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의 시민법 계수, 그리고 한자문화권


수많은 나라들이 서구의 시민법을 계수했지만, 이를 제대로 정착시키고 경제문화적 번영을 구가하는 데 성공적으로 활용한 나라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기껏해야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정도를 들 수 있다(조금 뒤늦었지만 중국도 최근에 이러한 대열에 합류해가고 있음. 그것도 매우 성공적으로...). 그 이유로서는 시기적 우연이나 지정학적 유리함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나는 특히 이러한 나라들이 모두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 속하고 있고, 그 안에서 한자어로 기록된 방대한 문화유산들을 장기간 공유하며, 윤리적 사명감과 도덕적 책임감, 역사의식과 교육열 등을 배양하고, 개념과 사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능력 등 정신적 자질과 함께, 교육 받고 연구한 성과를 정확히 표현하고 기록할 수 있는 언어 및 문화체계 등을 잘 정비해왔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론 한자가 표의문자라는 이점이 아니다. 그보다는, 수천년의 역사 흐름 속에서 쌓아올린 문화적 축적, 서구문화에 견줄만한 방대한 정신문화적, 물질문명적 축적이 바로 한자문화권에서 이루어져왔다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실제로 한자문화권은 근대화 직전까지 서구세계가 갖추고 있던 거의 모든 것을 사실상 똑 같이 가지고 있었다. 문학, 회화, 조각, 음악, 연극과 같이 어느 문화권에나 다 존재하는 것들뿐만 아니라, 정교하게 발달한 인문학과 자연과학 및 방대한 추상적 개념어휘들, 국가 전역에 통용되고 있던 강한 공신력의 화폐(국가통화), 정교(政敎)가 분리된 채 고도로 발달돼있던 국가행정 및 관료시스템, 정치적ㆍ학문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논쟁과 상호비판이 보장되고 있던 언론시스템, 매사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 기록된 문서들을 세심히 보관하며 시대를 초월하여 이 자료들을 공유하도록 하던 데이터베이스 문화, 이미 가내수공업의 단계를 벗어난지 오래되었으며 대규모화하고 수출 및 외화벌이까지 하고 있던 제조산업(특히 요업과 제지ㆍ제철업) 등등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유형이나 방식이 다를 뿐 대체적인 원리는 다르지 않게, 한자문화권은 기독교문화권의 모든 것을 이미 다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문화권이나 힌두문화권은 국가행정 및 관료시스템, 언론시스템 등에 있어서 한자문화권보다 무려 천 몇백 년 내지 몇백 년 이상은 뒤쳐진 문화권이었음.)

그 덕분에 한자문화권의 구성원들은 서구문물을 수입하는 데 있어서 다른 문화권의 구성원들보다 훨씬 더 빠를 수가 있었고, 거부감 없이 흡수를 할 수가 있었다. 일단 인문학적 유산과 상징 및 어휘체계가 워낙 발달돼있다 보니, 그 번역에 있어서부터 어려움이 없어서, 가령 영국인들이 'rule of law'라고 하면 동아시아인들은 곧 '법치(法治)'로 번역을 할 수 있었고, 'freedom'이라고 하면 곧 '자유(自由)'로, 'universal gravitation'이라고 하면 곧 '만유인력(萬有引力)'으로, 'survival of the fittest'라고 하면 곧 '적자생존(適者生存)'으로 금방 번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그와 같다. 그리고 이렇게 번역된 한자는 권내(圈內)에 공용(共用)이었으므로 누가 번역했건 개의하지 않고 모두가 갖다써서 급속히 통용되고 이해되게끔 할 수 있었다. 예컨대 기하(幾何), 대수(代數), 함수(函數), 복음(福音) 등은 중국에서 번역되어 전파된 말들이었고, 철학(哲學), 역학(力學), 이성(理性), 이상(理想) 등은 일본에서 번역되어 전파된 말들이었다. 국적과 상관없이 모두가 빠르게 이해했고, 모두가 빠르게 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유학시절, 나는 중국인 친구나 일본인 친구들을 만날 때, 설령 영어나 독일어가 잘 통하지 않더라도 종이 한 장 갖다놓고 한자로 필담(筆談)을 나누면서 매우 높은 수준의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경험들이 많다. 물론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온 친구들과는 그러한 대화가 통할 수 없었다. 그 누구이든 한자문화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알 수 있는 증거다.

일본이 일찍이 19세기말부터 세계열강의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고,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고, 중국이 오늘날 미국을 곧 능가할 정도의 초강대국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된 원동력도 모두 이러한 한자문화권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문화적 이점만 잘 활용한다고 해도 향후 국가적 장래에 별로 걱정이 없을 정도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초중등교육 현장에서는 한자교육이 자취를 감춘지 오래라고 하니, 걱정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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