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권리주체성과 동일성(同一性)에 관한 단상
민법학에서 일정한 권리주체에게 일정한 권리가 귀속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그 권리주체가 이른바 동일성(同一性)이란 것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근대 민법학은 모든 권리주체가 이러한 동일성을 유지하며, 그 인격이 분열되거나 변경되거나 통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전제로 삼고 있다.인간이 행위능력이나 의사능력을 잃는 일은 있어도, 동일성을 잃는 일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동일성 유지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 삶의 여러 순간들마다 매우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데, 그 예를 들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Doug Liman 감독의 2002년도 영화 ‘The Bourne Identity’를 보면, 이 영화에서 Matt Damon이 분한 주인공 Jason Bourne은 잠수복을 입은 채로 망망대해에 떠다니다가 원양어선에 의해 건져지는데, 이미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이다. 자신의 동일성(identity)에 대한 단서라고는 스위스은행에 맡겨진 ‘Jason Bourne’이라는 이름의 여권과 권총 몇 자루, 거액의 현금, 그리고 자신도 모르고 있던 싸움실력이 전부일 뿐이다. 결국 Jason은 자신의 동일성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인물이었는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점차 알게 되고,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동일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며, 과거로부터 도피하려 하지만,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싸움실력을 계속 갖고 있는 이상, 동일성의 굴레는 계속해서 그를 따라오고 옥조르고 그의 생명을 위협해오게 된다.
물론 이 영화 속의 Jason은 기억상실증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몰린, 매우 비전형적이고도 특별한 예라고 해야겠지만, 꼭 Jason 같은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실제로 인간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욕된 일을 겪은 후, 그 과거로부터 도망쳐서 새 삶을 살거나, 군입대, 이민, 실연, 사업실패 또는 유학 등의 이유로 과거의 관계망으로부터 이탈하여 전혀 새로운 관계망 속에 던져지거나 할 때,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과연 동일성을 갖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거나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따라서 그 동일성을 부정하고 싶어지거나, 반대로 그 옛날의 동일성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져서 안달하곤 하지만, 그 동일성이라는 것은 형식과 실질이 결코 일치하지 않게 마련이어서, 인간에게 심각한 정신적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매우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법학은 이러한 동일성의 기준을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그 신체적 동일성 기준으로 한정해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는 인간의 신체가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한 그의 영혼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서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지만, 프랑스의 생화학자 Andre Giordan은 그의 저서 ‘내 몸의 신비’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인간은 화학적으로 1년 안에 거의 완전히 바뀐다. 1년 만에 만난 사람은 물질적 차원에서 지난번 만난 그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인간의 세포 가운데 최고로 수명이 긴 세포는 75일의 수명을 갖고 있을 뿐이다. 길어봤자 75일만 지나면 인간의 내부 성분은 완전히 갱신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체적으로 봤을 때, 한 개인의 진정한 ‘무덤’은 공동묘지가 아니라 그의 욕실과 변기 배수구에 있다. 평생 그의 몸을 이루었던 물질 대부분이 이곳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최근 몇 달 동안 그가 섭취한 성분으로 잠시 구성돼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일본만화 ‘寄生獸’에서도 역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은 어느날 하늘에서 떨어진 밤송이 같은 외계생물이 몸 안에 침투해 주인공의 오른손을 외계생물의 세포조직으로 대체함으로써 결국 그 신체를 어느 외계생물과 공유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언젠가부터 외계생물의 세포가 분리되어 주인공의 뇌세포 속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주인공은 점차 외계생물의 성격과 혼합되어 다른 성격의 인간으로 변모해가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 그 주인공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또 한편으로 불교경전 가운데에서 백유경(百喩經)이라는 것을 보면 여기에도 동일성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나오는데, 이를 여기에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인도에 한 나그네가 있었다. 그는 여행하는 중이었는데 밤이 되자 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들판에 세워진 불당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한밤중이 되자 그 불당에 식인 도깨비가 나타났다. 인도에는 여러 식인 도깨비가 있는데, 그날 밤 불당에 찾아온 식인 도깨비는 살아 있는 인간은 먹지 않고 시체만 먹는 식인 도깨비였다.
도깨비는 시체를 안고 불당에 들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나그네에게는 다 같은 식인 도깨비였기 때문에 무서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는 불당의 한 구석에 숨어서 덜덜 떨고 있었다. 식인 도깨비는 나그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가지고 온 시체를 먹으려고 하였다. 그때였다. 다른 식인 도깨비가 들어오더니 그 식인 도깨비에게 말했다.
"이봐, 그 시체는 내 거야! 어서 내 놔."
그러자 먼저 온 도깨비가 화를 내며 대꾸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이건 내 거라구. 내가 가지고 왔단 말이야."
"거짓말하지 마! 내가 처음부터 여기 있었고, 네가 나중에 왔잖아."
"아니야. 내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어."
그러는 사이에 두 마리의 도깨비는 나그네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들은 나그네에게 누구의 말이 맞는지 판정해 달라고 했다. 나그네는 난처해졌다. 바른 말을 해도 거짓말을 해도 어차피 한쪽 도깨비가 화를 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사실대로 말했다. 어차피 어느 한쪽의 원한을 살 바에는 옳은 편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그네가 먼저 온 도깨비가 옳다고 하자 화가 난 다른 도깨비는 나그네의 오른손을 잘라내버리고 말았다. 나그네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한쪽 팔이 없어져버리자, 먼저 온 도깨비가 시체의 오른팔을 잘라내어 나그네에게 붙여주었다. 다른 도깨비는 다시 나그네의 왼팔을 잘라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먼저 온 도깨비가 시체의 왼팔을 나그네에게 붙여주었다.
그 다음 도깨비는 나그네의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고, 왼쪽 다리를 잘라내고, 차례차례 몸 여기저기를 잘라내버렸다. 그때마다 먼저 온 도깨비는 시체에서 그 부분을 잘라내어 나그네에게 붙여주었다. 이윽고 나그네의 몸은 완전히 시체와 뒤바뀌고 말았다. 물론 머리도 바뀌었다. 두 마리의 식인 도깨비는 여기저기에 흐트러진 육체(그것은 분명히 나그네의 육체였음)를 먹기 시작하더니 전부 다 먹고 나서 불당 밖으로 나갔다.
나그네는 홀로 남겨졌다. 불쌍하게도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의 육체는 모두 타인의 것이었다. 그의 원래 육체는 완전히 식인 도깨비에게 먹히고 말았다.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누구지? 나는 나인가, 내가 아닌가?"
나그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불당을 나갔다. 다행히 나그네는 부처님과 조우하게 되었고 부처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저인가요? 아니면 제가 아닌가요?"
부처님은 대답했다.
"물론 너는 너란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너는 없단다. 영구불변한 네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틀렸다. 그런 것은 없다."
그 말을 들은 나그네는 큰 깨달음을 얻었고 그날 이후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수행을 시작하였다 (히로 사치야 著, 佛敎寓話, 144-148면 참조).
이러한 무아(無我)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권리주체성이란 것이, 그 기본전제에 있어서 개념상 얼마나 허약한 지반 위에 서있는지, 아니 우리 민법학의 기본도그마 자체가 실로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우리는 한번쯤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과연 나인가? 아니면 내가 아닌가? 우리는 과연 우리인가? 그리고 그러한 문제가 그렇게도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여야 하는가?
일본만화 'Gantz'에서도 정체불명의 검은 구체 '간츠'가 죽은 사람들의 영혼과 신체를 복제전송하여 괴물과 싸우는 미션에 참가시킨다는 얘기가 나오죠. 여기서 이미 죽은 사람과 복제된 사람 간에 동일성이 인정될 수 있는지도 재미있게 고민해볼 만한 주제입니다. 특히 키시모토 케이라는 여주인공은 간츠의 실수로 전송되지 않은 본체가 살아남아서 본체와 복사본이 공존하는 바람에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대목이 나오는데, 만약 인간의 신체와 영혼이 복제될 수 있다면, 둘 간에 동일성이 존재하는가? 이건 대단히 난해한 철학적 주제가 아닐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과연 인간의 동일성 자체를 부정할 만한 상황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네요. 불교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도 어찌 보면 무책임한 현실도피나 현실부정에 불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서는 별로 현실성이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나중에 과학이 발전한다면 대단히 민감한 주제가 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되네요. ^^
이번에도 주인장의 무아론이란 게 정말 기본적인 자아개념조차도 없이
'이번 정권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 운운하며 유체이탈화법을 즐겨 사용하는 mb가카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심각하게 신경정신과 치료를 권하고 싶어지네요.
예전에 홍세화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뭐니 그런 게
개인의 무책임과
공동체적 연대의식의 실종을 방조하는 개소리라고 봅니다.
사회적 공동체개념, 사회적 책임감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아개념의 확고함이 선결요건인데...
"나는 나가 아닐지 모른다" "너는 너가 아닐지 모른다"
"우리 모두 유전자 세포가 시키는대로 본능에 충실하며 살면 된다."
"그 누구도 죄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이게 무슨 골때리는 소리입니까?
공동체적 책임감, 도덕적 반성...
이런 걸 위해서는 먼저 불교적 무아의 관념부터 청산을 해야 한다는 걸 대체 아는지 모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