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소 년 시 절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나는 잠시 이중의 자아 속에서 갈피를 못 잡던 상태에 놓여 있었던 듯하다. 나는 당시 남한사회를 지배하던 군사문화 속에서 수천 휘하를 거느려본 경력을 자랑하던 소년영웅이었고, 한편으로는 쉽게 상처 받는 것처럼 남에게 잔인하게 상처 주는 것도 싫어하는 심약한 소년이었다. 나는 '나폴레옹'과 '씨이저'의 위인전을 읽고, 그들이 갖고 있는 선악 양면성의 매력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넌 그런 타입이 아니야'라는 소리에 내 귀를 기울이곤 했다.

당시는 소신 있는 지식인들이 모두 뒷전에서 숨을 죽이고, 기성세대로서는 권위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가치관도 찾을 수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이런 때에는 아주 하잘 것 없는 어린 소년도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위험한 인물로 낙인이 찍히고, 미처 철들지 못한 어른들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자기 권위를 인정받으려 하기 마련이다. 특히 중학교 1학년때 담임선생님께서는 나의 다소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듯한 외향성과 그리 보잘 것 없는 가정환경 등에서 위험한 자의식과 주제를 모르는 시건방짐 비슷한 것을 발견하셨고, 나름대로는 뚜렷한 교육철학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그녀가 선택했던 '이런 문제아 다루기'방법은 때로는 학대로써, 때로는 멸시로써 한 소년이 자기 주제를 파악하도록 최대한 도와주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처음엔 그녀도 그런 자상한 특별지도의 결심에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않았겠지만 남들 모두의 주목을 받는 생활에 꽤나 익숙해져 있다고 착각하던 내가 그녀로부터 반장지명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절차상의 이의를 제기한 것은 당시의 전체주의적 사회분위기에서 볼 때나 그녀의 교육자적 자존심으로 볼 때나 용서할 수 없는 반항이었음에 분명했다. 그녀로부터 적당한 범위 내의 견제와 멸시를 받고,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여러 젊은 선생님들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일으켜 세워져 수시로 따귀를 맞아야 했던 경험은, 워낙에 비뚤어진 성격인 데다 지능도 빈약해 당시의 상황을 냉철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의 성격을, 더욱 부정적이고 편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당시의 학원공간에선 유독 나만이 그런 경험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대다수 사춘기 소년들이 그렇듯 지독한 정신적 불안정을 경험했던 것 같고, 한동안은 내 스스로를 주위로부터 격리시키는 데서 기쁨을 찾기까지도 했던 것 같다. 이런 저런 이유로 청소가 끝난 뒤의 교실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혼자 운동장의 햇볕을 내려다 보던 나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음산하고 두려운 분위기를 자아내던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기괴한 책벌레가 흔히 찾는 종류의 소설이 그렇듯, 당시 나는 도스또옙스끼나 헤르만 헤쎄를 즐겨 읽었는데, 그 냉소적이거나 몽상적인 광기, 그리고 자기모순적인 분열상들은 내게 뭔가 갈등과 파란, 그리고 이상적인 것에 대한 동경을 갖게 해주었다고 생각된다. 그 나이에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리도 없지만, 당시의 내가 철학책도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만 골라 읽었다는 것 역시,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이 긍정적이고 조화로운 보편자의 길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역설적인 사회부적응자의 길이 될 것임을 예고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부터 나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해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폭풍의 언덕'의 히드클리프나 '적과 흑'의 쥴리앙 쏘렐, '쟝크리스토프'에 나오는 크리스토프 크라프트와 같이 어둡고 과격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악마적인 정열과 반항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로서, 모든 고난을 자기가 직접 부딪쳐 경험해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어리석을 만치 자기 스스로에 대해 모순적인 예외적 인간형들이었다. 남들에게 오해를 받으면 그것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채질해놓고 즐기는 경향이라든가, 가장 갖고 싶은 것일수록 그것을 버려야만 마음이 놓이는 성향 등, 아직도 나의 원만한 사회생활을 방해하는 대부분의 내 문제아적 성격은 아마 나의 이 청소년기에 대부분이 형성되었으리라고 본다.

나의 부모님들께서는 자꾸만 떨어지는 아들의 성적문제로 골치를 썩으시고 이따금 분통을 터뜨리며 심하게 야단치시면서도 그 순간만 지나면 고맙게도 절대 공부하라는 닦달따위는 하지 않으셨다. 두 분의 건망증 덕에 나는 학과공부를 거의 등한히 했고, 시험때에도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점수 따기 위한 공부에 투자하곤 했다. 재미있는 것은, 운동신경이 별로였는데도 학과공부보다 차라리 농구나 배구를 하는 데 더 흥미를 느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를테면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권투를 좋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정형의 반복 속에서 내 육체를 혹사시키는 데 가장 이상적인 오락성을 발견할 만큼 내 취향 자체가 원래 단순했던 탓이라고 생각되는데, 처음엔 나에 대해 지독한 편견을 갖고 계시다 나중엔 나를 좋아하게 되신 중2 담임선생님께서 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시게 된 것도 운동시간에 내가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던 모습을 보셨을 때였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때 담임선생님께서는 지금 생각해봐도 세상에 보기 드물 만큼 매력이 있던 사람이었다. 다른 교사들이 애들 귀싸대기나 후려치고 고리타분한 권위나 세우면서 그저 촌지나 조금 더 받아볼 궁리에 여념이 없던 반면, 그 분은 교육개혁에 뜻이 있었고, 학생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유별난 열정을 갖고 계시던 분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탈춤과 농악과 '아침이슬' 등의 금지곡을 가르쳤으며, 종례시간마다 현실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인 발언을 많이 하셨는데, 당시 뭐든 때려부수고 싶었고 세상 돌아가는 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던 나에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복음과도 같이 들렸다.

중3에 올라가서 나는 그 분의 뜻을 내 손으로 실현하기 위해 반장선거에 나갔고, 학생회장선거에도 출마해서 부회장까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당시 엘리트학생들끼리의 배타적 사교집단이었던 학생회내에서 물 위의 기름같은 존재였다. 학생회에서 따돌림 받는 대신 나는 반장역할의 수행에만 전념했다. 나는 공부 잘하고 부유한 애들을 싫어했고, 공부 못하고 가난한 애들을 좋아했다. 그렇게 학급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놀기 좋아하고 떠들기 좋아하는 무질서한 아이들의 의사에 따라 장난치듯 즐겁게 반장노릇을 한다는 것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유희가 돼주기도 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육군 공수부대 장교출신이신 중3 담임선생님과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말이다.

타고나기를 막되먹게 타고난 나는 모범생이란 어때야 한다 하는 관념을 하찮게 생각했으므로, 심한 욕설을 하거나, 性이나 폭력에 관한 거친 농담을 하는 데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런 것들을 아이들과 공유하는 과정이란 한편으로 내가 이 세상의 가장 질기고 단단한 바닥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의외로 아주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으므로, 그런 나에 대해 가장 거친 부류의 아이들은 약아빠지고 잘난 체하는 평범한 모범생 아이들보다 더 역겨운 자식이라고 비웃곤 했다. 그들은 자기네들 패싸움하는 것을 말리고 고자질했다는 이유로 나를 집단폭행했고, 여학생 강간하는 것을 옆에서 방해했다는 이유로 나를 거의 발가벗겨 여학생들 교실 앞에 던져놓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거친 환경을 보장해주고 있었으므로, 굳이 이념과 실천을 분리함으로써 나 자신을 보호할 필요성은 꽤 줄어들게 되었다. 뒷골목에서 애들 돈을 뜯건, 패싸움을 벌이건, 도둑질을 하건, 여학생 강간을 하건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의 입장에서 이 불공평한 세상을 바라봐줄 수 있고, 또 그런 일을 하는 많은 친구들을 나는 사랑하겠다는 식으로 태도를 바꿔버린 것도 아마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무수히 많은 급우들을 때렸고, 무수히 많은 후배들을 구타했지만, 욕을 먹는 만큼의 권한과 책임이 나에게는 생겼다. 나의 성적은 그런 나의 자유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높게 치솟았지만, 나는 동시에 끊임없이 컨닝을 통해 내 주위의 친구들을 도와주었으므로 학과시험까지도 내게는 유희가 되었다. 다만 어머니와 내 주위 사람들이 나의 그 높아진 성적으로 인해 내게 허황된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게 그 부작용이 되었을 뿐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중2시절 담임선생님댁을 가끔 방문하면서 뭔가 진보적인 가르침을 얻으려는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때 중2 담임선생님께서는 이제 '전교협'이라는 단체의 핵심에서 일하시면서 '전교조'를 만들기 위한 작업에 한창이셨다. 87년 당시는 온 나라에 민주화의 열기가 가득하던 때로서, 노동자대투쟁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몇몇 여자고등학교는 학생들의 투쟁으로 재단이 큰 곤경에 처해있었다. 나는 한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를 뒤흔들어보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문제는 내가 전면에 나서느냐, 아니면 배후조종을 하느냐였는데, 여러가지 역학관계를 고려해볼 때 배후조종이 더 좋은 여건이었으므로, 나는 배후조종을 할 생각이었다.

참으로 멋진 여러 친구들이 나와 뜻을 같이 한다고 했다. 원래 고3 시절만큼 남자들이 자기 인생에서 어른스럽고 절제된 행동을 하는 시절도 드물다고 하지만, 지금도 그때처럼 성숙하고 생각깊던 친구들을 쉽게 만날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등학교시절의 나는 그렇게 좋은 친구들의 도움을 제대로 얻어낼 수 있을만큼 순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어머니와의 관계설정 자체를 너무 잘못 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있어서 몇십년을 두고 계속된 어머니와의 이러한 긴장과 갈등관계는 이때부터 이미 나에게 약이라기 보다는 독이 된 적이 더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공부를 잘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항상 반장을 하고, 학생회장을 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집착이 대단하셨다. 물론 나도 반장이나 학생회장이 된다는 게 그리 벅찬 일일 것도 없었지만, 철저히 보수적이고 실리적이신 어머니와는 달리 나는 상당부분 이념적이고 몽상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서, 내가 학생회장이 될 경우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벌어지게 될 사태들을 나는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만약 철저하게 이념적인 인간이었다면 그것은 그리 문제가 안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대학진학과 같은 현실적인 욕구의 충족도 나름대로 중요하다는 속물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인간이었고, 그때만 해도 대학은 최고명문대에 가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다.

그때 내가 가졌던 당연한 생각은, 학생회장을 하지 않고 대신 다른 아이를 학생회장으로 만들어 배후에서 학교를 흔들어보거나 아니면 좁은 고등학교무대는 포기하고 일단 대학을 좋은 데 간 다음에 대학에서 정말로 제대로 된 정치적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몇몇 동지(?)들에게 그런 내 생각을 말했고, 그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계획과 맹세를 어머니께서 완전히 묵살하신 것은 어머니 특유의 허영때문이라기 보다는 주위의 부추김에 어머니께서 완전히 농락당하신 결과였다고 여겨진다.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고3때 학생회장을 하지 못할 경우 성적이 오히려 떨어질 것이라는 희한한 믿음을 갖고 계셨으므로, 철 없고 물정 모르는 어린 아들의 변덕스러운 의사 따위는 당시의 어머니께 아무런 문제도 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나는 당시 내 고등학교에서 최초의 직선으로 치러진 학생회장선거에 출마했으며, 격전 끝에 당선되었고, 그 와중에서 비록 각오는 했지만 내가 출마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많은 친구들의 신의를 잃었다. 그때 내 정견발표문을 보면 꼭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한번 막가보자'는 식의 무식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다. 하지만 사실 그때 나는 엉뚱하게도 나름대로는 꽤 용의주도한 개혁의 프로그램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나는 입시학원과도 같은 경직된 학교분위기를 학생들이 맘대로 난장을 치는 활기찬 분위기로 바꾸고 싶었고, 학생들이 선생님들과 완전히 맞먹고 들만큼 학생들의 발언권을 강화하고 싶었으며, 어느 학교나 다 있게 마련인 각종 자질구레한 교내 비리를 근절하고 싶었다.

당시 나의 고3 담임선생님은 윤리과목을 맡은, 약간은 곤란하신 분이었는데, 지극히 소녀적인 감수성을 갖고 순결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인간만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그는, 나를 지극히 위험한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나와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학생회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뭔가 큰 겁을 먹고 있었던 그는 어머니와 힘을 합쳐 나를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들기로 작정을 했으므로, 그렇게 피곤한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 불려다니고 야단 맞느라 낭비했던 신경으로 인해 나의 성적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나처럼 항상 바빠야만 컨디션이 살아나는 인간은 학생회장이 아니라 별것을 했다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기만 했으면 성적이 절대 떨어질 일은 없었겠지만, 원래부터 노는 것을 좋아하던 나의 사생활은 선생님들과 어머니들의 마구잡이 추적과 억측으로 인해 얼토당토 않은 스캔들로 발전하였고, 그로 인해 발생한 나의 짜증은 나를 점점 학과공부로부터 멀어지게만 했다.

그런 갑갑한 상황 속에서 나는 가을에 학교축제를 하기로 진통 끝에 학교측으로부터 약속받은 다음, 초여름쯤 해서 다시 사소한 비리의 의혹을 물고 늘어져 한바탕 데모를 벌였다(물론 이때 가장 큰 활약을 보인 친구는 당시 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나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나은 점이 많았던 나의 친구 함연호군이었다). 복도와 계단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가는 광경은 모든 선생님들에게 경악 그 자체였던 것으로 보이며, 단 하룻동안이지만 학교의 모든 것은 마비되어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밀어붙일 수만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아주 극단적인 데까지 가려하는 아이들을 무마시키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던 것이다. 학생이 선생님께 대드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잘난 엘리트 녀석들과, 모든 것을 때려 엎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다수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 모든 비난을 뒤집어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학교측과 밀실에서 더러운 타협을 한 나에게도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타협은 사실 내가 의도했던 바가 아니고, 배신한 나에게 친구들이 쏟아낼 비난에 대해 전혀 책임져주실 수 없었던 어머니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데모를 통해 교내에서 학생회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지만, 아이들이 실질적으로 원했던 것은 정말 기존의 모든 질서가 철저하게 무너져서 학내 구성원의 사고 전체가 혁명적으로 전환되는 것이었기에 그 정도의 초라한 성과에는 누구도 만족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이랄까 고2때까지만 해도 공부문제에 관한 한은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던 어머니께서는 이제 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시작하셨다. 나는 어머니께 반항하고 횡포를 부리는 것으로 어머니의 간섭을 차단하려 했는데, 이를테면 어머니께서 내게 폭언을 퍼부으실 때마다 보란 듯이 한 며칠 공부를 아예 안해버리거나, 술 쳐먹고 대판 패싸움을 벌이고 들어오는 것이 그 예였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불치의 병을 얻으셨고, 아버지께서도 눈에 띄게 늙어버리셨으니, 그때 나의 반항은 지금 생각해봐도 정도가 지나쳤던 셈이었다.

가을에는 축제를 열어야 했다. 나는 후배들에게 상당부분 일을 나누어 맡겼지만, 다가오는 입시에도 불구하고 축제준비에 마음을 놓을 수 없어 학교 체육관에서 먹고 자며 일하기도 했다. 체육관에서 침낭 뒤집어쓰고 자려고 하면 친구들이 쏘주랑 과자랑 갖고 나를 찾아오곤 했다. 널찍하고 휑뎅그렁한 체육관 한켠에 앉아 나는 그 나이에 친구들과 새벽까지 소줏잔을 기울이곤 했는데, 그렇게 일탈하고 방황하는 속에 인생이 있다는 것을 그때 난 이미 알아차리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축제는 다행히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언제나 고맙기 그지 없는 중학교 2학년때 담임선생님께서 농악대의 발대를 도와주시고 직접 아이들에게 탈춤과 농악을 가르쳐주기까지 하시는 등 고작 한 명의 덜 떨어진 제자에게 파격적인 배려를 베풀어주신 덕이었다. 물론 나름대로 문제도 많이 발생했지만, 지금도 그때의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정말 바쁘고 흥겹게 잘 놀며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모든 고등학생들은 그렇게 자기 모든 취미와 소질을 마음껏 즐기면서 멋대로 살아야 하는데, 나는 다만 우리나라 교육현실에서 볼 때 그러한 시기를 너무 빨리 누렸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성적이 곤두박질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머니의 한숨 속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무난히 합격하였다. 돌이켜보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나의 일생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졌던 순간들이었고, 그것을 잘 정리해서 내 앞날의 밑거름으로 삼는다는 과제는 나에게 아주 필수적인 일임이 분명했지만, 어머니의 긴 한숨이 말해주듯 나는 그리 축복받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해야 했고 그런 점에서 내 고등학교 시절은 실패한, 그렇기에 보상받아야 할 어떤 것으로 내 인생에서 자리잡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그러한 어정쩡한 혼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내 인생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순간은 어쩌면 그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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