 행려병자들 같은 사람들이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 앞에서 충분한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은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독일의 사정이나 '자유 시장경제'라는 미국의 사정이나 거의 마찬가지라는
얘기이다.
물론 독일은 그밖에도 주택보조비를 비롯해서 광범한 사회보장정책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어쨌거나 미국보다는 '사회적 연대'와 '사회적 재분배'가 더 실현되고 있는 나라가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가만 보면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독일이나 미국이나 장애자, 편부모자녀,
노인, 실업자, 산업재해 피해자 등에 대한 강력한 사회보장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미국에
민주당의 Clinton대통령이 집권하고 독일에 기민련의 Helmut Kohl수상이 집권하고 있던
1990년대에는 미국이 자녀양육비 지급 등에서 독일보다 더 두터운 사회보장을 실시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독일과 미국의 사회복지예산비율을 잠깐 비교해보면 해마다 그 비율이 자꾸 바뀌긴
하지만 대략 독일은 국가총예산의 약 36%를 사회복지예산에 쓰고, 미국은 국가총예산의 약 24%를
사회복지예산에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분들께서는 독일이 국가총예산의 36%를
사회복지예산에 쓰고 있는 반면, 미국은 독일보다 약 12%를 사회복지예산에 덜 쓰고 있는 이상, 어쨌거나
독일이 더 '사회연대'나 '사회적 재분배'에 신경쓰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냐고 주장하실런지도 모르겠다.
단적으로 비교해서 독일은 미국보다 사회복지예산을 절반 가까이 더 쓰고 있는데, 미국과 독일 간에 별 차이가
없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반박이다.하지만 그렇게 반박하시려는 분들께서는 먼저 미국경제와
독일경제의 덩치를 한번 비교해보시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미국은 인구가 3억에 육박하고 1인당 GNP가 무려
3만 5천달러에 이르는 나라인 반면에, 독일은 통일 이후 1인당 GNP가 2만 6천달러에서 제자리걸음하는 중이고 인구
역시 8천2백만에 불과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솔직히 미국의 사회복지수준과 독일의 사회복지수준을 비슷하게
맞춰주려면 독일총예산의 최소한 36%는 사회복지예산에 퍼부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독일의 사회복지수준은 오늘날
미국의 사회복지수준보다 훨씬 더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미국은 독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국방예산을 지출하고 있으며, 천문학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경제구조나 극심한 빈부격차 역시 문제가 많다. 그러나 미국의 복지예산비중은 지금 현재에도 정말 빠른 속도로 증대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미국의 복지예산비중이 독일의 그것을 앞지르지 않나 생각될 정도이다.)
더군다나 독일은 교육, 문화 등의
부문에서 지나치게 방만한 사회복지예산을 집행하고 있는 중이지만 미국은 대학교육도 유료이고, 문화시설에 대한
보조금도 대기업가들의 자선사업에 대부분을 맡기고 있다. 독일에 비해서 사회복지예산을 집행할 분야가 비교적
좁은 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복지예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빈민계급이 실질적으로 손에 쥐는
최저생계비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 부분에서 미국과 독일 간에 과연 얼마나 차이가 날지 한번 생각을 해보셔야
할 것 같다. 난 물론 미국에 가본 적이 없지만, 미국의 헐리웃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슬럼가의 흑인청소년들
모습이나 독일의 대도시 빈민굴에서 뛰어노는 터키아이들 모습이나 그리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게 보인다.
상대적으로 잘 사는 백인애들보다 약간 더 추레해 보이면서도 애들이 잘 먹어서 얼굴에 기름기가 잘잘 흐르고
옷도 나름대로의 개성을 살려서 멋지게 잘 입고 다니는 것은 미국의 빈민소년들이나 독일의 빈민소년들이나 둘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진보지식인들은 미국더러 '허구적인 자유의 이념이 평등의 이념을 왜소화시킨 경우'라거나
'자유의 밀실이 평등의 광장을 동공화시킨' 경우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미국에 대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내게
종종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게 된다. 국가총예산의 고작 5% 정도를 사회복지예산에 쓰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국가총예산의 무려 24%를 사회복지예산에 쓰고 있는 미국을 타박한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그러면서 미국모델
대신에 국가총예산의 36%를 사회복지예산에 쓰고 있는 독일모델을 따르자느니, 그것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탄력적 평등과 실체적 자유에 기초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동공화된 평등과 허구적 자유에 바탕을 둔 미국의 자유시장 경제 모델에 대한 현실적 대안의 성격을
지닌다'느니 뭐니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뱁새가 자기 주제파악도 할 줄 모르고 황새다리가 더
기네, 아니네, 여기 있는 두루미 다리가 더 기네, 거기 있는 너 황새는 무슨 다리가 그렇게 짧아! 하고
호통치는 꼬락서니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미국의 두터운 사회복지제도를 보면 미국이나
독일이나 '사회적 시장경제'이긴 마찬가지이며, 둘 다 우리나라보다 더 두터운 사회복지정책을 펴는 것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과 독일은 똑같이 대기업 위주의 경제모델이라는
점에서도 상당히 닮은 꼴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은 미국이 약육강식의 졍글 같은
자유시장 경제모델이므로 덩치면에서 우월한 대규모 재벌기업들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는 반면,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모델이므로 중소기업들이 국가의 배려를 받아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다양하게 발달해 있을 것처럼 생각들을
하시는데, 실제로 보면 미국이나 독일이나, 시장에서 대기업들이 주로 판치는 것은 거의 공통된 현상이며 이
점에 있어서도 두 나라의 차이점은 거의 없음을 자연스럽게 발견하실 수가 있게 된다. (아니, 오히려 1990년대 이후 지식정보산업 위주로 이행한 미국경제에서 중소기업의 비중은 독일경제에서보다 더 커지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독일에서 '사회적 시장경제'가 성립되던 당시부터 그러했다. Nazi시절 Hitler에게 협조해서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식으로 Nazi들의 신임을 얻은 다음 Nazi당으로부터 전쟁물자를 수주받아 땅 짚고
헤엄치는 식으로 거액의 돈을 벌어들여 성장했던 수많은 독일 재벌기업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제 미국의
천문학적인 원조물자 분배를 담당하게 된 CDU 정치가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비호하에 안정적인 고속성장을
이뤄나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삼성, 현대, 대우 같은 대재벌들이 박정희 정권의 비호와
배려하에 급속도로 성장한 역사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로써 1945년 당시
재벌기업해체(Konzernentflechtung)를 목이 터져라고 외쳐대었던 자유주의좌파 그룹들(die
Linksliberalen)과 Freiburg학파(= '질서자유주의자'들이라고도 불리움) 사람들의 주장은
'사회적 시장경제'의 실천가 Ludwig Erhard에 의해 완전히 묵살될 수밖에 없었으며, 독일의
경제정책은 마치 Nazi시절처럼 CDU의 경제관료들과 대재벌기업의 이사들이 공동결정해서 자원을 분배하는
Faschist적 방식으로 흘러가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그리고 이러한 거대집단의 권력독점
현상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졌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의 초기자본주의에 있어서도 대자본은
시장경쟁이 아니라 철도, 전화, 전기, 철강, 석유 등에 대한 독점사업권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며, 그러한
독점권의 허가와 금융지원의 대가로 미국의 정치가들은 대자본한테서 막대한 액수의 정치자금을 수수하여 이미
일찍부터 미국의 정부와 거대자본은 매우 밀접한 공생관계를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미국
정부는 국제적 경쟁에 의해 미국의 대자본이 무너지지 않도록 높은 보호주의 무역장벽을 설치하면서 국내자본을
관리했는데, 이러한 보호주의는 20세기 전반기까지 미국의 경제정책을 대표하는 이념이 되기도 했었다. 독일이나
미국이나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경제정책방향이 거의 비슷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대기업노조가 기득권화하면서 국가 및 거대자본과 결탁하고, 대기업노조와 국가, 그리고 거대자본이 3각으로
밀접하게 공조하는 체제가 일찍부터 뿌리 내렸다는 점에 있어서도 독일과 닮은 점이 많았다. 대기업노조와
대기업경영진이 담합하여 하청기업과 중소기업 같은 더 약한 경제주체들을 쥐어짜는 일이 미국에서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당들은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간에 대규모 석유자본과 GM, Ford
등의 자동차재벌, AT&T나 Microsoft, IBM 같은 대규모 독점기업들로부터 각각
수백만달러씩의 정치헌금을 받아 운영되는 정당들이었으므로, 미국의 정당조직들이 이러한 재벌독과점체제를
개혁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CDU나 SPD가 '사회적 시장경제' 특유의
'조합주의'에 발목이 잡혀 독일의 대기업조직이나 노조들의 독과점적 지배력을 분쇄할 수가 없었던 것처럼,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도 미국의 대기업들과 노조들에게 맞선다는 것은 매우 힘든 노릇이었던
것이다.
물론 미국의 민주당과 달리 독일의 사민당(SPD) 같은 경우는 재벌기업보다 노조의 후원
속에 성장한 전형적 좌파 정당이며, 독일의 대기업-노조간 결탁체제는 미국보다도 더 견고하여, 독일식
'참여자본주의'나 '조합주의'는 미국의 '주주자본주의'와 명확히 구별되는 면도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는 기업주들의 소유권이 워낙에 확고하게 보장되고 있으므로, 기업주들의 자유로운 영업활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기껏해야 소액주주들에 의한 집단소송의 방식이나 우리사주제에 의한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방식
등이 가능할 뿐, 독일처럼 회사에 대한 아무런 지분권도 없는 노동자들이나 정부, 이해당사자들까지 모두
회사운영에 간섭하며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식의 '사회적
시장경제'나 '참여자본주의'가 노동자 및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는 상당히 정치적, 온정주의적, 국가주의적인
형태로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영미식의 '주주자본주의'는 자유시장경제모델과 자본주의경제의 기본원리에 더
충실한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Adam Smith가 이미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밝힌 바 그대로 '주식회사'는 그 본질상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원리에 원천적으로 반하는 것이었으며, 이
'주식회사'제도는 본질상 자본의 집적과 집중, 소유자의 경영책임회피와 국가 및 시민사회에 대한 위험책임
전가, 그리고 기업에 과도할 정도의 공공성을 부여하는 제도로서 국가권력과 경제권력간의 결탁을 정당화하는 데
필연적으로 악용될 수밖에 없는 회사형태였기 때문이다.특히 이러한 '주식회사' 형식을 이용해서
그 어떤 사업분야보다도 거대한 자본을 유치하고 마치 국민기업이라도 된 양 국가의 배려와 보호를 향유했던
재벌기업들은 바로 전형적인 거대장치자본들인 미국의 석유재벌과 군산복합체 기업들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가장 자유시장과 경쟁을 강조한다고 하는 공화당은 실상 이러한 석유재벌이나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 겉으로는 '자유경쟁모델'이나 '작은 정부'를 외쳐대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자유경쟁모델'을 위한 개혁을 추진한 적이 없었다. 예를 들어 최근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으로서는 Ronald
Reagon과 George H.W. Bush, 그리고 그의 아들인 George W. Bush(현직) 등을 들
수가 있겠지만, 그들은 자유시장모델을 따르긴 커녕 정부의 부채를 대규모로 늘리고, 국방예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군산복합체에 대규모의 국가보조금을 지급하고, 소수의 석유업계와 군산복합체가 갖는 이익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의 전쟁까지도 불사했던 Faschist적 지도자들이었던 것이다. 우스운 것은 정부의 부채를
줄이고 독점기업을 해체하며 '작은 정부'를 실현함으로써 '자유시장경제모델'의 이상에 근접하는 데 더 성공했던
대통령은 오히려 공화당 출신보다도 이른바 '신좌파'라고 불리웠던 민주당 출신의 Bill Clinton이 더
가까웠다는 점에 있다.
또한 미국에서 대부분 공화당을 지지하며 공화당의 경제정책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던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은 지나치게 탈정치화된 구상과 경제중심주의에 사로잡힌 나머지 정치 및
경제부문에 있어서 '자유시장모델'과는 전혀 거리가 먼 망발들을 해대면서 어지러운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는 Chicago대학의 Milton Friedman교수로서, 그는 1973년 칠레의
Pinochet가 우익군사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미국의 Nixon정권이 이 쿠데타를 지원해줬던 것을 지지한다며
어처구니 없는 망언을 내뱉기도 했던 사람이었는데, 경제에 있어서는 그렇게도 '자유시장'을 외쳐댔던 사람이,
정치면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경쟁'과 '시장원리'를 옹호하지 않고 '군사독재'를 열렬히 지지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 미국의 '자유시장경제모델'이 갖고 있던 실체를 보여주는 단서가 아니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Friedman과 같은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은 본질적으로 '독과점자본'과 '독재체제'을 지지했던
사람들이었지, '자유시장'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그런 점에서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의
Ludwig Erhard나 미국식 '자유시장경제모델'의 Friedman이나 겉보기와는 달리 속으로는 거의
마찬가지인 자들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미국의 경제는 노동시장의
유연화개혁에 성공하여, 예전에 조금이나마 갖고 있던 독일식 조합주의의 색채를 거의 완전히 버리고
'신자유주의' 쪽에 상당히 접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반면에 독일은 아직도
조합주의의 잔재를 씻어버리지 못했으며, 여전히 독일은 노동자들의 해고가 어렵고, 노동시간이나 노동조건 등에
있어서도 충분히 유연화가 관철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올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 독일은
집권사민당정부가 주도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경직된 노동시장을 미국처럼 유연하게 만들고 국가재정의 규모와
불필요한 복지지원, 정부간섭을 축소하기 위해 온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노조의 힘도 그에 따라 점차 약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다. 이는 물론 독일이 미국처럼 되어간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그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Frederick Taylor - Henry Ford가 구축했던
대량생산-동시생산-계획생산-표준화생산체제가 무너지고 1980년대부터 정보화사회에 기반한
다품종소량생산-차별화생산-탈중심화생산-탈규격화생산의 지식정보경제체제가 전세계에 파급되면서 필연적으로 모든
나라들이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개혁과 산업구조개혁의 양상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옛날 산업화시대에는 거대규모의 장치산업들이나 대재벌들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국가가
이러한 재벌기업을 후원하면서, 그만큼 그 기업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미국이건 독일이건 당연히
용납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 정보화시대에서 이러한 거대장치산업과 대재벌기업들은 독일이건 미국이건
자연스럽게 해체될 수밖에 없고, 각기업들이 조직을 경량화하며 군살을 빼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와 대재벌간의 유착과 협력 역시 사라지고, 노동자에 대한 국가와 기업의 포괄적인 보호 역시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으며, 미국모델만의 특유한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 교수의 주장처럼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모델,
미국은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마치 두 모델이 서로 많이 다른 것처럼,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된다. 설령 이러한 논리가 옳다고 하더라도 이는 오늘날의
경제적 추세에 비추어볼 때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는 미국모델이니
독일모델이니 하는 것을 떠나 전세계적인 경제흐름의 관점에서 미래를 바라볼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4. 2. 17.
jake wrote:
흔히 알고 있던 통념에는 반하는 내용이군요. 사회복지에서 미국과 독일의 차이는 과장되어 있다는... 북구는 어떨까요? 미국의 맑스주의자 에릭 올린 라이트가 현존하는 사회들 중 사회주의 사회에 가장 가까운 사회로 보았던 스웨덴은?
jake wrote:
그리고, 사회복지가 아니라 기업지배구조의 측면에서 영미의 주주 자본주의와 독일의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를 대별하는 관점도 상당히 보편적인 것 같습니다만.
지나가다 wrote:
공감가는 내용 잘 읽었습니다. 제가 보는 스웨덴은 사회주의국가라기 보다는 인구의 80%가 중산층이었다는 (80년대까지) 일본에 더 가깝지 않나합니다. 즉, 실제의 모습은 알고보면 독일과 미국이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듯이 스웨덴과
지나가다 wrote:
미국도 그렇게다르지 않다는 것이 스웨덴 회사에서 일하는 저의 생각입니다. 어떤 체제냐, 제도냐 이전에 스웨덴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것이 우리가 100년을 토론해서 프로포절을 만든다고해도 따라갈
지나가다 wrote:
수 없는, 그 '문화' 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우리의 문화, 그 실체가 무언가는, 그리고 어떻게 바꿀 수 있나는 계속 연구해야겠지요.
jake wrote:
거칠게 말해서, 요즘 한국의 온건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이냐 유럽이냐"라는 선택지를 위주로 사고하는 것 같더군요.
jake wrote:
미국의 야만적인 자본주의보다는 유럽의 인간적인 자본주의가 낫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저도 이 생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jake wrote:
저는 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미국과 독일, 스웨덴의 제도들이 어떻게 다르며 다르다면 어느 쪽이 나은지 자신 있게 말할 정도는 못되구요. 아직은 모색 중이라고 해야겠지요.
jake wrote:
다만 중앙계획경제에는 분명히 반대합니다. 소련형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통제를 받는 '민주적' 계획경제에도 동의하지 않구요.
의문 wrote:
이 곳 주인장이 통념에 반하는 내용을 설득력있게 주장했다고 생각되지 않구요, 그런 설명을 신뢰할 만한 자리에 있는 분도 아니라고 생각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