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이형과 전화통화를 하고
방금 86학번 선배 훈이형이랑 전화통화를 잠깐 하고 안부를 나누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사회과학 세미나를 할 때에 법대문학회 선배로서 자주 참석하여 어린 후배들 앞에서 왜곡된 역사와 가리워진 현실 등에 관해 어눌한 말투로 열변을 토하던 그 사람. 그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들 중에는 관념적이고 겉멋만 잔뜩 들었으며 자의식만 비대하던 댄디보이들이 꽤 많았었는데, 약 20여년 전 그때부터 이미 훈이형은 인식과 실천의 괴리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대단히 소탈하며 서민적인 풍모를 지닌 사람으로 내게 기억되고 있다.
그 어떤 어려운 이론도 대단히 쉽고 간단한 언어로 짧게 요약해서 단 한마디로 설명하였고, 그 어느 경우에도 잘난체를 하거나 생색을 내거나 냉소적인 자세를 취하는 일이 없이, 언제나 무지랭이 농사꾼이나 순박한 노동자와 같은 언행으로 일관하던 사람. 워낙에 이미지 자체가 거칠고 촌스럽고 투박한 사람이어서 그 당시 훈이형이 법대신문에다 기고한 글을 처음 읽어봤을 때 아주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유려하고 장중한 미문을 쓰는 사람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내면적이고 사색적이며 심미적이지만, 자기 시대 민중성의 심연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삶을 살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는 사람이 훈이형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명색이 문학을 공부하는 학회이다보니까, 훈이형이랑 세미나를 하면서 박노해의 시집도 읽고 백무산의 시집도 읽고 이런저런 노동문학작품들도 같이 읽고 했는데, 그런 문학작품들을 접하며 그 당시 노동현장의 비극성에 대해 모두가 같이 치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고도의 경제성장이라는 그늘 아래 손발이 잘려나가고 심폐가 썩어가고 척추가 문드러져가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단 한 번의 산업재해만으로도 온 가족이 모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고, 비인간적 정리해고에 항의하기 위해 파업이라도 한번 했다 하면 오히려 손배가압류조치 등으로 인해 그나마 가진 재산조차 모두 빼앗기고 자살의 외길로 치달아야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그때 아주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도 물론 노동법이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이는 거의 허울에 불과한 것이었고, 모든 근로조건은 비인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노동자들은 노조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 쟁의행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부분 잘 모른다고 하였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십수년이 지났어도 그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쳐주고 상담해줄 사람은 태부족인 상황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실력도 없고 자격도 없다보니 한계는 너무나 뚜렷해보였다. 누구는 아주 빨리, 누구는 아주 늦게 "여기까지가 끝인가보다"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훈이형은 아주 오래 그 암울한 바닥에 남아 있는 듯하였다. 그러더니만, 어느날 사법시험준비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다가, 금세 합격하여 노동변호사로서 눈부시게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대학시절의 초심을 잊고 소시민적 삶의 안락함에 빠져들 동안, 훈이형은 생존투쟁을 벌이거나 구치소에 투옥된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내밀한 삶 속에 파고들어 그들과 함께 싸우고 눈물 흘리고 절규하는 고난의 길을 애써 걸어가고 있었다. 나야 뭐 지금은 후방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법을 가르치는 소임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훈이형처럼 아직도 법적 투쟁의 최전방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법을 낳게 하는 긴박한 현실과 삶의 에너지, 그리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싱싱한 문제의식과 일체를 이루고 자기 자아와 인생 전체가 진보를 위해 내던져져 있으며, 진보를 향해 열려 있는, 영웅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심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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