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년 시 절




나는 1970년대가 시작되던 어느날 일반공무원이셨던 아버지와, 별로 평범하지 않은 가정주부이셨던 어머니 사이에 누나도 없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함박눈은 거리에 거의 퍼붓듯 내리고 있었고, 나는 예정일보다 10일이나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 자궁에서 나오고 난 뒤에도 한동안은 눈도 제대로 못 떴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시골 국민학교 교사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중앙공무원으로 서울에 올라오신, 나름대로의 입지전적 경력을 가지신 인물이셨다. 내성적 성격과 병약한 체질과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결국 평범한 서기관급 공무원으로 퇴직하셔야 했지만, 워낙 소박하고 성실한 성품을 타고나신 덕에 일평생 모범적인 가장이자 근면한 시민으로서 대과 없이 깨끗하게 살아가셨다.

사실 우리 아버지의 준수하신 용모와 훤칠하신 키, 그리고 날렵하신 몸매와 소년처럼 맑은 눈매를 본 모든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께서 뭇 여성들의 사랑 속에 대단히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오셨을 것으로 지레 짐작을 할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아버지께서는 어린 시절 가난한 환경에서 다소 고생과 좌절은 겪으셨을지 몰라도 그만하면 일평생을 아주 안정되게, 거의 따분하기까지 할 정도로 평탄하게 살아가신 분이셨다. 치명적인 중병이나 부상, 사기사건이나 고발사건이나 관재구설수로 골치 썩으신 적도 없었고, 직장에서 상사와의 마찰로 분연히 사표 쓰고 뛰쳐나와 여러 직장을 전전하신 적도 없었으며, 아버지만큼 수려한 용모를 가진 남자들에겐 으레 따르기 마련인 여자문제로 온 집안을 파탄에 빠뜨리신 적도 없었다. 화려한 스폿라이트를 받으신 적은 없었을 망정, 관운도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셨다. 어떻게 보면 너무 소극적인 삶을 살아오신 분이시라 나 같은 젊은 사람으로서는 별다른 흥미를 느낄 수도 없을 정도인데, 물론 우리 아버지께서 그런 안정지향적인 삶을 사신 데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이신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향리에 논밭뙈기깨나 갖고 있다고 하는 어느 토반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잘하셔서 일제식민시대 공무원생활까지 하셨던 분이었다. 당시 촌사람들 사이에서는 꽤나 선망받던 직업이었던 교사직까지 거치시면서, 아들 둘, 딸 다섯 낳으시고 제법 안정된 삶을 사셨는데, 일제 패망과 해방 이후 혼란기를 겪으시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당하셨는지 모르겠으나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정치적인 일로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처하셨다고 한다.

다른 약삭빠른 사람들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건만 직장을 그만 박차고 나와 벌이신 일이 '농민운동'이셨으니, 여러분들께서는 대략 그 결과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할아버지의 이상이 무참히 좌절된 나머지 온 식구가 혹독하게 치러야 했던 그 수많은 대가 앞에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인간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셨던 것 같다.

물론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를 어느 부분은 사랑하고 존경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그토록 애독하시던 수많은 철학서적, 이념서적들과 가슴 속에 품으셨던 그 크나큰 포부들에 대해서는 시큰둥하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독서와 시 습작을 즐기시고 스포츠와 붓글씨, 그림, 노래 같은 예능분야는 물론 각종 목공일에까지도 만능이셨지만, 평생 철학이나 정치적 이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 때문에 다 쓰러진 집안을 현실적으로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데 모든 인생의 목표를 두셨으며, 오직 그 목표 하나를 위해 모든 개인적 꿈을 접어두시고 건조한 일상 속에서 중단 없는 전진만을 계속하셨다.

비교적 흥미로운 성격을 가지셨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의 아버지와는 달리 나의 어머니께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특이한 점이 많은 분이셨다. 우선 출생에 있어서부터 나의 어머니께서는 단순한 양반집안 출신이 아닌 당시 인근에서 꽤 이름 있던 지주집안의 장녀로 태어나셨으며, 호걸풍의 용모와 정치가적 기질을 지니셨던 외할아버지를 닮으셨음인지 어려서부터 마치 여왕이 시녀들을 거느리듯 많은 친구들을 이끌고 다니셨다고 한다.

비록 좁은 지방무대이긴 하지만 사범학교까지 진학을 하셨던 걸 보면 어머니께서는 공부도 제법 잘 하셨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큰 기대를 받으셨고 무리를 한다면 학업을 더 계속하실 수도 있으셨겠지만 아직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어머니께서는 학문의 길을 택하지 않고 정식공무원시험에 합격하셔서 직장인이 되는 길을 택하셨다고 한다. 하긴 명문대 남학생조차도 합격하기 힘든 공무원시험에 여성의 몸으로 합격하셨다는 것은 꽤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아쉬워하시는 바와 같이 좀 더 높은 데 뜻을 두지 못하셨던 걸 보면 한편으로는 우리 어머니께서도 토반가 영양으로서의 일정한 한계를 깨시기에는 용기가 부족한 분이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께서는 젊은 시절 상당히 미인이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날씬하셨을 뿐 아니라 아주 서구적인 시원스런 미모를 갖고 계셨다는 소문이 지금도 돌고 있을 정도이다. 또 활달한 여장부적 성격에 야무진 일처리로 제법 인정 받는 직장생활도 하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어머니께서 다른 더 좋은 혼처를 다 마다하고 당시 가정형편이 지극히 어려우셨던 아버지와 어떻게 결혼까지 하게 되셨던가는 사실 오랜 기간 나에게 알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처음에 나는 아마도 어머니의 너무 크신 키와 여자로서 너무 똑똑하고 튀었던 데서 오는 외로움때문이거나 아니면 아버지의 순수한 사랑때문이었다고 생각을 했지만 지금 나의 결론은 그와 조금 다르다. 냉철한 실속파이셨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께서는 겉보기엔 야무지고 똑똑해보이셔도 생각보단 굉장히 순진한 분이셨다. 객관적 상황이야 어떻건 대개 그런 여성이 착한 성품에 잘 생긴 용모의 남성을 우연히 만나면 싫든 좋든 일은 잘 풀리게 되어있는 법이다.

두 분의 결혼초기는 아주 불행한 일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두 분은 격하게 싸우신 일 한 번 없으셨고, 그 흔한 바람 한 번 피우신 적 없이 단란한 가정을 지켜오셨다. 무엇보다 두 분 다 기본적으로는 착하시고 참을성도 갖추고 계셨던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런 화목하고 모범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내가 어려서부터 비뚤어지고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자라났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어쩌면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하셔서 늦게 본 아들이 그저 귀엽기만 하셨던 우리 착한 부모님들께서 어린 나를 너무 오냐 오냐 기르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는 중이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에 계셨지만 자식 기르는 데 있어서만큼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키우시려는 무리를 거듭하셨다. 그 덕분에 나와 내 동생은 오전엔 집에서 동화책을 읽거나 아동용 문제지를 풀고, 오후엔 집 근처 관악산에서 동네 아이들과 거의 몇 시간씩 뛰고 뒹굴며 놀다 들어오고, 저녁 6시면 집에 들어와 씻고 만화영화 '마징가', '아톰' 같은 것을 보다가 저녁 먹고 자는 그런 팔자 좋은 생활을 어린 시절에 매일마다 반복했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 중 상당수가 공장 나간 부모를 기다리며 혼자서 집 안에 갇혀 놀다 라면을 끓여먹거나 아니면 신문배달, 껌팔이 등을 하며 일찍부터 생업전선에 나서야 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역겨운, 귀족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었다. 어린 시절 아주 고생하며 크셨다는 아버지께서 이후 우리 형제들의 나약한 모습을 보실 적마다 '어려서부터 너무 배 부르게 커서 그렇다'고 경멸해 마지 않으신 것도 다 일리가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당시 우리 형제는 항상 흙밭에서 뒹굴며 놀았기 때문에 깡통 하나씩만 들려놓으면 영락 없는 거지꼴이었다고 한다).

비록 글을 일찍 깨우치고 국민학교 입학 이후로 반에서 상위권은 계속 유지했을지라도 우리 형제는 대체로 부모님의 눈에서 바라봤을 때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여줬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일단 부모를 닮지 않아 둘 다 얼굴이 못 생겼고, 특히 나는 짓궂고 고집스런 성격에 사고뭉치였으며, 내 동생은 소심한 성격에 자주 토라지곤 했다.

무엇보다도 우리 형제는 공부엔 별 관심이 없고 둘 다 만화 그리는 일과 되먹지 못한 소설 쓰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별로 현명치 못하게도 아버지께서는 우리 형제에게 취미로서 붓글씨를 가르치려 하셨지만, 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그랬는지 우리 형제는 둘 다 붓글씨를 영 못 썼다. 부모님께서는 두 분 다 노래를 아주 잘 부르셨는데, 우리 형제는 아무리 배우고 또 배워도 노래를 전혀 못 불렀다. 맨날 그린다고 하는 만화라도 잘 그렸으면 덜 한심했을텐데, 우리 형제는 만화 쪽에도 객관적으로 소질이 별로 없었다.

물론 부모님께서도 우리 형제의 교육에 대해 장기전인 전망 같은 것은 전혀 부재하셨다. 판검사로 키우시겠다든지, 과학자로 키우시겠다든지, 의사로 키우시겠다든지 하는 목표 없이 그저 '부모보다 나은 사람만 되라' 하셨다. 맨날 사달라고 하니까 소설책이나 만화책은 자주 사다 주셨지만, 아들들이 그걸 읽고 소설가나 만화가가 되겠다고 하면 언짢아 하셨다. 그 이유는 그 시대 대다수 인텔리 부모들이 거의 다 그러했듯 나의 부모님께서도 당신들의 현재모습과 당시 사회지도층들의 부도덕한 모습 모두에 막연한 불만이나 반감을 갖고 계셨지만 동시에 일반적인 직업적 고정관념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우실 수는 없었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별볼일 없는 소년이었던 나는 국민학교 6학년때 느닷없이 전교 어린이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 콩알만한 나이에 전교생이 7천명이나 되는 국민학교에서 목청 좋게 구령을 해댔다고 한다. 원래 국민학교 회장은 구령 같은 걸 붙이지 않는 법이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님들과 달라 약간 모험을 좋아하고 앞에 나서려는 기질이 있었던 나는 중고등학교 회장형들처럼 어린이회장인 나도 그런 걸 해보고 싶다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졸랐던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께서는 월요일날 직장에 조금 늦게 가시기로 하고 학교 뒷산에 올라 먼발치에서 아들의 구령 붙이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셨다고 한다. 5공 초기, 당시의 우스꽝스러운 시대상황을 고려해볼 때 아마 만감이 교차하셨을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나의 유년시절은 이렇게 부모님들께 이후 책임지지도 못할 희망의 환상을 심어드리기 시작한, 그런 기간이었던 것 같다. 나의 부모님들께서는 아들들이 갖고 있는 어떤 결점과 한계에 대해 분명히 일찍부터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부모 되신 입장에서 당연하게도 이를 애써 무시하거나 외면하려 하셨다. 물론 나 역시 그러한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족한 자질을 무리한 노력으로 극복하려 할 만큼 효행심이 충만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후 우리 가족들 모두가 떠안게 되는 불행과 실망이 있었다면 그 씨앗들은 나의 이 어린 때부터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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