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義務)의 일반이론


독일의 법학자들은 이론적으로 매우 철두철미한 것 같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허술한 구석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간혹 놀라게 된다. 이를테면 권리와 의무의 개념과 같은 것이 그러한데, 독일의 민법 일반이론서들을 들여다보면 권리의 개념에 대해서는 매우 상세하게 설명을 해놓아도, 의무의 개념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이 없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될 때가 많다(독일의 교과서들을 베낀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민법 교과서들도 마찬가지이긴 함). 그들이 그렇게 의무의 이론을 생략하는 이유는, 권리의 이론만으로 의무의 이론 역시 다 설명된다는, 그들의 간편하고 일원론적이며 일방적이고 직선적인 사고, 즉 제국주의적인 사고에 근거하는 것인데, 옛부터 주역(周易) 같은 책만 보더라도 팔괘(八卦)가 있으면 그 중에 사괘(四卦)만 설명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팔괘 모두를 다 설명해야 하고, 각각의 개념이 서로 어떻게 상응하고 대칭하는지를 일일이 다 설명해서 그 균형을 잡아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던 우리 동양인의 사고로 볼 때에, 이러한 그들의 이론적 태도는 뭔가 찜찜하고 개운치 않은 뒷맛을 항상 남기게 된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그리고 음양(陰陽)이 서로 완벽하게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음(陰) 가운데는 양(陽)과 통하지 않는 것도 있고, 양(陽) 중에서도 음(陰)과 통하지 않는 것이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음양(陰陽) 각각의 성질을 다 따로 살펴보지 않으면(예를 들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입장을 모두 똑같이 살펴보지 않으면), 우주질서의 전체를 인식함에 있어 항상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우리의 사고로 볼 때에, 독일인들처럼 권리의 이론만으로 의무의 이론을 다 유추하려 하고 권리중심적으로만 모든 법률현상을 바라보려 하는 데에는 뭔가 항상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건 마치 태극기의 절반만 그리고서 다 그렸다고 뽐내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인데(나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태극기가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상황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이원론적 원리, 그러니까 서로 대립하는 두 세력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절대선이고 어느 한 쪽이 절대악인 게 아니라, 둘의 견제와 상생과 공존, 그리고 장점과 약점이 항상 전제될 수밖에 없다는, 미묘한 사회학적 원리까지 그것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게 대한민국의 국민 아이큐를 높이는 데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쨌든 나는 이런 이론적 구멍을 참을 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에 한번 의무의 일반이론을 만들어서 여기에 정립을 해보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아래는 내가 멋대로 만들어본, 세계 민법학사상 최초의, 의무(義務)의 일반이론이 되시겠다:


1. 의무의 개념

(1) 권리의 정의와 의무의 정의

법률관계는 권리(權利)와 의무(義務)를 내용으로 한다. 법률관계 내에서 권리란 법적인 구속을 상대방에게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하는 반면에, 의무는 법적인 구속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권리와 의무 양자는 마치 음양(陰陽)의 관계처럼 서로 대칭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권리는 라틴어로 ‘ius’, 독일어로는 ‘Recht’, 영어로는 ‘right’라 불리는 반면에, 의무는 라틴어로 ‘debitum’, 독일어로는 ‘Pflicht’, 영어로는 ‘duty’라 불리며, 권리가 법에 의해 일정한 이익이 보장됨으로써 발생하기도 하고, 법에 의해 일정한 힘이 제어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기도 하는 것처럼, 의무 역시 일정한 행위에 대한 법의 적극적 요구(Gebot)로부터 발생하기도 하고, 일정한 행위에 대한 법의 소극적 금지(Verbot)로부터 발생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법률관계에서는 권리와 의무가 서로 대칭을 이루기 때문에, 의무 없이는 권리가 있을 수 없고, 권리 없이는 의무가 있을 수 없는 것이 거의 맞지만(예를 들어 모든 청구권에 대칭해서는 그 청구권에 복종하는 특정인의 의무가 상응해서 존재하고, 모든 절대권에 대칭해서는 그 절대권에 복종하는 만인의 의무가 상응해서 존재함), 모든 법률관계에서 의무가 권리에 대칭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예를 들어 형성권과 항변권의 경우 그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가 존재하지 않으며, 보호법규나 공서양속에 따른 의무의 경우 그 의무에 상응하는 권리가 존재하지 않음), 의무의 발생원인과 권리의 발생원인이 항상 서로 대칭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권리의 일반이론과 의무의 일반이론을 별도로 고찰할 필요성이 존재한다고 하겠다.

(2) 의무의 발생원인

의무는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법(여기서 ‘법’이란 주관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객관적인 것일 수도 있음)의 적극적 요구에 의해서 발생하기도 하고, 법의 소극적 금지에 의해서 그것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권리자가 갖는 권리를 존중하라는 적극적 요구와 권리자가 갖는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는 소극적 금지에 의해서 의무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이러한 의무를 ‘주관적 의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임), 이러한 경우 권리와 의무는 서로 대칭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권리의 존재와 상관없이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법이 각 의무주체에게 적극적 요구 또는 소극적 금지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예를 들어 형법의 사회적ㆍ국가적 법익에 대한 범죄규정, 도로교통법이나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경범죄처벌법, 질서위반행위규제법 등). 이 경우 의무는 주관적 권리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법질서에 상응하는 것이며, 이러한 한도에서 의무는 권리와 대칭하지 않는 것이 된다(이러한 의무를 ‘객관적 의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임). 물론 사적 자치의 원칙이 지배하는 법질서 하에서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의 범위는 가급적 협소하게만 인정될 뿐이고, 그에 따른 의무의 목록 역시 빈약한 게 사실이긴 하지만, 이러한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로부터 어쨌든 각종 의무들이 직접 발생하는 반면, 주관적 권리(그것이 절대권이든 상대권이든 불문함)가 이러한 공서양속(公序良俗) 관련 규범들로부터 직접 도출될 수는 없는 이상, 의무 가운데는 권리에 상응ㆍ대칭하지 않는 것도 존재함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물론 권리 가운데서도 형성권과 항변권처럼, 그에 상응하는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 권리들 역시 마찬가지로 존재함). 다만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의 존재로부터 만인이 권리를 직접 취득하지는 못해도, 그로부터 사실상의 반사이익을 얻을 수는 있으며, 이러한 이익이 침해될 때 그 의무에 상응하는 권리를 그 피해자가 간접적으로 취득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각 의무주체가 이러한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행위를 함으로써 특정의 상대방에게 손해를 발생시킨 경우, 그 특정의 피해자는 자신의 주관적 권리가 침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서양속에 기한 의무에 위반하여 가해행위를 한 자에 대해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제750조)을 행사할 수 있게 되고, 이 경우 각 권리주체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로부터 권리를 직접적으로는 도출하지 못해도, 간접적으로는 얼마든지 그 권리를 도출해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의무의 종류

(1) 개 관

권리가 절대권, 상대권으로 크게 나뉘는 반면, 의무는 계약상의 의무와 법정채권관계에 따른 의무, 그리고 일반적 거래안전의무로 크게 나뉜다. 세 가지 의무의 차이점은, 계약상의 의무가 특정인 간의 계약(채권계약, 물권적 합의, 친족법상의 전형계약을 불문함)을 전제로 하고, 계약상대방의 구체적인 각각의 권리, 특히 상대권에 대칭하여 인정되는 의무인 반면, 법정채권관계에 기한 의무는 법률규정에 의해 특정인 간에 채권관계가 발생한 것을 전제로 하고, 그 채권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상대방의 상대권에 대칭하여 인정되는 의무를 말하는 것이고, 그 반면에 일반적 거래안전의무는 특정인 간의 계약을 전제로 하지 않으며, 그 대신 절대권, 보호법규, 공서양속 등을 전제로 하여, 반드시 일정한 권리에 대칭될 필요가 없이 인정되는 의무를 말한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의무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2) 계약상의 의무

계약상의 의무는 특정인 간의 계약(契約)을 전제로 하여 특정인 간에 발생하는 의무를 말한다. 독일어로는 이를 ‘Vertragspflicht’라 칭한다. 계약상대방의 구체적인 각각의 권리, 예를 들면 계약의 목적으로서 급부(給付)에 대한 청구권과 이러한 급부의 완전한 실현을 요구하는 권리, 그리고 계약과정에서 계약상대방의 인격적 법익과 재산적 이익이 침해되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권리 등에 대칭하여 인정되는 의무로서, 주된 급부의무와 부수적 급부의무, 그리고 부수적 주의의무 등으로 구성된다. 계약상의 대인적(對人的) 의무인 만큼 어디까지나 계약 당사자만을 구속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 발생원인인 계약이 채권계약인가, 물권적 합의인가, 친족법적 계약인가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그 종류가 나뉜다:

1) 채권계약에 따른 의무 : 증여, 매매, 교환, 소비대차, 사용대차, 임대차, 고용, 도급, 위임, 임치, 조합 등 14종의 전형계약을 비롯한 여러 채권계약으로부터 발생한 의무이다. 채권계약 자체가 일종의 의무부담행위(義務負擔行爲)이므로, 이러한 채권계약으로부터 발생한 의무는 반드시 이행(履行)의 문제를 남기게 되며, 의무자가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였을 경우 채무불이행에 기한 손해배상의 책임이 발생하게 된다(제390조: 다만 귀책사유 없음이 입증될 경우 면책이 될 수는 있음). 물론 이때에 침해된 상대방의 권리는 대부분 절대권이 아니라 상대권이지만, 당사자 간에 특별구속관계가 존재하는 이상, 절대권의 침해 여부와 상관없이 그 관계에서 발생한 의무의 불이행 자체가 위법(違法)한 것으로 평가되고(大判 2002. 12. 27, 2000다47361), 그로부터 손해배상책임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간혹 이러한 채권계약에 따른 의무를 채무(債務)와 혼동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본디 채무는 이러한 약정채권관계에서 발생한 의무뿐만 아니라 사무관리, 부당이득, 불법행위 등 법정채권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들까지 다 포괄하여 총칭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2) 물권적 합의에 따른 의무 : 소유권이전의 합의, 지상권설정의 합의, 저당권설정의 합의 등 물권적 합의에 의해서 발생하는 의무들을 말하는 것이다. 물건의 점유인도의무, 등기의무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데, 이러한 물권적 합의에 따른 의무는 곧 그 원인행위인 채권계약에 따른 의무이기도 하므로, 이러한 물권적 합의에 따른 의무에 위반하였을 경우에도 일반규정에 따라 채무불이행에 기한 손해배상의 책임이 발생하게 된다(제390조). 물론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여, 이러한 물권적 합의에서 요구하는 공시방법까지 다 갖추어줄 경우 물권행위(物權行爲)는 완성하게 되며, 이로써 당사자 간에 모든 의무이행과 처분이 완료되므로, 원칙적으로 더 이상의 의무이행문제는 남지 않게 된다. 다만 제한물권의 존속기간이 완료되거나 하였을 때, 그 원상회복에 관하여 의무이행의 문제가 다시 발생할 수는 있게 될 것이다.

3) 친족법적 계약에 따른 의무 : 약혼, 혼인, 입양 등의 합의에서 발생하는 여러 친족법상 의무들을 말하는 것이다. 계약당사자만을 구속할 수 있으며, 의무이행을 하지 않을 경우 이행을 강제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 등 계약상 의무의 일반이론이 거의 그대로 적용되지만, 당사자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는 친족법적 계약으로서의 특수성을 갖고 있는 이상, 이러한 의무를 위반했다 하여 채무불이행에 기한 손해배상의 책임(제390조)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그 대신 제806조와 제825조에 특별규정들이 마련되어 이음), 그 의무의 이행이 함부로 강제되지 않는 예외들도 더러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예를 들어 부부간의 동거의무나 협조의무는 강제이행이 허용되지 않음).

(3) 일반적 거래안전의무

일반적 거래안전의무는 평균적인 사회구성원이 일반거래에 참여하면서 그 거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부담하는 의무로서, 특정인 간의 계약을 전제로 함이 없이, 절대권, 보호법규, 공서양속 등을 전제로 하여 발생하는 의무이다. 독일어로는 이러한 의무를 ‘allgemeine Verkehrssicherungspflicht’ 또는 ‘allgemeine Verkehrsversicherungspflicht’라고 칭한다. 그 내용은 대체로 타인의 생명, 신체, 건강, 소유권 기타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고, 보호법규와 공서양속을 준수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내용은 결코 특정인에 대해서만 이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민사회구성원과 거래공동체의 구성원에 대해서 널리 공평하게 이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무에 위반하여 특정인에게 손해를 발생시킬 경우에는, 그 특정인과 그 이전에 아무런 채권관계가 없었다 하더라도, 고의ㆍ과실 등 귀책사유의 입증을 전제로 하여 그 특정인에게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제750조)을 부담하게 된다. 이러한 일반적 거래안전의무의 종류로서는 다음의 세 가지 예를 들 수가 있다:

1) 타인의 절대권을 침해하지 않을 의무 : 타인의 인격권이나 지배권과 같은 절대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에 관한 의무이다. 일반적 거래안전의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이러한 의무를 침해하였을 경우 그 침해행위의 위법성(違法性)은 바로 추정이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그 의무위반으로 인하여 타인에게 손해가 발생하였고, 의무위반자에게 고의ㆍ과실 등 귀책사유가 입증되기만 하면, 의무위반자는 그 피해자에게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제750조)을 바로 부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타인의 절대권이 아니라 상대권을 침해하였을 경우에는, 그로 인하여 타인에게 손해가 발생하였고, 그 침해자의 고의ㆍ과실 등 귀책사유가 입증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이러한 의무의 위반이 인정되지는 않는 것으로 본다.

2) 보호법규를 준수할 의무 : 시민의 권리 및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의 보호를 위한 강행법규, 즉 보호법규(保護法規)에 위반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에 관한 의무이다. 이러한 강행법규로서는 물론 여러 가지의 것들이 있으나, 일단 결과반가치(結果反價値)에 관한 보호법규들은 여기서 제외하고, 행위반가치(行爲反價値)에 관한 보호법규들만을 여기에 포함시키기로 한다. 왜냐하면 결과반가치에 관한 보호법규들(예를 들어 형법의 개인적 법익에 대한 범죄규정들)은 대부분 위에서 설명한 ‘타인의 절대권을 침해하지 않을 의무’보다 더 협소한 범위의 의무들만을 거기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라, 검토의 실익이 적기 때문이다(대개의 경우 상대권의 침해는 규율하지 않으며, 절대권의 침해라 하더라도 그 침해자에게 고의만를 요구하는 경우가 더 많음).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보호법규란 결과반가치가 아니라 행위반가치에 관한 것들로서, 주로 형법의 사회적ㆍ국가적 법익에 대한 범죄규정들(예를 들어 공무방해, 위증, 무고, 교통방해, 아편제조, 통화위조, 문서위조, 간통, 음행매개, 공연음란 등), 도로교통법의 규정들(예를 들어 자동차의 속도제한이나 안전거리 확보 등에 관한 규정들)이나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의 규정들, 근로기준법이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의 규정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의 규정들,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의 규정들, 경범죄처벌법의 규정들, 질서위반행위규제법의 규정들 정도를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무에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발생시켰을 경우, 타인의 절대권이 침해된 것이 아니라 상대권, 사실적 이익이 침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법성의 추정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이로부터 발생하는 불법행위책임을 독일민법은 제823조 2항에 따로 규정하고 있음). 예를 들어 당해 소송에서 제소자가 주장한 권리 또는 법률관계가 사실적ㆍ법률적 근거가 없고, 제소자가 그와 같은 점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를 제기하는 등 소의 제기가 재판제도의 취지와 목적에 비추어 현저하게 상당성을 잃었다고 인정될 경우, 이는 형법 제156조의 무고(誣告)로서, 보호법규의 위반에 의해 그 위법성이 인정된다(大判 2002.5.31, 2001다64486). 그리고 기업이 노동조합과의 단체교섭을 거부하여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집행력 있는 판결이나 가처분을 받고도 이를 위반하여 노동조합과의 단체교섭을 거부하였다면, 이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81조 3호에 위반한 부당노동행위로서, 역시 보호법규의 위반에 의해 그 위법성이 인정된다(大判 2006.10.26, 2004다11070). 또 기업이 징계권을 남용하여 근로자를 해고하였다면, 이는 근로기준법 제23조 1항에 의해 무효인 해고행위로서, 역시 보호법규의 위반에 의해 그 위법성이 인정된다(大判 1993.10.12, 92다43586). 다만 판례는 약사법 제34조에 따라 감독관청의 승인이 요구됨에도 이를 위반하여 승인 없이 임상시험에 해당하는 의료행위를 한 경우 그 자체로 위법성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大判 2010.10.14, 2007다3162), 이는 그 규정이 보호법규가 아니라 단순한 절차규정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판례는 ‘그 자체가 의료상의 주의의무 위반행위는 아니라고 할 것이므로, 당해 의료행위에 있어 구체적인 의료상의 주의의무 위반이 인정되지 아니한다면 그것만으로 불법행위책임을 지지는 아니한다’고 판시하였음).

3) 공서양속을 준수할 의무 :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 즉 공서양속(公序良俗)을 준수하는 것에 관한 의무이다. 특정인의 절대권이 침해될 염려도 없고, 보호법규에 의해 그러한 의무가 요구되는 것도 아니라 하더라도,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여기서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는 민법 제103조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판례에 의해 ‘사회통념’이나 ‘사회상규’란 말로 표현되기도 함) 등을 고려하여 반드시 지켜줘야 하는 의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의무에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발생시켰을 경우, 타인의 절대권이 침해된 것이 아니라 상대권, 사실적 이익이 침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위법성이 인정될 수 있다(이로부터 발생하는 불법행위책임을 독일민법은 제826조에 따로 규정하고 있음). 예를 들어 제3자가 채무자에 대한 채권자의 존재 및 그 채권의 침해사실을 알면서 채무자와 적극 공모하였거나 채권행사를 방해할 의도로 사회상규에 반하는 부정한 수단을 사용한 경우, 이는 공서양속에 위반한 것으로서 위법성이 인정될 수 있다(大判 2003.3.14, 2000다32437). 그 밖에 성적 표현행위도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면 그 위법성이 인정될 수 있으며(大判 1998.2.10, 95다39533), 대학교의 학생징계 및 제적처분에 있어서 그 재량권의 일탈 및 남용의 정도가 사회통념이나 사회상규에 비추어 용인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을 경우에도 그 위법성이 인정될 수 있다(大判 1997.9.9, 97다20007). 다만 사적 자치를 그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는 법질서에서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의 범위를 매우 엄격하게 한정하므로, 그 행위자가 웬만큼 반사회적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러한 의무의 위반은 거의 인정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에 설령 위반하였다 하더라도, 그 행위자는 과실이 아니라 고의로 이러한 의무에 위반하였을 것을 요하므로(예를 들어 전문감정인이 그 예술품을 보지도 않고 진품 여부에 대해 감정을 내려 특정인에게 손해를 발생시켰다면, 이것은 고의로 볼 수 있음: BGH NJW 1991, 634, 636; BGHZ 129, 136, 177), 만약 그 행위자가 과실로 이러한 의무에 위반하였다면, 그로 인해 특정인에게 아무리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하더라도, 불법행위는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제750조). 그만큼 자유주의적 법질서 하에서는 각 개인에게 폭넓은 행동의 자유가 보장이 되는 것이다.

(4) 법정채권관계에 기한 의무

계약이 아니라 법률규정에 의해 특정인 간에 채권관계가 발생한 것을 전제로 하고, 그 채권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상대권에 대칭하여 인정되는 의무를 말한다. 여기서 채권의 목적인 급부(給付)는 당사자 간의 합의가 아니라 법률규정에 의해서 그 내용이 정해지며, 이러한 의무에 위반한 경우에도 상대방의 절대권이 침해되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위법성이 인정되고, 채무불이행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이 발생하게 된다(제390조). 본디 채무는 약정채권관계에서 발생한 의무뿐만 아니라 이러한 법정채권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들까지 다 포괄하여 총칭하는 것이고, 이러한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이 행하여지지 않았다면 그 자체가 바로 위법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大判 2002.12.27, 2000다47361). 이러한 의무로서는 사무관리에 기한 의무(제734조 이하)와 부당이득의 반환의무(제741조), 그리고 각종의 손해배상의무(제390조, 제750조 등) 등을 그 예로 들 수가 있다.

1) 사무관리에 기한 의무 : 아무런 계약상ㆍ법률상의 의무 없이 타인을 위해 그의 사무를 대신 처리해주었을 경우, 그 사무관리자와 본인 사이에는 사무관리(事務管理)에 관한 법률규정(제734조 이하)이 적용된다. 이에 기해서 발생하는 법정채권관계에 따라, 사무관리자는 본인의 의사를 알 수 있을 경우 그 의사에 적합하도록 관리해야 할 의무와, 그 사무의 성질에 따라 본인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법으로 관리해야 할 의무를 부담하게 된다(제734조). 물론 본인 역시 사무관리자가 지출한 비용의 상환의무(제739조)와 사무관리자가 입은 손해에 대해 본인의 귀책사유가 없다 하더라도 이를 현존이익의 한도에서 배상해줘야 하는 의무(제740조) 등을 부담하게 된다.

2) 부당이득의 반환의무 : 법률상 원인 없이 타인의 재산이나 노무로 인하여 이익을 얻었을 경우, 그 이득자와 손실자 사이에는 부당이득(不當利得)에 관한 법률규정(제741조)이 적용된다. 이에 기해서 발생하는 법정채권관계에 따라, 이득자는 손실자에게 그 이득을 반환하는 의무를 부담하는데, 다만 그 이득자가 선의일 경우에는 그 받은 이익이 현존하는 한도에서만 반환의무를 부담하게 된다(제748조 1항).

3) 손해배상의무 : 일정한 의무에 위반한 가해행위에 의하여 특정의 피해자에게 손해가 발생하였을 경우, 채무불이행(제390조) 또는 불법행위(제750조) 등의 손해배상규범에 의하여 가해자에게는 손해배상의 의무가 발생하게 된다. 특히 불법행위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 간에 채권관계가 존재하지 않다가 불법행위에 의해서 비로소 채권관계가 발생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발생하는 손해배상의무는 전형적인 법정채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채무불이행의 경우, 대부분 약정채권관계가 이미 존재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설령 그 불이행된 채무가 약정채무였다 하더라도, 손해배상의 의무 자체가 법률규정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이는 계약상 의무가 아니라 법정채권관계에 기한 의무가 된다는 점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댓글 5

Sondergänger
Sondergänger
한스님께서 그동안 줄기차게 지적질하신 보람이 있으셨네요.

그동안 독일것에 대해서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미련하고 답답한 사대주의적 태도로만 일관하시더니, 거기서 떠나서,

약간 뒤늦게나마 한국적인 것에 대해서도 뭔가 고민하려 하시는 흔적이 보여서 다행스럽게 생각됩니다. 역시 친구 좋다는 말은 빈 말이 아니었군요. ^

법학을 전공으로 삼지 않은 사람이라서, 권리는 양(+)이고 의무는 음(-)이란 말밖에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만, 나머지 얘기도 그리 틀린 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아서 고개가 끄덕거려집니다.

사주팔자 음양오행과 같은 역학적 방법론을 학문적 방법론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는 정치학에서도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황태연 교수님 같은 분들에 의해 시도된 적이 있습니다. (황태연 교수님께서도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시죠.)

물론 주인장님께서 황태연 교수님 정도의 내공을 가지신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법학분야에서 아직 시도되지 않은 것을 시도하려 하신다는 점에서, 제법 기대가 됩니다. ^^
YangChangSuk
YangChangSuk
죄송한 말씀이지만, 독일이론에서 탈피하려고 쓰신 글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독일이론에 철저히 입각해서 쓰신 글 같네요.

우리 민법은 불법행위에 관해서 권리침해를 요건으로 하고 있지 않고, 일반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권리존중의무는 인정되기가 어렵습니다.

공서양속 존중의무라든가 보호법규 준수의무 등도 독일민법의 고의의 양속위반에 따른 불법행위규정과 보호법규위반에 따른 불법행위규정을 참고하신 것 같은데, 우리민법의 해석론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우리나라 법학자들 중에 이런 식의 무리한 이론을 전개하시는 분도 없습니다.

독일민법과 마찬가지로 우리민법 역시 법조문에 의무에 관한 규정들을 두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채무, 선관주의의무 이외에는 이렇다 할 의무의 명칭 같은 것도 규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굳이 별도로 의무의 일반이론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고생해서 이론을 만드신 것을 치하드리고 싶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Ciracuser
Ciracuser
물권적 합의에 따른 의무 ---> 물권적 합의라는 개념이 우리 민법에 인정되고 있습니까? 물권행위의 개념 자체도 요즘은 인정 안 하는 추세 같은데요.

친족법적 계약에 따른 의무 ---> 친족법상의 행위가 '계약'이 될 수 있을까요? 신분행위에 따른 의무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런 의무를 위반했다고 해서 채무불이행이나 불법행위가 될 것 같지도 않고요.

몇 군데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민법을 한번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도 잘 읽었습니다.
Nora
Nora
주인장님의 글을 읽고 재미 있어서 제 남친(독일인, 법대생)한테 얘기했더니 독일 법학에도 의무의 일반이론이 다 있다고 하는데요?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독일 민법교과서들까지 보여주면서 다 설명을 해주는데 주인장님께서 위에 쓰신 내용들이 거의 다르지 않게 씌어져 있었습니다. 세계 민법학사상 최초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독일에서 공부하고는 있지만 법학전공자는 아닌 사람이라 잘못 알고서 이러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주인장님께 주제넘게 건방 떨었다면 죄송합니다... -_-
Martin
Martin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어린 법학도입니다. 위의 글들을 읽고 도서관에 가서 제가 직접 확인을 해봤는데요. 쾰러, 메디쿠스, 보르크 교수 등이 쓴 민법교과서들이 모두 'Pflicht'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의무의 일반이론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장님께서 의무의 일반이론을 전개하신 게 민법학 사상 최초는 아니라는 얘기고요. 물론 독일 민법 교과서에 쓰인 것들은 주인장님께서 쓰신 것처럼 길고 친절하게 설명한 것은 아니고, 무뚝뚝하고 적은 분량이었지만요. 압축적으로 개념을 잘 정립해놓았고요. 주인장님께서 위에서 쓰신 글을 다시 읽어봤는데 독일 민법 교과서에 나온 것보다 특별히 더 보태신 것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알기 쉽고 친절하게, 길게 풀어서 써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선택한 댓글 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