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잊혀질 수 있다고
오늘 하루 종일 커피를 너무 마셔 잠이 안 오다보니까 평소 그리 즐겨 읽지도 않던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집을 꺼내어 읽기에 이르렀다. 몇 개의 단편을 읽다가, 무슨 소설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옛날에 좋아하던 어느 소설책에 나오던 대목인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잊혀질 수 있다고 그 편지는 말하고 있었다" 어쩌구 하는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한때는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겼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상상의 세계와도 같은 것이 이러저러한 삶의 과정 속에서 자꾸만 망각되고 축소되고, 그러한 것들에 위기감이나 결핍의식을 느끼면서 인간의 꿈과 희망이 점차 절망으로 치닫는다는 것을 상기했다는 얘기인데, 그것을 계기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내 삶 속에서 딱 하나 긍정하는 게 있다면 그게 과연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나 자신에게 또 한번 던져보게 되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게 여전히 내 삶에 그닥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직은 그런 게 내 삶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오히려 내 삶에 역설적인 희망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져보게 되었다.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게 아직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는 이상, 내 삶에 희망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역설이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소설가 김훈씨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 분께서 신간 '흑산(黑山)'의 에필로그에 쓰셨다는 글들이 정말 대단하였다:
"귀가하는 저녁이면 하구 쪽으로 노을이 넓고 깊었다. 옛 양화진(楊花津) 자리에 강물을 향해 불쑥 튀어나온 봉우리가 있는데, 누에 대가리 같다고 해서 이름이 잠두봉(蠶頭峰)이었다. 140여 년 전에 무너져가는 나라의 정치권력은 이 봉우리에서 '사학(邪學)의 무리'를 목 자르고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죽임을 당한 자들이 1만 명이 넘었다."
"비 오는 날에는 절두산 벼랑이 빗물에 번들거리고 그 아래 자유로에는 늘 자동차들이 밀려있었다. 자유로를 따라서 서울을 드나들 때마다, 이 한줌의 흙더미는 나의 일상을 심하게 압박하였다. 이 소설은 그 억압과 부자유의 소산이다."
"흑산의 여러 섬에 갔더니, 물고기를 들여다보던 유배객의 자취는 풀섶에 덮였고 지나간 날들의 물고기는 오늘의 물고기로 이어져서 연안으로 몰려왔다. 섬에서 죽은 유자의 넋이 물고기가 되어 온 바다에 들끓는 것이려니 여겼다."
어쩌면 이다지도 문장이 짤막짤막하게 끊어지면서도 단단하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분께서 자기 삶이나 이 세상에 대해서 믿고 있는 게 실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애초에 뭐든 긍정하는 게 없으니, 말이 길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 분께서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게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라는 완전 절망의 경지에 이미 도달하셨기에, 이런 문장을 구사하실 수 있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쓸데없는 희망과 욕심들을 많이 갖고 있다 보면, 사람들이 쓸데없이 할말도 많아지는 법이다.
실제로 소설가 김훈은 기자에게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창작의 과정에 대해서도 "혼자서 견디는 날들과, 내 영세한 필경(筆耕)의 기진한 노동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입을 닫았다고 한다.
하긴 그의 대표작 '칼의 노래'에서도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한편에선, 존재의 위기감을 느끼고 절망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이렇게 절망 그 자체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가보다.
김훈 작가님은 예전에 마초적이고 현실도피적인 태도로 좌파, 페미니즘적 가치들에 대해 가차 없이 냉소를 보내고 경멸적 표현을 해대다가 진보진영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더욱 더 철두철미한 회의주의에 빠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는 게 자기는 진보 같은 거 추구하지도 않고,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꿈도 포기하게 되었다는 의미죠.
주인장님은 어쩌면 김훈 작가님을 따라가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그래도 딱 한가지 정도는 이 세상에 긍정적인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미련을 못 버리셔서 우왕좌왕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하거나, 현실에서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것은 불교적, 도교적 관점입니다. 그런 관점에 따른다면 진보적인 것도 없고 긍정적인 것도 없고 모든 게 헛될 뿐입니다. 성공한 인생에 대한 열망도 탐욕에 불과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도 집착에 불과하고 자유,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도 어리석은 방황에 불과하죠.
그런데 현실은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패배자' 또는 '사기꾼'의 낙인을 찍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런 낙인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살았어야 또 다른 멋을 완성할 수 있는 건데, 주인장님은 '그래도 내가 뭔가 한가지쯤은 추구할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타협하려 하십니다. 실상은 암암리에 이루어놓은 것도 많고, 지킬 것도 많은 분이시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구요. ^^
그러다 보니, 주위의 비웃음을 사면서 결과적으로 말만 많아지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 예전에 홍상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부정이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하고 궤변을 늘어놓다가 제자들에게 한 방 먹고 머리를 긁적거리던 유지태의 모습도 오버랩됩니다. 그때 어느 여학생이 그렇게 말했죠. "부정한다는 게 자랑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
"무너져가는 나라의 정치권력은 이 봉우리에서 '사학(邪學)의 무리'를 목 자르고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죽임을 당한 자들이 1만 명이 넘었다"
는 말은 가치판단이 들어간 것 아닐까요?
저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믿음이 가지 않더군요.
기회주의자라 할까요. 중간에서 박쥐처럼 잇속을 챙기려 하시는 것처럼도 보이구요.
김훈이 한겨레 기자였다고 하지만, 김훈은 이문열보다도 더 나쁘다. 이문열은 그래도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인간이다. 연좌제의 피해자니까.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에 대해 의리를 지키고.
영남출신의 보수주의 유명인사들에 대해서는 미련할 정도로 애정을 표시함. 가끔은 그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육탄방어를 하기도 함. 그런 걸 보면 참 우직하다는...
이문열은 간혹 진보진영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비판을 하기도 한다. 부악문원 문하생 중에 운동권 출신들이 많아서 그런 걸까? 굉장히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
그에 비해 김훈은 진보와 보수 어느쪽도 편들지 않고, 어느쪽에 대해서도 공감을 표시하지 않음.
진보진영에 대해 애정 어린 비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냉소만 던질 뿐이다. 그냥 나는 너네들을 경멸한다, 이거.
근데 그게 왜 역겹게 느껴지냐면, 김훈 같은 인간에게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없다는 게 드러나기 때문.
인간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자기도 거기에 동참하는 게 아니다.
나보다 하등한 짐승들이 울부짖는 것을 감정이입 없이 건조하게 묘사한다는 그런 거다. 억울한 피해자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다든가, 내가 나서서 이 문제의 해결에 기여를 하고 싶다든가, 그런 게 하나도 없다.
이문열 같은 인간, 심지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같은 인간도 그 방법이 잘못됐다 뿐이지, 나름대로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근데 김훈에게는 아예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없다.
이문열 같은 '따뜻한 보수'에 비해 김훈 같은 이런 '쿨한 자유주의적 작가'들이 더 위험하고 얄미운 존재들이다.
이문열처럼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확실한 방향을 잡고 달려가고, 명백히 틀린 말을 하는 인간들이 더 낫다.
김훈처럼 우왕좌왕하면서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아리송한 말장난만 하는 인간들이 사실은 더 나쁜 넘들이다. 우리나라의 진보에는 오히려 이런 인간들이 더 큰 해악을 끼친다.
한때 그의 책들을 다 모아놓고 화형식까지 집행했던 인간들이 소위 '진보'라는 인간들이죠. ㅠ
오랫동안 자기네들 편이었던 황석영도
이명박 한번 따라다녔다고 걍 쓰레기 취급을 해버리지 않나.
이제는 김훈까지 까대느라 난리네요. 도대체 '진보'란 인간들은
안 까는 인간들이 누가 있는지.
요즘 '도가니'로 날리고 있는 공지영이한테는
작품보다 얼굴로 승부하는 여자라고 까대지 않나...
요즘은 진짜 '진보'라는 인간들만 보면,
아예 상종을 못할 인간들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라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