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부경복(夫景福) 변호사라는 분의 책을 읽다가 '논리의 끝에서 공존하라'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논리는 아직 자기 입장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을 수긍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일 뿐, 이미 자기 입장을 정한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을 설득하기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그렇게 어줍잖게 설득을 시도하려다가는 싸움만 일어날 뿐이니, 논리를 통한 설득은 가급적 포기하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정하기 전까지만 다른 사람의 논리적인 설명을 수긍하려 한다. 일단 자기 입장을 정하고나면 그 어떤 논리에도 굴복하려 들지 않는 게 인간의 생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입장을 정한 사람에게 논리적인 설명을 하려 하면, 버럭 감정 섞인 비난의 고함소리만 듣게 될 뿐이고, 심한 경우 조직적인 인신공격의 십자포화까지 받게 된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은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싸움닭'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런 부작용을 상대방(들) 탓으로만 돌릴 경우 그 상대방(들)과의 인간관계는 망가지며, 이런 일이 반복될 경우 조직 내에서 나의 입지는 현저히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때에는 논리로 밀어붙여서 상대방을 끝까지 설득하려 애쓰지 말고, 차라리 나와 그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다. 내가 '최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차피 그 사람들에게 먹히지도 않을테니, 차라리 서로에게 '최악'이 되는 것만 피한다는 관점으로 재빨리 전환하여 그 사람에게 타협책을 제시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은 그러한 타협책에 대해서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고 따로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므로, 이 경우에는 나의 논리적 설명을 들어줄 가능성이 그나마 더 높아진다. 이렇게 '최선'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최악'이라도 피하는 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상대방이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데다 '내 사전에 타협은 없다' '불의의 세력은 박멸해버려야 한다'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을 경우, 그러니까 나를 '적(敵)'이라 생각하고 있을 경우, 내가 '최악'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대방에게 섣불리 말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그 사람은 '옳다꾸나'하고 그 '최악'을 실현해버릴 것이며 나의 존립근거를 완전히 파괴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나에게 '최악'인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최악'인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캣취해서 그것을 피하자는 식으로 말을 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건방진 '위협'이 될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위협'이 아닌 것처럼 부드럽게 말을 해서 상대방의 '최악'을 막고 간접적으로 나의 '최악'도 막는 것이 좋다.
만약 상대방이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나의 말이라면 무조건 듣지 않겠다, 자기 희생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나의 말과는 반대로만 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나온다면, 그 사람과 상대하지 않거나 조직을 떠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런 사람과 상대하거나 그런 곳에 있어봤자 자타공멸(自他共滅)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기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어느 정도 타협과 공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면, 상대방이 최악으로 생각하는 것과 내가 최악으로 생각하는 것만 피한다는 관점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서로에게 감정의 소모를 줄일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이 된다. 끝까지 우직하게 정면으로 들이받아서 장렬히 산화하는 것만이 지고의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어느 조직, 어느 대인관계에서나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 같은 상황이 너무 많이 벌어진다. 어느 쪽이나 상대방과의 공존은 염두에 두지 않고, 상대방의 이익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자기네들이 '최선'으로 생각하는 것만 백퍼센트 완벽하게 관철하려 하고, 자기네가 모든 것을 독식하려 한다.
그런데 이것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자기네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의사소통 습관을 계속 갖고 있으면, 다른 곳에서도 싸움을 계속 일으킬 수밖에 없고, 엄청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강력한 저항과 막대한 정력의 소모를 무릅쓰더라도 정의의 성전(聖戰)을 벌이거나 승자독식의 전쟁을 벌여 끝까지 승리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뭐 끝까지 그렇게 살라고 해야 하겠으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집단은 대개 통합진보당처럼 내부적 싸움으로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모해버리는 자폐적 집단으로 전락하거나, 역사상 수많은 제국들처럼 정복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하다가 멸망하는 과정을 밟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모든 싸움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총과 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글을 사용하는 이른바 '논쟁(論爭)'의 경우 상대적으로 부드러워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논리적인 말과 글을 사용하는 경우, 그것이 정의의 실현이자 절대진리의 체현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논리적인 말과 글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을 완전히 배제하고 무시하거나 나만이 옳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이것이 총이나 칼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논리'가 무조건 왕도가 아니며, 논리는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곳은 정해져 있다는 한계를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논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존'이다. 적어도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나의 논리가 모두 완벽할 수 없음을 안다면, 논리보다 공존을 더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우리에게 한정되어 있는 시간자원과 정력자원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원칙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냥 '논리적 싸움꾼'이 될 뿐이다. 어느 조직에서나 분란과 충돌, 그리고 패가르기만 일삼는 사람이 되어, 자기가 속한 조직을 멸망에 빠트리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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