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태국총선 단상


태국이라고 하면 나는 아직도 율 브린너와 데보라 카 주연의 옛날 영화 '왕과 나'가 생각난다. 그런 기억때문인지 나는 어린 시절 한동안 태국왕이 굉장히 멋있고 잘 생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제 태국왕 푸미폰의 못 생기고 까무잡잡한 얼굴사진을 보고 매우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태국은 17세기부터 서구, 특히 프랑스, 영국인들의 진출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백인혼혈이 꽤 많은 편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2PM의 닉쿤 같은 아이들이 백인혼혈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것도 그때문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백인종이 황인종보다 얼굴이 더 잘 생겼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_-)

하지만 태국인들은 대개 인종적으로 중국인들과 매우 가까운 종족이라 일컬어지고 있으며(동남아에서는 라오스인들과 북베트남인들이 또한 그러함), 18세기에는 프라야 딱신처럼 아예 중국인이 태국의 왕을 한 적도 있었다. 현재도 태국에서는 중국계, 화교의 힘이 막강한데 (인구구성상으로도 중국계는 태국 전체인구의 13.5%에 달한다 함), 태국내 다른 소수민족들과는 달리 중국인들은 태국 민중들에게 그리 배척당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태국인 자체가 사실상 중국인과 유전적 특성이 비슷하거나 사실상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중국인에 비해 태국인의 민도가 훨씬 더 떨어지긴 하지만.

현재의 태국 왕조는 1782년에 태국의 국가적 영웅이자 국왕이었던 프라야 딱신을 약삭빠르게 제거하고 대신 왕위에 오른 딱신의 부하 프라야 차크리의 후손들이 새운 왕조로서, 이른바 차크리 왕조라고 한다(비유하자면 궁예를 제거하고 고려의 왕위에 오른 왕건의 자손들?). 그런데 이 왕조의 역대왕들은 프라야 딱신을 몰아낸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통적으로 상황판단에 매우 능했고 아주 유연한, 나쁘게 말하자면 아주 얍삽한 사고를 가졌던 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19세기에 서구세력이 침략의 야욕을 불 태울 때 차크리왕조의 왕들은 결코 정면대결을 벌이지 않았고, 적당히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거나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거나 하면서 약삭빠르게 실속을 챙기며 자기들의 자리를 계속 보전한 바 있었다. 19세기에 조선왕조를 이끌던 대원군, 민비, 고종이 고지식한 자세로 외교적 실책을 거듭하면서 조선을 계속 자멸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게 하고, 결국 조선왕가 역시 멸문의 비극을 초래했던 것과는 많이 비교된다.

20세기에 들어서부터는 태국과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간의 무력충돌이 격화되면서, 태국에서 군부의 힘이 강해져서 왕권을 위협하였는데, 당연히 태국의 왕들은 군부에 대해서도 결코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힘센 놈이 나타나면 재빨리 그들의 세력적 우위를 인정하고 그 대신에 챙길 것은 확실히 챙기거나 적당한 때에 뒤통수를 치는 전략으로 나아갔다. 결국 1932년에 차크리 왕조는 태국에 대한 전제적 통치권을 포기하면서도 군부로부터 국왕의 권위를 계속 인정받아, 오늘날까지도 태국의 국왕은 태국에서 정치적 실권은 없지만, 물경 30조를 넘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보유하면서 국민들에 대한 정신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1992년에는 태국판 5.18.사태에 직면하여 국왕이 군부지도자와 야당지도자를 불러 꾸짖고 상황을 종료시키기도 하였음), 오늘날 태국에서 국왕의 존재는 거의 '살아있는 신'에 비견될 정도라고 한다.

20세기 말엽에 들어서 태국은 외환위기로 크게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러자 딱신이라는 중국계 정치인이 혜성과도 같이 등장하여 외환위기로 도탄에 빠진 태국경제를 구하고 고도성장 및 복지확대 등을 실현하여 민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태국의 전통귀족들이 기득권을 상실하고 태국 내에서 중국계가 새로운 지배집단으로 떠오르는 분위기가 되자, 기득권세력이 군부와 손을 잡았고, 결국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딱신을 몰아냈다 (딱신의 부패사실이 드러났던 것도 그의 실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 그리고 태국왕 푸미폰은 이러한 쿠데타를 배후에서 사실상 지원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고 있다.

딱신은 총리 재임시절 강력한 친서민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민중들의 지지가 높다. 중국계라고는 하지만 태국의 민중들은 그런 것쯤 거의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태국인은 중국인과 그리 먼 혈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국 기득권층의 사주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킨 손티 분야랏끌린 장군은 놀랍게도 태국 남부 소수민족 출신으로서 이슬람교도이다. 대부분의 후진국이 그러하듯이 태국 역시 다수세력이 소수세력을 혹독하게 억압하는 나라이며, 따라서 불교를 신봉하는 대다수의 태국인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남부의 소수민족들을 지독히 경멸하고 배척해온 입장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남부 소수민족 출신의 이슬람교도가 군부의 실권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태국민중의 다수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태국 왕실은 민중들의 이러한 분노를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다. 사실 태국 왕실이 어떤 전통을 갖고 있는 왕실인가? 19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경쟁시키고, 20세기 전반기에는 영국과 일본을 경쟁시켰으며,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한 뒤에는 미국세력을 끌어들여서 영국과 경쟁시켰고(현재의 태국왕인 푸미폰 국왕은 보스톤에서 태어나 미국국적을 갖고 있는 미국시민이며, 1946년에 미국세력과 친미 군부세력의 공작에 의해 형을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혐의를 받고 있음), 21세기부터는 미국과 중국을 경쟁시킨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두 세력을 경쟁시켜서 그 틈바구니에서 자기 기득권을 교묘히 지켜왔던 것이 태국왕실이다.

그러한 태국왕실이 이제는 딱신을 견제하고 중국계 딱신을 거점으로 하여 태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세력과 중국 화교자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 다름 아닌 이슬람세력을 끌어들인 셈이다. 아무리 태국인들이 왕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태국 민중들이 왕실의 이러한 태도를 가만 두고 볼 리가 없다. (사실 왕이라 하더라도 1992년에 보여줬던 것과 같은 카리스마 있는 중재력을 민중들에게 보여줘야 왕대접을 받는 것이지, 최근의 쿠데타 상황에서 보여줬던 것과 같은 방관자적 태도를 계속 견지한다면, 민중들도 조금씩 왕을 얕보게 돼있다.)

지금까지 중국의 남진(南進)과 딱신家의 포퓰리즘적 대중선동을 견제하기 위해 태국왕을 지지하고 보호해왔던 미국의 군부와 정보기관들 역시, 2006년부터는 태국 내에서 이슬람세력이 자리를 굳히게 된 만큼, 이제 더 이상 태국왕을 딱신과 그를 추종하는 민중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태국에서 극우세력과 이슬람세력이 득세할 경우, 중동의 이란 등과 태국 내의 이슬람 군부세력, 그리고 말레이지아 등이 연대하여 미국에게 상당히 피곤하게 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작년인 2010년부터 태국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지원때문인지 대규모 소요사태가 일어났고, 오늘 7. 3. 총선에 이르러서는 딱신의 여동생이 다시 태국의 총리로 선출되는 결과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를 보고 태국의 군부와 기득권들이 가만 있을 리 없는 이상, 향후 태국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참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아니 할 수 없다.

중국은 물론이고 자국내 민중들까지 적으로 돌리고, 심지어는 미국의 심기까지 건드리다니... 수백년 동안 절묘한 외교적 줄타기를 계속해왔던 태국 왕실이 결국은 연장후반 막판에 정치적 자살골을 넣고만 것인가?

아니면 태국 왕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재빠르게 태도를 바꾸어 미국과 중국에 평화 제스처를 보낸 다음, 미국과 중국을 경쟁시켜 또 다시 실리를 얻게 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 중국은 이번에 갑자기 빅딜을 한 후 태국 왕실을 손 보게 될 것인가? 아니면 선심공약으로 집권한 딱신家가 그 자승자박으로 배신감을 느낀 민중들에 의해 왕실보다 먼저 몰락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총선으로 큰 힘을 손에 쥔 딱신家가 태국 왕실을 결국 해체하게 될 것인가?

자칫하면 그로 인해 태국 왕가가 붕괴하거나 영향력을 잃고 (아니면 푸미폰 대신에 미국과 중국을 더 철저히 따르는 새로운 왕이 등극하고), 태국의 군부 내 국가주의적 극우세력이 와해되며, 미국의 묵인 하에 중국이 딱신家를 앞잡이로 하여 태국에 대한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대폭 확대하고 딱신家의 포퓰리즘적 정책을 지원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태국에 대한 중국의 지분이 정말 어느 정도로 높아지게 된다면, 미국은 중국에게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게 될 것인지,

혹시 한반도에서 북한에 관한 군사적 이권 (예를 들면 중국의 묵인 하에 미국의 북한 영변 핵시설 정밀폭격 등) 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지금은 정말 여러 가지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상황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요약컨대 동남아를 시발점으로 하여 아시아 정세 전체가 지금 요동을 치고 있는 듯하다.





댓글 3

Sondergä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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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왕실이 이슬람교 신자를 육참총장으로 임명한 것은 남부 이슬람 소수민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죠.

손티 장군이 이슬람교 신자라고 해서 태국 내에 이슬람세력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죠. 오히려 손티 장군은 태국내 이슬람 신도들의 입장에서 이완용 같은 존재라고 봐야죠.

2006년에 탁신이 실각한 것은 태국 왕실과 기득권의 음모라기보다는 탁신 일가의 부패와 거짓말이 목불인견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았고, 당시의 정치권이 부패한 탁신에 대해 완전히 신뢰감을 상실해서,

탁신으로는 태국의 정국을 도저히 안정시킬 수 없었기 때문으로 봐야 합니다.
Sondergänger
Sondergänger
왕실이 쿠데타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 것도 아니죠. 왕실이 손티 장군을 시켜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건 태국에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죠. 거기에 미국이 개입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탁신은 중국계라 아무래도 중국에 가까울 수밖에 없고, 포퓰리즘 정책으로 태국의 경제를 중국경제에 더욱 더 종속시킬지도 모르는 인물이라, 미국이 결코 탁신과 그의 가족들을 지원할 수는 없음을 알아두셨으면 좋겠네요.

미국은 세계 어디에서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군부 쿠데타를 사주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넘들이죠. 칠레에서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한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Sondergänger
Sondergänger
태국왕실의 뒤에는 미국이, 탁신의 뒤에는 중국이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입니다. 물론 태국왕실은 중국에도 발을 걸치고 있고, 탁신 역시 미국에 발을 걸치고 있긴 하지만요.

태국왕실과 원주민은 화교세력에게 경제권을 내줄 수가 없고, 이러한 이해관계는 미국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하죠. 단순히 쿠데타 최고지도자가 이슬람이었다는 것만으로 미국이 태국왕실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리라고 볼 수는 없죠.

다만 미국이 태국왕실을 부추켜서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미국과 중국이 동남아를 사이에 두고 각축하는 것은 사실이나 정면충돌 역시 부담스러울 것이기 때문에 적절한 타협이 있기는 할 것입니다. 왕실은 탁신 여동생을 총리로 지명할 거고, 쿠데타도 자제시키겠죠.

결과적으로 태국이 중국의 영향권으로 흡수될 상황인 것은 맞지만, 지금 동남아에서 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중국의 영향권으로 빨려들어갈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도 그냥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미국이 이번에 중국에게 한방을 먹었다고 해서, 동북아에서 그 대가로 이권을 요구할 만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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