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동으로 이사를 하다.


1. 드디어 그저께 보문동으로 이사를 했다. 서초구 잠원동에서 6년 동안 살아오다가 한강 이북에 새 전세집을 구해서 온 것이다. 전세금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인터넷과 도시가스서비스를 해지하고, 새로 이사할 집의 청소를 하고, 이삿짐을 정리하고, 주차스티커를 반납하고, 이삿짐을 나르고, 가구와 살림을 재배치하고, 인터넷과 도시가스서비스를 새롭게 신청하고, 주차스티커를 새로 발급받고, 전입신고를 하고, 열쇠를 넘겨받고, 관리비를 정산하는 등의 일을 처리했다. 새로 이사 온 동네가 예전 동네보다 공기도 더 맑고, 분위기도 더 소박하고 해서 마음에 들었다. 아파트 창밖 아래로는 미타사(彌陀寺)의 기와지붕이 내려다보이고, 동망봉(東望峰)의 산자락도 눈에 들어왔다. 만 세 살짜리 아들 녀석은 새로 이사 온 집이 신기한지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하며 즐거워 했다. 내게 몇번이나 "아빠,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하고 물어보기도 하였다. 훗날 아들녀석이 나이를 먹어 인생에 환멸을 느끼는 40대의 남자가 된다 하더라도 이 동네에서의 기억을 회상할 때면 뭔가 행복한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월달부터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아들 녀석을 매일 아침 여섯시반에 깨워서 여덟시반까지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매일 오후 다섯시반에 데리러 가서 아들과 함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했었는데, 이제는 유치원 근처로 이사를 했으니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왔다갔다 할 필요가 없게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2. 같은 날인 그저께, 어머니께서 퇴원을 하셨다. 목디스크 수술을 받으신지 일주일만이었다. 작년에 폐렴때문에 입원하셨을 때에는 약 3주 정도, 매일마다 어머니 곁에서 간병을 해드렸으나, 이번에는 이사문제도 있고 아들 유치원문제도 있고 해서 그리 간병을 많이 해드리지 못했다. 병실에 외롭게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면서 옛날의 조상 할머니들께서는 나이 들어 병에 걸리셨을 때 어떻게 지내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천혜의 자연환경과 맑은 공기 속에서 매일마다 아들 손주 며느리를 보고 사셨을 테고, 적어도 무슨 공장건물 같은 곳에서 일련번호가 달린 유니폼 환자복을 입은 채로 쓸쓸하게 지내시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요리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다. 재래시장에서 신선한 고기와 생선, 채소, 과일 등을 사오신 다음, 다지고 깎고 볶고 찌고 해서 정말로 맛있는 음식들을 만들어내셨다. 물론 어머니께서는 그 많은 음식들을 전부 아들들에게만 먹이셨다. 당신께서는 거의 하나도 드시지 않았다. 거대한 병원건물에 갇혀계신 어머니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나는 문득, 무거운 책가방을 짊어진 채로 공항에 홀로 서서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유럽 나라로 떠나려 하고 있던 내 젊은 시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거운 짐가방을 든 채 기차역에 서서 언제나 똑같은 생태계가 되풀이되던 고향을 떠나 서울로 떠나려 하고 계시던 어머니의 젊으셨을 적 모습도 함께 떠올렸다. 그리고 그 시절의 꿈과 이상에 대해서, 그것이 우리 삶을 얼마나 더 낫게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3. 어제는 날씨도 맑고 따뜻하고 해서 아들녀석과 함께 바깥에 봄나들이를 나갔다. 햇살이 따사롭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안암동 참살이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아들 녀석이 아주 잔뜩 신이 나서 최근에 배운 '봄님'이란 노래를 막 불러대기 시작했다. "봄님이 오시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었나요/ 길가에 꽃들이 어여쁘게 피어나/ 봄님이 오시는 걸 알았어요/ 봄님이 오시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었나요/ 따뜻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 봄님이 오시는 걸 알았어요" 다섯살 짜리 아기의 애교 섞인 동요열창을 들으며 상춘(賞春)을 하니, 문득 한없는 행복감으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물론 이러한 기분이 그렇게 오래가는 것은 아님을, 이러한 순간이 어딘가에 견고히 저장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댓글 12

H.호나우두
H.호나우두
저는 오늘 블랙데이라서 점심에 혼자 짜장면을 먹을 예정입니다. 교수님께서 아드님이랑 저녁때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드셨다니 서글퍼지네요. ㅠ
松下道人
松下道人
보문동으로 이사를 했다면, 이건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사를 했다는 얘기군요. ㅎㅎㅎ

선천적으로 기가 별로 세지 못한 KNura 백경일이가 강남에서 몇 년 좀 살아보더니 도저히 강남의 그 기운을 견뎌내지 못하고 강북으로 도망친 것 같은데,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싸구려밖에 못 먹고 큰 넘은 평생 싸구려만 먹고 살아야 되고, 어려서부터 시궁창에서밖에 못 살고 큰 넘은 평생 빈민굴 시궁창에서 살아야 하는 법인 것처럼,

원래 강남에서 살아보지 못한 넘이 갑자기 나이 먹어 강남에서 살면 반다시 거기서 탈이 나게 돼있는 거입니다. ㅍㅎㅎ

모름지기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강남에 거주하고 외제차 굴리고 다니고 골프 치고 다니고 그런 정도의 사람이 되려면 일단 기(氣)부터 쎄야 합니다.

단순히 재복이 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일단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쏟아지는 주변 사람들의 시기, 질투, 원성을 이겨낼 정도로 깡다구가 있어야 하고,

그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풍요로움이 없이는 세상 사는 게 불편할 정도로 상류층 문화에 푸욱 젖어 있어야 한다 이거입니다.

("새로 이사 온 동네가 예전 동네보다 공기도 더 맑고, 분위기도 더 소박하고 해서 마음에 들었다." 같은 마인드로는 백날 뭘 해도 절대 안 된다는 거입네다. 푸하하하하하하.)

뭘 잘 모르는 넘들은 평소의 일상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둥, 언제나 밑바닥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아야 한다는 둥, 주둥이를 나불거리지요.

기런데 옛날같이 헛점이 많았던 시대에는 그런 페인트모션이 통했을 지 몰라도 지금은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松下道人
松下道人
전에도 말했지만 밑바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입 놀리는 자들 치고 정말로 밑바닥에 일부러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가 능력이 안 되니까 밑바닥에 있는 것이지요. ㅎㅎㅎ)

강남의 물질주의에 물들어선 안 된다구요? 모든 동네에는 수준이란 게 있는 겁니다. 하물며 공무원 직렬 간에도 끗발의 서열이 있고, 군대 보직이나 발령지에도 잘 나가는 곳과 못 나가는 곳이 있으며,

똑같은 시골 마을이라도 볕 잘 들고 기름지고 물 맛 좋은 마을에 사는 것이 좋은 것이지, 그렇지 못한 마을에 사는 것은 말 그대로 굴욕인 것이며, 원래는 좋은 마을에서 살다가 갑자기 나쁜 마을로 옮겨 가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후진 동네에는 후진 동네의 마인드가 있고, 부자동네에는 부자동네의 마인드가 따로 있습니다. 해방 이후 사회가 격변기에 있을 때에는 밑바닥 후진 동네에서도 리더가 나올 수 있었지만,

요즘 같이 서민들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전문직조차 망해가고 있는 시대에는, 밑바닥에서 죽어도 리더를 키울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니까 아들을 낳으면 밑바닥에서 키우라는, 말같지 않은 노이즈를 내는 것입니다.

밑바닥은 원래부터 짓밟히는 레벨입니다. 최악의 서민들이 모여사는 임대아파트 아이들은 바로 윗동네의 싸구려 아파트 아이들에게조차 멸시 당하고 짓밟힙니다. (그럼 강남의 도련님들에게는? 강남의 귀족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강북의 임대아파트 아이들을 아예 짓밟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신발에 더러운 게 묻을 수가 있으니까 말입네다. 우하하하하하.)

빈민굴에서 사는 아이들에게는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윗 동네 아이들의 명령에 잘 복종하면 약간의 인센티브를 받지만, 좀 두각을 드러내면 바로 윗동네 아이들에 의해 사정없이 내리꽂히니, 적당적당히 눈치나 보고 시키는 일만 대충대충 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못 사는 동네에서 조금이라도 두각을 드러내면, 같은 동네의 가난한 친구들이 시기하고 질투해서 너도 나도 잘 나가는 넘의 빤쓰를 잡아당기고 주저 앉혀서 똑같이 망하게 해버리니까, 못 사는 동네에서는 아예 꿈도 야망도 갖지 아니하고 술과 범죄, 변태성욕과 강간 등으로 소일하며 사는 거입네다.

그러니 나쁜 동네에 백날 있어 봐야 무례한 말버릇과 못된 손버릇만 늘고, 친구도 맨날 그런 레벨의 친구들만 사귀고, 백년하청으로 계속 밑바닥인 거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야망 있는 자는 밑바닥에 오래 못 있었습니다. 특히나 아들이나 딸을 키운다고 하면, 조금이라도 좋은 동네에서 키우도록 노력해야지,

좌빨들의 선동에 혹해서 가난한 동네로 일부러 내려가면, 결국 자식 교육을 망치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아시겠습니까? 우하하하하하하하하.
1stwhitewhale
1stwhitewhale
H.호나우두님께/ 님처럼 멋있는 분께 아직 여자친구가 없다니 의외네요. 이번 봄날 동안에 좋은 인연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松下道人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
한수아빠
한수아빠
松下道人에게/ 말 참 이쁘게 하는 놈이네......
노광균
노광균
제가 보기에 송하도인님은 교수님께 나름대로 계속 \'말걸기\'를 하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상대를 안 해주시니까 열이 뻗친 것 같네요.
H.호나우두
H.호나우두
지식도 있고 유머감각도 있고 글빨도 있고... 송하도인님은 진짜 많은 걸 갖춘 사람인데, 가장 중요한 인생관과 세계관이 썩었네요. ㅋ
Ciracuser
Ciracuser
어머님의 쾌유를 빕니다.
임인정
임인정
이 말이 떠오르네요. 주인장님 글 읽고나니..

절대 결혼하지 말아야 할 남자

1. 금쪽같은 내 새끼
2. 하늘이 내린 효자
3. 개천에서 난 용

주인장님은 그냥 위 세 개에 다 해당되시는 분인 듯.
H.호나우두
H.호나우두
임인정/ 님은 교수님께 괜히 뭐라 하지 마시고 저도 좀 바라봐주세요. -_-;

교수님=유부남, 저는 총각입니다. ㅋ
maria
maria
교수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림이 막~~ 그려져요..ㅎㅎ
에구.. 고생 많으셨겠어요^^; 좋은 아빠, 좋은 아들이세요~^^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1stwhitewhale
1stwhitewhale
maria님께/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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