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아래 칼을 신고 얼음 위에서 춤 추는 여자


지난 일요일은 발 아래 칼을 신고 얼음 위에서 춤 추는 여자애 하나때문에 가슴을 졸였다가 갑자기 기분이 막 좋아지는 등의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추운 걸 아주 싫어하는 편이기 때문에 동계스포츠니 빙상경기니 이런 거는 거의 보지 않는 편인데, 그래도 피겨스케이팅은 - 내가 그 분야에 문외한이긴 하지만 - 보면서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긴 들었다. 일요일 낮에 사우나에 가서 아들녀석이랑 함께 평상 위에 앉아 빙판 위를 칼 신고 달리는 아가씨들의 꽃처럼 아름다운 춤의 향연들을 보고 있자니, 뭔가 황홀한 느낌도 들고 해서 TV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만 세 살 짜리 아들녀석도 넋을 잃고서 그걸 볼 정도였으니 더 이상 무엇을 더 말하랴.)

피겨가 발레보다 훨씬 스피디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는 건, 아무래도 발 아래 칼을 신고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 춤을 추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런가, 아름답긴 아름다운데 보는 내내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승한 한국 여자애는 그 노력하고 극기하는 자세라든가, 중요한 순간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냉정함이라든가 등등, 그 전부터 참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던 편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자기가 항상 접하는 그 얼음과 칼이라는 물질에 자신의 멘탈이 완전히 동화되어 완전히 차갑고 예리한 성정을 갖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런 여자애와 업무적으로 친하게 된다면 그 이상 믿음직스럽기가 힘들 정도이겠지만, 이런 여자애와 인간적으로 친하게 된다면? 솔직히 말해서 '섬찟'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기 생활의 모든 것에 아주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며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친구나 연인들 앞에서 얼마나 감정적으로 폭주하는지 잘 알고 있고,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거의 마음 편할 때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것보단 약간 멀리 떨어져서 그런 사람들의 노력을 감상하거나 아니면 파트너관계를 맺고서 이런 사람들의 노력을 이용하는 게 상책이라는 얘기인데, 그렇게 보면 이런 사람들의 인생도 얼마나 가련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로부터 추앙은 받을지언정 친밀감을 자아내지는 못하고 살 것이며, 평생 냉혹한 정신세계를 갖고서 자기는 물론이고 남들까지 그저 압박하기만 하며 살아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얼음과 칼은 그 자체로 깨끗하고 완벽하며 강력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더럽고 뒤죽박죽이며 노곤노곤한 기운에 그대로 허물어지기 십상이다. 고도로 긴장하며 얼음과 칼만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도 물론 가치가 있긴 하나, 그 사람의 평생을 생각한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자신을 좀 해체하고서 더럽고 뒤죽박죽이며 노곤노곤한 세상의 분위기 속에 섞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1등이라는 것. 물론 가치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2등과 3등 그리고 꼴등에게도 똑같은 갈채를 보내며 함께 즐기는 문화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 아래 칼을 신고 얼음 위에서 춤 추는 여자애들 모습을 보면서 뭔가 대견하면서도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기에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말이다.



댓글 4

옳곤
옳곤
우리나라 현실상... 김연아 같은 스포츠스타를 조금이라도 비판적으로 얘기하면 극성팬들 수백수천명이 득달같이 달겨들어서 융단폭격을 해버리는 게 일반적 현상인데, 교수님께서 너무 거침없이 말씀하신 것 같아서 불안하네요.

쓸데없는 소동을 불러일으키시기 전에... 이 글은 조용히 내리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_-;;;
1stwhitewhale
1stwhitewhale
옳곤님께/ 염려 마세요. 특정인을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닌데요 뭘. :-)
정지혁
정지혁
김연아 같이 뛰어난 피겨스케이터들은 전부 유머감각이 별로 없을 것 같네여... ㅠ

평생을 얼음 위에서 살아왔는데, 농담을 해도 썰렁하기가 거의 시베리아 수준일 듯... ㅠ
H.호나우두
H.호나우두
칼과 얼음... 저나 교수님같이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어찌 보면 피겨 스케이터들 못지 않게 칼과 얼음에 친한 사람들 같습니다.

법의 여신이 한 손에 칼을 든 것도 그렇고, 법(法)이라는 한자가 물수(水)변을 끼고 있어서 본질적으로 찬 성격을 갖고 있는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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